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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수14: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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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8.1.27
세상에는 어떤 일이든 원칙과 예외가 있습니다. 지금 정치 계절이 되어 국회의원 후보 공천원칙을 놓고 각 당마다 치열한 공방전을 하는 것을 봅니다. 그 원칙이 어떻게 정해지느냐에 따라 공천을 받을 수도 있고 못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으로서는 공천은 정치 생명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경험하는 것이지만 결과를 보면 100%로 그 원칙대로 되지 않습니다. 예외가 늘 있는 것입니다. 예외가 많으면 많은 수록 후진국형 정치이고 원칙 대로 잘 되면 될수록 선진국형 정치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정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는데도 원칙과 예외가 있습니다. 병원에 아무 연고가 없는 사람은 진료 예약을 하는데 한 달이 걸리는데 진료의사가 자신의 친구라면 일주일도 걸리지 않을 것이며 만약 그 병원의 이사장이라면 그날 즉시 진료가 될 것입니다. 새 정부의 인사도 마찬가지고 기업의 인사 정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기업에 인사 원칙이 있지만 그 원칙대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외가 있습니다. 기업의 회장이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미리 총무과장으로 발탁하여 훈련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도 보면 성경에서도 그런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가나안 땅 거점 도시를 점령하였습니다. 한 번도 자신들의 땅을 가져보지 못한 백성들입니다. 서로 많은 땅, 좋은 땅을 차지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점령한 땅을 나누어 줄 때 분명한 원칙을 세워 주었습니다. 기업의 범위는 이미 하나님께서 12지파에게 지정해 주신 범위에 국한하였습니다. 기업의 크기는 각 지파의 인원수대로였으며, 분배방법은 제비 뽑기 방법으로 결정하였습니다. 분배 과정은 먼저 요단 동편에서 므낫세 반지파와 르우벤 지파, 그리고 갓지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둘째로 길갈에서 요단 서편 땅 분배를 하였습니다. 이 때 유다 지파, 므낫세 반 지파 에브라임 지파가 분배받았습니다(14장). 셋째로 실로에서 나머지(18장) 일곱 지파에게 땅을 분배해 주고 마지막으로 레위 지파가 거주할 성읍을 분배해 줍니다(20,21장). 이것이 가나안 땅 분배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는 이 원칙에는 맞지 않는 예외 조항이 나오고 있습니다. 길갈에서 2지파 반에게 기업 분배를 할 때입니다. 기업 분배를 위해 제비뽑기를 하기 직전에 갈렙이 기업을 요구하였습니다. 45년 전에 가나안 정탐꾼으로 세운 공로로 모세에게서 이미 약속받은 땅을 특별 기업 분배로 해 줄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민14:24,30). 이 예외 조항에 의해 갈렙은 제비뽑기나 인구 비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발로 밟는 모든 땅은 그 자신과 후손들에게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해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축복을 받았습니다(수 14:9). 요즈음 말하면 심는대로 거두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인데 심지도 않은데서 거두는 예외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과학법칙에 따라 적용되는 것인데 불치의 병이 기도로 치료되는 예외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다른 지파는 원주민을 몰아내지 못했는데 갈렙은 생전에 강력한 적들을 다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전쟁그침).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다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지만 갈렙만은 예외적으로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의 소산을 먹고 마시는 축복을 받았습니다(민14:30). 그 뿐 아닙니다. 노년이면 당연히 힘이 없어지고 기력이 쇠할텐데 40세 때나 일반인 강건의 복을 받았습니다(11).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년이 되면 짐이 되는데 갈렙은 예외적으로 노년에도 다른 사람이 축복해주고 자신이 축복을 베푸는 복을 받았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축복을 받습니다(13). 가족에게 축복을 베풀어 줍니다(15:18-19). 가족 중에 옷니엘이라는 사사가 나옵니다(15:17). 우리도 마지막 노년까지 이렇게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노년까지 이렇게 신앙 안에서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고 소망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에 근거한 목표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다리는 삶입니다. 요즈음 유행하는 말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 갈렙의 나이 85세입니다(10절 하반 절) 당시 자신과 함께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들은 여호수아를 제외하고는 다 죽었습니다. 지금 같아도 남자들은 대부분 돌아가실 나이고 돌아가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며느리 눈치 보며 살 나이입니다. 돌아가셔도 후손들이 눈물도 흘리지 않고 호상이라고 그렇게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을 나이입니다. 어떤 새로운 것은 시작하기에 이미 늦었다고 생각할 나이입니다. 그런데 그 때 갈렙이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12). 이제 살날이 얼마 되지 않은 한 늙은이의 노욕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12절을 계속 보십시오. 그 땅이 어떤 땅입니까? 아낙 자손이 거하는 땅입니다. 그 성읍은 크고 견고합니다. 헤브론 산악지대를 가리킵니다.(민13:22) 쉽게 차지할 땅이 아닙니다. 이미 45년 전에 정탐꾼들이 그 땅을 살펴보고 10명의 정탐꾼들이 자신들은 메뚜기에 불과하고 그 땅은 자신들을 삼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60만이 넘는 백성들이 소리를 치며 밤새도록 통곡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차라리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인도하여 망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꺼리는 땅입니다. 그런데 그 땅을 달라는 것입니다. 노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그 땅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6절부터 길게 설명하고 그 땅을 달라는 것입니다. 45년 전에 백성이 폭동을 일으키려고 했을 대 적극적으로 백성을 안돈시킨 것이 갈렙과 여호수아입니다(민13:30). 더욱 강력하게 대응한 사람이 갈렙입니다. 갈렙은 말했습니다.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도 합세하여 그들은 옷을 찢고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고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그 때 회중들을 그들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다 똑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심히 아름다운 땅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태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약속해 주었습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민 14:24)"
