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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수1:1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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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2007.10.14
우리는 지금 대전환기에 살고 있습니다. 농경 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제 정보사회로 변환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땅부자가 부자가 아닙니다. 세계의 최고 부자는 빌게이츠이고 일본의 최고 부자는 소프트뱅크 사장 손정의라고 합니다. 정보통신기술(IT), 생명기술(BT)과 환경기술(ET), 문화기술(CT)의 정보를 가진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시대입니다. 새
로운 형태의 패러다임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단순한 변화가 아닙니다. 영어로 말하면 "Change"가 아니라 "Transformation"입니다.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인 변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회 전체가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들이 변환되어 가고 있습니다. 모든 조직, 기관, 사람들의 삶의 방법에 변화가 급속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전환기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를 이루고 가나안 복지의 삶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중대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바뀌는 시기입니다. 모세에게서 여호수아로 바뀌는 시기입니다. 지도자가 바뀌면 지도자의 철학에 따라 수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거주 환경이 바뀌는 시기입니다. 40년의 광야 생활을 접고 가나안 토착 생활로 전환하는 시기입니다. 산업이 바뀌는 시기입니다. 유목 생활에서 농경 생활로 변화되는 전환기입니다. 주식이 바뀌는 시기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던 시기에서 이제 스스로 농사를 지어 음식을 먹어야 하는 전환기입니다. 무엇보다 이제는 가나안을 향하여 행진하는 시기가 아니라 전쟁을 통해 직접 정복해야 할 시기입니다. 이 전환기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미래는 달라질 것입니다. 민족 공동체가 전멸되어 없어질 수도 있고 약속의 땅을 점령하여 안식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늘 이런 전환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가정에서 사업의 현장에서, 회사에서, 신앙생활에서 전환기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인생은 성공적인 삶이 될 수도 있고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전환기 때 함께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여 성공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전환기 때 목표를 성취하여 성공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 전환기에 함께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비전을 분명히 하고 확산시켜야 합니다.(10-11)
하나님께서는 전환기에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쓰시기 위해 여호수아를 준비시켰습니다. 그는 애굽으로터의 구원과 시내산의 율법 계시, 광야의 끔찍한 좌절과 고난들, 그리고 모세의 놀라운 신앙을 직접 체험한 종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성령에 감동된 사람입니다(민27:18). 지혜의 신이 충만하였습니다(신 34:90).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한 사람입니다(민 32:12). 그는 회막을 지키는 자였습니다.(출33:11). 그는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함께 있었습니다.(출 24:13이하). 그는 가나안 땅에 파견된 12명의 정탐꾼 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였으며 가나안 땅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민14:10). 그는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에 전쟁터의 야전 사령관으로 나가 승리한 사람입니다. (출 17: 8-13). 그런 그에게 모세가 죽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에게 처음 하신 말씀은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듯이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1). 여호수아를 세운 이유를 분명하게 알겨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루어야 할 공동의 목표이고 모세를 통하여 이루고자 했던 사명입니다. 모세는 죽었지만 하나님의 이 계획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여호수아가 어떻게 합니까? 오늘 본문 10절을 잃어 보십시오. 바로 백성의 유사들에게 명령합니다. 유사는 문자적으로는 글쓰는 자입니다. 서기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행정직 관리들입니다. 지도자의 지시 사항을 백성에게 전달하거나 전쟁에 참여할 인원명부를 작성하여 전투 인원을 소집하는 관리입니다. 이들에게 무엇을 명령합니까? 11절을 읽어보십시오. 첫 번째 명령이 무엇입니까? 양식을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전투 식량을 비축하라는 것입니다. 사냥해서 얻는 고기나 요단 동편에서 얻는 식량으로 준비하라는 것일 것입니다. 지금 만나가 내릴 때입니다. 만나가 그친 것은 5장 12절에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부터입니다.
