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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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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2007·07·07
지난 겨울 교회로 오는 길에 초라한 모습의 강아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어느 집에서 기르던 애완견이었음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날 길을 헤매며 지내왔기 때문에 지저분하고 초라한 모습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처량하고 불쌍하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주인집에서 살 때는 예쁘고 사랑받는 애완견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무엇을 먹고, 잠은 어디서 자는지 모릅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고생스럽고 막연하게 생각되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가 그 강아지와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다 길 잃은 양들이었던 것입니다. 양은 목자가 돌보아주지 않으면 스스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자 제 길로 나가서 죄 가운데서 고집하며 살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히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또 우리를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완벽하게 돌보시고 보살펴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일을 가장 선하게 인도해주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주님과 동행하다가 영원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돌보심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우리처럼 길을 잃고 헤매는 양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양들도 인도하여 우리와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10:16)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며 우리를 가장 잘 아시면서 완전하게 돌보아주시는 주님께서는 우리 밖에 있는 잃어버린 양들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당신은 이러한 주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밖에 있는 양들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주님의 눈에는 잃어버린 양들, 우리 안에 들어있지 않는 양들이 너무나도 많이 보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잃어버린 양들을 바라보시며 늘 안타가워 하시며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마14:14)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15:32)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6:34)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7:13)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들은 우리 밖에 있기 때문에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이 길 잃은 양이라는 사실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 돌아올 줄도 모릅니다. 그들은 길을 잃은 양들이며, 처량하고 막연하게 헤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대로 방치해두면 언제 비참하게 멸망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곤고하고 헛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며, 멸망 길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고 아프신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마치 집을 나간 어린 자녀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알 수 없는 부모의 심정과도 비슷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심정을 ‘잃은 양 비유’ 와 ‘탕자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4-7)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15:11-24)
지난 주간에는 가출했던 한 여학생이 노숙자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 일어나고 50일이 지나서야 신원이 밝혀졌습니다. 그 부모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알고 보니 그 여학생의 가정은 매우 가난하고 불우했으며, 학교에서도 늘 따돌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여학생에 관한 기사를 읽는데 어찌나 가슴이 아픈지 눈물이 나왔습니다. 우리 밖에 있는 잃어버린 양들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심정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 심정을 가지고 우리 밖에 잃어버린 양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들이 지금 우리 밖에 있는 이유
그런데 그들은 왜 우리 밖에 있는 것일까요? 처음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스스로 각기 제 길로 나가 범죄하고 고집을 부리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쫓아내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고 살아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집을 나간 잃은 양들은 스스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마귀가 그들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듣거나 권함을 받아도 쉽게 돌아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들을 끝까지 잡아둘 수 없습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영혼을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해내는 일입니다.
둘째로, 그들이 속히 돌아오지 못한 데는 먼저 믿은 우리의 책임이 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그들에게 큰 도전과 충격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구원받아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보호 아래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선하고 본이 되는 모습입니까?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돌보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사람들에게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다면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기가 훨씬 쉬울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믿은 우리가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안 믿는 사람들과 별 다를 것이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것들을 다 버리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어려움 속에서 시달리는 모습을 가지고 힘없이 살아갑니다. 누가 이런 모습을 보고 도전을 받겠습니까? 누가 이런 성도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 예수 믿기를 원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달라져야 합니다. 이제는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만 바라보면서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 없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이며 살아야겠습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모습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우리의 모습과 삶이 우리 밖에 있는 양들에게 도전과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목자이신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돌아오는 길
우리 밖에서 방황하며 고생하는 양들은 어떻게 해야 우리 안으로 돌아와 선한 목자의 인도를 받게 될까요? 그들이 돌아오는 데는 단 하나의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 유일한 방법은 먼저 믿은 우리가 전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전도를 통하여 그들이 돌아오도록 정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우리가 어떻게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까?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토록 미련하게 보이는 전도를 통하여 세계 각처의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길이 전도밖에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전도자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고국과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타국에 가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 나 같은 사람도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전도하지 않아도 결국 돌아오게 되지 않을까요? 많은 성도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반드시 전도를 통해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전도할 수 있게 해줍니다. 내가 전도하는 것이 한심스럽고 미련하게 보일지 모르나 바로 그 전도를 통해서 택하신 자들이 믿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하거나 두려워말고 더욱 담대하게 열심을 다해 전도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전도해서 열매를 맺는데, 평생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한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지난주에 타 교회에 출석하는 어떤 성도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옷 가게를 하는데,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무조건 전도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믿겠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믿음이 좋다고 생각되는 성도에게 연결시켰는데, 한 사람도 결실을 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성도에게 연결을 시켰더니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우리가 전도하고 수고하면 택하신 자들은 반드시 믿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감당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전도하십니까? 하도 성화를 대서 할 수 없이 전도대상자를 적어 냈지만, 속으로는 이미 포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영혼이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이 눈물 흘려 기도하며 씨를 뿌리면 그중에서 택하신 자들은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주님께서 안타깝게 그 영혼을 기다리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더욱 최선을 다해 전도대상자들을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로 인도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선교의 비전
주님께서 택하신 백성은 우리 주위에도 많을 뿐 아니라 온 세계에 흩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세계선교에도 헌신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북한과 중국과 아프리카와 방글라데시의 잃어버린 영혼들이 얼마나 곤고하고 안타까운 가운데 헤매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우리도 갖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번 방글라데시 단시선교에 한 번 다녀오도록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가서 그들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느껴보십시오. 우리는 이 자리에 안일하게 그냥 앉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있는 힘을 다하여 세계선교에 참여해야 합니다. 선교사님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목숨을 걸고 현장으로 나갔습니다. 후방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는 우리가 선교에 무관심하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것은 우리 밖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시며 눈물 흘리시는 선한 목자의 심정을 너무나도 외면한 것입니다. 선교에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매월 선교헌금을 드리지 않는 성도가 있습니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반드시 선교헌금에 동참하십시오. 그리고 뜨거운 마음으로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세계를 가슴에 품고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열정을 가지고 선교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맥추감사절의 영적인 의미
오늘은 맥추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풍성합니까?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 안에서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를 완벽하게 잘 아시는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 그 모든 일들을 가장 선하고 아름답게 이루어 가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아니 영원한 우리의 본향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를 완벽하게 돌보시며 지켜주실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잘 아시고 돌보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멸망당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 모든 은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려도 그 은혜에 만분의 일도 보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당신은 주님의 그 은혜를 얼마나 감사하며 사십니까? 그 은혜가 감사하여 주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의 감사가 초라하고 부끄러운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주님께 성의 없는 감사를 드리지 마십시오.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심정으로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맥추감사절은 하나님께서 주신 곡식을 거두어들인 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 절기에는 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은 천국의 알곡을 천국 창고에 거두어들이는 것을 상징합니다. 누가 천국 알곡입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 천국 알곡입니다. 감사절의 궁극적인 의미는 영혼의 추수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절기를 지키면서 잃어버린 양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새롭게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머잖아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전도하여 믿게 된 형제들과 함께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맞아주실 때 우리가 전도한 영혼들을 확인하실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은 과연 몇 사람이나 주님께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당신이 전도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혼자서 주님 앞에 간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일입니까? 어떻게 우리가 전도하기를 소홀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도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안타깝게 바라고보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본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 영혼은 방황을 끝내고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품 안에 안기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전도대상자들을 반드시 주님께로 인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일이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며, 주님께서 가장 크게 상주시는 일임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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