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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

유다서 황찬호 목사............... 조회 수 2462 추천 수 0 2010.10.13 14: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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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유1:1-16 
설교자 : 황찬호 목사 
참고 : http://blog.daum.net/hchdan/13610963 

유다서 강해 01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   유다서 1:1-16


[본문 분석]


1. 서론(1-4)

    가. 저자와 수신자(1-2)

    나. 기록 목적(3-4)

2.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5-16)

    가. 과거 거짓 교사들에 대한 심판(5-7)

    나. 현재 거짓 교사들의 행위(8-13)

        1) 육체를 더럽히고, 권위를 대적하며, 영광을 훼방함(8-10)

        2) 가인의 길, 발람의 길, 고라의 길을 따름(11)

        3) 6가지 특징(12-13)

    라. 미래 거짓 교사들의 운명(14-16)

3.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권면(17-23)

    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억하라(17-19)

    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합당한 삶을 세워라(20-21)

    다. 다른 지체들을 바르게 인도하라(22-23)

4. 축도(24-25): 능히 너희를 보호하실 하나님께 영광을



[본문 강해]


1. 서론(1-4)


   영국 수상 처칠을 태운 승용차가 과속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경찰의 단속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면허증 제시를 요구하자 운전사는 면허증 대신 “수상께서 타셨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경찰관은 “알고 있지만 과속이니 스티커를 발부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경찰관의 당돌한 대답에 처칠 수상은 여송연을 입에 문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봐! 내가 누군 줄 아는가?” 그때 경찰관은 “예. 수상 각하와 얼굴은 비슷합니다만 법을 지키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경찰의 거침없는 답변에 처칠 수상은 스티커를 발부 받고 말았습니다. 처칠은 일을 마친 후에 경찰국장을 불러 자기에게 딱지를 뗀 경찰을 특진시킬 것을 명했습니다. 그런데 경찰 국장의 대답이 더 걸작입니다. 그는 “과속 차를 단속했다고 특진시키는 법은 없다”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 중요한가를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힘과 권위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지킬 것은 지킨다는 생각입니다.


   교회는 신앙고백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신앙고백이 분명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적인 상황 속에서 교회 안에도 질서가 무너지고 원칙이 존중되지 않는 경우가 많이 발생합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를 어지럽히고, 성도들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이단이나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바른 신앙 위에 자랄 것을 전합니다.


   본문 1-4절까지는 유다서의 서론으로써 편지의 저자와 수신자를 기록하며 그 편지를 기록한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가. 저자와 수신자(1-2)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유 1:1-2).”


   본문 1절을 보시면 이 편지의 저자가 기록됩니다. 그는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라고 밝힙니다. 야고보의 형제라는 것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의미합니다. 사도 야고보의 형제는 유다가 아니라 요한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고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자신의 신분을 밝힐 때에 야고보의 형제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 편지를 읽는 사람이 안심하고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그는 원래 예수님의 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동생 유다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의 종 유다라고 밝힙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형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구주로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의 형통적 관계를 내세우지 않고 신앙적인 관계를 우선적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혈연적 관계도 중요하지만 신앙적인 관계는 더욱 중요합니다.


   형님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형님이 구세주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많은 혜택이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복음을 위해 헌신해야할 종일 뿐이라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삶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뜻만을 행해야 하는 위치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주님께만 절대적인 복종을 해야만 하는 자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동생 유다라고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 유다라고 밝혔던 것입니다.


