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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9:38-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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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2007.9.30/열린교회/김필곤 목사
추석 명절이 되어 고향에 다 다녀왔을 줄 압니다. 저도 참으로 오랜만에 추석에 고향에 갔다왔습니다. 아이들이 집에서 출발하는데 서로 자리다툼을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같은 곳을 가고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로 가는 것인데 잠깐 승차했다가 내릴 것인데 조그마한 차에서 자리가 뭐 그렇게 중요한지? 다투는 모습을 보고 참 안타까웠습니다. 아마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심정이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관심을 가지시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시고 가르치시고 환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여 인류 구속 사역을 완성하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수준은 여전히 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변화산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올라가 변형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초막 셋을 짓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들의 수준은 땅의 부동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평생 집 한 채 장만하기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증언해 주는 음성을 들었는데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할 것을 말씀하지만 제자들의 수준은 여전히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한 원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있는데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한심하겠습니까? 좀더 높은 세계를 바라보고 예수님이 품고 있는 큰 꿈을 품고 주님의 길을 같이 따라와 주었으면 좋겠는데 계속해서 수준 이하의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에서 삶의 수준을 높이라고 말씀합니다. 삶의 기준을 좀더 높이 좀더 깊이 좀더 넓게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좀더 높은 기준점을 가져야 합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봅니다. 같은 사람일지라도 몽골족들은 보통 사람의 시력이 '2.9'이고, 시력이 아주 좋은 사람이 '7.0'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시력이 그토록 좋은 이유는 넓은 초원에서 멀리 바라보는 생활을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멀리 보면 사람의 시력도 그만큼 발달된다는 것입니다.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결과에 있어 많은 차이가 납니다. 1953년 미국 예일대학에서 졸업반을 대상으로 조사했답니다. 졸업생 중 67%는 뚜렷한 목표와 비전이 없었고, 30%는 비전이 있었지만 기록해 놓지 않았으며, 오직 3%만이 자신의 비전을 기록해 놓았답니다. 그들이 졸업하고 20년이 지난 후 다시 설문 조사한 결과, 자신의 비전을 기록해 놓았던 3%의 수입이나 성공률이 비전을 기록해 놓지 않은 나머지 97%보다 훨씬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답니다. 인간은 30%의 긍정적인 감정, 70%의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무언가를 바라본다고 합니다. 실패하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감정이 발달된 사람이고 성공하는 사람들은 긍정적인 감정이 발달된 사람들입니다. 미국 기독교계의 탁월한 지도자 John Maxwell 은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점을 이렇게 간단하게 대비시켜 정의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있고 비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재만 보고 지금만 보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삶의 기준을 높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어떤 삶의 기준을 높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 사역의 기준 높이기/ 관용의 기준(38-42)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입니다. 대 사역관계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불쾌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3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것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쳐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금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하지 못하도록 금한 기준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사역의 기준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조금 전에 귀신을 쫓아 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도 못하는데 왜 네가 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장로인데 나도 못하는 건축헌금을 왜 너가 그렇게 만이 해.” 질투하고 시기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대장이 되어야 합니다. 몇 년 전에 한 동료 목회자의 고민을 들었습니다. 한 교회에서 교회를 건축한지 오래 되어 교회 의자가 낡았고, 교회 건축 내부가 현대 시설에 맞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기도 하는 중에 교회 내부 리모델링을 하자고 제직회에 안건으로 붙였답니다. 그래서 온 제직들이 교회 내부 리모델링을 하기로 결의하고 아름답게 리모델링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아름답게 꾸몄는데 의자가 낡은 것이라 어울리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한 집사님께서 목사님을 찾아 와 자신이 헌금을 할터이니 교회 의자를 바꾸자고 했답니다. 그리고 집사님께서 교회 의자 값을 헌금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한 장로님이 그 돈 있으면 구제를 하지 멀쩡한 의자를 왜 바꾸느냐고 반대를 하였답니다. 제자들과 똑같은 것입니다. 기준이 편협합니다. 자기 중심적입니다. 독선적입니다. 독점적입니다. 인색합니다. 배타주의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파벌주의, 계급의식, 패거리 문화, 텃세 의식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저급한 수준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고 비교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역의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39절을 읽어 보십시오.