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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 오늘날은 지퍼 열어라는 사인이 아니다.
'오늘날' 하니까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언젠가 구역모임을 할 때 주기도문 하는 모습을 눈 살짝 뜨고 한번 본적이 있습니다.
구역 예배가 끝날 때쯤 되면 "마지막으로 주기도문으로 마치겠습니다." 하면 "아, 이제 집에 갈 시간이구나" 하는 사인으로 알아듣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면서 성경 찬송을 이렇게 덮어요. 그 다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하면서 성경찬송 끌어다가 주섬주섬 챙겨서 앞에 놓고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면서 더듬더듬 가방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면 여기저기에서 지익! 지익! 가방 지퍼여는 소리가 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할 때 가방을 잠그더라구요. 그래서 옆에 탁 끼고 앉으면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벌떡!'
벌떡 일어나서 가더라 그 말입니다. 그 모든 순간을 눈감고 입으로는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손으로는 더듬더듬 하는 모습이 완전히 숙련된 전문가 수준입니다. 이 엄청난 기도를 대개가 그렇게 드린단 말씀입니다. 더 앉아서 수다떨고 싶은 사람만 빼놓고는 거의 다 비슷한 행동을 하는 거예요. 아주 잘 주섬주섬 집어넣는다 그 말이예요. 흑흑!
2. 오늘날
신약성경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두 번 주기도문이 나오는데, 이게 딱 맞게 똑같으면 별 문제가 없으련만, 몇 군데 틀린 부분이 있습니다. 그 중 '오늘날'에 대한 해석입니다.
마태는 '세-메론'을 썼고 누가는 '카데-메란'을 썼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세-메론'은 단수로서 오늘, 투데이. 오늘 먹을 양식을 구하는 것이고, '카데-메란'은 복수로서 오늘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오는 여러 날(오늘날), 며칠의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을 따른다면 '세-메론'을 '오늘날'로 번역한 것은 오류입니다. '세-메론'은 틀림없이 24시간 하루입니다. '오늘' 투데이, 디스 데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오늘의 시대, 요즈음을 말합니다.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은 오늘 하룻 동안 어떻게 살았는가를 묻는 말이 아니라 요 근래에 무슨 일이 없었느냐를 묻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에서 일용(一用)할 양식이란 '하룻 동안 먹을 양식을 말합니다' 일회용은 한번 쓰는 물건을 말합니다. 오늘날(여러날) 먹을 양식을 '일회용' 양식으로 달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굳이 '오늘날'을 써야 된다면 "오늘, 날" 이렇게 오늘과 날을 띄어 써서 금일(今日)이라는 의미가 되게 해야 됩니다. 개역성경 이외의 모든 다른 성경은 '오늘'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주기도문엔 오늘날(여러날)먹을 것을 달라고 하였기에, 꼭 하룻동안 먹을 양식 구하는 것만 옳다고 할 수 도 없습니다. '오늘'도 맞고 '오늘날'도 맞는데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오늘'이라고 번역하고, 하룻동안 먹을 양식을 구하는 것으로 해야 맞다 그말입니다.
3. 쓸데없는 것을 구하지 말라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톤 아르톤(양식을) 헤몬(우리의) 톤 에피우시온(일용할) 도스(주옵시고) 헤민 (우리에게) 세메론 (오늘날)
개역성경은 헤몬(우리의)을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헤몬을 번역하지 않은 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될까요? 그러니까 헤몬을 번역하면 '우리의 양식을 주옵시고' 인데, 번역을 안 하면 그냥 '양식을 주옵시고'가 됩니다.
헤몬은 에피우시온과 합쳐져서 '생존을 위한, 필요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위에 있는 우리의 양식'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구하는 양식은 우리 생존에 꼭 필요한 필요불가결의 양식입니다. 그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고 꽁짜인데 많이 많이 받는 사람이 장땡이라고 이것저것 마구마구 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여집사님은 집이 23채나 돼요. 아무 일 안 해도 집세 받아서 떵떵거리며 펑펑 놀며 사는데 집을 더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게 합당합니까?