   이제 수신자가 누구인가를 보겠습니다. 본문 1절에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살후2:13-14 말씀을 한 번 찾아봅시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13-14).”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도 없을뿐더러,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만한 자격도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을 오늘 하나님께서는 불러 주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쏟아 부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보호하시고 지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누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계속 누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나 된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순수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보호하심을 받기 위해 그분께로 나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순전한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지켜주심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하기에 본문 2절은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평강은 어지러운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심을 확신하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더욱 충만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긍휼과 평강과 사랑.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이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나. 기록 목적(3-4)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 1:3)”


   유다는 그의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3절에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모든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에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돌아오는 영혼을 향한 비전이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친구와 가족들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만큼 가치있고 위한 것은 없습니다. 정말 가치있는 일에 여러분의 인생을 투자하세요.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헌신하는 것이 바로 비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기만 한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다는 인간에게 이 구원의 진리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온 천하를 다 소유한다고 해도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구원의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가운데 유다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면할 필요를 느꼈다고 기록합니다. 힘써 싸우라는 말은 “필사적으로 애쓴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운동선수들이 승리하기 위해 전심전력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유다는 이제 가만히 앉아있을 때가 아니라 전투적으로 싸움에 임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강조하고 싶어 했습니다. 매우 심각한 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심각한 사태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 4절에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 1:4).”


   갈2:4에서도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기 위함”이라고 밝혔습니다. 가만히 들어왔다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공동체 안에 들어와서 공동체의 회원인 것처럼 행세를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선전포고라도 하고 들어왔다면 우리들은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았을 것입니다. 알곡들 안에 가라지와 쭉정이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유다가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외부적인 박해나 핍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안으로 침투한 거짓 가르침과 경건치 않은 삶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4절은 이들의 특징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라고 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도 사랑도 보호하심도 받을 수 없는 멸망의 자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자녀인 것처럼 행세하며 들어와 있지만 실상은 멸망의 자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써 사도인 것처럼 행세했지만 멸망의 자식으로 망했던 가룟 유다와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이들은 성령의 역사가 무엇인가를 옆에서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도 않았고 경외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불신앙으로 멸망의 자식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경건치 아니하며” 이 말은 그들의 삶에서 부도덕한 모습들이 많았음을 보여줍니다. 요즘도 이단들은 성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많이 타락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삶은 형편없습니다. 표현은 거룩하게 보이지만 거룩한 삶의 열매가 없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어도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껍데기는 가지고 있어도 그리스도인의 삶은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교회에 들어온 목적입니다. 자기는 왜 교회에 들어왔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단이 그들을 교회 가운데 침투시킨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악용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구석진 말씀을 가지고 주장하기 때문에 말씀을 잘 배우지 못한 자들은 속기가 쉽습니다. 이들이 주로 주장하는 것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은혜를 더 받기 위해 죄를 더 지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함이지 죄의 노예로 전락시키기 위함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의 심각성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죄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말씀의 원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강한 갈망으로 나타납니다. 참된 믿음은 올바른 삶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죄악으로 달려가던 우리를 붙잡아 의의 열매를 맺는 삶으로 변화시키는 것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오직 예수가 아니라 다른 예수가 있다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카톨릭입니다. 그들에겐 예수 뿐 아니라 교황도, 마리아도, 베드로도 여러 성인들도 예수님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니라 마리아에게 혹은 교황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와 같은 자들이 교회 안에 침투했기 때문에 “힘써 싸우라”고 말합니다. 본문 3절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교회 안에 잠재된 음탕한 적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눈감아 주어라. 사랑으로 용납하라. 오래 참고 기다리라.” 이런 말씀이 아닙니다. 힘써 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로부터 전쟁은 방어와 공격으로 구분이 됩니다. 방어를 위해 견고한 성을 쌓았고, 공격을 위해 칼과 활 그리고 전차를 만들었습니다. 전쟁을 통해 많은 물자들이 투입되었고 인명과 재산의 손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용감하게 싸웠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많은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힘을 다해 싸웠던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진리의 복음”입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의 진리 위에 굳게 서지 못한 사람들을 유혹하여 멸망으로 이끌려고 하는 대적들의 활동은 초대교회 때부터 끊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주요 공격대상은 “복음”이었습니다. “복음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우리에겐 사회적인 책임도 있고, 도덕적인 책임도 있고, 직장과 가정에 대한 의무도 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럴듯한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와 복음을 위해 가정도 직장도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버릴 수 있는 사람만이 참 제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복음을 위협하는 행위는 잘 용납하면서, 복음이 아닌 비진리의 문제를 가지고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자들이 교회에 많이 있다는 점입니다. 야유회를 갈 때 버스를 타고 갈 것이냐 기차를 타고 갈 것이냐를 가지고 피터지게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누가 적인지 누가 아군인지를 모르는 자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아군입니다. 아군끼리는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2.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5-16)


   이제 본문은 거짓 가르침을 교회 안에 확산시키는 대적들의 정체에 대해 말씀합니다. 먼저 5-7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대적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역사적인 전례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그리고 8-13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현재 거짓 교사들이 하고 있는 행위가 그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마지막으로 14-16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그들의 마지막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선포합니다.