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도 고백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면 소속이 어디든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침례교인이든 장로교인이든, 감리교인이든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 장로님이 하시든 목사님이 하시든 집사님이 하시든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찬양할지언정 비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여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40절을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그 사람이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에 서있는 우리를 위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내 편이 아닙니다. 예수님 편에 서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비록 내 의견이 맞지 않고 내 가치관과 맞지 않더라도 주님 편에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예, 한 집사님의 선교 이야기, 한 선교사님의 자녀 교육 이야기)
세 번째로 더 적극적인 이유를 말씀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 속한 자라고 해서 어떤 친절과 도움을 베풀면 보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귀신들려 정상적으로 살지 못하고 갖가지 고난 가운데 처한 사람으로 예수님으로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면 얼마나 좋은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상을 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소자 하나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한 것도 상을 받는데 귀신을 쫓아 냄으로 사람을 살렸는데 상을 받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마음의 넓혀야 합니다. 사역의 기준점을 넓히고 높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의 가져야 합니다. 관용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넓히면 우주를 품을 수 있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좁히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내도, 자식도 품을 수 없습니다. 상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는지는 보지 않고 자꾸 내 방식으로 내 주문대로 내 신앙대로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방해하고 금지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요즈음 신앙 생활 그래도 오래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저마다 내가 복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종종 봅니다.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주님께 쓰임받는 것이 중요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방법대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관용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남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여대서는 안됩니다. 남에게 관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자신의 사람으로 쓰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받아들였습니다. 누구나 흠없고 존경받는 사람을 통해 일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리 사기꾼 마태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기회주의자요 포악한 성격의 요한을 제자로 삼았고, 일곱 귀신들렸던 여인 마리아를 받아 주었습니다. 다섯 남편을 둔 수가성 여인도, 비겁하게 밤에 찾아와 진리를 가르쳐달라던 부자 관원 니고데모도 받아주었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금방까지 함께 욕하던 우편강도의 청을 거절치 않으며 포용했습니다. 자기를 세번식이나 부인 저주 맹세하고 도망간 베드로도 다시 찾아가 다시 한번 사명을 주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던 청년 바울도, 술주정뱅이, 깡패였던 죤번연도, 선교사의 머리통을 깨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깡패 김익두도 품었습니다. 17명이나 죽인 살인마 김대두도, 100여명을 죽인 마녀같은 김현희도 관용으로 받아 주었습니다.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조롱하는 자들을 보며 저들의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부자이든 가난하건, 건강하던 병자이든, 간음자이건 살인자이건 , 무식하던 유식하던, 사기꾼이든 깡패이든 다 받아 주었습니다. 쉽게 편가르기 좋아하는 제자를 나무라면 "받아주기"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속좁은 사람은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만을 찾습니다. 그러나 속 넓은 사람은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만 찾습니다. 받아주는 것은 놀라운 능력을 일으키는 기술입니다. 교회에서 옷만 달라도, 출신 지역만 달라도, 조금만 생각이 달라도 받아 주지 못하고 정죄하고 비난하고 헐뜯고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적과 동지를 구별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사람들은 다 동지입니다.
광야의 모세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광야 시대 때 모세가 광야에서 70인 장로를 세웠습니다. 이들이 성막에 들어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엘닷과 메닷이 회막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그 때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고하였습니다.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 말을 듣고 모세에게 고합니다. 금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말합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민11:26-29) 모세의 넓은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도 말씀합니다.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 1:18)”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으니까 비난합니다. 진리는 한 사람이 파악하고 있기에는 너무나 큰 것입니다. 비관용은 오만과 무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연고주의 문화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합니다. 자기와 동류가 아니면 배척하고 자기와 다르면 배척하고 자기에게 소속되지 않으면 배척합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은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봉사하는데 독선을 금지하신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42절을 보십시오.