그러면 왜 전투 식량을 준비하라고 했겠습니까? 전투 중에 한가히 만나를 거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풍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삼일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단을 왜 건너간다는 것입니까?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라”라고 말씀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여 주기로 한 약속의 땅을 차지하러 들어 갈 수 있도록 양식을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유사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합니까? 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라는 것입니다. '진'(Camp)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하는 곳'입니다. ‘두루 다니며’라는 말은 '지나지 않는 곳이 없도록 돌아다니다'는 뜻입니다. 가나안 정복에 참여할 모든 사람들에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철저히 알리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이 받은 비전을 자신만 확신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분명하게 확신하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확산시킨 것입니다. 오늘날로 정리하면 비전을 분명히 확신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확산시켜 그 비전을 이룰 수 있도록 준비시키라는 것입니다. 전환기 때는 무엇보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숨가쁘게 세상은 변화되고 있습니다. 변화될 때마다 목표가 달라진다면 이룰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화된다하여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분명히 이룰 것을 확신하고 같이 이 사명을 이룰 사람들에게도 확신시키고 준비시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사명은 어떤 시대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결국 십자가를 지어 인류를 구속하였습니다. 요셉은 꿈을 꾸었습니다. 형제들과 부모가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으로 형제들의 비난을 받고 웅덩이에 들어가지고 하고 노예로 팔리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지만 그것 잃지 않았습니다. 그 꿈은 결국 이루어졌습니다. 바울도 이방인과 이방 임금들에게 복음을 전할 비전을 다메섹 도상에서 받았습니다. 어떤 변화가 와도 그 비전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동역자들에게 확산시키고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였습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수 1:5-6)”
전환기에 사단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늘 쓰는 방법이 바로 논점 흐리기입니다. 목표를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비전을 잃어 버리고 사명을 잃어 버리고 다른데 관심을 쏟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른 것에 관심을 쏟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우리를 파괴시키려는 사단의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아담 하와를 넘어뜨릴 때 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창1:28)”는 것에는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게 관심을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는 날에는 하나님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논점을 흐리게 하여 결국 넘어뜨려 버립니다. 지금 세상이 만들어 지고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살아야 할 이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한 것이지 선악과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펼쳐갈 때도 사단은 논점 흐리기로 유혹을 합니다. 에덴에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한 예수님을 시험할 때 쓰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사를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먹는 것으로 명예로 권력으로 유혹을 합니다. 오늘 날도 공동체의 목표를 성취하지 못하도록 전환기 때 사탄은 그 방법을 사용합니다. 전혀 본질과는 상관없는 문제를 드러내어 공동체를 파괴시켜 버립니다. 오늘날도 사단은 갖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지 못하도록 논점을 흐리기하고 있습니다. 사명에 대한 확신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처럼 말씀에 근거하여 입술로 선언해야 합니다. 확산시켜야 합니다. 믿고 나가면 결국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20)”라고 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아무리 어려움이 오고 위급한 상황, 급력한 변화의 상황이 와도 사명만큼은 잃지 말고 확신을 하고 확산을 시켜야 합니다.
사울이 왕이 될 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습니다. 용모가 준수하고 뛰어났지만 겸손했습니다. 그는 왕이 되었습니다. 법을 수호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 것이 그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왕이 된지 2년에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민족의 전환기입니다. 망하느냐 흥하느냐하는 위기입니다. 블레셋은 병거 삼만, 마병 육천의 막강한 군사력이었습니다. 사울이 길갈에서 소집한 이스라엘 군대는 3천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의 막강한 군사력을 보고 겁에 질린 이스라엘 병사들은 숨을 곳을 찾기에 바빴고 일부는 요단 강을 건너 멀리 도망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정한 기한인 이레 동안 사무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레가 다 되어도 사무엘이 오지 않자 백성들은 사울의 곁을 떠나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은 백성들이 흩어짐을 보고는 다급한 마음에 자신이 제사를 드리고 말았습니다. 