    가. 과거 거짓 교사들에 대한 심판(5-7)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유 1:5)”


   본문 5절에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한다”고 말씀합니다. 1청년회에 김명재 목사님께서 차기리더반을 개설하고자 했을 때 그들의 첫 반응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이런 것 다 해봤다. 우린 이런 훈련 필요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 삶에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다시 생각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늘 배우고 또 배워야 합니다. 배울 수 없는 날이 속히 오리니…. 배울 수 있을 때에 힘써 배우라. 복음의 진리 위에 굳게 서기 위해 우리는 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합니다.


   첫 번째 예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입니다. 본문 5절에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본문의 배경을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큰 권능과 역사로 애굽을 탈출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출애굽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렇게 구원하신 목적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나안 땅 바로 입구인 가데스 바네아에서 절망적으로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열두 정탐꾼 중 열 정탐군의 부정적인 보고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를 비현실적인 무모한 의견으로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광야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개인들이 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크신 하나님의 능력과 이적을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어떤 은혜를 체험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이 믿음을 굳게 지키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천국의 백성들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롬9:6은 “이스라엘에서 난 자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은혜와 혜택을 받았던 자들도 약속을 믿지 않고 불순종할 때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노년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딤후4:7-8).” 언약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이적과 능력을 체험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약 공동체 안에서 이런 역사와 이적을 맛보더라도 멸망당한 사람들이 바로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현재 내가 믿음으로 살아가느냐에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 1:6)”


   두 번째 예는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말씀합니다. 본문 6절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고 말씀합니다. 원래 천사들은 거룩한 직분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 곁에서 섬기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얼마가 교만하여 타락함으로 하나님을 반역하다가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사탄이며 사탄을 추종하던 악마들입니다.


   이들이 섬겼던 장소가 어디입니까? 거룩한 하나님이 계시던 하늘나라입니다. 이들이 섬겼던 직분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어두운 곳으로 쫓겨났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본문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났다”고 말합니다.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한 오만함이 심판의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주로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의 특징은 권위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나 말씀의 권위를 무시합니다. 말씀에 어떻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회개하라는 말씀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또한 말씀으로 권면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의 권위도 우습게 생각하게 됩니다. 목사도 없고 장로도 없습니다. 개망나니처럼 자기 생각만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처벌은 “흑암과 어두움에 쫓아내는 것”입니다.


   저는 새 가족이 오면 언제나 하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 생활 안 꼬이려면 일단 저와 안소현 자매랑 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난삼아 하는 말이지만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하면 교역자와 조장들과의 사이도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멀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교역자와 조장들과의 사이가 벌어지면 하나님과의 사이도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혼자서 “나 잘났다”고 외쳐도 늘 자신이 영적 침체와 어두움 가운데 있을 뿐이라는 사실만을 발견하게 될 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7)”


   세 번째 예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예입니다(7).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정욕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욕 때문에 성적으로 매우 타락한 자들이었습니다. 소돔이라는 말에서 sodomy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이 말은 “동성연애”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순리에 따라 성생활을 하지 않았고 동성애나 짐승들과 교합하는 짓들을 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그들의 비정상적인 색욕이 얼마나 컸으면 그들을 심판하러 온 천사들에까지 강간을 하려고 했습니다. 본문 7절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본문은 범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을 향해 불신했던 자들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자기 지위를 떠난 천사들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저지르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소돔과 고모라는 정욕을 따라 방탕한 삶을 살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유다가 이 세 가지 예를 들어서 다시 상기시키는 것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교회에 침투한 거짓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의 삶이 이와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거짓된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을 불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반역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삶은 정욕과 방탕의 삶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이 사건들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심판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그들의 전철을 밟는다면 우리는 정말 어리석은 자가 될 것입니다. 불신과 반역과 정욕. 이것은 우리가 평생 싸워야할 내면의 적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자만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나. 현재 거짓 교사들의 행위(8-13)


