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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수7: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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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7.11.25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1930년대 초 미국 한 보험회사의 관리ㆍ감독자였던 H.W.하인리히는 고객 상담을 통해 사고를 분석해 ‘1대 29대 300’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1번의 대형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이미 그 전에 유사한 29번의 경미한 사고가 있었고, 그 주변에서는 300번의 이상 징후가 감지됐었다는 것입니다. 한 상품에서 치명적 결함이 드러났다면 29회의 고객불만(클레임)이 회사에 접수되고, 고객이든 사원이든 300번 정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쿄대학 교수인 하타무라 요타로는 실패에도 이 '하인리히 법칙'이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실패의 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의 실패에는 그 이전에 작은 실패가 29건 존재하고, 그 안에는 실패를 예고하는 조그만 사건들이 300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실패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연한 승리는 있어도 우연한 패배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애굽의 포로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가던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만에 요단강 동편에서 승리하고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너고 난공불락 같던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연속된 승리였습니다. 40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며 기다린 땅입니다.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며 달려온 땅입니다. 그 땅에 들어와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으니 얼마나 감격적이었겠습니까? 그들의 앞길에는 실패라는 단어는 생각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성 아이성 전투에서 갑자기 실패를 하였습니다. 3천명이 올라가 전쟁을 하였는데 36명이 전사하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했습니다. 뜻하지 않는 결과였습니다. 아이 사람들을 도망가는 이스라엘 군인들을 추격하여 이스라엘 백성 앞에 진을 쳤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습니다. 염려와 걱정과 공포만이 남아 마음을 지배한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실패하고 이런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기대를 가지고 일을 시작했는데 뜻하지 않은 실패로 온 가족이 염려와 걱정과 공포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실패가 주는 교훈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당하는 실패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1. 실패할 때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을 성찰하고 일어나야 합니다(6-10).
누구나 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할 수 있고, 결혼에 실패할 수 있고, 공부에 실패할 수 있고, 자녀 교육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실패를 이상하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삶의 과정입니다. 세계적인 마케팅 전문기관 미국 AC 닐슨의 현지법인인 한국 닐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94년 출시한 751개의 신제품 가운데 11.1%인 83개만이 성공을 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신제품 중 살아 남는 것은 10개 중 1개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차 1대 개발 때마다 200여대 부순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매년 3만개 이상의 소비재 관련 신제품이 쏟아지지만 이 중 80% 이상이 실패한다고 합니다. 홈런 왕 베이브 루스는 714개의 홈런을 치기까지는 1,330번의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했다고 합니다. 링컨은 사업가로서 2번 실패했으며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주 선거 및 전국 선거에서 6번이나 낙선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실패 없이 성공만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넘어지지 않고 걷기를 배울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야구방망이로 단번에 공을 날릴 수는 없습니다. 넘어지지 않고는 자전거를 타기를 배울 수 없습니다. 물 마시지 않고 수영을 배울 수 없습니다.
실패했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입니다. 실패의 경험을 창조적 에너지로 쓰느냐 파괴적 에너지로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실패로 축복을 유통시킬 것인가 저주를 유통시킬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실패보다 실패 후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여호수아는 치욕스러운 실패를 한 후 바로 어떻게 합니까?
6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는 바로 여호와의 궤 앞에 나아갔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입학 시험에 실패하고 술집에 간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에 갔습니다. 사업 실패하고 바닷가로 간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실패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 실패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 실패가 하나님을 만나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사업의 실패로 하나님을 만난다며 실패가 돈보다 더 귀중한 우주의 창조자를 만나는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옷을 찢었습니다. 극한 슬픔의 표시이며 회개의 표시입니다(창 37:34; 민 14:6; 삼하 1:11).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썼습니다. 저물도록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어찌하여 멸망시키려 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수1:3-5) 시작한 전쟁인데 실패한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하신 대로 형통하고 승리할 것이라고 약속하여 그 약속 붙들고 전쟁을 하였는데 왜 실패하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실패로 인하여 절망하고 두려워하는 백성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합니까? 셋째는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겠습니까? 입니다. 만약 이대로 패배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체면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 평판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 체면보다 자기 평판보다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실패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기 성찰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한 것입니다. 실패로 인하여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실패를 하고 즉각 하나님께 나아가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과 관계를 통해 찾는 것입니다. 실패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나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이 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0절 한 번 크게 읽어보겠습니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힘을 내라, 담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일어나 여호와의 언약이나 신실성을 절대 의심치 말고, 아이 성 패배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여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배전의 노력을 다하여 승리하라는 말입니다. 실패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용기를 주시며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실패를 통해 얻는 첫 번째 교훈입니다. 실패는 끝이 아닙니다. 실패는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신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와 자기 성찰을 하라는 기회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어나 승리의 길로 나아가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입니다.