번제는 왕이 드리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었습니다. 사명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전환기에 사명을 잃지 말고 그 사명을 함께 한 공동체에게 확산을 시켜야 합니다. 이 원리는 신앙 생활 뿐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 사업의 현장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어제 신문에서 지금 일본에서 최고의 부자가 된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 기사를 읽어 보았습니다.(경제잡지 ‘포브스’가 지난 5월에 1위 선정). 일본 대학생과 신입사원들이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으로 선정될 정도로 그는 일본에서도 인정받는 경영자라고 합니다. 재산 평가액은 58억 달러(약 5조 4000억 원) 세계 800여 개 기업, 직원 1만여 명을 거느리는 거대한 디지털 제국을 구축했다고 합니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바뀌는 변환의 시기에 그는 목표를 분명히하고 그 목표를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재벌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조부는 일제시대 대구에서 규수에 건너온 탄광노동자였다고 합니다. 유치원 때 동네 소년이 "조센진"하며 돌을 던져 머리에서 피가 쏟아졌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교사가 되고 싶었으나 공립학교 교사는 일본 국적이라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재일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가 그렇게 성공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중 3 때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이때부터 "일본 제일의 사업가가 된다"는 비전을 품었다고 합니다. 그는 차별에 굴복하지 않고 큰 비전을 품었다고 합니다. 공부건, 축구건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17세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고등학교를 한달 만에 졸업했다고 합니다. 고교 1년 여름 방학 때 어학연수로 미국을 다녀와 부모를 설득, 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갔다고 합니다. "일본 최고가 되려면 미국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1981년 9월. 도쿄 이치가야의 허름한 사무실에서 소프트뱅크 회사를 차렸답니다. 당시 직원이라곤 아르바이트생 2명이었다고 합니다. 24세의 손 사장은 직원조회를 하면서 2명을 세워놓고 연단 대신 귤 궤짝 위에 올라가 “5년 안에 매출 100억 엔을 올리고, 수만 명을 거느리는 거대기업이 된다.”고 연설했다고 합니다. 당장 먹고 살 형편이 막막한 처지에 거대기업 운운했으니 상상만 해도 과대망상 같은 풍경이었을 것입니다. 기가 질린 직원 2명은 곧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꿈을 그는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인생 최대 위기는 26세 때 찾아왔다고 합니다. 중증 만성간염으로 최악의 경우 5년을 못 넘길 수 있다는 선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완치해 보이겠다"며 의욕을 불태우며 3년여 간 병원 신세를 지며 4,000권의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는 "병원 침대에서 평생 먹고 살 지식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비전을 품고 그 비전을 확산시킨 사람입니다. 어떤 전환기에서도 비전을 버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세상에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인생의 전환기에 포기하지 않고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잘 대처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변환의 시기가 다가와도 자신이 처한 열악한 조건과 상황에 굴하지 않고 꿈꾸고 과감하게 실행한 사람들입니다. 넘어갈 수 없다면 뚫고서 간다는 신념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전환기에 주어지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2. 전환기에 함께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내 목표 성취했다고 안주하지 말고 공동체 의식으로 은혜를 잊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도 처음 다짐을 실천하여 함께 공동의 목표를 이루어야 합니다(13).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정복의 비전을 듣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달한 여호수아는 이제 유사들에게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이들은 이미 요단 동편 땅을 차지한 지파들입니다. 성취해야 할 땅, 자신들이 차지해야 할 땅을 다 차지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제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도 손해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고 이미 차지한 땅에 머물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에 동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과 관계되지 않은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희생이나 부담은 명분을 만들어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은 이익과 편리, 쾌락을 쫓아 살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이 지파들이 자신들의 가족과 재산을 남겨둔 채 요단을 건너와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그들은 모세 때 그 땅을 차지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지도자가 바뀌었습니다. 약속의 대상자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상황이 급격하게 변화되었습니다. 적당히 핑계를 대고 적당한 명분을 내세워 얼마든지 옛날의 약속을 파기해 버리도 상관이 없을 때입니다. 전환기입니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여호수아는 이미 땅을 차지한 이들에게 말합니다. 