“나를 믿는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소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어린 아이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 신앙이 약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영분별 능력이 약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문맥을 볼 때 아마 예수님의 제자 무리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귀신을 쫓아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를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게 함으로 주님의 사역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 실족하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약하고 미미한 신앙을 가진 사람을 유혹하거나 배척하여 상처를 받게 하고 낙심하게 하여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며 주님의 사역을 하지 못하게 하면 나귀를 통하여 돌리는 큰 맷돌을 그 목에 끼우고 바다에 던지는 것이 났다는 것입니다. 자기 편견으로 아집으로 자기 기준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사역하는 사람들 실족시키지 말라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2. 평가의 기준 높이기/자기 자신 기준 높이기/ 마지막 천국을 바라보고 살아라(43-48)/대신관계
사람들은 이 땅의 평가가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서로 누가 높으냐 싸우고,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초막 셋을 짓고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이 땅의 평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초막을 짓겠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누가 높으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43절을 읽어 보십시오. 이 땅에서 두 손을 갖고 그 손으로 못할짓 다 하면서 사는 것보다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으로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났다는 것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이 땅에서 두 다리 가지고 못 갈 곳 가면서 사는 것보다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는 것보다 났다는 것입니다. 47절을 보십시오. 이 땅에서 두 눈 가지고 못볼 것 다 보면서 사는 것보다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났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이란 이 땅의 삶으로 끝나지 않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진정한 평가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보다 더 귀중한 것은 죽음 후의 영원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라는 말씀입니까? 43절을 보십시오.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면 찍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47절을 보십시오.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고 합니다. 차라리 장애인으로 하나님 아들 딸 답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손과 발과 눈 얼마나 귀중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손 두 발 두 눈을 가지고 영원히 멸망하는 것보다 한 손, 한 발, 한 눈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났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손과 발을 찍어 버리라는 말씀이겠습니까? 실제로 눈을 빼라는 말씀이겠습니까? 그러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삶의 가치 기준을 높이라는 말입니다.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면 오늘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의 삶에 방해되는 요소를 과감하게 정리하고 버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아도 지옥가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죄란 매우 파괴적인 권세이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시험은 반드시 즉시, 단호히 내던져 버리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영원한 나라를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평가 기준을 이 땅에서 영원한 나라로 확장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기준을 영원한 천국, 하나님 나라에 두어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옥의 실상을 알면 우리의 삶은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죽음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 인생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삶이 경건해 집니다. 남에게는 관대해지고 자신에게는 엄격해집니다. 한신 대학교 학술원 신학 연구소가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한국 기독교인 24.5%는 사후세계가 없다고 믿거나 모른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과거 80년대에는 8%였습니다.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사람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일반인들의 46.7%가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고 있고, 35.2%는 없다고 믿고 있으며, 18.1%는 모르거나 무응답이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명백하게 밝혀질 때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은 삶의 차원이 다릅니다.
미국의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의 연방준비은행 연구원들이 여러 나라의 국민 소득에 종교 문제가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결과 지옥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높은 나라가 덜 부패한다는 경향성이 나타나고, 부패 지수가 낮은 나라일수록 1인당 국민소득이 높다는 명확한 관계가 도출되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지옥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높을수록 부자나라가 된다는 말입니다. 연구 내용이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내세에 대한 믿음의 현재 삶의 질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롬14: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했습니다. 자신도 속일 수 있고 다른 사람도 적당히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도 속일 수도 없습니다.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이 있습니다(48) 지옥이 얼마나 뜨겁고 고통스러운 곳인가를 지옥에 들어간 부자는 이렇게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눅16: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천국이 분명이 있습니다. 죽음도 고통도 눈물도 질병도 없는 곳입니다.
마태복은 25:34을 보면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2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에비하러 가노니"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5:1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라고 했고,"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옥이 아니라 천국 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요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 백성이 되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늘 회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7 : 21)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살면 삶의 질이 달라지고 삶의 기준이 달라집니다. 회개는 늦추지 말고 구체적으로 신속하고 철저하게 해야합니다. 잘라 낼 것은 과감하게 잘라내고, 끊어버릴 것은 단호히 끊어버려야 합니다. 버려야 할 것은 미련없이 버려야 합니다. 영국의 도덕적 타락에 대하여 윈스턴 처칠 경은 '대영제국의 도덕이 이렇게까지 문란한 상태가 된 이유는 이 나라에서 천국과 지옥이 더 이상 선포되지 않는데 있다.' 라고 논평하였습니다.