민족 개혁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로뎀나무 아래 지쳐서 쓰러져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시켜서 떡과 물을 주시며 "일어나 먹으라" 고 하셨습니다.(왕상19:5절)
세상을 향하여 말씀을 전하다 실패하고 지쳐 있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 고 말씀하십니다.(이사야 60:1절)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동안 질병을 고치지 못하고 실패 앞에서 좌절하며 사는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하였습니다.(요한복음 5:8) 일생 동한 앉은 뱅이로 실패하여 구걸하는 인생을 사는 병자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을 향하다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고 하였습니다.(사도행전 3:6절) 실패의 현장에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실패를 통해 하나님께 나오기를 원합니다. 여호수아는 왜 이 전쟁에서 실패했습니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실패에는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최고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도 원인이 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아모리 족속 정벌 사건, 요단 도하 사건 여리고 성 정복 사건 등을 통해 거듭된 승리로 그는 자만해 있었습니다. 6장 27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의 명성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 왜 그런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 그런 것입니다. 사업이 잘되고 건강하고 명예를 얻고 부자가 된 것이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승승장구하니까 그것을 잠깐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그가 취한 행동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의뢰합니까? 요단강을 건널 때나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이성 전투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보지 않습니다. 정탐병을 보내어 정탐하게 하였는데 2-3천명만 있으면 승리할 수 있겠다는 정탐병들의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상대를 얕잡아 보고 이스라엘 군대의 힘만을 믿은 교만심의 발로였는데 그것을 지도자로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어떤 것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사실 아이성 인구는 1만 2천명이었습니다(8:25) 따라서 싸움에 출전할 수 있는 장점은 대략 3,500 - 4000명 가량 되었을 것입니다. 아이성은 여리고 성과는 달리 해발 800m 가량의 산지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인근 벧엘의 군사들과 합동 작전을 펼 가능성이 있었습니다(8:17). 그런데 과거의 승리로 교만해져 상대를 과소평가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의지할 필요가 없이 자신들 힘으로 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잘 되어갈 때 조심해야 합니다. 자아 비대증, 이성 만능주의에 사로잡히면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구약의 사이클은 축복-범죄-징계-회개-축복이라는 사이클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잘 되면 범죄하게 되고 그것으로 징계을 받고 실패하는 것을 늘 보게 됩니다. 우리가 잘 될 때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설령 실패했다 해도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신앙에는 수리형 신앙과 정비형 신앙이 있습니다. 문제가 발생할 때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앙은 수리형 신앙입니다. 그것도 좋지만 미리 정비하는 신앙이 좋습니다.
2. 실패할 때 실패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거하고 다시 일어나 승리해야 합니다(1,11-16).
모든 실패에는 많은 원인들이 있지만 중요한 직접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 제거하지 않는 한 실패는 계속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실패의 직접적인 원인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1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곧장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한 실패의 생활을 한 것도 바로 하나님의 뜻을 거슬린 죄 때문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언약을 어겼다는 것입니까?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덕질 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숨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취하였다는 말입니다', '도적하였다는 말입니다', '사기하였다는 말입니다', '감추어 두었다는 말입니다' 6장 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게 할 때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라고 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 외의 것은 다 불태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아간이 욕심이 나서 바친 물건을 도덕질 한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 은 이백 세겔,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이 나서 취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다 어긴 것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죄가 아닙니다. 단순한 탐심으로 남의 물건 훔친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취하면 화를 당할 것(신 7:26)이라는 금지 규정을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킬만한 신성 모독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바쳐진 물건 즉 하나님께 소유권이 넘어간 것을 제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신약에서 아나니아아 삽비라 부부가 이런 범죄를 저질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리고 일부를 훔쳤다가 성령을 속이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그랬습니다. 제물을 훔쳤습니다. 결국 비참하게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실패의 원인인 그것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대적을 능히 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는 너희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공동체의 암덩어리를 제거하기 전까지는 대적을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제거하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제비 뽑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돌로 쳐 죽인 후에, 그 시체를 불로 태우는 극형에 처하라고 했습니다. 그 범죄 행위가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께로부터 소원(疏遠)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 그만큼 큽니다. 한 사람이 잘못하면 공동체를 침체되게 만들고 병들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을 없신 여기는 마음들이 감염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거역한 죄를 저질러도 아무렇지도 않다라고 생각하는 영적 문둥병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공동체는 파괴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유기적인 공동체입니다. 서로가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 전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다보면 공동체가 참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실패했다고 좌절하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찾아 그것을 제거하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평소에는 그 원인을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통해 그 원인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에는 그것 때문에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면 실패의 원인을 우리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알려 주십니다. 이렇게 볼 때는 실패도 때로는 축복입니다. 몸에 고통이 오는 것도 축복입니다. 그 고통을 통해 병원에 가게 되는 것이고 병원에 가서 고통을 주는 원인을 발견하여 제거하면 그 병으로 더 많은 고통을 당하지 않고 죽음을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 질병을 집도하여 실패한 인생에서 건강한 인생으로 살리시길 원합니다. 실패의 원인 죄를 제거하면 마른 나무에도 새순이 솟아나고 고목 나무에도 꽃이 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할 때 그 실패의 현장에 찾아 오셔서 실패의 원인을 가르쳐 주시고 버릴 것 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세가 살인하고 도망하여 실패할 때 모세를 찾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이 첩의 아들을 두었을 때 그 실패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야곱이 실패하고 도망갈 때 그 현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고쳐주시고 실패에서 일어서게 했습니다.