1) 육체를 더럽히고, 권위를 대적하며, 영광을 훼방함(8-10)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유 1:8)”


   본문 8절은 “그러한데”로 시작합니다. 이미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신했고, 권위에 도전했고, 방탕한 삶을 살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드로 그와 같이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이”입니다.


   그들의 특징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가 다 나왔습니다. 그들은 정욕을 따라 자기 육체를 더럽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업신여기며 유아독존 식으로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했다는 표현은 본문 10절에 더 자세히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9-10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더불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또 저희는 이성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9-10).”


   모세의 승천기에 나오는 내용이 여기 언급됩니다. 모세가 죽자 하나님께서는 천사장 미가엘을 시켜서 시체를 치우려고 했습니다. 그때 마귀가 나타나서 모세의 시체의 소유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주장합니다. 아마 마귀는 죽음의 영역 안에서 어느 정도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때 미가엘은 천사장으로써 하나님의 권위로 마귀를 심판할 능력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를 억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미가엘처럼 권세도 없고 능력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교만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식이 있는 척 하지만 결국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입장에 서고 말았던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가장 어려운 사람들은 이유 없이 반항하고 훼방하는 자들입니다. 정말 말씀에 근거하여 빗나가는 모습들을 정확하게 지적하며 권면하는 자들은 귀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설치고 돌아다니는 경우엔 정말 답이 없습니다. 그래도 좀 아는 자들은 말씀을 가지고 변론을 하면 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아예 이야기 상대가 안 되는 자들입니다. 말씀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세우신 지도자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자기 생각만이 진리며 옳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본문 10절에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이성 없는 짐승처럼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고 합니다. 말씀이 들어가지를 않으니 본능으로 아는 것으로 망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믿음이 자라야 죄악된 본능을 이기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악된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망하는 길로만 나가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 길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답이 말씀에 있는데 말씀을 모르니 답이 없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순수한 믿음으로 말씀 앞에 도전을 받으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2) 가인의 길, 발람의 길, 고라의 길(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 1:11)”


   본문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세 가지가 등장합니다. 가인의 길. 발람의 어그러진 길. 고라의 패역된 길. 그들이 이성없는 짐승처럼 본능으로 아는 그것을 망하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세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먼저 가인의 길입니다. 가인은 자기보다 의로운 동생을 쳐죽인 사람입니다. 요일3:12 말씀은 이렇게 가인을 평가합니다. “가인같이 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가인은 하나님의 권위 뿐 아니라 도덕적인 질서까지도 무시하고 자기 마음이 원하는대로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가인이 시기심으로 가득할 때 하나님은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죄의 소원은 네 마음에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동생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네게 있지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도 경고도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가인이 이렇게 범죄 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껍데기만 가진 종교생활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롭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는 드렸지만 행위로는 부인했던 자였습니다.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자에게 영적인 능력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결국 말씀도 거역하고, 하나님의 경고도 무시하고, 자기 마음에 원하는 죄악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예배에서 승리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에 실패한 자는 그 어디에서도 승리할 수 없습니다.


   발람의 어그러진 길은 탐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길을 의미합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은사와 사역을 팔았습니다. 그는 선지자였지만 돈을 주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주하라는 발락의 청을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그는 물질을 얻기 위해 영적인 것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사람을 축복할 수도 있고 저주할 수도 있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자기만족과 유익을 위해 진리를 배반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의 자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젊을 때부터 원칙이 바르고도 분명하게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젊은 자들은 진리를 위해 생명도 내걸 수 있는 패기가 있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벌써부터 타협하고 양보하기 시작하면 중년에는 정말 파렴치한 인간이 되고 말 것입니다.