헤몬을 번역하면 '우리의 양식'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셔야 한다고 간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양식이 아닌 것도 달라고 한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불법을 행하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4. 양식
아우구스티누스는 양식이 세가지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문자적으로 육신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일용할 식물. 둘째는 주의 만찬에서 경건한 자에게 주어지는 가견적으로 성별된 빵. 셋째는 불가견적인 빵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마태복음에서 '주옵시고'로 번역된 '도스'는 단순 과거 명령형으로써 일회작인 동작을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주옵시고'가 '디두'라는 동사이고 현재 명령형으로써 반복적인 동작을 뜻합니다.
마태복음에서 한번 (일회적인) 달라는 것은 영의 양식을 간구하는 것이고(영혼의 구원, 즉 배부름은 한번으로 성취되므로) 누가복음에서 반복적으로 계속 달라는 것은 육의 양식을 간구하는 (왜냐하면 날마다 안 먹으면 죽기 때문에)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5. 빵
저는 오래 전에 빵공장에서 한 3년 일을 했습니다. 빵을 만들면서 맛 본다며(?) 덕분에 빵을 실컷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뿐, 빵더미 속에 있으니 어느 순갑부터가 빵이 싫어지더군요. 만들기는 하지만 잘 먹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역시 한국사람에게는 '밥에 김치 한가닥 척 올려 먹는게 주식이지, 서양처럼 빵만 먹고 살라하면 못살거야' 하고 생각했습니다.
'일용할 양식'의 양식에 해당하는 단어 '아르토스'는 '빵'입니다. 성경을 처음 번역할 당시 우리나라엔 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빵과 비슷한 '떡'(마4:4)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빵'이 주식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떡'은 특별한 날에 먹는 별식이지 주식이 아닙니다. 그럼 주식인 밥으로 번역하면 어떨까? '일용할 밥'을 주시고... 그런데 '밥'만은 못먹습니다. 반찬도 있어야 하고 고기도 있어야 하고 국도 있어야 하고... '밥상'이라고 해볼까요? '일용할 밥상도 주시고...
이렇게 정당한 말이 없을 때 성경번역에서는 적당히 타협을 합니다. 원천언어(원래의 의미)를 수용언어(실제로 사용하는 의미)로 바꾸어도 눈을 감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협 끝에 나온 말이 '양식'입니다. '양식'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는 '아르토스'라고 할 수 없는데, '아르토스'는 '양식'이 되는 복잡한 형태입니다.
-성경을 일점 일획이라도 바꾸면 안 된다는 말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알면 기절초풍할 말이지요? 세상에, 성경의 일획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타협이라니...
6. 오늘과 내일
우리나라에서는 하루의 시작은 아침입니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면 깜깜해집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루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저녁에 시작합니다. 깜깜해져서 시작하지만 하루를 마칠때는 찬란한 아침입니다. 쉽게 예기해서 그리스도인이란 내일 볼 일이 있는 사람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렇게 믿음으로 기도한 사람들은 처음 시작했을 때의 삶과 그의 몇년후의 삶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오늘은 캄캄하지만 내일은 소망이 있습니다.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 내일 나로 하여금 살게 하옵시고 내일 나로 하여금 정말 승리케 하옵시고, 출16:21에 보면 '만나'를 바로 '내일의 양식'이라 했습니다.
우리 개념으로는 '일용할 양식'이라 하면 우리는 아침부터 하루가 시작되기 때문에 당일 먹는 양식이지만, 성경의 개념대로 한다면 저녁에 하루를 시작하여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음식을 먹기 때문에 '내일의 양식'이 된다 그 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마태복음 6;34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아라. 목숨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는 '매림나워' 인데 생각을 거기에다 소비하는 것, 그걸 '매림나워'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구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옵시고 뜻이 그 나라에 아주 펼쳐지기를 구한 사람이라면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에 내 생각 전체를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6. 돼지보다 못한 인간
어느 양돈장에서 주인이 돼지들을 손가락질하며 혼잣말을 합니다.
