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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 주기도문 무용론
주기도문이 한동안 논란이 되어서 '이 기도는 하지 말자' 이런 얘기까지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바로 이 부분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죄를 용서하신 것은 우리의 공로가 하나도 안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했기 때문에, 즉 다른 사람을 용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값없이 무조건 우리를 죄에서 용서하셨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마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준 댓가로 하나님께서도 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if then, 만일에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그 다음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내가 용서받은 것은 내 행위에 먼저 근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에 의문을 던졌습니다. 이것이 맞냐?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용서해 줄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이 기도를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계속)
2. 사하여
'사한다'는 것은 용서한다 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데, 헬라어로는 "아피엠
이"입니다. 마6;12에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는 용서한다는 뜻으로 사용했지만 마18;27 ,마18;32에는 탕감한다, 없는 것으로 친다, 포기해 버린다, 잊어 버린다로 썼습니다. 죄라는 단어는 '빚'에 더 가깝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돈을 꿔가며 쓰는 차용증서가 정말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약속한 기간 내에 돈을 갚지 않으면 그 당사자와 그 아내와 그 자식들과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차압을 해서 끌어와 돈이 다 계산될 때까지 노동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악독한 주인은 일부러 돈을 갚지 못하게 해서 온 가족을 평생토록 종으로 부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빚 받을 사람이 이 차용증서를 불에 태워버리고 없는 것으로 해 주겠다. 그러니까 돈 갚을 근거가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이것이 바로 사하여 준다, 용서해 준다, 탕감해 준다 는 의미입니다. 아주 기억 속에서 빼버리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도 똑같이 '아피에미'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히8;12하나님이 우리 죄를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하나님, 제가 1년 전에 이런 죄 지은 거 아시죠? 회개 하려구요"
"난 기억이 안나는데!"
"있잖아요, 이런이런 흉악한 죄를 제가 지었잖아요"
"잘 모르겠는데...언제 그런 일이 있었니?"
기억은 하고 있지만 "에이 괜찮다, 됐어, 됐어"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기억 없는데, 모르겠어. 모르겠어. 네가 언제 그랬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다는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두고두고 울궈 먹는 그런 것이 아니라, 아예 죄에 대한 파일을 삭제한 다음 쓰레기통을 깨끗이 비워버리는 것입니다. ⓒ최용우
3. 용서
아모스서는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서 쓴 성경입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뜻은 죄를 지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공평하게 벌을 내리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이라는 법을 주셨습니다. 법이 없다면 법에 걸릴 일도 없건만 인간은 율법으로 정죄를 받습니다. 공평한 재판장이신 하나님 옆에 있는 검사가 누구냐하면 마귀입니다. 계12:10에 마귀는 매일같이 하나님 앞에 가서 "저 죄지은 놈 벌주시요. 죄 지었으니 벌을 주는 것이 마땅한 줄 아뢰오." 이렇게 밤낮으로 참소한다고 했습니다. 밤낮으로.
그러면 하나님은 재판관으로서 공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죄인은 벌을 줄 수 밖에 없으니, "너는 영원히 형벌 받는다. 저주로 떨어져라" 하고 판결을 합니다. 그리고는 뒤에 꼭 한마디 붙이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너의 죄가 다 '용서' 받았다. 그러니 너는 무죄다. 땅땅당"
재판장이 '무죄' 판결을 내려 버리니 마귀도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렇게 깨끗이 처리 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나는, 바로 이것을 감사하고 있는 나는, 이 용서 때문에 자유를 누리고 있는 나는, 바로 이웃을 용서해 줌으로 이웃과의 관계도 그렇게 처리함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계속 내 삶 속에서 실질적으로 경험해야된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중요한 겁니다.
