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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001】 아빠와 딸
"엄마, 좀 도와 주세요..."
"텔레비젼 만화영화 볼 시간에 구구단 외우지? 그리고 네가 외워야 되지, 엄마가 대신 외워주냐?"
학교에서 구구단을 배우는데, 아무리 외워도 외워지지 않는 구구단 때문에 며칠전부터 고민을 하던 좋은이가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야단만 맞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좋은아... 아빠가 도와줄게! 눈물 닦고, 자, 9단부터 외워 보자. 어렵더라도 9단을 외우면 다른 단은 쉽거든" 좋은이에게 9단을 천천히 읽게 한다. 내일 수학시간에 선생님께서 시키는 사람은 구구단을 외워야 하는데, 잘 못 외울 것 같은 그 부담감이 너무커서 그런지 말이 저절로 빨라진다.
"좋은아, 빨리 읽으려하지 말고, 천천히 느릿느릿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읽어봐, 느릿느릿 읽으면 정확하게 읽을 수가 있고 숫자가 확실하게 눈에 들어오거든. 자, 느~ 릿~ 느~ 릿~"
눈물방울을 단 좋은이가 9단을 느릿느릿 울먹울먹 읽는다. 그렇게 열 번정도 읽혔다. 옆에서 하나도 도움이 안되는 엄마는 2단과 5단밖에 못 외운다는데 9단을 가르치면서 외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 느릿느릿 읽으라고만 해서 그게 되냐며 머라머라 비교육적인 말을 막 퍼붓는다.
"에잉~ 좋은아, 그만하고 씻고 오늘은 일찍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다시 한번 읽어보자. 빨리 외워야된다고 생각하면 긴장만 되고 오히려 더 안되거든, 까짓거 못 외우면 어때! 아빠가 전자계산기 하나 사줄게!"
좋은이는 외우는 것을 포기하고 화장실에가서 샤워를 했다. 그런데, 샤워를 다 끝내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빠, 씻으면서 속으로 9단을 한번 생각해보니까 생각이 나서 안틀리고 속으로 한번 외워보았어요. 그랬더니 안 외워도 그냥 다 생각이 나요"
"그래?"
아침엔 일어나 학교가기도 바쁘다. 의도적으로 아침엔 구구셈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좋은이도 깜빡 잊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저녁때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물어보았다.
"좋은아, 오늘 구구단 어떻게 했어?"
"당연히 안 틀렸지요. 그런데, 8단은 안외웠는데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생각이 나서 천천히 말 해 보았더니 하나도 안 틀리고 다 맞은거 있죠."
"그래, 잘했쓰어~. 좋은이!" 어젯밤에는 다 죽어가더니 지금은 완전히 180도 뒤집어져서 자신감이 너무 철철 넘치는 좋은이!
요즘 인기있는 '다니엘학습법'보다는 못하지만 내 나름대로의 학습법이 있는데, 그건 '느릿느릿 학습법'이다. 공부한다는 생각이나, 외워야 한다는 강박관념같은 것을 다 털어버리고 그냥, 천천히 느릿느릿 세월아 네월아 숫자나 글자를 머릿속 칠판에 쓴다는 생각으로 정확하게 읽어 내려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모르겠는데, 나에게는 상당히 효과적인 학습법이며, 내 인생 자체를 빠름에서 한 발짝 벗어나 느릿느릿 학습법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2003.9.8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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