"내일은 저놈, 저놈, 저놈을 도살장에 끌고 가야지. 무게가 많이 나가려면 오늘 잘 맥여야겠네" 그리고는 다른 날보다 더 먹이를 많이 줍니다. 그러면 돼지는 "앗 오늘은 웬일이냐 꿀꿀" 하면서 기분 좋아하지, 이거 이렇게 먹여놓고 나를 잡으려고 하는 구나 생각하는 돼지는 한 마리도 없습니다. 돼지는 내일 죽을지언정 내일 일을 미리 염려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염려의 90%가 내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목숨에 관한 겁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의 복음 때문에 내 생각을 거기에다 사로잡는 다고 하면 하나님이 내일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것은 100% 확실합니다.
요한1서 4장18절 두려움(염려)은 형벌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대로 그것이 내 환경 속으로 찾아와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형벌입니다. 병들면 어떻게 하지? 그럼 병든다는 얘기입니다. 가난해지면 어떻게 하지? 가난해진다 그말이예요.
늙어서 자식들이 불효하면 어떻게 하지? 자식들이 불효한다 그말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그 염려하는 그대로 두려워 하면 두려워 하는 그대로 형벌이 따라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고 기도했다면, 이제 줄 것을 딱 믿고 내일 일을 미래 땡겨서 염려하지 말아라! 이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주옵시고" 라는 이 기도속에는 아주 염려를 떨어버리겠다는 염려하지 않겠다는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무서워하지 않겠다는 신앙 고백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7. 과거의 걱정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주옵시고" 라는 이 기도 속에는 미래에 다가올 일에 대한 '염려'뿐만 아니라, 과거의 염려까지 다 떨어버리겠다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를 왜 끄집어내어 걱정합니까?
"어디가 그렇게 아프십니까?" 허리요, 허리가 한 20년 아팠습니다. 온갖 약을 다 써도 안 듣는데 선생님의 방법이 효과가 있을까요? 지나간 과거의 이력을 꺼내면서 의심부터 하니 그 사람은 앞으로도 20년간은 더 허리가 아플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오늘 이 순간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것입니다.
"그 일이 잘 될까? 전에 그 일을 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는데 도 실패하면 어떡하지? 저 사람 저 사람 믿지 마세요. 아유, 과거에 사기꾼이었는데 예수 믿고도 또 사기칠지 몰라요."
"전에도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재채기도 안 하시더라니가요. 이번이라고 뭐 별 수 있을까요?"
과거는 과거입니다. 과거에 어찌어찌 한 것은 이제 돌이킬 수 없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걱정하고 염려한들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에서 배운게 뭐예요? 걱정 않는 생활을 훈련 받은 겁니다. 걱정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배웠어요. 그렇게 되기까지 40년이나 걸린 것입니다.
8. 일용할 양식이 필요 없는 사람
텔레비전에서 아무 직업이 없는 아주머니가 집을 23채나 가지고 있어 그 집세만 받아 가지고도 펑펑 쓰면서 잘 산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그 수완 좋은 아주머니는 IMF가 터지자 여기저기에서 돈을 끌어 모아 집을 사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지금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두어달에 집이 한 채씩 저절로 늘어난다고 너스레를 떱니다. 그걸 본 어떤 사람이 "에구! IMF가 한번만 더 터져라! 그때는 내가 목숨걸고 집만 사 모은다..내가"
"나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런 쩨쩨한 기도가 필요 없습니다. 이미 재산이 충분히 있고, 어떤 상황이 닥쳐도 돈을 벌 수 있는 비상한 머리가 있으니 그런 나약한 기도는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룻1:21)'는 나오미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의 기도는 나만을 위한 간청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양식'이 있다고 해서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되고, 지금도 애타게 양식을 찾는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함은 당연합니다. 나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필요를 날마다 간구해야 합니다.