  

   고라의 패역을 좇은 길이란 자기가 권력을 잡기 위해 하나님이 임명한 지도자를 대항하고 반역한 길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민수기 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지도력을 비웃었고 모세가 분수에 지나치도록 교만하다는 식으로 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언약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말았습니다. 모세를 따르는 자와 자기를 따르는 자들로 구분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권위에 대한 도전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느 공동체이든지 상처받은 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보통 이러한 도전적인 세력에 동조하는 자들은 좌절과 실의에 빠져 이를 갈아보았던 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고라 뿐 아니라 고라를 따르던 자들 모두가 땅이 갈라져 그 안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받은 상처와 실망을 성령의 은혜로 치유 받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인간적으로 갚으려고 할 때에 권위에 대항하게 되고, 교회 분열에 앞장서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의 죄는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발람의 죄는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고라의 패역의 길은 실망과 상처를 성령의 은혜로 치유하지 못한 것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세 가지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한 본능으로 아는 대로 살았던 자들의 비참한 종말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비참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성령의 임재가 있는 예배, 실망과 상처가 치료되는 회복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육체를 따르지 않고 성령을 쫓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3) 6가지 특징(12-13)


   이제 본문은 거짓 교사들이 가진 6가지 특징을 말씀합니다. 그들은 애찬의 암초,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 물 없는 구름, 열매 없는 가을 나무, 바다의 거친 물결, 유리하는 별들로 묘사됩니다. 한 가지씩 그 특징들을 살펴봅시다.


가) 애찬의 암초(12)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유 1:12)”


   본문 12절에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는다고 합니다. ‘기탄없이’라는 말은 ‘두려움 없이’ 곧 경외심이 없이 애찬식에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거룩함과 사랑으로 충만해야할 애찬에 이기적인 목적과 뻔뻔스러운 모습으로 참여했다는 말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드리기 전에 식사를 나눴습니다. 이것을 애찬이라고 합니다. 애찬을 가지는 목적은 성찬에 참여할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참으로 주님을 기념하며 친교의 시간을 가지도록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본문은 이들이 “너희 애찬의 암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암초란 바다에 잠겨있으면서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는 바위를 말합니다. 이 암초를 미처 발견하지 못할 때 배가 급작스럽게 부딪혀 침몰하게 됩니다. 빙산 한 덩이에 거대한 타이타닉 호가 침몰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암초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애찬의 암초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거룩한 예배를 더럽히는 역할을 했다는 뜻입니다. 아무런 경외심이 없이 떠들며 흥청망청 먹어대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모습은 꼴불견일 뿐 아니라 건강한 교제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교회의 교제를 통해 자기 세력을 확장하는 사람들을 들 수가 있겠습니다. 교회의 교제를 이용하여 자기를 추종하는 세력들을 확장하는 것에 전력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편당을 만들어서 공동체의 하나됨을 방해하는 자들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 세력 확장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있는 자들입니다. 실제로 고린도교회에서는 부유한 자들이 자기들끼리만 음식을 준비하여 먹음으로 가난한 자들을 왕따시켰던 적이 있었습니다(고전11). 애찬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구별하여 당을 짓는 기회로 전락시켰던 것입니다.


나)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12)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유 1:12)”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사람들을 부려먹는 자를 의미합니다. 참 목자는 양을 잘 인도하고 양육하여 건강하게 자라도록 섬기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거짓 목자는 양을 자기 양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자기 양처럼 생각했다면 그들의 안전과 양육에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양들의 성장에 있지 않고, 자기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을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도 자기들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양들을 착취하거나 부려먹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자기들 위에 군림하여 압제하는 자들을 교회는 반겼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 앞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렘5:31)” 사도 바울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11:30).”