덴마아크를 변화시킨 구룬두비 목사님이 계십니다. 덴마아크 하면 구룬두비 목사님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덴마크의 비극적인 역사를 가슴아파 하면서 병든 민족을 살리기 위해 행동하는 목사로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룬두비가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고시를 치르는데 목사고시의 설교제목이 '덴마크 교회 지도자들이여 회개하라'였습니다. 시험관들은 건방지다는 이유로 그를 떨어뜨렸고 멀리 떨어진 섬으로 발령을 내렸습니다. 덴마크 교회는 국교회여서 목사들이 정부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발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교회를 개혁하고 나라를 구하겠다고 일어섰지만 목사고시에 낙방을 하고 조그마한 섬에 유배당하다시피하여 신경쇠약에 걸려 잠도 못 자고 나중엔 헛소리까지 해가며 폐인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그룬 두비는 완전히 절망하고 낙심하고 밑바닥에 떨어져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을 그때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간절히 통회 자복하며 눈물로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불로 그를 뜨겁게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온몸으로 체험하였습니다. 천국이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땅이 아니라 천국을 사모하였습니다. 그 후 신경쇠약, 불면증도 고치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룬 두비가 성령의 감동, 하나님의 치료하심으로 뜨거워지고 담대해지자 그 때부터 그의 입에서 말씀이 쏟아지고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덴마아크 사랑을 외쳤습니다. 그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 확실했습니다. 덴마아크를 천국같은 나라로 바꾸길 원했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던 청년들이 뜨거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에 대한 열정으로 뜨거워졌습니다. 지금도 덴마크에 가 보면 곳곳에 그룬두비 목사의 동상이 서있다고 합니다.
일본을 변화시킨 우치무라 간조오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명치유신이 백 년 되던 해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일본을 일으키는데 공헌한 사람 20명의 선각자를 선정하는 데 기독교인으로는 유일하게 그가 뽑혔습니다. 그를 뽑은 이유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즉 군인들이 나라를 점령하던 시대에 조용하게 동경의 여섯 평짜리 다다미방에서 사람들을 성경으로 길러냈다. 그래서 하나님 신앙과 일본 민족주의를 결합시켜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를 길러낸 점에서 선발했다."고 했습니다. 우치무라 간조오 선생은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나 하급 사무라이 가정의 아들로 자라났습니다. 그러다가 유명한 클라크 선교사라는 분을 통해 복음을 영접하게되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나라를 천국처럼 변화시켜야겠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미국에 가서 신학공부를 하였습니다. 귀국한 후 일본의 군사정권이, 즉 제국주의가 자꾸 해외침략으로 손을 뻗쳐나가니까 우치무라 간조오 선생은 우려에 찬 목소리로 그 잘못됨을 지적하셨습니다. "일본이 계속해서 이렇게 나간다면 하나님께서 일본 하늘에다 불벼락을 떨어 뜨릴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일본이 망한다는 것입니다.군인들은 그분을 직장에서 쫓아내고 일본 사회에 발을 못 붙이게 했습니다. 이제 갈 곳이 없어진 선생은 어찌할 길이 없으니까 동경의 자기 집에 여섯 평짜리 다다미방에다 청년들을 모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성경 공부반을 시작했습니다. 이 공부반에서는 동경대학 총장을 세 분이나 배출시켰고, 오히라 수상도 그 성경 공부반 출신입니다. 무라야마 수상이 속한 사회당의 창립 멤버들이 모두 우치무라 간조오 선생의 성경공부반 출신이라고 합니다. 전후 일본 사회을 일으키는 기초를 닦은 분들이 다 그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확신하면 삶의 기준이 달라집니다.
성경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 25:4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썩지 않은 면류관(고전9:25), 의의 면류관(딤후4:8), 생명의 면류관(약1:12,계2:10), 영광의 면류관(벧전5:4), 기쁨의 면류관(살전2:19)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삶의 평가 기준을 천국으로 높여야 합니다.
3. 대인 관계 기준 높이기(49-50)/화목 도모/화목을 사명으로 받아들여라.
