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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수1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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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7.1.20
제 17대 대통령으로 이명박 후보가 당선이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잘 살게 해 주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약의 주제는 경제만은 확실히 살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국민들은 그것에 동의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시장주의, 실용주의를 기치로 내 걸고 있습니다. 민간과 효율을 내 걸고 있습니다. 7.4.7 공약을 통해 집권 후 매년 7% 경제성장, 10년 후 국민소득 4만 달러 달성으로 경제 규모 세계 7위 대국으로 성장을 목표로 제시하였습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줄.푸.세'하겠다고 합니다. 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4대 기업환경 조성 원칙'을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는 규제 최소화, 둘째는 세율 최저화, 셋째는 서비스산업 글로벌화, 넷째는 법 지배원칙 확립하겠다는 것입니다.
국토재창조 프로젝트를 내걸었습니다. 한반도 대운하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통일시대를 대비해 남한의 12개 노선 북한의 5개 노선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린&클린 코리아'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일자리를 만들어 복지와 성장이 함께 가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지상과제인 교육개혁을 통해 창의력 있는 우수한 인재를 만들고 '학교만족 두 배, 사교육 절반' 프로젝트를 통해 공교육만으로 영어를 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국민을 잘 살게 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다 잘 살기를 원합니다. 부자 되기를 원합니다. 부자 나라, 부자 회사, 부자 가정이 되기를 원합니다. 진정한 부자와 진정 행복의 나라, 진정 부유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주시는 가나안 땅을 통하여 진정 행복한 나라는 어떤 나라인지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원리적으로 우리는 주심(성장), 분배, 누림(복지) 등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성장의 원리입니다. 행복하고 안락하고 안식을 누리를 삶을 살려면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주심의 원리를 통하여 우리가 성장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교훈받을 수 있습니다.
1. 주심의 원리는 축복으로 주신 땅을 부지런함으로 차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7).
이미 12장까지 거점 도시를 점령하였습니다. 31명의 왕을 제거하였습니다. 이제는 되었다라고 생각할 때입니다.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과 오랜 전쟁으로 인하여 피로감이 극도로 쌓여 있을 때였습니다. 나이도 노년의 때입니다. 여호수아가 110세 돌아가셨으니까 당시 갈렙이 85세인 것을 미루어 보아 100세는 되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를 카일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 거동이 불편할 만큼 연로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 되면 누구나 이제 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절을 같이 일어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다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직 정복해야 할 땅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미 주신 땅을 아직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알려 줍니까? 그 정복해야 할 땅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2절부터 나오는 나라들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온 지방으로 시작하여(2) 모든 시돈 사람의 땅까지를(6) 정복해야 할 땅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대부분 지역을 정복하고 전쟁을 종결했음에도 불구하고(11:23) 그들이 마저 정복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아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남서부에 있는 블레셋 땅(2,3) 시돈 지역의 땅(4) 북쪽 지역의 땅(5,6)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6절 중반절 이하부터 읽어 보십시오.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나의 명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 너는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기력이 쇠하여 전쟁터에 직접 나가 싸울 수 없으나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한 대로 아직 정복되지 않았지만 그 땅을 아홉지파 반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쫓아내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장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너는 떠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진정 부유함과 안식을 누리려면 약속의 땅, 축복의 땅을 조건이 안된다고 포기하지 말고 차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땅을 이제는 이만큼이면 다 되었다고 안주하지 말고 끝까지 정복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나이 100살입니다. 이제 쉴 때이고 새로운 이상을 갖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아직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이 들었다고 약속을 받았는데 안주해서는 안됩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을 받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84세에 포로가 된 롯을 구출하기 위해 용감히 전쟁터에 나갔습니다(창14:13-16). 100세에도 자식에게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였습니다(창22:1-19). 야곱은 77세에 하란으로 가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여 12 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창29:1,20). 