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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재산

열왕기상 김창인 목사............... 조회 수 2139 추천 수 0 2010.10.23 23: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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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왕상21:17-29 
설교자 : 김창인 목사 
참고 : 광성교회 - 김창인 목사 제1설교집 -하늘의 전화/모퉁이돌 에서 

내용은 1절부터 보겠습니다. 우리 사람이 살아가는데 재산이 없으면 못 삽니다. 어떤 재산이든지 재산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람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가 의식주라고 합니다. 먹어야 되고 입어야 되고 잠잘 집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재물입니다.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살기에 너무 불편합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재산보다도 더 귀한 재산이 있는데, 건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돈을 혹은 금 덩어리를 쌓아 놓고도 건강을 다 잃어버리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건강은 귀한 재산입니다. 그런가 하면, 10년 20년 갈고 닦아 놓은 지식이라고 하는 것도 큰 재산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노동을 해서 살 수 있지만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그 나름대로 그 지식을 가지고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손에 익힌 재간, 기술이라고 하는 것도 큰 재산입니다. 그리고 가정이라고 하는 것도 큰 재산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아 가정 없이 산다고 하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따뜻한 가정에서 태어나 그 품에서 자랐고 그 품에서 복을 누리며 산다는 것이 큰 재산입니다. 이 모든 것들과 그밖에도 많지만, 재산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외에 또 다른 귀한 재산이 있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재산, 그 재산 때문에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재산 말입니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믿는 사람의 첫째 재산은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믿음이라는 것을 빼버리면 이미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믿음이로되 세상에 나가 적당히 살면서 믿는다고 하는 형식만 갖춘 신앙은 우리의 재산일 수가 없습니다. 재산도 재산 구실 하는 재산이 있고 재산 구실 못하는 재산이 있습니다. 믿음도 믿음 구실 하는 믿음이 있고 믿음 구실 못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믿는 자의 재산이라면 순교적인 신앙, 바로 이것이 귀한 재산입니다.


I. 순교적인 신앙이 재산(17-19절)


이 순교적인 신앙을 큰 재산으로 가졌던 사람이 나봇입니다. 이 사람의 순교적인 신앙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말씀을 지킨 순교 신앙


이스라엘 왕 아합의 궁전 옆에는 좋고 아름다운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포도원주인이 누군가 알아보니 그의 이름이 나봇이랍니다. 나봇을 불러 왔습니다. 왕이 나봇에게 청을 합니다. 당신의 포도원이 너무 좋은데 그것을 나에게 달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다른 포도원을 달라고 하면 그보다 몇 배 좋은 포도원을 주겠고 값을 쳐서 달라고 하면 네가 부르는 것이 값이다. 그러니 얼마든지 불러 보아라, 주겠다"고 했습니다. 나봇에게는 너무너무 좋은 기회가 온 것입니다. 다른 포도원으로 바꿔도 되고 값을 쳐서 불러도 되고, 그리고 임금님이 하자는데 비위 맞춰 주면 출세 길도 열릴 수 있고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봇은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시기 때문에 못하겠습니다." 나봇이라고 너무 놓치기 싫은 좋은 기회인 줄을 모르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이 금했기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합 임금은 그의 권세를 가지고도 어떻게 하지를 못하고 그만 머리를 싸매고 누웠습니다. 그의 아내 이세벨이 보니 딱합니다. 먹는 것까지 폐합니다. 나봇은 하나님이 금하셨습니다고 하는 그 말씀 한 마디를 끝까지 지켜 나가다가 마지막에는 왕의 아내 이세벨의 간계에 그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말씀 한 절을 지키는 것이 그에게 그렇게 귀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여호수아에 의해서 땅을 점령하고 호주를 따라서 전부 재산을 분배하고, 땅을 분배하고 유업을 받을 때에, 슬로보앗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들 없이 딸만 다섯을 낳고 죽었습니다. 호주를 따라서 땅을 기업으로 나누어주다 보니 딸 다섯이 기업을 받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족장을 찾아가서,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고 항의했습니다. 이에 므낫세 족장이 여호수아에게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딸들에게도 한 몫을 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끝이 났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다음 이 처녀들이 모두 성장하여 출가하게 됐습니다. 시집갈 때 자기 몫인 땅의 송유권을 갖고 시집을 갑니다. 그러니까 열두 지파로 몫을 나누어 받은 땅인데 소유권을 가지고 가버리면 므낫세 지파의 땅은 줄어든다는 말입니다. 므낫세 족장에게도 문제가 됩니다. 다시 또 여호수아에게 나가서 아가씨들이 땅을 갖고 시집을 가버리면 우리는 땅이 줄어듭니다, 그러면 곤란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하나님 말씀이, 슬로보앗의 딸들만은 절대 다른 지파에게로 가지 말라, 같은 족속에게 시집을 가면 시집을 가도 네 땅이 줄지 않는 것 아니냐,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땅을 절대로 옮기지 말라. 이것이 말씀 한 절입니다.


