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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룻1:1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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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상훈 목사 |
참고 : | 승동교회 http://www.seungdong.or.kr |
승동교회 박상훈 목사 룻기강해설교 제 8 강 베들레헴에 도착
룻기 1:19∼22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오늘 본문은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도착하는 장면입니다.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모압 땅에서 출발해서 베들레헴에 이르기까지 긴 여정이 다 끝났습니다. 이제 베들레헴에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이 됩니다. 끝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입니다.
19절 하반부부터는 두 사람이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 동네 사람이 보여준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번째 반응은, 온 성읍 사람들이 떠들었습니다.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베들레헴 온 성읍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구절의 "떠들며"라는 말은 우리말 동사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만 원어에 보면 여성이 주어입니다. 또 20절에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그들이라는 말도 남성이 아니라 여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여자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나오미가 돌아왔어요"하고 떠든 것입니다. 10년이 넘는 세월만에 나오미가 돌아왔습니다. 그 사이 나오미는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이방땅에 가서 새터전을 일구느라 고생했습니다. 거기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것으로 나오미는 어쩌면 베들레헴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는 나오미보다 훨씬 더 나이들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베들레헴 온 성읍이 그들로 인해서 떠들었습니다. 반갑고 기뻐서 그랬을 것입니다.
떠든다든지 큰 소리가 난다든지 하는 표현을 성경 몇 군데서 찾아보십시다.
삼상 4: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 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왕상 1:45,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이 기혼에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고 무리가 그곳에서 올라오며 즐거워하므로 성중이 진동하였나니 당신들에게 들린 소리가 이것이라."
미 2:12, "야곱아 내가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정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양떼같게 하며 초장의 양떼 같게 하리니 그들의 인수가 많으므로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며."
상기 구절 모두 기쁘고 즐거워서 큰 소리를 지르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이 보여준 두번째 반응은, 나오미에게 와서 질문을 한 것입니다.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정말 나오미가 왔어? 네가 정말 나오미냐?"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나오미의 옛친구들이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도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은 선한 목자의 심정도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쓰라린 상처를 안고 교회를 찾는 이들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 새가족을 환영하는 우리의 모습 또한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20∼21절을 보면 동네 사람들은 반가워하는 반응을 보이지만 나오미의 반응은 전혀 상반됩니다.
1:20∼21,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나오미는 십수 년 만에 다시 정든 고향 땅에 돌아왔습니다. 옛날 이웃 친구들과 함께 거닐던 거리, 자신의 두 아들이 어릴 때 뛰어놀던 거리를 바라볼 때 여러분같으면 어떻겠어요? 감개가 무량할 것입니다. 눈물을 왈칵 쏟을 것입니다. 나오미가 바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기쁘게 반기는 동네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나오미의 뜻은 "즐거움, 희락"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오미는 마음이 하나도 즐겁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마라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마라라는 말은 "괴로움"이란 뜻을 가진 말입니다.
나오미가 왜 그렇게 괴롭습니까? 그 이유가 20절 하반부에 나옵니다.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어떻게 보면 나오미는 자기의 슬픈 상황을 모두 하나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 같지만 단순히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삶의 주관자가 누구라는 것입니까?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에,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하나님 앞에서 솔직했습니다. 시편에 보면 이런 말이 자주 나옵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러시겠습니까? 악인이 이렇게 번영하고 의인이 괴로움을 당합니다." 이런 고백이 하나님 앞에 솔직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시 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 35:17,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리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시 41:5,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또 나오미는 사람 앞에서도 전혀 꾸밈이 없었습니다. 자기의 슬픔을 그대로 보입니다. "나는 지금 괴롭다, 이렇게 어려워졌다." 보통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자기의 약점을 감추려고 애를 씁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어려운 현실이나 약점을 들키면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 앞에서 꾸미고 가식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룻이 하나님 앞에 전적인 헌신의 한 표본이라면, 나오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직하고 진실하고 솔직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나오미 생각에 하나님이 자기를 심히 괴롭게 했는데 어떻게 괴롭게 했다는 것입니까?
룻 1: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두 가지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풍족하게 나간 것"과 하나는 "비어 돌아온 것"입니다. "풍족하다"는 것은 양식이 풍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서 풍족하다는 것입니다. 나갈 때 혼자 나간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는 남편이 있었고, 든든한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여인으로서 더할 나위없이 풍족했는데 돌아올 때는 비어 돌아왔습니다.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네 명이 나갔는데 혼자 돌아왔습니다. 이 모든 일이 누구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습니까?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에 의해서라는 것입니다. 삶의 주관자가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기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나오미라는 이름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런 자기의 상황에 맞는 마라라는 이름으로 부르라고 합니다.
나오미와 룻이 함께 돌아와서 어디에 거했을까요? 엘리멜렉의 옛집에 거했을까요, 아니면 남의 집을 얻어 임시로 살게 되었을까요? 또 베들레헴 사람들이 나오미와 같이 온 룻에 대해서는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까요? 성경 저자는 22절에서 그런 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나오미와 함께 온 여인을 간단하게 소개해줍니다.
1: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이름은 룻, 출신은 모압, 나오미와의 관계는 며느리, 이것이 다입니다.
나오미와 룻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모압 지방에서 왔습니다. 나오미가 룻과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왔다는 말 다음에 보면 룻기의 내용상 아주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돌아온 것이 언제였습니까?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이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돌아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1:1에 나오미가 베들레헴을 떠날 때는 어떠할 때였습니까? 그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돌아올 때는 보리를 추수하는 시기였습니다. 그것도 추수가 막 시작되었을 때입니다.
2:23,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 지역에서는 보리 추수가 끝나자마자 밀 추수가 시작됩니다. 보리 추수는 4, 5월 경에 하고, 밀 추수는 5, 6월 경에 합니다. 추수 때라고 하면 우리에게 무엇인가 풍족하고 넉넉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나갈 때는 흉년이 들어 참 쓸쓸하게 나갔습니다. 그런데 돌아올 때는 추수할 때였습니다. 만약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면 어떨지 생각해봅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올 때는 찬 바람이 불 때였더라."
을씨년스럽고 황량합니다. 이렇게 되면 나갈 때보다 더 암담한 상황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착할 때는 보리 추수 시작할 때였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즐겁고 희망이 있고 일이 잘될 것 같은 예감을 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흉년을 당할 때도 있고, 또 보리 추수 시작할 때를 맞이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흉년일 때나 보리 추수를 시작할 때나 항상 우리를 돌보시고 거느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공했다고 교만할 필요도 없고,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실망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때로는 햇빛을 주실 때도 있지만 때로는 비를 주실 때도 있습니다. 1년 365일 내내 햇빛만 든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땅은 사막이 되어버려서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서 적절하게 비를 주시기도 하고 햇빛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어려울 때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근심, 걱정, 불안, 초조, 공포를 믿음으로 다 날려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저들의 마음속에 이런 것들이 틈타지 못하도록 마음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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