모세는 80세에 소명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최초로 대제사장이 된 아론은 80세부터 123세까지 소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94세에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민27:15-23) 110세까지 전쟁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나이 든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신 것을 다 이루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통하여 이루지 못한 것들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서도 얼마든지 이루십니다. 내가 없어서 하나님이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쓰임받는 것이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주신 땅 차지하면 내가 복을 받고 우리 가족이 우리 민족이 복을 받습니다. 희생하기 싫다고 힘겹다고 무겁다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일도 하나님은 한 순간에 이루실 수 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영웅이라고 하는 처칠도 65세에 빛을 발한 사람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되어, 나치 독일이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을 파죽지세로 굴복시키고 유럽대륙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을 무렵 영국은 풍전 등화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순다섯 살의 노인 처칠은 “승리하지 못하면, 죽음만이 남을 뿐”이라는 각오로 “어떠한 희생과 공포를 무릅쓰더라도” 싸우겠다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히틀러는 그가 알코올중독으로 정신이상이 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인류를 나치의 폭압으로부터 구한 영웅이 되었으며 전후 세계평화의 기반이 된 국제연합과 유럽연합을 제창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의 어버지도 그도 우울증에 시달린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바람기가 있고 사치가 심하였습니다. 부모는 금슬이 썩 좋은 편도 아니었습니다. 처칠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성적이 좋지 않았으며 게다가 수업태도마저 좋지 않아서 늘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듣는 문제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자주 교장실로 끌려가 엉덩이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고,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몇 시간 동안이나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체벌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샌드 허스트 사관학교에 지원했지만 두 번이나 시험에 낙방했습니다. 세 번째 시험을 볼 때 사관학교 입시에는 세계의 여러 나라 중에서 하나를 정해 그 나라의 지도를 자세히 그리는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처칠은 고민을 하다가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수많은 나라 중에서 뉴질랜드를 찍어서 집중적으로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입시에서 그 많은 나라 중 뉴질랜드를 그리라는 문제가 나와 세 번째 시험에 간신히 합격했다고 합니다. 그는 우울증, 알코올중독, 빚에 시달리고, 불행한 결혼 생활과 이혼과 같은 삶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65세부터 달라졌고 20세기 최고의 영웅이라는 찬사를 들었습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반드시 남은 지역을 마저 정복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사명감으로 그 일을 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땅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준신 땅(7)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창15:18-21)입니다. 그 땅을 기필코 정복하도록 하나님은 명령했고 있기 때문입니다(6).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점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화근이 되고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완수한 것은 400명이 지난 다윗 시대에 이루어졌습니다(삼하 8,10장). 우리에게 주신 지경들이 있습니다. 안식의 땅 축복의 땅, 약속의 땅 선물로 주어진 땅입니다. 말씀으로 점령해야 할 습관, 못된 습관, 가난, 질병, 선교 등 우리는 마지막 하늘 나라에 갈 때까지 점령해야 합니다(딤후4:2).
2. 나눔의 원리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공평 공정하게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8-33; 수14:1-5).
성장과 분배는 균형이 맞추어 져야 더불어 행복한 나라,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땅을 지배하여 욕심대로 다 가지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분배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한 개인 80개를 가지고 99명이 20개를 가지고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은혜로 주신 땅을 어떻게 분배하라고 하십니까?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땅을 분배하는 내용이 본격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8절부터 33절까지는 요단 동편 땅을 분배하는 내용입니다. 이미 모세 때 분배한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분배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살아 있었을 때 이미 요단 동편에서 나누어 준 땅입니다(민32:1-42). 그들은 모세와의 약속을 성실하게 지켰습니다(민32:1-32). 므낫세 반 지파와 르우벤 지파, 갓지파는 이미 요단강 서편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요단강 동편 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미 땅을 얻었다고 가나안 서편 정복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전투 맨 선봉에 서서 전쟁에 용감히 참전하였습니다. 가나안을 다 점령한 후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을 하였는데 이제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켰으므로 요단 동편 땅이 정식적으로 주는 것입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고 나올 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 약속에 따라 분배합니다.