왕이 청하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하나님의 말씀 단 한 절 때문에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한 절 지키느라고 좋은 기회도 내동댕이치고 마지막에는 돌에 맞아 순교해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이 나봇의 순교는 말씀 한 절을 지키는 순교였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압니다. 그러기에 이 사람이 말씀 한 절을 귀하게 여겼다면 성경 66권도 다 귀하게 여길 사람이라고, 한 절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은 열 절도 무시하고 살 사람이고, 66권 전체를 무시하고 살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의 재산 중 말씀을 지키는 순교 신앙이 귀중합니다.


② 가정을 지킨 순교 신앙


본문 21장에는 나봇이 순교를 당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이 이러합니다. 아합 임금이 머리를 싸매고 누웠습니다. 이세벨 왕후가 보니 기가 막힙니다. 왕이 되어서도 어쩌면 저 꼴입니까. 그래서 나봇의 고향 장로들과 귀인들에게 편지를 써서, 너희가 재판석을 차려 놓고 높은 자리에 나봇을 앉혀 놓고 거짓 증인을 세우는데 깡패들을 동원하라는 것입니다.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두 사람만 증인을 세우면 백성들이 돌로 죽이게 됩니다. 순전히 거짓말입니다. 그런 편지를 받은 장로들과 귀인들이 그 편지대로 안할 수 있습니까? 재판 자리를 베풀고 높은 자리에 앉히고 깡패들을 동원하여 거짓 증언한 다음 죽였습니다. 여기 보게 되면 혼자 죽은 것으로 되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왕하 9장 26절에 보면 그때 아들들도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정적으로 전부 다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아버지가 그 말씀 한 절을 지키기 위해 좋은 기회도 다 버리고 순교를 당했다면 그 다음 권한이 맏아들에게 옵니다. 내 아버지는 그랬을지라도 다 가져가십시오, 말씀 한 절이 뭐가 그렇게 귀합니까 하고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습니다,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도 못한다는 겁니다. 맏아들 죽고 난 다음에 둘째, 그리고 막내아들까지 다 죽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나봇은 바로 믿었습니다. 자기 혼자만의 성공을 성공이라고 하지 맙시다. 나 혼자만은 잘 믿었다 할 지라도 내 아들 내 자손에게 그 믿음이 이어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실패입니다. 내가 잘 믿었는지 못 믿었는지는 내 아들과 딸에게서 보면 됩니다. 아버지의 믿음이 진짜라고 하게 되면 자녀들은 받아 이어갑니다. 아무리 아버지가 날고 뛰고 열심이라고 해도 믿음이 가짜라면 전수되는 법이 없습니다. 거짓 믿음 위해서 자녀가 왜 순교를 당하겠습니까. 그러기에 이 사람은 믿음으로 가정을 지킨 사람입니다. 가정적으로 신앙을 지킨 사람입니다. 온 가족적으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말 재산이 될만한 믿음입니다.


③ 유업을 지킨 순교 신앙


말씀을 지킨 순교, 가정을 지킨 순교, 마지막으로 유업을 지킨 순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받아 자기의 기업을 삼을 때가 여호수아 때입니다. 지금이 아합 임금 때니까 세월이 흘러 어림잡아 1천년이 지났습니다. 1천년 전부터 조상 대대로 지켜 오는 유산입니다. 그 땅에서 조상들이 태어났고 살았습니다. 자기도 태어나 자랐고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바로 그 유업은 축복의 현장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누리는 삶터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것을 빼앗겠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봇은 이 조상의 유업을 자기 목숨을 걸고 지켰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다해서 조상의 유업을 지킨 사람입니다. 축복의 현장을 지킨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옛날 역사적인 이 사건이 오늘날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할지 모르나 오늘날 이렇게 결부시켜 해석을 합시다. 우리의 조상 대대로 수 천년 동안 우리에게 주신 유업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 안에서 자라고 은혜 받고 구원 얻고 축복을 받습니다. 바로 은혜와 구원의 축복의 현장입니다. 2천년 동안 우리 조상 때부터 유업으로 받아온 것을 공산당들도 빼앗으려고 했고 일본 사람들도 교회를 짓밟아 버리려고 했고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면 2천년 동안 교회를 빼앗으려고 발악한 무리들도 많았습니다. 피로써 지켜 온 교회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는 피로 지켜서 우리 자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 순교적인 신앙이 우리에게 재산이 됩니다.