4. '사하여' 와 '용서'의 차이
원문은 '아피에-미'인데 우리 성경은 '사하다' '용서하다'로 서로 혼용하여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사하다'로 번역을 했고 사람들끼리의 용서는 그대로 '용서'로 번역을 했습니다. 아마도 어감상의 차이뿐만 아니라 개념적으로도 약간의 차이가 있는 단어를 구별해 줌으로서 하나님의 '용서'를 특별하게 보이도록 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죄 사하심은 죄를 없이 하는 것, 죄를 면해 주시는 것, 면죄(免罪)입니다. 인간들 사이의 죄 용서함은 죄를 없이하는 면죄가 아니라(면죄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므로), 죄는 있으되 단지 처벌을 하지 않는 것, 즉 용서입니다. 원문에는 구별이 없지만 각 나라의 정서에 따라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를 구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1만달란트 빚진자가 왕으로부터 그 빚을 탕감 받은 것은 '사함'받은 것이고, 빚진자가 돌아가다가 만난 100데나리온 빚진 동관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은 '용서'입니다. 빚진자는 동관의 100데나리온을 탕감해주고 기억조차 말아야 합니다. 됐다! 이제 다 잊어버리자. 없는 것으로 하자 그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왕에게 1만달란트의 빚을 갚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엄청난 빚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면'해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싸그리 잊은 것이 아니고 면해주신 것입니다.
5. 죄 지은자들을 (빚진 자들을)
표면적으로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 용서하고 용서함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매여 이면에 숨어있는 진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면 반쪽짜리 성경해석입니다. 조심스럽게 이 구절을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에서 '죄'라고 번역한 단어는 '오페일레마'인데 '빚'이라고 해야 합니다.('죄'는 '하마르티아'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빚진자들 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성도가 '우리'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빚진 자들은 나에게 빚진 자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주님께 빚진자 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 빚진자들입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빚진자입니다. 그 빚을 값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롬1:15에서 복음을 들어야 하는 형제들에게 '나는 복음의 빚 진자'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뜻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에 성도가 수천명씩 늘어났지만, '빚진 것을 갚는 복음'을 증거하지 않고 안주하려 할 때 주께서는 핍박이라는 채찍으로 그들을 세계각국으로 흩어버리십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와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의 빚을 갚습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일은 좋은 일 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근본적으로 서로 빚을 값는 자리(복음을 전하는 자리)가 아니라면, 세상 친교모임보다도 훨씬 재미없고 무익한 모임일 것입니다. - 정리를 해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 진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같이, 우리의 빚들을 우리에게서 용서해 주시고, - 이런 이면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 용서하고 용서함 받는 교훈은 성경보다도 '불경'이나 공자님 말씀이 훨씬 현실적이고 감동적이고 구체적인 교훈을 줄것입니다.
6. 빚쟁이 만들기
자,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고 싶습니까? 빚을 갚아야 하는 사람을 만나면 늘 그 일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형제를 도와주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일은 복음으로 자기 빚을 그에게 나누어 주어 그를 빚쟁이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연약한 자가 성경을 모를 때 가르쳐 주고 내가 가지고 있는 하늘의 신령한 것을 나누어 주면 그것이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악한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 많은 일들을 행하였다고 해도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은 빚진자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한일서3:16) 여기에서 '마땅하니라'는 주기도문에 나오는 '빚진 것'(죄지은) 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7.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먹습니다.
용서도 받아 본 사람이 잘 용서합니다.
사랑 받고 자란 아이들은 커서 사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곡간에서 인심 난다고 넉넉해야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용서함'받은 경험이 풍성한 사람은 잘 용서합니다.
하나님께 '용서함'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용서에 인색합니다.
하나님께 '용서함'받지 못하는 것은 용서를 빌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용서받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남을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넉넉한 '용서'를 먼저 경험하세요.
8.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이 간구는 단순히 개인적인 죄에 대한 용서뿐 아니라 신앙공동체 전체의 죄에 대한 용서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 사회의 어떤 조직체이든 내, 외부적으로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되어 있습니다. 개인은 가정과, 가정은 직장과, 직장은 또 다른 단체와, 단체는 사회와 국가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죄는 개인 뿐 아니라 반드시 교회공동체와 가정, 그리고 사회에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죄가 너에게 미칠 수 있고, 우리의 죄가 사회와 교회를 병들게 하며 무력하게 하며 부흥을 가로막는 것을 알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라는 기도는 서로가 애쓰고 힘써 우선적으로 절실하게 해야 할 공동기도입니다. 이 사회가 썩었다고 말하기 전에.