9. 주옵시고, 주시옵고
아기들은 부모가 하는 말을 듣고 보며 말을 배웁니다. 그래서 존댓말을 가르치기 위해 일정기간 어른이 아이에게 존댓말을 하게 됩니다. 저에게는 딸이 둘 있는데, 큰딸은 성공을 거두어서 지금 어른들에게는 무조건 존대말을 씁니다. 그런데 둘째에게는 그만 실패했습니다. 요놈은 그렇게 혼나면서도 존댓말이 안되나 봅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아이에게 말을 높입니다.
"밝은이 유치원 잘 다녀 왔어요?"
"응"
"밝은이 밥 먹어야지요. 그렇지요?"
"응"
어휴...딱 때려버릴 수도 없고...
우리말의 표현법에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서로 존대하여 말하는 겸양어(謙讓語) 방법이 있습니다. 듣는 사람 우선 존대시는 어간에 '-시'를 붙이고, 말하는 사람 우선 존대시는 '-옵'을 붙입니다. 주기도문에서 듣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말하는 사람은 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는 '-시'를 붙이고 사람 앞에는 '-옵'을 붙여야 합니다. 사실 '-옵'은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제 딸 밝은이에게 존대를 하는 것은 존댓말을 가르치기 위함이지 실제로 존대말을 써야 된다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방정환 선생님은 어린이들에게도 존댓말을 썼다고 하지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존댓말을 쓰셔야 하는 의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반말을 하셔도 "하나님, 왜 반말하십니까?"하고 따질만한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옵'은 안써도 상관 없고, 쓴다면 반드시, 하나님 존대하는 '-시' 뒤에 써야 합니다.
그래서 -옵이 앞에 온 '주옵시고'는 틀립니다. '주시옵고'가 맞습니다. 같은 주기도문 안에서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맞음), 나라이 임하옵시며(틀림), 양식을 주옵시고(틀림),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틀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틀림) - 중고난방이지요?
사실 '-옵'은 안 써도 되는 과잉표현입니다. 아마도 성경의 표현을 거룩하게(?)한다고 말을 억지로 만들어 붙인 것 같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가 맞습니다. 그래도 옵자에 미련이 남는다면 '-주' 뒤에 넣어 '주시옵고'해야 맞습니다.
10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의 조상들은 "사람은 다 자기 먹을 것 가지고 태어난다" 했습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지구의 인구가 얼마든 다 배불리 먹을 곡식을 주셨습니다. 앞으로 인구가 70억 100억이 된다 해도 곡식은 충분합니다. 그런데 왜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는가?
분배의 문제입니다. 전세계 인구의 22%가 78%의 곡식을 먹어 치웁니다. 그리고 78%의 인구는 22%의 곡식을 나누어 먹어야 하니 굶주릴 수 밖에요.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우리나라를 포함하여) 22%의 인구는 나누어 먹어야 할 곡식을 모두 움켜잡고, 너무 많이 먹어서 비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먹다가 먹다가 이제 곡식은 진절머리가 난다고 사람 먹을 곡식으로 동물을 키워 동물을 잡아 그 죽은 시체를 먹고 있습니다.그러니 희귀한 병들이 계속 생겨나지요. (동물 사료를 만드는 곡식이 전체 생산량의 3분의1가량 된다)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22%의 사람들이 먹다 버린 음식만 모아도 전 세계 기아의 50%는 해결됩니다. 남한에서 먹다 버린 음식물 찌꺼기만 모아도 북한의 식량문제가 해결되어 탈북자가 안 생깁니다. 아르헨티나, 호주의 노는 넓은 평야를 개간하여 씨앗만 뿌려도 지금보다 곡식의 수확량을 3분의 1은 늘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태어나는 인류의 '일용할 양식'을 이미 다 주셨습니다. 욕심이 가득한 똑똑한 사람들이 그것을 움켜쥐고 제대로 나누어먹지 않을 뿐입니다.