   참된 목자는 양들의 안전과 양육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목자는 자기 몸만을 생각합니다. 참된 목자 밑에서 양육을 받는 양들은 살찌고 잘 성장하지만, 거짓 목자를 따르는 자들의 삶은 황폐하기 그지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푸른 초장 맑은 물가가 아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만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장들은 양들을 진정으로 섬기는 참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 양이 주리고 목마르며 방황하고 있다면 그건 모두 목자의 책임입니다. 하지만, 양들이 참된 목자인 조장을 따르지 않고, 거짓 목자를 따라간다면 그들의 삶 역시 황폐하기 그지 없는 삶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조장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잘 따라 다니세요. 그러면, 뭔가가 반드시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조장들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다) 물 없는 구름(12)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유 1:12)”


   본문은 거짓 교사들을 바람에 불려 가는 물 없는 구름에 비유합니다. 하늘의 구름이 무언가 줄 것처럼 자태를 뽐내며 흘러갑니다. 하지만, 물 없는 구름은 농민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물을 줄 수 없는 구름입니다. 이처럼, 거짓 교사들은 지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진리를 줄 수 없는 자들입니다. 영적인 것처럼 자신을 과신하지만 영적인 역사를 이룰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을 것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고전4:20).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지 못한 자들은 상처받은 심령에게 생수를 공급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교만한 모습으로 자랑은 하지만, 인간의 심령에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를 공급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라) 열매 없는 가을 나무(12)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유 1:12)”


   이제 본문은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에 비유합니다. 죽고 또 죽었다는 말씀은 두 번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죽었을 뿐 아니라 다시 소생할 가능성도 전혀 없는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생명이 없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뿌리까지 뽑힌 열매없는 가을 나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열매만 없는 것이 아니라 뿌리도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열매가 없었던 원인은 뿌리가 뽑혔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이들의 뿌리가 땅에 잘 박혀있었다면 자연스럽게 열매가 맺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뿌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열매는 진정한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영적인 열매를 하나씩 둘씩 맺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뿌리가 깊숙이 땅에 박혀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께서도 그들의 열매로 그를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말이나 껍데기만 보아선 안됩니다. 행실과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마)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13)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유 1:13)”


   바다의 거친 물결에 비유한 것은 그들의 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과장된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성난 파도가 엄청난 위세를 가지고 달려오지만 힘없이 해안에서 부서지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몰고 온 것은 온갖 오물과 잡동사니들만 가득 쏟아 부을 뿐입니다. 사57:20에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이 말씀은 그들이 낸 “엄청난 과장의 말”이 실상은 거품이나 잡동사니와 같은 쓰레기 뿐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조장들은 말씀의 심오한 보물을 끌어서 전해 주지만, 이들이 가르치는 것은 단지 오물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이들을 추종하는 자들은 오물을 먹으면서 만족하고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보물을 받아먹고 있는 자들은 자기가 엄청난 보물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둘 다가 불쌍한 자들입니다.


바)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13)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유 1:13)”


   여기 본문에서 유리하는 별들이라는 의미는 “궤도를 이탈한 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별이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2000년 전에 이미 알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별이 궤도를 이탈하면 어떻게 됩니까? 캄캄한 암흑 속에서 떠돌게 됩니다. 이와 같이 거짓 교사들도 제 궤도를 이탈하여 유리하는 별들과 같이 흑암 가운데 떨어질 것을 말씀합니다.


   소행성들이 궤도를 이탈하면 지구 대기권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별똥이라고 합니다. 별은 별인데 똥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대기권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모든 별보다 더 활활 타오르면서 두각을 드러냅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이들이 나타나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명은 거의 1초가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궤도를 이탈한 별과 같이 거짓 교사들도 그 생명이 잠깐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지금은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 빛을 잃고 영원히 캄캄한 흑암 가운데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북극성과 같은 고정된 별들은 어둠 속에서도 여행자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됩니다. 하지만, 제 궤도를 이탈한 별들은 안내자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길을 잃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언제나 진리 편에 서서 진리를 외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정리하면 거짓 교사들은 암초와 같이 위험한 존재들입니다. 자기만을 생각하고 양을 잡아먹는 못된 목자들입니다. 갈급한 자들에게 생수를 공급할 수 없는 물 없는 구름과 같습니다. 자기가 생명이 없기 때문에 생명을 전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영적인 것 같으나 실제로는 수치와 오물이 가득한 자들입니다. 정상적인 신앙 노선을 떠났기 때문에 곧 캄캄한 어두움 가운데 심판을 받게 될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천사의 얼굴을 하고 처세술과 달변으로 사람들을 잘 유혹합니다.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라(마7:15).”고 하셨습니다. 분별력을 가지고 참 진리만을 굳게 붙잡는 자가 축복된 사람입니다.


