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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룻2: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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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상훈 목사 |
참고 : | 승동교회 http://www.seungdong.or.kr |
승동교회 박상훈 목사 룻기강해설교 제10강 보아스의 밭에서
룻기 2:3∼7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뉘 소녀냐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구약의 율법을 보면 가난한 자들이 이삭을 줍는 일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주울 수 있는 때는 추수가 다 끝난 다음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룻은 베는 사환들의 뒤를 따라서 이삭을 줍고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어떻게 해서 룻이 그와 같이 특별한 은총을 입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2: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우연히"라는 말은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도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가 누구의 밭인지 이런 것을 따지지 않고 아무런 생각 없이 가서 이삭을 주우려고 하는데 그곳이 보아스에 속한 밭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을 보면 보아스를 가리켜 단순히 보아스라 하지 않고 보아스를 설명해서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룻기의 저자는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친족에게 주어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려고 한 것입니다. 엘리멜렉의 친족으로서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남은 가족인 나오미와 룻에게 사회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려고 한 것입니다. 이 책임 때문에 룻과 보아스가 연관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20,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이스라엘 사회에서 친족에게는 친족의 잃어버린 기업을 되찾아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레 25:25,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해서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율법입니다. 예를 들어서 형편이 어려워져서 제가 가꾸고 살아온 땅 일부를 팔았습니다. 그러면 제 친척 가운데 형편이 괜찮은 사람이 그 밭을 사서 제게 돌려주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친척끼리 서로 사랑하면서 도와주고 보호해주는 아름다운 모습이 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보아스는 단순한 보아스가 아닙니다.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떠난 그 땅을 다시 자기에게 돌려줄 책임이 있는, 또 권리가 있는 자신의 친족입니다.
드디어 보아스가 등장합니다.
2: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4절 초반부에 "마침"이라고 한 말은 3절에 나오는 "우연히"라는 단어와 통합니다. 우연에 우연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마침 보아스가 신기하게도 베들레헴에서 왔습니다. 정말 단순히 우연일까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우연이지만, 사람의 의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면 절대로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배후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를 하신 것입니다.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러서 룻과 보아스가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룻은 참으로 적절한 장소에 갔습니다. 자기가 가려고 간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또 적절한 때에 그곳에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섭리를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일을 많이 겪지 않습니까? 정말 우연히 그런 일이 생긴 것 같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자기 밭으로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렀습니다. 아마도 일꾼들이 일을 제대로 하는지 감독하고 열심히 일하라고 격려하기 위해서 왔을 것입니다. 보아스가 이곳에 와서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인사를 했습니까?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는 신앙이 돈독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안녕하시오? 일들 잘하시오"라고 인사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신앙적인 인사를 했습니다. 그럴 때 일꾼들도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좋은 사람은 이렇게 주변에 좋은 감화를 끼칩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귀되 신앙적인 인물들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복을 줍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받을 복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먼저 복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복 있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시편 1편에서도 받을 복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지 않고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복 받을 사람이 되면 자동적으로 복이 따라옵니다. 꼬마가 아버지에게 돈 10만원을 달라고 하면 줍니까? 물론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장성해서 10만원이 필요한 때가 되면 아버지가 다 알아서 줍니다. 마찬가지로 "주여, 제게 복을 주옵소서"하고 간구하기에 앞서서 내가 과연 복 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보아스가 일꾼들에게 뭐라고 인사했습니까?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빌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외에 다른 것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갓난 아기들이 가장 행복해 하는 때는 엄마 품에 안겨 엄마의 젖을 물고 있을 때라고 합니다. 그때는 갓난 아기의 마음 속에 어머니가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어머니의 임재가 충만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아무런 걱정 근심없이 아기는 어머니 품안에서 평안히 잠을 잡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큰 시험 환난의 바람이 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행복합니다. 평안합니다.
시 23편을 읽어봅니다. 읽으면서 가장 중심되는 구절을 찾아봅니다. 이 구절을 중심으로 그 앞의 단어 수와 그 뒤의 단어 수가 똑같습니다.
시 23:1-6,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예. 그렇습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구절이 가장 중심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만 하신다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하나님의 임재가 여러분 마음속에 충만히 느껴지시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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