분배 원칙이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23절까지 르우벤 지파에게 준 땅입니다. 원칙은 그 가족 대로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갓(24-28)에게 어떤 원칙이 적용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그 가족대로입니다(28). 므낫세 반 지파(29-33)에게 어떤 원칙이 적용됩니까? 29,31절을 보십시오. 그 가족대로입니다. 앞과 끝에 반복적으로 그 가족대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공평하게 나누워 주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전투에 혁혁한 공을 세웠느냐가 기준이 아닙니다. 얼마나 능력이 있느냐? 얼마나 배웠느냐? 얼마나 힘이 있느냐? 연고주의가 아닙니다. 인맥, 학맥, 지맥으로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식구가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교회에서 교역자에게 사례금을 주는데 담임목사냐 부목사냐 사찰집사냐 따지지 않고 그 가족이 얼마 있느냐로 사례를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능력의 공평성은 훼손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초의 나눔은 능력대로 주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지배는 능력에 의해 좌우되었습니다. 14장 1절 이하를 보십시오. 가나안 본토 가나안 서편 땅을 분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분배의 원칙이 무엇입니까? 누가 분배합니까? 1절을 보십시오. 종교 지도자 제사장 엘르아살과 정치지도자 여호수아, 그리고 각지파 족장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분배 방식은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제비를 뽑았습니다. 공정성의 원칙입니다. 제사장과 여호수아 각지파 족장이 입회한 상태에서 제비를 뽑아 공정하게 시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땅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구 비례제와 제비 뽑기를 통하여 공평과 공정의 원리에 입각하여 땅을 나누되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고 실행하기 위해서 하는 방법입니다. 잠언서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잠 16:3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 방법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방법입니다. 기업의 크기는 각 지파의 인원수에 따라(민33:53)하라고 했습니다. 분배의 방법은 제비 뽑기 방법(민33:54 수14:2)을 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대로 시행하였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늙으면 노욕이 생기는 것이고 집착욕이 강해진다고 합니다. 고대에 땅은 대부분 누구의 소유가 됩니까? 정복자의 소유가 됩니다. 우리 나라 고대 사회를 보십시오. 구 한 말까지 왕들의 소유였습니다. 일부 권력자들의 소유였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이제 어느 정도 성장하였습니다. 함께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토지는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레 25:23)” 땅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나그네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때가 되면 다 놓고 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농지개혁을 하고 여러 가지 법을 만들어 경제 정의를 실현하려고 애를 썼지만 토지의 불로소득은 갈수록 커지고 있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살 맛을 꺽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땅값은 2008년 1월 5일자 한겨레 신문을 보니까 공시지가로 2천조원을 돌파하여 캐나다를 5개, 프랑스는 8개, 미국은 절반을 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땅값이 오르면 누가 이익이겠습니까? 땅 주인입니다. 땅값이 오르면 기업하기 나빠지고 국가의 경쟁력은 떨어지고 국민들은 투기에 몰두하고 국운은 쇠퇴하게 되지만 땅 주인에게는 이익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땅이 심각하게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전 국토 중 개인 명의로 등록된 민유지가 57%라고 합니다. 주민등록 인구는 4,878만명이라고 합니다. 이중 1%를 약간 넘는 50만명이 이 땅의 57%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전국 1785만 가구 중 40.1%를 차지하는 715만가구는 땅 한 평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반면에 0.5%를 약간 넘는 10만 가구가 30.3%(땅값 기준으로 21.7%), 2.8%인 50만 가구가 59.3%(43.5%)의 땅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구조적으로 법체계를 만들어 개선하지 않고 계속 악순환되면 행복한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1달러 미만 생활자가 12억이나 됩니다. 8억명이 영양실조입니다. 세계 문맹자가 13억입니다. 선진국 20%가 세계 소득의 86%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만해도 한해 술갑 14조, 성매매 24조, 애견 비용이 2조나 들어간다고 합니다. 집있으면 3%, 자동차만 있어도 6% 부자 안에 듭니다.