이 약속을 45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가 마침 때가 되니까 여호수아에게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노년까지 아름다운 인생, 행복한 인생, 복스러운 인생을 살려면 하나님의 약속 붙들고 소망하며 기다리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것입니다. 기업을 하든 공부를 하든 예술을 하든 신앙 생활을 하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교회부지를 하나님이 약속의 땅으로 주었습니다. 일부는 그 땅은 우리를 삼키는 땅이라고 생각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땅을 약속의 땅으로 바라보며 소망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갈렙이 받았던 축복을 다 누릴 줄 믿습니다. 우리는 어떤 악조건이 주어지고 절망적 상황이 우리 앞에 다가 온다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목표를 끝까지 붙들고 이루어야 합니다. 조건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갈렙은 출신 성분이 좋지 않습니다. 나이도 많습니다. 이제 무엇을 시작하는데 늦은 나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갈렙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산지에 대한 소망을 45년이 지났는데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가데스 바냐에 도착한 때가 출애굽 한 지 2년차였을 때입니다. 그러니 38년은 앞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예측하지 못하는 광야에서 7년은 매일 생사를 넘나드는 가나안 전투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에게 주어진 산지는 무엇입니까? 사업의 성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선교지 확장일 수 있습니다. 지역 복음화일 수 있습니다. 지식의 진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녀의 성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의 승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성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직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멋진 교회를 한번 만들어 보는 것도 될 수 있습니다. 가정의 회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임으로 가지고 있는 신념은 이루어 질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소원은 받듯이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십시오. 아브라함 때에 출애굽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이 성취되기까지는 400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줄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사라의 태는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25년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것은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바로된 것이 아닙니다. 10여년이 지난 후에 그는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요셉의 꿈이 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신매매를 당하였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는 일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비전은 결국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소원이 우연히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소원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롬 5:5)"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끝까지 이루는 것입니다.
잠깐 환란이 있다고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망하고 중도에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론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당신이 걷고 있는 길이 내내 언덕길일 때, 자금은 얼마 없고 빚은 많을 때, 웃고 싶어도 한숨지어야 할 때, 걱정이 당신의 어깨를 내려 누를 때, 이때가 바로 우리가 포기하지 말고 목표를 붙들어야 할 때입니다.
항상 절망의 끝에는 희망의 통로가 있는 법입니다. 갈렙의 소원은 자신의 욕심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진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온전히 쫓음으로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 붙들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습니다. 45년 전에도 갈렙은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그 사실을 모세도 인정해 주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온전히"라는 말은 하나님이 만족하실 정도로 충분히 그분의 뜻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남들은 못한다고 부정적인 생각에 잡혀 포기 할 때 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좇아 신앙적으로 극복했다는 뜻입니다. 좇는다는 것은 믿음의 행위를 말합니다. 믿음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 땅에 대한 약속을 받은 것도 그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모세가 당이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민 14:24)"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45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마침내 헤브론 땅을 갈렙이 차지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 왜냐하면 이유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시간 지나면서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 변한다해도 하나님을 온전히 좇는 신앙만큼은 변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는 신앙이(민14:24) 45년이 지나도 불변하였습니다.(수14:14) 여호와 앞에 정직하였던 요하스도 변하였고(대하24:1-3, 대하24:15-19) 솔로몬도 변하였습니다.(왕상11:1-8) 예수님의 제자 유다는 돈전대를 맡았다 결국 예수님을 팔아먹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좇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갈렙이 하나님에 대하여 얼마든지 억울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섭섭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보십시오. 잘 따르다가도 조금만 서운하면 등을 돌리지 않습니까? 45년 전 가데스 바냐에서 주동적으로 백성을 수습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은 오히려 여호수아보다 갈렙이었습니다. 그래서 땅에 대한 약속도 갈렙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후계자가 누가 되었습니까? 여호수아가 되었습니다. 마음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대가 무너지면 섭섭하게 되는 것이고 상대와 적이 되어 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갈렙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 때나 45년이 지난 지금이나 온전히 좇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지닙니까? 겸손하게 대합니다.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시기와 질투입니다. 남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남의 아들이 자기 아들보다 출세하는 것 보지 못합니다. 갈렙은 그것을 극복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좇습니다.