II. 결사적 용기가 재산(20-26절)


우리 믿는 사람에게 용기가 없다고 하게 되면 이미 그 사람은 믿는 사람 구실을 못합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용기가 있어야 하는데 결사적인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 20절에서 26절 사이는 엘리야의 용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찾아가는 용기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찾아가는 용기입니다. 호랑이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찾아가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보통 용기를 가지고는 못합니다. 본문에 엘리야가 나타납니다만 여기에 나타나기 이전에는 18장에 등장하고 21장에 가서 또 등장합니다. 그러면 18장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때 아합 임금이 이세벨이라고 하는 이방 왕후를 맞이하니 그 왕후가 바알 신을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기반을 닦고 바알 신 제사장들을 키워놓았습니다. 하나님이 노하셔서 3년 6개월 동안 비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때 임금과 엘리야는 만나서 한번 내기를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참 신이 누구입니까? 갈멜 산에 제단을 쌓고 바알 선지자와 송아지를 잡아 각을 떠놓고, 불을 대지 아니하고 기도만 할 때에 불이 내려와 응답하는 신이 참 신이라는 것을 가려 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먼저 바알의 선지자 450명이 저녁때가 되도록 바알 제단에서 춤추며 뛰놉니다. 응답을 기다렸으나 응답이 없습니다. 뛰놀며 춤추는 곳에 신의 역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뛰노는 자체가 신의 역사도 아닙니다. 엘리야가 제단 쌓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불이 내려 왔고 응답이 있었습니다. 450명의 바알 선지자가 하나도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쯤 되고 보니 이세벨이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군인을 풀어서 샅샅이 수색합니다. 엘리야는 40일을 광야 생활하며 방황하다가 하나님의 산, 호렙 산 굴 속에 숨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위로를 해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앞날에 대한 비젼을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에서 새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가라는 것입니다.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로 가라는 것 아닙니까. 보통 용기를 가지고는 자기를 죽이겠다는 사람에게 더구나 왕권을 가진 사람에게 제 발로 찾아갈 순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갔습니다. 찾아가는 용기, 이것이 귀합니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으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용기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용기입니다. 이 용기는 우리 재산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② 말하는 용기


찾아가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가서 말해야 합니다. 말하는 용기가 중요합니다. 이 말은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예"하고 대답해야 될 자리에서 입장이 곤란하고 손해를 본다고 해서 우리는 "예"하지 못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아니오" 해야 될 자리에 가서 손해보고 입장이 곤란해진다고 "아니오"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예"와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참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로 하여금 아합에게 그냥 다녀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서 나의 말,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전하라는 내용은 너무 엄청나게 무서운 내용입니다. 너와 네 집을 완전히 쓸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너와 네 자손들이 성읍에서 죽으면 개가 뜯어먹고 들에서 죽으면 새들이 와서 뜯어먹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쑥대밭을 만들어 놓겠다는 것입니다.


가서 좋은 말하라면 누가 못하겠습니까.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가감하지 않고 비위 맞춰 주지 아니하고 그대로 전하려니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렇지만 비위를 맞추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만 그대로 전하는 용기가 참 귀합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 가서나, 정말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용기가 귀합니다. 그렇다고 덮어놓고 하지 않을 소리를 하고 다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해야 될 말은 하고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는 사람의 용기는 우리의 재산입니다.


③ 물러가는 용기


엘리야가 아합 임금님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기세가 등등해서 "나의 대적이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하고 살기 등등해 달려들던 아합 임금은 엘리야가 전하는 말에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만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다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거꾸러지며 녹아집니다. 이쯤 되면 엘리야는 완전히 성공했습니다. 백 퍼센트 성공입니다. 성공한 그 자리에서 그는 영광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높임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사명과 일이 끝난 줄 알고 말없이 떠나갔습니다. 여기에서 할 일이 더 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할 일은 끝났다는 것입니다. 성공의 현장에서 나의 할 일 다 끝났다고 받을 영광과 높임을 마다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용기가 아닙니다.