여호수아도 자신이 지도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좋은 땅을 가지고 싶고 많은 땅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인 것을 인정하고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땅임을 인정하고 청지기로서 공평과 공정의 원리에 따라 분배하여 더불어 사는 삶을 구현하였습니다. 인류의 핵심 가치는 자유 정의 평등 박애입니다. 하나님은 평등을 경제적 정의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안식년을 두어 땅을 쉬게 하고 희년이 되면 다시 원 주인에게 돌려 주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 하나님의 경제 분배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땅을 바벨론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진정 함께 더불어 행복한 사회, 참 안식을 누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눔의 원리, 경제 긍휼의 원리, 경제 나눔의 원리, 오순절 성령이 임하였을 때 스스로 이루어진 나눔 공동체의 원리가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 공동체에서 이루어진 행복한 경제 생활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행 4:34-35)”
3. 누림의 원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장하고 분배가 잘 이루어져도 그것을 가지고 잘 누리지 못하면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성장이 죄의 도구가 되고 공정한 분배가 방종과 나태의 구실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방지하고 진정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기 위해 땅을 분배할 때 특별한 내용을 말씀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레위 지파에게는 땅을 분배하지 않은 것입니다. 레위지파는 요단강을 건널 때도 최 전방에 서서 법궤를 메고 물에 들어갔습니다. 가장 위험부담이 컸습니다. 레위 지파가 죽으면 다른 지파 사람들은 들어가지 않으면 됩니다. 여리고성 전투에서도 가장 앞서 법궤를 매고 돌았습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땅을 주지 않았습니다. 요단 동편에서 보십시오. 레위 지파에게 기업을 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14,33) 14절에는 화제물이 그 기업이 됨이라고 했습니다. 33절에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의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요단 서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4장 3절을 보십시오. 레위 지파에게 기업을 주지 않습니다. 다른 지파로부터 48개의 성음과 목초지를 할애 받았을 뿐입니다(수21:1-42) 모든 사람이 다 땅을 받는데 자신들만 받지 못하니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섭섭함, 소외감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레위 지파가 땅을 분배받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거룩한 일 곧 성소에서 봉사를 위해 구별되었기 때문에(민8:14-19) 그들은 제사를 드린 음식을 먹게 하였습니다. 생계에 전염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에 전염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각 지파에 흩어져 신앙 생활을 지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업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신10:9; 18:2,11). 신령한 예배 그 자체를 통하여 그 기업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와 예물을 통해 생활하게 하였습니다. 레위 지파가 하나님의 것을 분배받아 살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십일조와 헌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이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하였습니다. 그 때 12지파가 있었는데 레위 지파를 택하여 성전을 맡아 전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할 때 레위 지파를 제외하고 11지파에게 공평하게 땅을 분배하였습니다. 레위 지파는 땅이 없으므로 11지파가 땅에서 거둔 소득의 1/10을 내게 하여 레위지파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이 십일조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레 27:30)"
이 제도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법칙 중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누림을 이루는 수단입니다. 하나님은 열방의 제사장 나라로 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진정한 부를 이루는 삶의 기본 제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는 것을 물질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시간의 1/7을 주일로 지킴으로 시간의 주인되신 하나님 제일 주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처럼 물질의 1/10을 통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청지기적 삶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가는 것이 인생인데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는 가정, 물질, 돈, 기타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이요,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택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오직 죄의 문제를 담당하여 제사를 드리는 레위인과 제사장을 위해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민18:21-24)를 드려라고 했습니다. 민족 절기 때 감사의 축제용으로 축제의 십일조(신14:23-27)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매 안식년을 기준으로 제 제3년과 6년에는 그것을 축제용으로 사용치 말고 성(城) 중의 고아, 과부, 나그네,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구제하는 데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그 중 9/10를 가져다 쓰는 것입니다. 1/10은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성물인 것으로 알고 손을 대지 않고 최소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쓰임받는 물질로 남겨 놓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질병으로, 홀로되어, 구조적인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직분상 생업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에 전무하는 사람에게 주어 함께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경제적 행복은 누리는 행복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윌리엄 번스타인은 그의 책 "부의 탄생"에서 부의 탄생과 축적에는 꼭 필요한 네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네가지 요소가 없으면 절대로 부가 쌓일 수 없고 이 네가지 요소를 갖춘 곳에서는 반드시 놀랄 만한 성장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는 첫째 요소가 재산권이라고 말합니다. 북한은 99%의 문해율(文解率)을 자랑하지만 재산권이 인정되지 않으니까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요인은 과학적 합리주의라고 합니다. 과학적 합리주의는 기술의 발전을 가져오게 하고 기술의 발전은 곧 부로 연결된다고 합니다.