여호수아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온전히 따른 것입니다.
나이의 한계를 뛰어 넘으며 온전히 좇은 것입니다. 나이들면 사람들의 신앙이 무덤덤해집니다. 감격이 살아집니다. 습관에 따른 신앙을 갖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않고 경험에 따른 신앙으로 형식화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실제적인 신앙을 가지고 온전히 좇는 삶을 살았습니다.
신분의 한계를 뛰어 넘고 온전히 좇는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갈렙의 이름의 뜻은 개라는 말입니다. 갈렙은 히브리인이 아닙니다. 그는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5:19에 의하면 그니스 족속은 아브라함시대 가나안 족속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닙니다. 에돔 족속 중의 하나입니다.(창36:11,15) 지금 말하면 별 볼일 없는 가문 출신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이방인 출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소망하는 데는 아무런 방해 요소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음으로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으로 축복으로 주신 약속의 땅의 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갈렙은 노년의 나이인데도 자신감이 넘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살아 있는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10절 보십시오. 지금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왜 살아 있다고 받아들입니까? 같은 동료들은 이미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를 제외하고는 자신만 살아있는 것입니다. 12절에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한 약속한 산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나이 들어 늙었지만 45년 전과 같이 몸이 건강하여 싸움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강한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모든 일에 자신감이 살아집니다. 보수주의 자가 됩니다. 안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85세의 할아버지가 가장 힘있다고 생각하는 족속과의 싸움을 감당할 수 있다고 강한 자신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10명의 정탐꾼이 보고 자신들을 삼키는 땅이라고 무서워 떨던 땅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45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은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비관적이고 독선적이고 편협한 사고방식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은 그 사람들과 비교해 보니 메뚜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안된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땅을 자신들을 삼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고 낙담하고 원망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가나안 땅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있다면 그것은 신념 잘못 나가면 만용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거가 하나님께 있을 때는 그것은 신앙이고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능력있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고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 땅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약속해 주신 땅이고 그 땅을 점령할 수 있도록 이미 기적으로 애굽에서 탈출하게 해주시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하여 먹여주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 약속의 땅은 반드시 하나님이 들어가게 해 주실 땅인 것을 약속에 근거하여 믿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감이 생긴 것입니다.
45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늙었지만 누가 함께 하면 쫓아 낼 수 있다는 것입니까? 12절을 보세요. 장대한 아낙사람이 있고 그 성이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입니다. 혹시 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의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기만 하면”으로 강한 소망과 확신을 내포하는 말입니다. 적은 강하고 성은 견고하며 자신은 이미 늙어 힘이 없지만 그 조건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임마누엘 하나님이 그 현자에 함께 계시면 결국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누릴 수 있다는 확신을 표현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민14:6-8)이 45년 지난 85세에도 불변하였습니다.(수14:12)
그의 신앙은 형식적이고 입술의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놓고 자신은 빠지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고 하나님의 일을 내일로 알고 최선을 다하여 결국 정복하는 신앙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쫓아내리라고 말씀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고 말씀 따라 돌진하는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는 무능력하고 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새 힘이 생기고 능력이 생기고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고목나무에 생기가 돌게 되고 꽃이 피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칠 때를 보십시오. 다윗의 힘이 아닙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힘을 보며 떨고 있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힘을 보았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7:45)”라고 신앙 고백을 하고 결국 승리하여 왕이 되었습니다.
물맷돌 다섯 개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면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면 기적의 지팡이로 사용되어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을 내는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어린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5000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를 거두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무식하고 사회적인 지위도 없고 물질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붙들이면 세계를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 목동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니까 에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인생이 변화된다는 사실을 무수히 많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합리적이고 계산적으로 되어질 일만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까? 결코 아닙니다.(히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홍해가 어떻게 갈라집니까?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납니다. 말씀 한마디고 이 땅을 어떻게 지으십니까? 문둥병자가 말한 마디 한다고 어떻게 깨끗해집니까? 소경이 어떻게 눈을 뜹니까? 귀신들린 사람이 어떻게 정상인이 될 수 있습니까? 폭풍이 말씀 한마디로 어떻게 잠잠해집니까?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할수있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망상은 다릅니다. 믿음은 반드시 "약속"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망상은 단순히 자신만의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 4:18)”
약속을 붙들고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나에 대한 자신감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자신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불가능은 가능으로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8.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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