예수님은 삶의 기준을 높이기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으로 무슨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까? 49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말에는 번역이 되어 있지 않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가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불은 앞 절에서 언급된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 때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불 속에서 소금치듯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표준 번역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 (막 9:49)”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지옥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믿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대인관계를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제자들이 지금 서로 누가 높으냐? 고 싸우고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예수님의 이름을 귀신을 쫓아내는 자를 시기하고 질투하여 제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대하여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50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서로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화목은 홀로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되는 것입니다. 화목으로 대인관계의 기준점을 높이라는 것입니다. 경쟁이나 다툼이나 전쟁이 아니라 화목에 기준점을 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소금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 대인관계의 기준점인 화목을 더 정확히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현대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쉽게 번역을 했습니다.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아무쓸데가 없다. 무엇으로 그것을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너희도 제 맛을 잃어버리지 말고 서로 화목하라." (막 9:50)”
소금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첫째는 맛을 내는 기능입니다. 둘째는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입니다. 셋째는 순하게 하는 기능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짠맛을 통해 순하게 하는 기능을 말합니다. 배추를 절일 때 소금을 뿌립니다. 순하게 만들기 위해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소금은 다 녹아 형태가 없어집니다. 뻣뻣한 배추에 스며듭니다. 그렇다고 소금의 짠맛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예수님은 레위기의 언약의 소금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구약에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죄가 화목의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 제물을 죽임으로 화목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난하여 식물을 드릴 때는 피를 뿌려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2장 13절에 에서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제물에 소금을 둘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물을 죽여서 드렸는데 식물은 소금을 쳐 죽이는 것입니다. 채소를 가지고 와서 드리려고 할 때에 그것은 소금을 쳐서 뻣뻣한 채소를 부드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곧 십자가에서 단번에 화목 제물로 드릴 예수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단번에 십자가에서 제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 인간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4-15)”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 2:2)”
그리고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고후 5:18)” 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대인관계의 기준은 화목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야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이익을 위하는 것은 야합이고 내 이익을 포기하고 희생하면서 하나를 이루는 것을 화합이라고 합니다. 나를 중심으로 모이라는 것은 화합이 아닙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 화목입니다. 우리 주님을 닮아 가는 것이 화목입니다. 형태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본질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소금이 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쟁심, 승부욕, 시기, 질투, 편견, 고집, 아집, 녹여야 합니다. 뻣뻣한 것이 숨을 죽여야 합니다. 목이 곧은 사람 목을 굽혀야 됩니다. 교만한 눈을 겸손의 눈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어깨에 힘을 빼야 합니다. 눈 높이를 낮추어야 합니다. 녹지 않는 소금은 소용없습니다. 가끔 보면 맛간 교인들이 있습니다. 늘 다른 사람을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면 화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기와 질투의 늪, 모략과 중상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시시한 기준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화목하게 하기 위해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 고귀한 하늘의 지위도 버리셨습니다. 형체가 없어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갖은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죄로 말미암은 불화를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불화(창3:8). 부부간에 불화(창3:12). 형제간에 불화(창4:8). 자연과도 불화(창3:17-19)를 제거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오늘날 끝없는 경쟁 사회에서 살다 보니 예수 믿는 사람들도 닮아 갑니다. 사탄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나친 "이기주의"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모두 경쟁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독일에서 100만 부가 팔리고 유럽 14개국에서 번역 출간된 요제프 키르쉬너가 지은 "이기주의자로 살아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모든 사람은 이기주의자다."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 모두 한 배를 타고 있으니 자신을 생각하지 말고 남들을 배려하라? 남을 도와야 너도 도움을 받는다? 우리는 하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미루어라" 등의 격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들을 복종시키려는 사람들이 지어낸 허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우선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결정을 내릴 때마다 항상 거리낌없이 다른 사람이 그것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대신 그것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라는 질문을 던져 보라"는 것입니다. "항상 남들만 배려하는 대신, 남들을 나에게 익숙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보다 다른 누구를 더 존경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경쟁이고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의 대상을 밟고 일어나야 하는 세상에서는 그의 말이 효용성 있는 가치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옥의 백성이 아닙니다. 천국의 백성입니다. 어떤 경우도 화목을 우선 순위로 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국에 가보니 사람들이 긴 젓가락을 가지고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입으로는 젓가락이 너무 길어 밥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주 행복하게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에 서로 넣어 주는 것입니다. 다음에 지옥으로 갔습니다. 상황은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모두 진수성찬을 앞에 놓고 아우성을 치며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젓가락이 길어 자신이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롬 8:32)"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우리는 화복해야 합니다.
높이 오른 새는 멀리 봅니다. 우리는 삶의 기준을 높여야 합니다. 사역의 기준점을 높여야 합니다. 내만 해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관용의 폭을 높여야 합니다. 평가의 기준을 높여야 합니다. 이 땅으로 모든 것이 마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이 참으로 의미있는 삶이 되려면 하늘나라와 연관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대인관계의 기준점을 높여야 합니다. 경쟁이 아닙니다. 화목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화목케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화목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2007.9.30/열린교회/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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