9. 남자와 여자
우리나라 교회를 보면 기도는 여자들이 다하는데, 일은 남자들이 다 합니다. 기도하는 것으로 봐서 여자들이 훨씬 일을 많이 할 것 같은데 실제로 보면 큰일은 기도도 별로 안 하는 것 같은 남자들이 다 합니다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여자들에게 기도하기 전에 먼저 다 '용서'했냐고 살짝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정말이냐?고 물으면 "실은 다 용서해도 한 놈은 절대로 용서 못합니다." 그 한 놈이 누구요? 그 한 놈이 바로 남편입니다. 꽃같이 예쁘던 자기를 데리고 와서 이렇게 고생시키는 남편을 어떻게 용서하느냐... 40된 집사님도 그렇게 말하고 60된 권사님도 그렇게 말해요. 결국 그게 풀려야 하는데, 입으로는 용서한다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용서가 안되니 큰일을 할 수가 없지요. 그렇게 용서를 안 하면 누가 손해냐? 원래 남편은 지들이 잘 못 한줄도 모르고 있으니 결국에 죽는 건 여자들입니다. 믿는다 하면서 "주 ~시옵소서, 주 ~시옵소서, 주 ~시옵소서" 그냥 욕심껏 구하지만 별로 받은 것 같지는 않고 그러다가 시들해집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굉장한 함정입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까짓거! 하면서 툴툴 털어 버리는데 능합니다. 그래서 잘 용서하는 남자들이 큰일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10. 맨날 똑같은 기도
"애순님, 맛있는 밥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밥 먹고 건강하게 해 주시고, 유치원에서 공부 잘하게 해 주시고, 친구들 안 때리게 해 주시고, 밤에 잠 잘 자게 해 주세요. 애순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내미의 식사기도는 거의 변함이 없습니다.
"어째 너는 기도할 것이 밥, 건강, 잠자는 것 밖에 없냐?" 하며 다른 기도를 가르치려 하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더 나이가 들면 안 가르쳐도 다른 기도를 하겠지요. 그것 보다는 밝은이의 평범한 기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때되면 밥 먹는 것, 잘 먹고 건강해지는 것, 밤에 잠 잘 자는 것 -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 같지만 그 중 하나라도 빠지면 아주 곤란한 일이 생깁니다. 늘 똑같은 기도만 한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먹고, 건강하고, 자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만큼 하나님의 커다란 은총도 없습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 1만달란트의 은혜를 입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아빠는 100데나리온의 기도를 안한다고 불평하려 했으니... 오늘은 밝은이에게 아빠가 한 수 배웠다. ⓒ최용우
1. 주기도문 무용론
주기도문이 한동안 논란이 되어서 '이 기도는 하지 말자' 이런 얘기까지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바로 이 부분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죄를 용서하신 것은 우리의 공로가 하나도 안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했기 때문에, 즉 다른 사람을 용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값없이 무조건 우리를 죄에서 용서하셨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마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준 댓가로 하나님께서도 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if then, 만일에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그 다음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내가 용서받은 것은 내 행위에 먼저 근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에 의문을 던졌습니다. 이것이 맞냐?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용서해 줄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이 기도를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계속)
2. 사하여
'사한다'는 것은 용서한다 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데, 헬라어로는 "아피엠
이"입니다. 마6;12에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는 용서한다는 뜻으로 사용했지만 마18;27 ,마18;32에는 탕감한다, 없는 것으로 친다, 포기해 버린다, 잊어 버린다로 썼습니다. 죄라는 단어는 '빚'에 더 가깝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돈을 꿔가며 쓰는 차용증서가 정말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약속한 기간 내에 돈을 갚지 않으면 그 당사자와 그 아내와 그 자식들과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차압을 해서 끌어와 돈이 다 계산될 때까지 노동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악독한 주인은 일부러 돈을 갚지 못하게 해서 온 가족을 평생토록 종으로 부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빚 받을 사람이 이 차용증서를 불에 태워버리고 없는 것으로 해 주겠다. 그러니까 돈 갚을 근거가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이것이 바로 사하여 준다, 용서해 준다, 탕감해 준다 는 의미입니다. 아주 기억 속에서 빼버리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도 똑같이 '아피에미'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히8;12하나님이 우리 죄를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하나님, 제가 1년 전에 이런 죄 지은 거 아시죠? 회개 하려구요"
"난 기억이 안나는데!"
"있잖아요, 이런이런 흉악한 죄를 제가 지었잖아요"
"잘 모르겠는데...언제 그런 일이 있었니?"