1. 오늘날은 지퍼 열어라는 사인이 아니다.
'오늘날' 하니까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언젠가 구역모임을 할 때 주기도문 하는 모습을 눈 살짝 뜨고 한번 본적이 있습니다.
구역 예배가 끝날 때쯤 되면 "마지막으로 주기도문으로 마치겠습니다." 하면 "아, 이제 집에 갈 시간이구나" 하는 사인으로 알아듣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면서 성경 찬송을 이렇게 덮어요. 그 다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하면서 성경찬송 끌어다가 주섬주섬 챙겨서 앞에 놓고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면서 더듬더듬 가방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면 여기저기에서 지익! 지익! 가방 지퍼여는 소리가 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할 때 가방을 잠그더라구요. 그래서 옆에 탁 끼고 앉으면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벌떡!'
벌떡 일어나서 가더라 그 말입니다. 그 모든 순간을 눈감고 입으로는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손으로는 더듬더듬 하는 모습이 완전히 숙련된 전문가 수준입니다. 이 엄청난 기도를 대개가 그렇게 드린단 말씀입니다. 더 앉아서 수다떨고 싶은 사람만 빼놓고는 거의 다 비슷한 행동을 하는 거예요. 아주 잘 주섬주섬 집어넣는다 그 말이예요. 흑흑!
2. 오늘날
신약성경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두 번 주기도문이 나오는데, 이게 딱 맞게 똑같으면 별 문제가 없으련만, 몇 군데 틀린 부분이 있습니다. 그 중 '오늘날'에 대한 해석입니다.
마태는 '세-메론'을 썼고 누가는 '카데-메란'을 썼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세-메론'은 단수로서 오늘, 투데이. 오늘 먹을 양식을 구하는 것이고, '카데-메란'은 복수로서 오늘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오는 여러 날(오늘날), 며칠의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을 따른다면 '세-메론'을 '오늘날'로 번역한 것은 오류입니다. '세-메론'은 틀림없이 24시간 하루입니다. '오늘' 투데이, 디스 데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오늘의 시대, 요즈음을 말합니다.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은 오늘 하룻 동안 어떻게 살았는가를 묻는 말이 아니라 요 근래에 무슨 일이 없었느냐를 묻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에서 일용(一用)할 양식이란 '하룻 동안 먹을 양식을 말합니다' 일회용은 한번 쓰는 물건을 말합니다. 오늘날(여러날) 먹을 양식을 '일회용' 양식으로 달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굳이 '오늘날'을 써야 된다면 "오늘, 날" 이렇게 오늘과 날을 띄어 써서 금일(今日)이라는 의미가 되게 해야 됩니다. 개역성경 이외의 모든 다른 성경은 '오늘'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주기도문엔 오늘날(여러날)먹을 것을 달라고 하였기에, 꼭 하룻동안 먹을 양식 구하는 것만 옳다고 할 수 도 없습니다. '오늘'도 맞고 '오늘날'도 맞는데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오늘'이라고 번역하고, 하룻동안 먹을 양식을 구하는 것으로 해야 맞다 그말입니다.
3. 쓸데없는 것을 구하지 말라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톤 아르톤(양식을) 헤몬(우리의) 톤 에피우시온(일용할) 도스(주옵시고) 헤민 (우리에게) 세메론 (오늘날)
개역성경은 헤몬(우리의)을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헤몬을 번역하지 않은 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될까요? 그러니까 헤몬을 번역하면 '우리의 양식을 주옵시고' 인데, 번역을 안 하면 그냥 '양식을 주옵시고'가 됩니다.
헤몬은 에피우시온과 합쳐져서 '생존을 위한, 필요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위에 있는 우리의 양식'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구하는 양식은 우리 생존에 꼭 필요한 필요불가결의 양식입니다. 그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고 꽁짜인데 많이 많이 받는 사람이 장땡이라고 이것저것 마구마구 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여집사님은 집이 23채나 돼요. 아무 일 안 해도 집세 받아서 떵떵거리며 펑펑 놀며 사는데 집을 더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게 합당합니까?