라. 미래 거짓 교사들의 운명(14-16)


   지금까지 본문은 1) 과거에 있었던 거짓 교사들의 행위와 그들이 받았던 심판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2) 현재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의 행위와 특징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본문은 거짓 교사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유 1:14)”


   본문 14절 말씀은 에녹이 등장합니다. 에녹은 노아 홍수 심판이 있기 전 아담의 7대 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이었고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올라갔던 인물입니다. 히브리서 11:5에서는 그를 믿음의 영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충분히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예언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예언을 봅시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그는 노아 홍수가 일어나기 전의 인물이었지만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가장 최초로 예언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목적에 대하여 기록합니다. 본문 15절에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유 1:15)”


   주께서 임하는 목적은 심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심판하러 오신다는 말씀입니까? 본문 15절에 ‘뭇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경건치 않은’이라는 말이 세 번 기록됩니다. 그러니까 경건치 않은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러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심판의 초점은 그들이 행한 일과 말에 두고 있습니다.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일과 경건치 않은 죄인이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그렇다면 경건치 않는 말과 일이란 무엇입니까? 본문 16절에 보면 먼저 경건치 않은 죄인들의 강퍅한 말에 대해 먼저 언급합니다.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유 1:16)”


   “이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며 불만을 토하다가 광야에서 멸망당했던 것과 같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불평할 이유를 찾는 사람이 바로 원망하는 자이며 불만을 토하는 자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니 보따리까지 건져주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자들입니다. 똑같이 예배를 드려도 눈물로 은혜를 받는 자가 있는 반면에 말씀의 은혜가 떨어졌다고 불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말씀이 달라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자기 마음이 화인 맞아서 그런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불평을 일삼는 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지체들에게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불만을 나타내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의 불만은 별 의미가 없이 터뜨리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듣는 자들에게 신앙적으로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또 계속해서 보면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이런 자들의 특징은 가치가 있는 자들 앞에서는 아첨하고, 별 이용 가치가 없는 자들 앞에서는 교만하게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자들입니다. 별 볼일 없는 자들 앞에서는 자기를 과시하고, 가진 자들 앞에서는 아첨꾼이 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경건치 않는 말들을 쏟아내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본문 중간에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바로 이것이 그들이 불평하고 불만을 토하고, 자랑하고 아첨하는 본질적인 이유입니다. 복음을 들었으면서도 여전히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은 복음이 주는 안식을 누릴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경건은 자기 입에 재갈을 먹이고 그 정욕을 따라 말을 하지 않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약1:26에서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교회를 어지럽히던 거짓 선지자들의 운명에 대해 말씀합니다. 주께서 반드시 오실 것입니다. 경건치 않은 그들의 말과 행위를 심판하시기 위해 분명히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8:4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결론