기억은 하고 있지만 "에이 괜찮다, 됐어, 됐어"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기억 없는데, 모르겠어. 모르겠어. 네가 언제 그랬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다는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두고두고 울궈 먹는 그런 것이 아니라, 아예 죄에 대한 파일을 삭제한 다음 쓰레기통을 깨끗이 비워버리는 것입니다. ⓒ최용우
3. 용서
아모스서는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서 쓴 성경입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뜻은 죄를 지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공평하게 벌을 내리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이라는 법을 주셨습니다. 법이 없다면 법에 걸릴 일도 없건만 인간은 율법으로 정죄를 받습니다. 공평한 재판장이신 하나님 옆에 있는 검사가 누구냐하면 마귀입니다. 계12:10에 마귀는 매일같이 하나님 앞에 가서 "저 죄지은 놈 벌주시요. 죄 지었으니 벌을 주는 것이 마땅한 줄 아뢰오." 이렇게 밤낮으로 참소한다고 했습니다. 밤낮으로.
그러면 하나님은 재판관으로서 공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죄인은 벌을 줄 수 밖에 없으니, "너는 영원히 형벌 받는다. 저주로 떨어져라" 하고 판결을 합니다. 그리고는 뒤에 꼭 한마디 붙이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너의 죄가 다 '용서' 받았다. 그러니 너는 무죄다. 땅땅당"
재판장이 '무죄' 판결을 내려 버리니 마귀도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렇게 깨끗이 처리 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나는, 바로 이것을 감사하고 있는 나는, 이 용서 때문에 자유를 누리고 있는 나는, 바로 이웃을 용서해 줌으로 이웃과의 관계도 그렇게 처리함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계속 내 삶 속에서 실질적으로 경험해야된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중요한 겁니다.
4. '사하여' 와 '용서'의 차이
원문은 '아피에-미'인데 우리 성경은 '사하다' '용서하다'로 서로 혼용하여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사하다'로 번역을 했고 사람들끼리의 용서는 그대로 '용서'로 번역을 했습니다. 아마도 어감상의 차이뿐만 아니라 개념적으로도 약간의 차이가 있는 단어를 구별해 줌으로서 하나님의 '용서'를 특별하게 보이도록 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죄 사하심은 죄를 없이 하는 것, 죄를 면해 주시는 것, 면죄(免罪)입니다. 인간들 사이의 죄 용서함은 죄를 없이하는 면죄가 아니라(면죄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므로), 죄는 있으되 단지 처벌을 하지 않는 것, 즉 용서입니다. 원문에는 구별이 없지만 각 나라의 정서에 따라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를 구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1만달란트 빚진자가 왕으로부터 그 빚을 탕감 받은 것은 '사함'받은 것이고, 빚진자가 돌아가다가 만난 100데나리온 빚진 동관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은 '용서'입니다. 빚진자는 동관의 100데나리온을 탕감해주고 기억조차 말아야 합니다. 됐다! 이제 다 잊어버리자. 없는 것으로 하자 그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왕에게 1만달란트의 빚을 갚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엄청난 빚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면'해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싸그리 잊은 것이 아니고 면해주신 것입니다.
5. 죄 지은자들을 (빚진 자들을)
표면적으로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 용서하고 용서함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매여 이면에 숨어있는 진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면 반쪽짜리 성경해석입니다. 조심스럽게 이 구절을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에서 '죄'라고 번역한 단어는 '오페일레마'인데 '빚'이라고 해야 합니다.('죄'는 '하마르티아'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빚진자들 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성도가 '우리'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빚진 자들은 나에게 빚진 자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주님께 빚진자 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 빚진자들입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빚진자입니다. 그 빚을 값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롬1:15에서 복음을 들어야 하는 형제들에게 '나는 복음의 빚 진자'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뜻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에 성도가 수천명씩 늘어났지만, '빚진 것을 갚는 복음'을 증거하지 않고 안주하려 할 때 주께서는 핍박이라는 채찍으로 그들을 세계각국으로 흩어버리십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와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의 빚을 갚습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일은 좋은 일 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근본적으로 서로 빚을 값는 자리(복음을 전하는 자리)가 아니라면, 세상 친교모임보다도 훨씬 재미없고 무익한 모임일 것입니다. - 정리를 해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 진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같이, 우리의 빚들을 우리에게서 용서해 주시고, - 이런 이면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 용서하고 용서함 받는 교훈은 성경보다도 '불경'이나 공자님 말씀이 훨씬 현실적이고 감동적이고 구체적인 교훈을 줄것입니다.