셋째 요인은 자본시장의 활성화라고 합니다. 넷째 요인은 통신과 수송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업이 재산권과 지적 도구 그리고 충분한 자본을 확보해 좋은 제품을 만들었다고 해도 자신의 제품을 소비자에게 신속하게 전달할 수 없다면 그 혁신제품은 잠식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요인이 처음으로 일어났던 네덜란드는 16세기부터 1세기 정도는 번영을 누렸지만, 18세기 영국의 해상 봉쇄로 인해 수송을 잃게 되면서 그 번영이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부(富)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제도(制度)가 갖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국가의 번영을 결정짓는 요인은 물질이 아닌 제도적인 부분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장기적인 번영을 결정하는 것은 그 나라의 천연자원도 아니고 문화적 자산도 아니며, 권력의식이나 군사적 용기도 아닌 제도(制度)에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그 제도를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레위인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움켜쥐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움켜쥐고 싶어했던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하여 가나안 땅을 잃어버리고 집도 농토도 잃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포로 생활하는 그들을 향해 너무나 답답하여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합니다.
구약 성경의 맨 마지막 성경인 말라기 3장 7절 이하를 보십시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들을 향하여 진정 복 받는 길 나라가 재건되고 부강해지는 길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돌아갑니까? 8절에 보십시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곧 그것이 무엇입니까?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 보세요. 왜 이들이 이렇게 나라가 망하고 부강한 나라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까?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시험을 해 보라고 합니다. 10절 같이 크게 읽어보겠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시험을 해 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황충을 금하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토지의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보고 복되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행복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복스러운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신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면 적극적으로는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고(말 3: 10), 소극적으로는 재난이 없어지고(말 3: 11), 대외적으로는 열방이 인정할 만큼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말.3: 12).
이것은 구약의 원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후서 8장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 때 마게도니아 교회가 참 어려웠습니다. 환난도 많고 시련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습니다(고후 8:2)"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하였습니다(고후 8:3). 그런데 그렇게 헌금하여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13절 이하를 보십시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고후 8:13-15)"
함께 행복해지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이 일을 실현하기 위해 이웃들을 섬기는데 열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만명의 어린이를 양육하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해외에 100개의 교회를 짓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소년 소녀 가장들의 장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장애인과 농어촌 교회, 선교사를 섬기기 위해 힘에 지나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독거 노인 등 하나님의 나라의 지경을 넓히는데 헌금이 바르게 쓰이도록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실제로 학자가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신앙 생활이 영혼의 문제로 만 끝나는가 아니면 경제 생활에도 영향이 있는가를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경제학과의 조너선 그루버가 조사를 해보았답니다. "예배 출석률이 2배가 되면 가계소득이 9.1% 증가하거나 복지지원금 수혜가 16% 감소하고 이혼확률이 4% 줄어든다"고 밝혔습니다. 예배 참석 빈도가 높을수록 학력과 소득도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영혼만 살찌는 것이 아니라 지갑도 두둑해진다는 것입니다.
맨소래담의 창업자 미국의 하이드(Albert Alexander Hyde)라는 분이 계십니다. 서점을 경영하여 거부가 되었는데 1887년에 밀어닥친 경제공황으로 빚만 10만 달러를 지고 사업은 다 살아져 버렸답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가족의 보금자리인 집을 팔아 이미 YMCA에 기부하기로 약속했던 기부금을 내고 십일조를 하였답니다. 그 때 사람들은 그를 비웃으며 제 정신이 아니다고 했답니다. "헌금은 나중에 돈을 많이 벌었을 때나 하고, 먼저 빚부터 갚아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했답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지당하고 옳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이드의 생각은 달랐답니다. 하나님께 진 빚을 먼저 갚으려고 했답니다. 그는 사람의 빚보다 하나님께 빚진 것을 더 두려워했답니다. 그는 결국 3년 후 맨소래담 회사를 창립하고, 이전에 받았던 축복보다 더욱 놀라운 축복을 받아 수입의 구(9/10)를 하나님께 바치는 풍요로운 헌금 생활을 하였답니다. 진정 부강하기를 원하십니까? 형통하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사는 곳에서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주시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삶으로 표현해 보십시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7.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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