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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유1:1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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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황찬호 목사 |
참고 : | http://blog.daum.net/hchdan/13611084 |
유다서 강해 02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권면 (유다서 1:17-25)
[본문 분석]
3.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권면(17-23)
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억하라(17-19)
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합당한 삶을 세워라(20-21)
다. 다른 지체들을 바르게 인도하라(22-23)
4. 축도(24-25): 능히 너희를 보호하실 하나님께 영광을
[도입]
인도의 전도자였던 선다 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히말라야 산기슭에서 산불을 만났을 때 본 광경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나무를 바라보며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나무에 불이 타올라가는데, 그 나무 가지 위에는 둥지가 있었고 그 안에는 새끼들이 있었습니다.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본 어미 새는 정신없이 날아다니며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새끼들이 당한 위험을 바라보며 미친 듯이 둥위 주위를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안타깝게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나무의 불만큼은 꺼주고 싶었지만 도무지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불이 그 둥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이때 놀라운 광경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은 이제 어미 새가 포기하고 돌아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어미 새는 둥지에 내려앉아 날개를 펴고 새끼들을 품었던 것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것이 사랑입니다. 이번 수련회를 통해 우리 공동체가 정말 사랑으로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를 향한 사랑의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시온을 향한 여러분들의 사랑이 회복되고, 진리 안에서 온전히 하나가 되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권면(17-2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유 1:17)
본문은 “사랑하는 자들아”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원문에는 “그러나”를 의미하는 헬라어 “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본문은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의 행위와 그들이 받을 심판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이제 본문은 그러한 상황 가운데 참된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행하다가 저렇게 심판은 받았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아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가르침은 세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여기에는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합당한 삶을 세우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단이나 당을 짓는 다른 지체들을 바르게 인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억하라(17-19)
본문은 먼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무슨 말씀을 했습니까? 본문 18절에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유 1:18)”
사도 바울은 행20:29에서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도 벧후2:1-3에서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서도 거짓 선생들이 있을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심으리니 저희 심판을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이뿐 아니라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교회 안에 거짓 선지자들이 침투하여 정욕으로 지은 말을 가지고 속이고 기만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교회 안에 드러난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말고 침착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교회 안에 이런 자들이 일어날 수가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그토록 신뢰했던 자들이 거짓 선지자였을 수가 있는가? 놀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 1:19).”
본문 19절에 그들의 특징이 기록됩니다. 먼저 당을 짓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교회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가장 주된 원인입니다. 무리를 지어서 무시할 수 없는 파워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감히 이들을 건드릴 수 없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교회에서 존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당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이단들은 자기 지도자들에게 비이성적인 충성심을 보입니다. 심지어 자기 지도자들이 부도덕한 삶을 살거나 거짓을 일삼는데도 불구하고 그 충성심이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JMS의 정명석을 따르는 자들을 보면서 이러한 마귀적인 역사에 놀라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비슷한 움직임들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역자는 성도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훈련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의 충성된 종으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역자 뿐 아니라 성도들 가운데에도 자기들의 말만 듣도록 당을 짓는 것을 교회를 분열시키는 행위입니다. 교회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명령만을 따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90%가 같고 10%가 틀려도 같은 90% 때문에 동지가 됩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90%가 같고 10%가 틀리면 그 틀린 10% 때문에 원수가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났습니다. 복음 안에서 서로 협조하고 하나가 되어야 할 교회가 갈라지고 싸우는 일들이 일어나는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다른 부분만을 볼 것이 아니라 같은 비전과 목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육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육에 속한 자로써 정욕대로 행동하고 있으면서 자기가 영적인 사람이라고 주장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잘 쓰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옥 백성이란 말인가?” 바리새인들이 이런 말을 잘 했습니다. 요9:40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우리도 소경인가?”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소경이 되었더면 죄가 없었으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육에 속했기 때문에 성령이 없는 자들입니다. 성령이 없다는 말은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따르면서 성령의 역사를 항상 거스리는 자들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행위가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하나님의 뜻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백성들마저도 자기가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육에 속한 자처럼 행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는 분별력이 있고, 하나님과 함께 잘 동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한 대 맞는 지름길입니다.
본문은 이미 사도들을 통해 교회 안에 이런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마치 옥토밭에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자들을 통해 교회는 어려움과 시험을 당하게 되고 심지어 분열되고 없어지기까지 했습니다.
본문은 이런 상황 가운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 이런 사람들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잘 모르면 영적인 일들을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올바르게 적용하지 않으면 이런 자들의 밥이 되기가 쉽습니다. 우리를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그 무엇도 과감하게 떠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대학부의 시절에 교회 생활을 가장 잘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것은 말씀 훈련과 영성 훈련을 가장 잘 받은 사람입니다. 대학부의 시절은 훈련의 시절입니다. 봉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훈련받는 것에 우선되어서는 안됩니다. 훈련이 먼저이고 다음이 봉사입니다. 대학부의 시절에 잘 훈련받지 못하면, 영원히 교회에서 좋은 일군이 못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착실하게 잘 훈련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크게 쓰임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자들을 들어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대학부의 시절은 심고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합당한 삶을 세워라(20-21)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유 1:20)”
말씀을 기억한 자들은 이 말씀의 기초 위에 거룩한 삶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믿는 자 안에서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네 가지를 말씀합니다. 그것은 믿음, 기도, 사랑 그리고 소망입니다.