헤몬을 번역하면 '우리의 양식'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셔야 한다고 간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양식이 아닌 것도 달라고 한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불법을 행하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4. 양식
아우구스티누스는 양식이 세가지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문자적으로 육신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일용할 식물. 둘째는 주의 만찬에서 경건한 자에게 주어지는 가견적으로 성별된 빵. 셋째는 불가견적인 빵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마태복음에서 '주옵시고'로 번역된 '도스'는 단순 과거 명령형으로써 일회작인 동작을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주옵시고'가 '디두'라는 동사이고 현재 명령형으로써 반복적인 동작을 뜻합니다.
마태복음에서 한번 (일회적인) 달라는 것은 영의 양식을 간구하는 것이고(영혼의 구원, 즉 배부름은 한번으로 성취되므로) 누가복음에서 반복적으로 계속 달라는 것은 육의 양식을 간구하는 (왜냐하면 날마다 안 먹으면 죽기 때문에)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5. 빵
저는 오래 전에 빵공장에서 한 3년 일을 했습니다. 빵을 만들면서 맛 본다며(?) 덕분에 빵을 실컷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뿐, 빵더미 속에 있으니 어느 순갑부터가 빵이 싫어지더군요. 만들기는 하지만 잘 먹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역시 한국사람에게는 '밥에 김치 한가닥 척 올려 먹는게 주식이지, 서양처럼 빵만 먹고 살라하면 못살거야' 하고 생각했습니다.
'일용할 양식'의 양식에 해당하는 단어 '아르토스'는 '빵'입니다. 성경을 처음 번역할 당시 우리나라엔 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빵과 비슷한 '떡'(마4:4)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빵'이 주식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떡'은 특별한 날에 먹는 별식이지 주식이 아닙니다. 그럼 주식인 밥으로 번역하면 어떨까? '일용할 밥'을 주시고... 그런데 '밥'만은 못먹습니다. 반찬도 있어야 하고 고기도 있어야 하고 국도 있어야 하고... '밥상'이라고 해볼까요? '일용할 밥상도 주시고...
이렇게 정당한 말이 없을 때 성경번역에서는 적당히 타협을 합니다. 원천언어(원래의 의미)를 수용언어(실제로 사용하는 의미)로 바꾸어도 눈을 감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협 끝에 나온 말이 '양식'입니다. '양식'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는 '아르토스'라고 할 수 없는데, '아르토스'는 '양식'이 되는 복잡한 형태입니다.
-성경을 일점 일획이라도 바꾸면 안 된다는 말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알면 기절초풍할 말이지요? 세상에, 성경의 일획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타협이라니...
6. 오늘과 내일
우리나라에서는 하루의 시작은 아침입니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면 깜깜해집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루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저녁에 시작합니다. 깜깜해져서 시작하지만 하루를 마칠때는 찬란한 아침입니다. 쉽게 예기해서 그리스도인이란 내일 볼 일이 있는 사람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렇게 믿음으로 기도한 사람들은 처음 시작했을 때의 삶과 그의 몇년후의 삶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오늘은 캄캄하지만 내일은 소망이 있습니다.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 내일 나로 하여금 살게 하옵시고 내일 나로 하여금 정말 승리케 하옵시고, 출16:21에 보면 '만나'를 바로 '내일의 양식'이라 했습니다.
우리 개념으로는 '일용할 양식'이라 하면 우리는 아침부터 하루가 시작되기 때문에 당일 먹는 양식이지만, 성경의 개념대로 한다면 저녁에 하루를 시작하여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음식을 먹기 때문에 '내일의 양식'이 된다 그 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마태복음 6;34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아라. 목숨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는 '매림나워' 인데 생각을 거기에다 소비하는 것, 그걸 '매림나워'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구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옵시고 뜻이 그 나라에 아주 펼쳐지기를 구한 사람이라면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에 내 생각 전체를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6. 돼지보다 못한 인간
어느 양돈장에서 주인이 돼지들을 손가락질하며 혼잣말을 합니다.