무슨 말씀을 합니까? 13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과거 약속한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세 때 약속한 약속 일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거 마음 먹었던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결혼할 때 결혼 서약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취업할 때 다짐한 마음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창업자의 창업 정신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다짐하고 다짐한 서원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 다짐한 것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무엇입니까? 모세가 명한 것입니다. 민32:16-32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요단 동편에 땅에 이르러 이들이 모세에게 요구하였습니다.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유아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곳에 살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대신 군인들은 무장하고 가나안 정복에서 선봉에 서서 싸울 것이고 이스라엘 모든 족속이 땅을 얻을 후에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그들에게 허락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 좋은 땅을 가장 먼저 받은 것입니다. 특별한 노력을 하지도 않고 다른 지파 보다 먼저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은혜를 잊지 말고 요단강 서쪽 지역의 가나안 본토 정복 사업에 이들 지파가 선봉에 서서 참전한다는 계약(민 32:16-32; 신 3:18-20)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때가 되었으니 그 약속, 그 서원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억해야 할 것 쉽게 잊어 버립니다. 물고기의 기억은 3초 밖에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과 수초 전에 물고 혼났던 미끼를 또 다시 물어 낚시에 걸리고 맙니다. 쥐의 기억력도 3초라고 합니다. 고양이에게 몰려 쥐구멍으로 도망쳤다가도 3초가 지나면 방금 전 일을 잊어버리고 머리를 내밀다 죽음을 당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 쉽게 망각하여 어려움 당한 사람들을 봅니다.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을 오래 기억하면서 정작 기억할 것을 쉽게 잊어 버리는 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우리 민족은 함께 동업을 못한다고 합니다. 동업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실패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아주 굳게 약속을 합니다.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자고 합니다. 그런데 잘되면 어떻게 됩니까? 서로 많은 것을 가지려고 싸움을 합니다. 못되면 어떻게 됩니까? 서로 잘못된 원인이 상대에게 있다고 싸움을 하면서 헤어집니다. 약속을 밥먹듯이 어겨 버립니다. 초심을 밥먹듯이 버려 버립니다. 어려울 때 그렇게 도와 달라고 하던 사람도 조금 잘 되면 금방 배신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좋은 사람되려고 하지말고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나가 브니나의 괴롭힘으로 하나님께 술취한 여인처럼 기도합니다.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서원하며 기도합니다.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삼상 1:11)”
하나님은 그녀의 고통과 그녀의 애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로 아들을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때 마음이 바뀌어 버립니다. 자기 혼자 누려 버립니다. 하나님은 주신 것을 가지고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길 원하십니다. 부자가 되게 하고, 건강을 주고, 지혜를 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주신 것을 가지고 타락의 도구로 사용해 버립니다. 그러나 한나는 달랐습니다. 아이를 임신하고 매년 마다 드리는 서원제에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아이가 젖을 떼거든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영원히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마 아이에 대한 남편의 마음이 변하여 서원을 무효화 할까봐서 같이 올라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을 것입니다. 이는 성소의 누추한 모습과 홉니와 비느하스를 중심으로 한 타락한 영적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여 서원을 이행하지 못할까봐서 그러했던 것입니다. 아이가 너무 어리므로 안전하게 충실히 키운 후에 드리고자 해서일 것입니다. 젖을 떼자 한나는 서원대로 사무엘을 데리고 하나님의 전에 드렸습니다. 사실 오랜 기간동안 무자(無子)로 인해 당한 온갖 고통과 수모를 생각할때, 어렵게 얻은 자식을 여호와의 전에 바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한나에게 사무엘 외에 후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한나가 기른 것보다 더 잘 양육하여 암흑기에 민족을 살리는 민족의 지도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에게 삼손을 주었습니다. 나실인으로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고 부정한 것, 포도주를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삿13:5).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주었습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삿 13:5)”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그 서원을 다 어겨 버립니다. 시체에 손을 대고, 술을 먹고 머리를 깍기우고 결국 눈이 빼이고 비참하게 죽습니다. 그 강력한 힘을 자신 만을 위해 사용하다가 비극적인 인생으로 마감해 버립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은혜로 우리를 우리 주님께서 구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갖가지 복을 주었습니다. 그것 나 홀로 잘 살라라고 주신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의 목표를 이루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민 30:2)”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전 5:4)”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시 61:5)”라고 말씀합니다.