먼저 본문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고 합니다. 여기 건축한다는 말은 이미 기초가 놓여진 건축물의 구조를 완성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이것을 영적인 것에 적용한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식과 삶을 지속적으로 성장시키는 작업을 의미합니다(TDNT). 결국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성장이 참된 믿음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신자들이 견고하게 설 수 있는 기초가 참된 믿음임을 보여줍니다.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제대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참된 믿음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열매가 있는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자들의 삶은 변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삶이 변화된다는 말씀은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참된 믿음이 없으면 두려워 떨게 됩니다. 거짓된 가르침 앞에서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방탕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을 분별하고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기 위해 참된 믿음 위에 기초를 세워야 합니다.
두 번째로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성령의 감화를 받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아무리 기도를 하고 싶어도 성령의 충만한 인도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제가 제일 답답할 때가 기도는 하고 싶은데 기도가 안 되는 때입니다. 그때를 돌아보면 성령의 인도를 소멸했던 때이며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을 때가 분명합니다. 그럴 때 기도가 안 된다고 그냥 일어서면 안 됩니다. 그리고 바로 내 기도 제목으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성령이 내 마음을 감동시키고 능력으로 인도하시기를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에 들어가는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가장 영적으로 어두울 때에는 심지어 2시간 동안을 앉아 있어도 기도의 문이 열리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이름만 불러도 바로 기도의 문이 열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우리가 기도제목을 발견하게 되고 기도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때 간구하는 기도에는 힘이 있습니다. 응답의 확신이 있습니다. 이땐 기도를 그만하라고 해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계속 기도의 제목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도 생활을 하는 자들의 삶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1)”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강한 확신이 우리를 모든 염려와 불안과 공포에서 떠날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우리는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나의 모든 삶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십니까?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십니까?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고 하십니다. 왜 이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켜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는 우리들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정작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엔 퀘스천 마크를 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자들은 불안과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정말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분께 나아가는 자마다 이 사랑을 체험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마지막으로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망을 의미합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소망이 끊어진 사람은 어두움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경건치 않은 자들은 심판하실 것이지만, 생명을 얻은 우리들에겐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림은 우리에게 공포가 아니라 소망이 됩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영생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자비와 긍휼 때문에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실패하는 우리의 모습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실패한 우리를 향한 대적들의 조롱과 비난에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겨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공로와 노력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랑과 자비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망을 가진 자들은 “견고하며 흔들리지 아니하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고전15:58).” 왜냐하면 우리의 수고가 주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생명의 면류관으로 우리에게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참된 믿음의 기초 위에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에 따라 기도할 때 능력과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소망을 가지고 주의 재림을 기다릴 때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일에 전념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믿음, 기도, 사랑, 그리고 소망 이 네 가지를 꼭 기억하고 삶에서 주님의 향기를 나타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다. 다른 지체들을 바르게 인도하라(22-23)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유 1:22)”
본문은 이제 거짓 교사들에 의해 영적 위험에 처한 자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이들을 그냥 둘 것인가? 아니면 피터지게 한판 붙어볼 것인가?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헷갈리게 하고, 다툼과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잘 했다고 소문이 날까요?