"내일은 저놈, 저놈, 저놈을 도살장에 끌고 가야지. 무게가 많이 나가려면 오늘 잘 맥여야겠네" 그리고는 다른 날보다 더 먹이를 많이 줍니다. 그러면 돼지는 "앗 오늘은 웬일이냐 꿀꿀" 하면서 기분 좋아하지, 이거 이렇게 먹여놓고 나를 잡으려고 하는 구나 생각하는 돼지는 한 마리도 없습니다. 돼지는 내일 죽을지언정 내일 일을 미리 염려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염려의 90%가 내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목숨에 관한 겁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의 복음 때문에 내 생각을 거기에다 사로잡는 다고 하면 하나님이 내일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것은 100% 확실합니다.
요한1서 4장18절 두려움(염려)은 형벌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대로 그것이 내 환경 속으로 찾아와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형벌입니다. 병들면 어떻게 하지? 그럼 병든다는 얘기입니다. 가난해지면 어떻게 하지? 가난해진다 그말이예요.
늙어서 자식들이 불효하면 어떻게 하지? 자식들이 불효한다 그말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그 염려하는 그대로 두려워 하면 두려워 하는 그대로 형벌이 따라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고 기도했다면, 이제 줄 것을 딱 믿고 내일 일을 미래 땡겨서 염려하지 말아라! 이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주옵시고" 라는 이 기도속에는 아주 염려를 떨어버리겠다는 염려하지 않겠다는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무서워하지 않겠다는 신앙 고백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7. 과거의 걱정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주옵시고" 라는 이 기도 속에는 미래에 다가올 일에 대한 '염려'뿐만 아니라, 과거의 염려까지 다 떨어버리겠다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를 왜 끄집어내어 걱정합니까?
"어디가 그렇게 아프십니까?" 허리요, 허리가 한 20년 아팠습니다. 온갖 약을 다 써도 안 듣는데 선생님의 방법이 효과가 있을까요? 지나간 과거의 이력을 꺼내면서 의심부터 하니 그 사람은 앞으로도 20년간은 더 허리가 아플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오늘 이 순간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것입니다.
"그 일이 잘 될까? 전에 그 일을 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는데 도 실패하면 어떡하지? 저 사람 저 사람 믿지 마세요. 아유, 과거에 사기꾼이었는데 예수 믿고도 또 사기칠지 몰라요."
"전에도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재채기도 안 하시더라니가요. 이번이라고 뭐 별 수 있을까요?"
과거는 과거입니다. 과거에 어찌어찌 한 것은 이제 돌이킬 수 없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걱정하고 염려한들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에서 배운게 뭐예요? 걱정 않는 생활을 훈련 받은 겁니다. 걱정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배웠어요. 그렇게 되기까지 40년이나 걸린 것입니다.
8. 일용할 양식이 필요 없는 사람
텔레비전에서 아무 직업이 없는 아주머니가 집을 23채나 가지고 있어 그 집세만 받아 가지고도 펑펑 쓰면서 잘 산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그 수완 좋은 아주머니는 IMF가 터지자 여기저기에서 돈을 끌어 모아 집을 사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지금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두어달에 집이 한 채씩 저절로 늘어난다고 너스레를 떱니다. 그걸 본 어떤 사람이 "에구! IMF가 한번만 더 터져라! 그때는 내가 목숨걸고 집만 사 모은다..내가"
"나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런 쩨쩨한 기도가 필요 없습니다. 이미 재산이 충분히 있고, 어떤 상황이 닥쳐도 돈을 벌 수 있는 비상한 머리가 있으니 그런 나약한 기도는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룻1:21)'는 나오미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의 기도는 나만을 위한 간청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양식'이 있다고 해서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되고, 지금도 애타게 양식을 찾는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함은 당연합니다. 나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필요를 날마다 간구해야 합니다.