일본 사람 중에 도모다까 시모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형수였습니다. 실패한 인생입니다. 탄광에서 일하는데 하루는 자신에게 면회를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허리가 굽고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된 어머니였습니다. 시모지는 어머니를 보고 짜증을 내었습니다. 아들이 구박을 하자 어머니가 아들에게 "그래 내가 돌아갈께, 그러나 이 보따리 하나는 받아라"하고 보따리를 놓고 갔습니다. 그 보따리를 들고 숙소로 돌아와서 열어 보니 성경이 들어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 동안에 예수쟁이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재수 없다는 듯이 방구석에 성경을 내 던져 버렸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몇 일을 지나다 보니 거기서 함께 일면서 한 방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한 장 한 장 뜯어서 담배를 말아 피웁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시모지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어머니가 3,000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서 전해 주고 간 성경책인데 이 놈들이 담배를 말아 피워' 야단을 치고는 재수 없다고 짚어 던졌던 성경책을 빼앗았습니다. 어머니는 뭐가 좋길래 성경에 빠져 버렸는가 싶어서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자석에 붙은 듯이 눈을 떼지 못합니다. 계속 읽어 나가면서 성경에 빨려 들어갑니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잠자는 시간과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성경만 읽었습니다. 그 날도 성경을 가지고 탄광 갱도 속에 들어가 일을 했습니다. 점심 시간이 되었습니다. 점심을 빨리 먹고 다른 친구들은 모여서 떠들고 있을 때 시모지는 귀찮아서 다른 갱도로 옮겨갔습니다. 그 곳에서 성경을 읽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순간 벼락치는 소리가 납니다. 바로 자기가 일하고 있던 갱도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함께 일하던 37명이 몰살해서 죽었습니다. 시모지는 거기에서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시모지는 '하나님이 날 살려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모범수가 되어 감형받고 출옥했습니다. 어머니는 벌써 세상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돈을 열심히 벌어서 그 동안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속태웠던 것을 후회하면서 양로원을 세웁니다. 양로원만 세운 것이 아니라 또 돈을 벌어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6개를 세웁니다. 일본 정부가 주는 교육자 대상을 받았습니다. 사회 사업가에게 주는 대상도 받았습니다. 77살에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실패하여 마지막 사형수로서 끝마쳐야 할 인생이 자신의 실패의 원인을 발견하고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 오니까 절망에서 희망의 인생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길에서 삶의 길로 바뀌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실패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시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만나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면 인생에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3. 실패할 때 회복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회개하고 일어나야 합니다(16-26)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실패의 원인에 대한 처방을 받고 어떻게 합니까?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비를 뽑았습니다. 12지파 중에 유다 지파가 뽑혔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범죄한 사람을 지명하여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그 만큼 기회를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아간이 나와 회개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아간은 용기를 가지고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탐심으로 어두워진 눈은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보지 못하게 했고 무서운 진노로 임하는 미래를 사실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하게 임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의사가 질병의 결과에 대하여 알려주며 수술할 기회를 주는데 설마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까 하며 방심하다가 수술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계속 제비를 뽑습니다. 유다 족속 가운데 세라 족속이 뽑혔습니다. 지파를 구성하는 여러 가문들 중에 세라 족속이 뽑힌 것입니다. 점점 자신을 향해 압박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마 내가 제비 뽑히겠느냐는 식으로 대처합니다. 장정만 60만 명인데 그 중에 어떻게 내가 뽑히겠느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회개하고 자백하지 않다가 사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에 예민하지 못하고 마음이 무디어져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한 것입니다. 세라 족속 중에 삽디가 뽑혔습니다. 그래도 아간은 자백하지 않습니다.