기둥처럼 쓰임받아야 합니다. 힘있는 자가 먼저 강한 형제애, 공동체 의식, 연대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홀로 잘 된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가 파괴되면 같이 죽는 것입니다. 한 웅덩이에서 한 마리의 물고기가 자기만 잘 살겠다고 하면 결국 다는 물고기는 죽고 그 물고기가 썩으면 자신도 함께 죽는 것입니다. 손이 잘못되면 손만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을 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에스더처럼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 자신이 왕비된 것이 이 때를 위함인 줄 알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나아가면 자신도 살고 민족도 사는 공동의 목표를 이루는 것입니다. 주신 것을 통하여 쓰임받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주신 것으로 더욱 헌신하여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울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삼손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솔로몬 같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세의 손자처럼 훌륭한 조상 모세의 혈통으로 시작했다가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끝맺어서는 안됩니다.(삿 18 : 30). 갈라디아 교회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게 되어서는 안됩니다(갈3:3),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나중에 잃어 버려서는 안됩니다(계2:4-5). 비록 처음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해 져야 합니다. 나에게 주신 은혜로 나만 행복해지고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공동체의 사명을 이루어 함께 행복해 져야 합니다. 전환기는 하나님 앞에서 주신 은혜로 공동체를 위해 쓰임받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끝마무리를 잘해야 합니다.
상품가치는 끝마무리에 있습니다. 끝마무리는 1%의 수고가 들어가지만 100%의 효과가 난다는 것입니다. 상품 뿐 아니라 인생살이도 그렇습니다. 대인 관계도 그렇습니다. 끝마무리가 좋아야 합니다. 직장 생활하면서 10년 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마지막 마무리를 잘 못하면 사람들은 그 잘못한 것만 기억하고 그 직장은 추억의 직장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을 할 때 처음 시작은 아름답게 하지만 끝은 다시 보기 싫을 정도로 추하게 맺는 사람이 있습니다.
끝도 아름다우려면 먼저 마지막까지 변화는 하지만 변절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가룟 유다같은 변절자를 싫어합니다. 끝이 아름답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 변절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은 의욕과 꿈을 가지고 모든 것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변절하게 되고 그 변절로 인해 다시는 만나기 싫은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위기 앞에서, 자신의 이해타산 앞에서 절개와 지조를 명예에, 돈에, 쾌락에, 편리에, 이기심에 팔아먹는 것입니다. 시대 상황에 맞는 변화는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변화를 멈추는 순간 성숙과 성장은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변화되어야 하지만 변절해서는 안됩니다. 변절은 아름다운 끝마무리에 구멍을 내어 인생의 아름다운 추억을 침몰하게 하는 것입니다.
끝도 아름다운 인생을 살려면 후퇴는 하지만 마지막까지 포기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하는 것은 비겁도 아니고 변절도 창피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주어진 사명을 포기해서는 아니됩니다. 주어진 삶을 끝까지 완수할 때 그 삶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전투의 현장에서 묵묵히 부하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전진하는 소대장의 모습을 보면 장엄하고 아름답습니다. 무엇보다 끝도 아름다운 인생이 되려면 맡김 받은 나와 내일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맡기신 분의 일을 해야 하고 그분을 드러내야 합니다.
3. 전환기에 함께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서로 도와야 합니다(14-18).
여호수아는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미 땅을 차지한 두 지파 반에게 계속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 약속대로 용사들은 무장하고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도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도우라는 것입니까?
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요단 동편에 머물게 하라는 것입니다. 있는 재산 다 가지고 도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용감한 전사(戰士)들만 요구합니다. 4:13에 의하면 요단을 건너 전쟁에 참여한 두 지파 반의 수는 4만명입니다. 민 26:7,18,34에 의하면 이들 지파 중 20세 이상으로서 싸움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총 11만명이었습니다. 따라서 7만명은 아마 처자와 가축을 보호하고 그들이 분배받은 요단 동편 땅을 지키기 위해 뒤에 남겨 놓고 전쟁에 능한 전예병 4만명은 선봉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공동체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주신 것들이 있습니다. 입술로 도울 수 있습니다. 물질로 도울 수 있습니다. 기도로 도울 수 있습니다. 나에게 있는 지식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라고 비난하고 험담하는데 쓰지 말고 도와주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용사들은 형제보다 앞서 가서 도우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도우라는 말입니다.