6. 빚쟁이 만들기
자,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고 싶습니까? 빚을 갚아야 하는 사람을 만나면 늘 그 일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형제를 도와주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일은 복음으로 자기 빚을 그에게 나누어 주어 그를 빚쟁이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연약한 자가 성경을 모를 때 가르쳐 주고 내가 가지고 있는 하늘의 신령한 것을 나누어 주면 그것이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악한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 많은 일들을 행하였다고 해도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은 빚진자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한일서3:16) 여기에서 '마땅하니라'는 주기도문에 나오는 '빚진 것'(죄지은) 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7.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먹습니다.
용서도 받아 본 사람이 잘 용서합니다.
사랑 받고 자란 아이들은 커서 사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곡간에서 인심 난다고 넉넉해야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용서함'받은 경험이 풍성한 사람은 잘 용서합니다.
하나님께 '용서함'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용서에 인색합니다.
하나님께 '용서함'받지 못하는 것은 용서를 빌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용서받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남을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넉넉한 '용서'를 먼저 경험하세요.
8.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이 간구는 단순히 개인적인 죄에 대한 용서뿐 아니라 신앙공동체 전체의 죄에 대한 용서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 사회의 어떤 조직체이든 내, 외부적으로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되어 있습니다. 개인은 가정과, 가정은 직장과, 직장은 또 다른 단체와, 단체는 사회와 국가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죄는 개인 뿐 아니라 반드시 교회공동체와 가정, 그리고 사회에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죄가 너에게 미칠 수 있고, 우리의 죄가 사회와 교회를 병들게 하며 무력하게 하며 부흥을 가로막는 것을 알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라는 기도는 서로가 애쓰고 힘써 우선적으로 절실하게 해야 할 공동기도입니다. 이 사회가 썩었다고 말하기 전에.
9. 남자와 여자
우리나라 교회를 보면 기도는 여자들이 다하는데, 일은 남자들이 다 합니다. 기도하는 것으로 봐서 여자들이 훨씬 일을 많이 할 것 같은데 실제로 보면 큰일은 기도도 별로 안 하는 것 같은 남자들이 다 합니다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여자들에게 기도하기 전에 먼저 다 '용서'했냐고 살짝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정말이냐?고 물으면 "실은 다 용서해도 한 놈은 절대로 용서 못합니다." 그 한 놈이 누구요? 그 한 놈이 바로 남편입니다. 꽃같이 예쁘던 자기를 데리고 와서 이렇게 고생시키는 남편을 어떻게 용서하느냐... 40된 집사님도 그렇게 말하고 60된 권사님도 그렇게 말해요. 결국 그게 풀려야 하는데, 입으로는 용서한다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용서가 안되니 큰일을 할 수가 없지요. 그렇게 용서를 안 하면 누가 손해냐? 원래 남편은 지들이 잘 못 한줄도 모르고 있으니 결국에 죽는 건 여자들입니다. 믿는다 하면서 "주 ~시옵소서, 주 ~시옵소서, 주 ~시옵소서" 그냥 욕심껏 구하지만 별로 받은 것 같지는 않고 그러다가 시들해집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굉장한 함정입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까짓거! 하면서 툴툴 털어 버리는데 능합니다. 그래서 잘 용서하는 남자들이 큰일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10. 맨날 똑같은 기도
"애순님, 맛있는 밥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밥 먹고 건강하게 해 주시고, 유치원에서 공부 잘하게 해 주시고, 친구들 안 때리게 해 주시고, 밤에 잠 잘 자게 해 주세요. 애순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내미의 식사기도는 거의 변함이 없습니다.
"어째 너는 기도할 것이 밥, 건강, 잠자는 것 밖에 없냐?" 하며 다른 기도를 가르치려 하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더 나이가 들면 안 가르쳐도 다른 기도를 하겠지요. 그것 보다는 밝은이의 평범한 기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때되면 밥 먹는 것, 잘 먹고 건강해지는 것, 밤에 잠 잘 자는 것 -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 같지만 그 중 하나라도 빠지면 아주 곤란한 일이 생깁니다. 늘 똑같은 기도만 한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먹고, 건강하고, 자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만큼 하나님의 커다란 은총도 없습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 1만달란트의 은혜를 입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아빠는 100데나리온의 기도를 안한다고 불평하려 했으니... 오늘은 밝은이에게 아빠가 한 수 배웠다.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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