9. 주옵시고, 주시옵고
아기들은 부모가 하는 말을 듣고 보며 말을 배웁니다. 그래서 존댓말을 가르치기 위해 일정기간 어른이 아이에게 존댓말을 하게 됩니다. 저에게는 딸이 둘 있는데, 큰딸은 성공을 거두어서 지금 어른들에게는 무조건 존대말을 씁니다. 그런데 둘째에게는 그만 실패했습니다. 요놈은 그렇게 혼나면서도 존댓말이 안되나 봅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아이에게 말을 높입니다.
"밝은이 유치원 잘 다녀 왔어요?"
"응"
"밝은이 밥 먹어야지요. 그렇지요?"
"응"
어휴...딱 때려버릴 수도 없고...
우리말의 표현법에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서로 존대하여 말하는 겸양어(謙讓語) 방법이 있습니다. 듣는 사람 우선 존대시는 어간에 '-시'를 붙이고, 말하는 사람 우선 존대시는 '-옵'을 붙입니다. 주기도문에서 듣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말하는 사람은 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는 '-시'를 붙이고 사람 앞에는 '-옵'을 붙여야 합니다. 사실 '-옵'은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제 딸 밝은이에게 존대를 하는 것은 존댓말을 가르치기 위함이지 실제로 존대말을 써야 된다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방정환 선생님은 어린이들에게도 존댓말을 썼다고 하지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존댓말을 쓰셔야 하는 의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반말을 하셔도 "하나님, 왜 반말하십니까?"하고 따질만한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옵'은 안써도 상관 없고, 쓴다면 반드시, 하나님 존대하는 '-시' 뒤에 써야 합니다.
그래서 -옵이 앞에 온 '주옵시고'는 틀립니다. '주시옵고'가 맞습니다. 같은 주기도문 안에서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맞음), 나라이 임하옵시며(틀림), 양식을 주옵시고(틀림),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틀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틀림) - 중고난방이지요?
사실 '-옵'은 안 써도 되는 과잉표현입니다. 아마도 성경의 표현을 거룩하게(?)한다고 말을 억지로 만들어 붙인 것 같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가 맞습니다. 그래도 옵자에 미련이 남는다면 '-주' 뒤에 넣어 '주시옵고'해야 맞습니다.
10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의 조상들은 "사람은 다 자기 먹을 것 가지고 태어난다" 했습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지구의 인구가 얼마든 다 배불리 먹을 곡식을 주셨습니다. 앞으로 인구가 70억 100억이 된다 해도 곡식은 충분합니다. 그런데 왜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는가?
분배의 문제입니다. 전세계 인구의 22%가 78%의 곡식을 먹어 치웁니다. 그리고 78%의 인구는 22%의 곡식을 나누어 먹어야 하니 굶주릴 수 밖에요.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우리나라를 포함하여) 22%의 인구는 나누어 먹어야 할 곡식을 모두 움켜잡고, 너무 많이 먹어서 비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먹다가 먹다가 이제 곡식은 진절머리가 난다고 사람 먹을 곡식으로 동물을 키워 동물을 잡아 그 죽은 시체를 먹고 있습니다.그러니 희귀한 병들이 계속 생겨나지요. (동물 사료를 만드는 곡식이 전체 생산량의 3분의1가량 된다)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22%의 사람들이 먹다 버린 음식만 모아도 전 세계 기아의 50%는 해결됩니다. 남한에서 먹다 버린 음식물 찌꺼기만 모아도 북한의 식량문제가 해결되어 탈북자가 안 생깁니다. 아르헨티나, 호주의 노는 넓은 평야를 개간하여 씨앗만 뿌려도 지금보다 곡식의 수확량을 3분의 1은 늘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태어나는 인류의 '일용할 양식'을 이미 다 주셨습니다. 욕심이 가득한 똑똑한 사람들이 그것을 움켜쥐고 제대로 나누어먹지 않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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