죄는 중간에 돌이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관성의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자신이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효능감'에 위배되고 한번 판단을 내리면 상황이 달라져도 그 판단을 지속하려는 '욕구 일관성 오류'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믿는 것과 일치하는 정보만 수집하고 자신의 주장에 위배되는 정보는 받아들이지 않거나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발생합니다. 즉 '확인 편향'(conformation bias)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정보처리과정은 매우 비합리적이 되어 버립니다. 컴퓨터처럼 정보를 수집하고 수집된 정보를 토대로 정보 처리하여 어떤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성급한 결론을 도출하고 결론에 부합하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집하여 결론을 견고화하게 됩니다. 계속적으로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가룟 유다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었습니까? 결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아간이 뽑혔습니다.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말합니다. 자복하라는 것입니다. 행한 일을 고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야 아간이 자복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기회 주어졌을 때 조용히 해결해도 될 것을 은폐하고 은폐하다가 만인 앞에 드러납니다. 자신의 범죄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백합니다. 이것은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시날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 은 이백 세겔, 금 오십 세겔을 훔쳤다는 것입니다. 불살라야 할 외투를 취하였습니다. 은금과 동철 기구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인데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한 것입니다. 모든 진상을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훔친 것, 자녀들 그리고 자신 모두 아골 골짜기에 가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실패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한 사람의 죄를 다른 가족들에게까지 전가시키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신24:16) 따라서 아간의 자녀들이 함께 동참했던지 묵인 방조한 것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물건을 장막 안에 감추인 것을 보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족적으로 완전한 실패로 끝이 난 것입니다. 사울의 집안과 아나니아와 삽비라 집안, 엘리 제사장 집안처럼 기회를 주었지만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비극으로 끝이 나는 집안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다 지파는 그 수효가 가장 많았습니다. 세력도 강하여 항상 지도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가나안에서 최초로 가장 좋은 기업을 차지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수15:1-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몫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은폐하고 회개의 기회를 주었지만 회개하지 안하고 결국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실패할 때는 잘못을 돌이키고 방향을 바꾸어 다시 일어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를 통해 우리에게 기회를 제공합니다. 성숙의 기회, 성결의 기회, 삶의 질의 회복의 기회, 믿음의 기회, 행복의 기회, 성공의 기회를 주시고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 회개하고 더욱 성숙해지고 더욱 겸손해지고 정결해져야 합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범죄한 후 철저히 회개하여 그 실패를 경험으로 성군이 되었습니다. 히스기야 질병이라는 위기 앞에 자신의 교만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나라를 살렸습니다.
실패는 변화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면 잘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실패는 방법을 잘못 선택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실패는 그 방법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패는 능력이 없음을 깨닫게 하는 기회입니다. 실패할 때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찾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실패는 목표를 향해 가는 길이 아니라는 신호에 불과합니다. 실패는 결코 끝이 아닙니다. 자동차의 창립자 헨리 포드는 "실패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기회는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세계적인 명작『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는 실패를 달고 다녔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스물네 살 때는 참전했다 왼팔에 부상을 입고 불구의 몸이 되었습니다. 스물여덟 살 때에는 말레이의 포로가 되어 5년간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네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서른 여덟 살 때, 처녀작「갈라테아」를 비롯한 여러 편의 희곡을 발표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세금 징수원이 되어 지방을 돌아다녔는데, 실수로 영수증을 잘못 발행하는 바람에 또다시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옥중에서『돈키호테』를 썼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쉰 여덟이었답니다. 텍사스 격언에 "젖소를 잃어버리지 않은 한, 우유를 얼마나 많이 쏟았는지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생 동안 계속적인 실패를 경험했던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KFC)의 창시자 커널 샌더스는 매월 나오는 105달러의 연금으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해 사업을 시작하여 88세가 되던 해, 마침내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대통령이었던 투루먼은 서른 여덟 살이던 1922년에 많은 빚을 지고 실업자가 되었지만 1945년에 미국에서 가장 높은 직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죠지 워싱턴은 그가 치룬 전쟁 중에서 2/3는 패배했으나 마침내 전쟁을 이기므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쉰 두 살의 남자가 노만 빈센트 필 박사를 찾아와 극도의 절망에 사로잡혀 말했습니다. "이제는 끝장났어요. 사업에 실패하여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필 박사가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요? 그럼 우리 한번 종이에 당신의 남아있는 것을 적어봅시다. 부인은 계십니까?" "예, 좋은 아내입니다.." 필 박사는 종이에 '좋은 아내'라고 적었습니다. "자녀들은 있습니까?" "예, 귀여운 세 아이가 있습니다." "친구는요?" " 있습니다." "건강은요?" "좋은 편입니다" 계속해서 종이에 적어나가던 남자가 말했습니다. "어쩌면 내 사정이 그리 나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실패하고 다 잃었다고 생각해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하나님께 나오는 시간에는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라고 말씀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7.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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