   미국의 두 청년이 주일 저녁에 도박장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던 도중에 교회 게시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의 설교 제목이 거기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 중 한 청년은 도박장에 가지말고 교회에 들어가서 설교나 한 번 들어보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청년은 한 번 결심한 것은 지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혼자 도박장으로 떠나버렸습니다. 지킬 것은 지키는 청년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30년이 지났습니다. 미국에는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도박장에 갔었던 그 청년은 감옥에서 대통령 취임식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 지난날의 어리석은 선택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도박 생활을 하다 감옥에까지 갇힌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도 처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신문의 주인공을 알아보고 가슴을 치며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30년 전에 교회 앞에서 헤어진 자기의 친구 클리블랜드였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선택은 인생 전체를 파멸과 고통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선택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그 결과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인생을 책임질 중요한 선택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 위에 굳게 설 때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설 수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배우고 확신한 가운데 처신하며, 믿음의 열매를 많이 맺는 청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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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1 여호수아 가던 길에서 위기가 다가오면 수1:1-9  김필곤 목사  2010-10-18 2283
4250 마가복음 기준 높이기 막9:38-50  김필곤 목사  2010-10-18 2242
4249 신명기 추석문화와 문화 변혁자로서 신앙인 신16:13-17  김필곤 목사  2010-10-18 2182
4248 출애굽기 쓰임 받음 출4:10-17  김필곤 목사  2010-10-18 2030
4247 사사기 135,000대 300의 싸움 삿7:2-14  김필곤 목사  2010-10-18 2306
4246 마가복음 쇠하는 길과 흥하는 길 막9:30-37  김필곤 목사  2010-10-18 2799
4245 마가복음 변화산 아래서의 삶 막9:14-29  김필곤 목사  2010-10-18 2307
4244 로마서 믿음의 분량 롬12:3-5  강종수 목사  2010-10-17 2720
4243 역대상 근심을 벗고 복받는 해 대상4:9-10  김홍도 목사  2010-10-17 2596
4242 로마서 환난을 이겨내는 삶 롬12:12-13  박상훈 목사  2010-10-16 2621
4241 유다서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권면 유1:17-25  황찬호 목사  2010-10-13 2819
» 유다서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 유1:1-16  황찬호 목사  2010-10-13 2462
4239 사무엘하 활 노래를 부르자 삼하1:17-26  김삼환 목사  2010-10-11 2577
4238 요한삼서 진리로 성공하자 요삼1:2-4  강종수 목사  2010-10-10 2004
4237 아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아8:6-7  이정수 목사  2010-10-10 2928
4236 요한복음 하나님은 영이시라 요4:20-26  이정수 목사  2010-10-10 3088
4235 요한일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4:7-21  이정수 목사  2010-10-10 3173
4234 창세기 하나님은 빛이시라 창1:1-2:3  이정수 목사  2010-10-10 2319
4233 마태복음 긍휼히 여기는 사람의 복 마5:7  이정수 목사  2010-10-10 2396
4232 로마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롬8:28  이정수 목사  2010-10-10 2438
4231 마태복음 온유한 사람의 복 마5:5  이정수 목사  2010-10-10 2732
4230 마태복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복 마5:3  이정수 목사  2010-10-10 2546
4229 시편 네 삶 자체를 여호와께 맡기라! 시37:5-6  이정수 목사  2010-10-10 2989
4228 시편 흘러 넘치는 충만한 삶의 유익 시23:1-6  이정수 목사  2010-10-10 2235
4227 고린도후 강함과 약함의 역설적 신비 고후12:7-10  이정수 목사  2010-10-10 2920
4226 누가복음 삶의 공간(space), 시간(time), 그리고 일(work) 눅2:49  이정수 목사  2010-10-10 2310
4225 역대상 야베스의 기도 [1] 대상4:9-10  이정수 목사  2010-10-10 9244
4224 요한복음 거듭난 사람 요3:1-15  이정수 목사  2010-10-10 2552
4223 에배소서 나 혼자 소리는 약합니다 엡2:11-22  이정수 목사  2010-10-10 2512
4222 요한복음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 요3:16  이정수 목사  2010-10-10 2723
4221 요한복음 포도나무와 가지 요15:1-8  이정수 목사  2010-10-10 3197
4220 요한복음 진리를 막는 3가지 태도 요6:41-52  이한규 목사  2010-10-08 2245
4219 요한복음 작은 예수가 되는 길 요6:32-40  이한규 목사  2010-10-08 2684
4218 요한복음 모든 삶이 은혜입니다 요6:27-31  이한규 목사  2010-10-08 2496
4217 요한복음 기적을 일으키는 3대 원천 요6:1-10  이한규 목사  2010-10-08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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