오늘 본문은 그 지체들을 바르게 인도하라고 하십니다. 본문은 그 지체들을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1) 어떤 의심하는 자들(22) 2) 불 속에 있는 자들(23a) 3) 이미 더렵혀진 자들입니다(23b). 정도는 달라도 대하는 태도는 같습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바르게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어떤 의심하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흔들리는 자들이며 굳세지 못한 영혼들입니다. 신앙은 가졌지만 의심과 회의가 많은 자들입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참된 진리를 믿지 못하고 현혹된 자들입니다. 이단들이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받았지만 아직 치명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참된 진리를 따르는 것에는 주저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본문은 이런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삐딱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자들을 정죄하기가 쉬운데 그렇게 하지말고 긍휼히 여기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언제나 사랑과 긍휼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입장을 바꾸어서 내가 흔들리고 있을 때에 형제들이 나에게 어떻게 대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그대로 그들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 이단이나 거짓된 가르침에 잘 넘어가는 자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소외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은 사회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자들은 항상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자들을 찾습니다. 자기를 환영하고 인정해주는 자들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만을 앞세워 그들을 정죄하거나 비난만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이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유 1:23)”
두 번째는 불 속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이미 미혹을 받아 매우 심각한 영적 위험에 처한 자들입니다. 불이 난 집에 있는 사람을 구할 때 어떻게 합니까? “당신은 현재 불 속에 있습니다. 여기서 빠져나가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저는 안전한 곳을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설득하느라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열 수 있도록 좋은 인상을 보일 필요도 없습니다.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분석하고 회의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냥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 속에 있는 자들입니다. 시각을 다투는 아주 긴박한 실제상황입니다. 그들은 억지로라도 끌어내어 구원시켜야 할 위태로운 자들입니다. 우리 지체들 가운데에도 이런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냥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이미 더렵혀진 자들입니다. 본문은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렵혀진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가장 타락하고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 육체로 더렵혀진 옷이라는 말은 그들의 방탕한 삶의 열매를 말합니다. 이것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그들을 구원하려고 섣불리 다가서다가 그들처럼 오염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전염병을 치료하는 자는 항상 그 병에 자신이 오염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오염된 자들을 통해 성도들을 오염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그 육체로 더럽혀진 옷이라도 실어하라고 하십니다. 작은 죄 하나라도 그냥 넘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그들의 죄는 미워하되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행동하는 자들을 많이 봅니다. 그들의 죄를 별로 미워하지도 않고 경계하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인정하고 추종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습니다. 불쌍히 여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도리어 정상적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미 전염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교회를 비난하고, 목회자들을 조롱하고, 지체들을 험담하는 말들을 들을 때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다정하고 친근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이미 여러분들이 오염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저는 복숭아 알레르기입니다. 복숭아를 먹을 뿐 아니라 복숭아를 보기만 해도 두드러기가 납니다. 죄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권위에 대항하는 그 어떤 것에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 육체로 더럽혀진 옷이라고 싫어하는 자세”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죄를 미워하고 죄악된 삶을 경계하되, 그 가운데 빠져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몇 년 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습니다. 당시 백화점 안에는 손님과 종업원을 포함해서 1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119 구조대원들은 필사적으로 건물 더미 속에서 부상자들을 구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생존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작업은 필사적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출될 때마다 “우리는 해냈다”고 울먹였고 전 민족이 기뻐했습니다.
정 모 대원은 온몸에 타박상을 입고도 “이젠 죽어도 좋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김 모 대원은 구멍을 뚫다가 천정이 무너져 오른손 손가락을 절단하기도 했습니다. 55세 된 장 모 소방관은 작업 중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중태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하루 20시간을 작업하고 4시간을 아스팔트 위에서 자야 했지만, 생존자들이 자기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잠을 잘 수 없어서 목숨을 건 구조 활동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우리 시온에도 이렇게 영혼을 생각하는 자들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편히 쉬고자 하면 죄악의 무게에 눌려 신음하는 저들의 목소리가 들려서 그냥 있을 수가 없는 영적인 부담이 여러분 가운데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나의 육체와 몸이 병들고 피곤해도 그 일을 쉴 수 없는 영적인 부담감 말입니다. “나의 자녀들이 살아나는 그 날을 사모하며 일어나고 또 일어나서 그들에게 달려가는 ‘마귀가 포기한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이단적인 가르침과 거짓 선지자들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에 처할지라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살아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말씀을 바로 알고 배워서 삶에 잘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배우고 확신한 가운데 거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합당한 삶을 세워 나갈 수 있습니다. 이런 열매가 가득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다른 지체들을 진리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지체들을 성급하게 인도하려고 다가설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런 믿음의 기초가 든든히 세워지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우리가 오염되고 먹힘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4. 축도(24-25): 능히 너희를 보호하실 하나님께 영광을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유 1:24-25).”
이제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축복 기도를 기록합니다. 지금까지 이단과 거짓 교사들의 활동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 가운데 참 성도들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인가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에게는 책망과 심판의 경고를 말씀했고, 신실한 자들에게는 권고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을 기록합니다.
본문에 기록된 축복의 요지는 “능히 우리를 보호하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내용입니다. 침입자들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침입자들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넘어질지라도 우리는 다시 일으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시험에 들어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그 교회를 회복시키시고 다시 일으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교회를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교회를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비록 연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거짓과 위선과 죄악으로 오염되었을지라도 그 교회를 붙들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순수한 열정과 혈기로 교회를 비난하기도 하고 또 쉽게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약하고 힘없이 보이는 교회일지라도 그 교회를 붙들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영광을 회복시키실 것이고,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세상에 증명하실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교회의 회복은 하나님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교회의 일군으로 부르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회복과 부흥의 도구로 헌신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고집과 이기적인 생각을 접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마귀를 돕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스러운 회복과 부흥을 위해 우리 대학부가 먼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6․25 동란 때 낙동강 전선만을 남기고 있을 때 민족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신사참배의 죄악을 회개했던 운동은 SFC 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회가 삼일교회로부터 시작되었을 때에 인천상륙 작전을 통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셨다는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가장 연약하고 보잘 것 없이 보였던 십대들을 통해 민족을 살리는 회복의 운동을 전개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을 볼 때 어떻게 느껴집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워서 부흥과 회복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 대학부에 생명의 역사들이 분명히 일어날 것입니다. 이 일에 함께 일어나 전진합시다. 청년의 때에 세상과 정욕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 안목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와 회복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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