이승만 대통령-나중에 역사가들이 바로 기록하겠지만-그가 독재한 것은 사실입니다. 일하는 중에 공과도 있지만 정치하다 보면 잘하는 일도 있겠고 못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존경할 만한 것은 그 마지막을 보십시오. 데모대를 향한 총질에 학생들이 피를 흘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깨끗이 물러나지 않았습니까. 보통 용기가 아닙니다. 요즘 누구나 할 수 있는 용기냐 그 말입니다. 그 자리에 얼마든지 연연하여 수습하였어도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깨끗이 물러가는 용기, 보통 용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성공하고도 물러났습니다. 우리는 찾아가야 할 자리는 내 목숨을 노리는 곳이라도 찾아가야 되고, 내가 해야 될 말, "예"와 "아니오"를 해야 될 입장이라면 분명히 하고 내 사명이 끝났다 할 때에는 깨끗이 물러가는 용기가 참 귀한 것입니다.


III. 나타난 겸비가 재산(27-29절)


다시 생각해 보면 순교적인 신앙, 결사적인 용기, 세 번째 나타난 겸비가 재산입니다. 겸비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겸손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이 우리의 재산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겸손을 빼면 무엇이 됩니까. 하나님은 겸손을 빼버린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원수로 여기신다고 했는데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입니다. 그런데 이 겸손한 자는 누구냐 하면 아합 왕입니다. 어떻게 아합 이야기를 여기에 갖다 붙였는가? 할지 모르나, 본문에 보게 되면 아합 임금이 잘한 것은 별로 없었으나 한 번 잘한 것이 나오는데 겸비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10년 20년 아니 30년 믿어오는 가운데 잘한 것을 이력서에 쓰라면 하나도 없지만 다만 겸비 하나는 내놓을 수 있다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아합에게는 겸비 하나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겸비가 곧 재산입니다.


① 말씀을 들을 때 겸비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라 하셨더라"(27-29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기세 등등 한 사람은 말씀에 거꾸지고 또 항복해야만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겸비요, 겸손한 사람은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비판만 합니다.


② 구체적인 겸비


둘째로는 구체적인 겸비, 즉 옷을 찢었습니다. 그 겸비는 구체적입니다. 우리는 너무 안타깝고 괴로울 때 가슴을 쥐어뜯습니다. 아합의 표현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에 굵은 베를 입고 슬퍼하지 않습니까. 아합은 그 의로운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는 엄청난 일의 잘못을 깨닫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을 하고 옷을 찢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 모든 운명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거꾸러지고 녹아졌습니다. 구체적인 겸손입니다. 겸손은 말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추상적인 것도 아닙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겸비 이것이 우리의 재산입니다.


③ 공인된 겸비


엘리야가 떠나서 얼마쯤 갔을 때 그는 아합을 보았습니다. 즉 아합의 겸비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타가 공인합니다. 아합 자신도 인정을 하고 그것을 지켜본 엘리야도 인정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도 그것을 보고 인정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고 하나님까지도 인정하는 겸비, 이것이 참 귀합니다. 그래서 축복으로 주시는 말은, 내가 저의 대에는 재앙과 멸망을 내리지 않겠고 그 자손의 대에 내리리라고 했습니다. 자손이 그때에 겸비하고 바로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사실상의 취소가 아닙니까. 겸비, 이 것은 우리들의 재산이어야 합니다. 아합에게서 잘한 점 하나도 찾을 수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은 잘했다고 공인되는 겸손은 하나님이 가장 마음에 드는 성도의 재산인 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재산은 순교적인 신앙, 결사적인, 그리고 나타나는 겸비, 이것이 빼놓을 수 없는 재산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재산도 갖추어야 하겠지만 신자만의 재산이 더욱 귀합니다. 먼저 순교적인 신앙이 나봇의 재산이었습니다. 목숨과 바꿀 만큼 귀한 것입니다. 다음에는 결사적인 용기입니다. 이것은 엘리야의 재산이었습니다. 이 용기가 그로 그 되게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겸비가 아합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겸비가 그에게 삶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의 귀중한 재산을 잘 간직하고 누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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