어느 때까지 도우라는 말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공동체의 목표를 이룰 때까지 도우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땅을 차지하고 정착하여 안식을 누리면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 자가 다른 사람의 목표를 달성해 주기 위해 수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과 직결되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 때 이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도피하지 않았습니다. 핑계대지 않았습니다. 부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6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명하신 모든 것은 다 행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내시는 모든 곳에서 다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자기들이 세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인 자세로 그 약속을 수행하기 위하여 애쓰겠다는 다짐입니다. 모세와 세운 약속을 적극적으로 이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모세와 약속한 약속을 그대로 수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남은 지파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일이겠습니까? 만약 그들이 주저앉아 버렸다면 얼마나 이스라엘은 분열되었겠습니까? 실제로 수행했습니다(수4:12).
17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모세를 청종한 것 같이 여호수아를 청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모세와 연관시킴으로써, 여호수아를 모세의 합법적 후계자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권위를 그대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권위를 인정함으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권위를 부정하는 세대입니까? 직장에서 사장의 권위를 부정하여 잘 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국가에서 정당하게 대통령의 지위에 오른 사람의 권위를 부정하여 무엇이 좋아지겠습니까? 교회에서 목회자의 권위를 부정하고 비난하여 얻을 이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계셨던 같이 여호수아에게도 함께 계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로써 기준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는 것입니다(삼상11:6; 16:13).
18절을 읽어 보십시오.
명령을 거역하면 죽임을 당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종을 거역하면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신 17:12에 따르면,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가나안 정복 전쟁의 지휘자 여호수아의 말을 거역한 자는 신정 정치의 법에 따라 처형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여리고 성의 물건을 모두 진멸시키라는 여호수아의 명을 거역한 아간 일족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7:20-26). 그러면서 여호수아를 격려함으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소신 있게 인도해 줄 것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휼륭한 지도자는 훌륭한 백성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지도자를 위해 기도와 격려를 한다면 지도자는 자신에게 주어지 소임을 잘 감당할 것입니다.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격려합니다.
이것이 바로 전환기에 함께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전환기는 위험에 노출될 때이고 쉽게 요동할 때이며 사람의 마음이 흔들릴 때입니다. 이럴 때 서로 기도해 주고 격려해 주고 인정해주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1923년 9월 1일 도쿄를 뒤흔든 대지진과 그에 동반된 큰불이 일어났을 때였습니다. 시대의 전환기입니다. 이 때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일본인들을 몰살시키려 우물에다 독을 풀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 악성 소문으로 인해 6,000여명의 한국인이 학살당했습니다. 악성루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유령처럼 떠돌며 배후에서 사람들의 혀를 휘두르게 합니다. 이것은 칼보다 더 무섭습니다. 악성루머가 망나니처럼 날뛸 때, 진실의 목은 비릿한 피냄새를 풍기며 달아나고 맙니다. 살인은 한 사람을 죽이지만 헛소문은 헛소문을 퍼뜨린 자신과 헛소문의 주인공과 헛소문을 들은 사람이 모두 피해를 봅니다. 일단 소문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소문이 난 당사자를 사람들은 이상하게 쳐다보며 경시하게 되고, 그 정보를 듣는 사람이 미리부터 가지고 있던 지적 또는 감정적 조건이 어떻냐에 따라 그 영향력은 대단한 파괴력을 가집니다.
대부분의 소문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으나 소문을 내는 사람의 의도와 목적이 가미되어 떠돌게 됩니다. 그 의도와 목적이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상대를 모략하기 위한 것이라면 늘 소문은 '헛소문, 루머, 마타도어, 유언비어, 흑색선전' 등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헛소문은 진실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당사자가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사실처럼 퍼져 나가 사람의 마음을 흉흉하게 만들고 공동체의 단결력을 모래알처럼 흩어 버립니다. 멀쩡한 기업이 하루아침에 악성루머 때문에 자금난으로 쓰러지고, 건강한 가정이 파괴되고, 행복한 교회 공동체가 술렁이게 됩니다. 심하면 사람이나 조직에만 해악을 끼치는 게 아니라 나라까지 구렁텅이에 빠뜨려 버립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모든 악 가운데 가장 빠른 게 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방죽을 뒤집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징어 10마리를 놓아 둔 곳에서 한 마리가 먹물을 품으면 10마리 모두 죽어 버린다고 합니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퍼뜨린 소문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식으로 상대가 받아들이면 추한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헛소문의 발설자의 음흉한 목적은 성취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악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을 향하여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중심에는 해를 도모하는도다 (렘 9:8)"라고 말씀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서로 도와주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루에 사용하는 단어가 남자는 평균 2만 5천 단어, 여자는 3만 단어 쯤 된다고 합니다. 1년 동안 자신이 사용한 단어로 책을 펴내면 4백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132권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일평생 이야기하는 시간을 따로 모아 보면 대략 13년을 꼬박 말하는 데 소비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말들이 결국 인생을 만들어 냅니다. 좋은 말은 좋은 인생을 만들고, 위대한 말은 위대한 인생을 만들며, 훌륭한 말은 훌륭한 인생을 만들고, 덕스러운 말은 덕스러운 인생을 만들며, 아름다운 말은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고, 신앙적인 말은 건강한 신앙인을 만들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십시오(표준번역,엡4:29)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비난합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춤을 추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법궤가 70년 만에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천부장과 백부장 그리고 모든 장수로 더불어 의논하고 결정하여 한 일입니다.(대상 13:1). 국민 투표에 붙였습니다. 온 회중과도 합의했습니다(대상 13:2-4). 그리고 다윗은 이스라엘 무리 중에서 뺀 3만 명의 정예를 모았습니다(삼하 6:1). 전국의 유명한 악사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야말로 거국적이고 거족적인 행사였습니다. 변환의 시기입니다. 새 왕의 등극과 함께 전 이스라엘의 마음이 하나님(법궤) 중심으로 뭉쳐지는 대동단결의 장면입니다. 요단강을 가를 때,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 맨 앞에 나아갔던 능력의 법궤입니다. 다윗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온 백성이 이일로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이 때 한 사람만 예외가 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다윗의 아내 미갈이었습니다. 미갈은 사울의 딸입니다. 미갈은 참여하지도 않습니다. 창문으로 구경합니다. 다윗의 뛰어 노는 것을 보고 심중에 업신여겼습니다. 다윗을 비난합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 체통이 참 볼만하더군요. 건달처럼 신하들의 여편네들보는 앞에서 몸을 온통 드러내시다니." (삼하 6:20 공동번역)"
예수님을 끝없이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비난은 대부분 무지와 무시, 무례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체를 알지 못하고 자신이 보고 느끼고 판단하는 것을 전부이며 사실이라고 속단하고 자신의 잣대로 비난하는 것입니다. 비난에 중독된 사람들은 대부분 독선가들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가치만 옳다고 생각하는 배타적인 사람들로 자신의 생각과 가치가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고 헐뜯습니다. 자신은 우월하고 완벽하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매사 비난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만성적인 욕구좌절로 열등감과 분노에 휩싸여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은 마음 속 깊이 적대시하는 부류에게 악플을 달면서 내면에 쌓인 분노를 쏟아내는 것입니다. 대부분 비난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신의 결함을 감추고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자신의 눈의 들보를 빼내고 난 후에 남의 눈의 티를 비판하라고 하셨습니다(마7:1-5). 바울 사도는“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하였습니다. 비난은 아무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비난하는 자나, 비난 받는 자나 비난의 소리를 듣는 모두에게 파괴적인 힘일 뿐입니다. 모두가 가나안 땅을 행해 가는데 아이성에서 죽어버린 아간과 그의 가족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예루살렘에서 성령 충만을 받아 행복한 삶을 사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축복에서 예외가 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공동의 목표를 함께 이루어 가나안의 행복을 누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전환기에 함께 공동의 목표를 이루려면
어떤 상황이 와도 비전을 분명히 하고 확산시켜야 합니다.(10-11) 내 목표가 다 성취되었다고 은혜를 잊지 말고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처음 다짐을 실천하여 함께 공동의 목표를 성취해야 합니다(13). 전환기에 함께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서로 도와야 합니다(14-18).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7.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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