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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14: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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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강재식 목사 |
참고 : | 구미등대교회 |
코드 J를 맞춰라
본문: 로마서14:8-9
"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
옛날 어느 한 청년이 아름다운 젊은 여성과 결혼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청년이 길모퉁이에 서 있는데 고삐 풀린 말이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태운 채로 미친 듯이 질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청년은 뛰어나가 말고삐를 잡고 늘어져 마침내 세웠지만 그는 말발굽 아래 짓밟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새파랗게 질려 뛰어 내려온 약혼녀를 보며 청년을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우리는 흑암의 죄라는 미친 듯이 질주하는 말의 뒤에 묶여 꼼짝없이 사망과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보살피지 않으시고 갈보리산 위로 오르셔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를 사랑했노라'고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님에 대해서 예언하기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53:4-6)
예수님이 슬픔과 고난과 찔림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바로 나의 질고와 허물과 죄악 때문이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죄 때문에 아무런 죄는 없으신 예수 님께서 그 엄청난 고초와 죽음을 당하셨고, 그로 인해 나는 살았습니다. 영원한 형벌을 면하여 영생을 얻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데서 부터 말입니다. 여기에 나의 공로는 전혀 없고 순전히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되어졌습니다.
제가 오늘 제목을 "코드J를 맞춰라"라고 하였는데 J는 Jesus 즉 예수를 말합니다. 어느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로 인해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즉 내 삶이 바로 이 J코드에 맞춰진 것입니다.
마치 어떤 기계가 아무리 코드를 꼽아도 작동이 안 되다가 한 기계전문가가 와서는 그 기계에 맞는 새 코드를 만들어 주므로 그 코드에 꼽는 순간 작동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기계는 항상 전문가가 만들어준 그 코드에 꽂아야만 작동이 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어느날 성령님은 나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내 삶을 예수 코드에 꽂히게 하시고 새로운 인생 즉 거듭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죄 사함 받아 의롭다 인정도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도 부르고, 천국백성이 되어 성도라는 칭호도 주어지고, 하나님께 예배도 하고, 기도도 하고, 찬송도 하는 인생이 되는 J코드가 나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땅히 삶의 코드가 항상 J코드에 맞추어 살아야 행복한 삶, 형통한 삶이 이루어지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내 인생의 코드가 사탄의 코드에 꽂혀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미움, 시기 질투, 다툼, 분냄, 악독, 비방등이 내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인정하십니까? 그러나 내 인생이 예수 코드에 꽂히고는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온유, 충성, 절제가 쏟아집니다. 아니라고요? 그런 것이 내 삶에서 나오지 않는다고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코드가 잘못 꼽혀 있습니다. 다시 사탄에게 코드를 꼽았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오늘 본문에 인생을 예수 코드에 꼽고 사는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혹 그것은 너무하다.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이는 '예수를 믿어도 너무 빠지지 마라! 인생 망칠지 모르니까!'라고 합니다. 또 어떤 성도들은 그런 말을 듣고 그게 그런가? 하고 적당히 자기가 조절하며 신앙생활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저 안 잊어버릴 정도로 주일예배나 나가고, 어쩌다가 행사가 있으면 나가고, 스스로 깊이 빠지지 않게 적당히 조절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코드를 예수에게 꽂았다가 또 세상에 꽂았다가, 사람에게 꽂았다가, 자신의 생각에다 꽂으므로 스스로 잘 조절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아주 위험천만의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고요? 9절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즉 예수 님은 죽었다가 살아 나신 분이시기에 산 자와 죽은 자의 주인이십니다.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으면, 예수 님께서 살아도 책임지고, 죽어도 책임진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누가 여러분들의 인생을 책임집니까? 누가 살립니까? 죽으면 누가 책임집니까? 지난주에 말씀드렸지만 시편62:9절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니 저울에 달면 입김보다 가벼우리라"
시편146:3-4 "너희는 힘있는 고관을 의지하지 말며,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베드로전서1:24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라고 하였지 않습니까!
그 어떤 인생도 나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님만이 책임질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산 자의 죽은 자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살아도 주 위해, 죽어도 주 위해 사는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전적으로 주를 믿고 의지하는 삶이겠지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보면
1. 그 분의 말씀에 100% 순종입니다.
'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 영원토록 주를 찬송하리라' 그 어떤 말보다도, 그 누구의 말보다도 성경말씀이 최우선임을 확실히 하시기 바랍니다.
2. 그 분의 삶을 본 받아 사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1:6 "너희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서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느니라"고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주를 본 받는 삶의 첫 번째는 섬김이고 그 다음은 나눔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희생이며, 이것을 우리는 십자가를 진다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결과는 영혼의 구원입니다.
예수 님의 삶은 요약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김과 나눔에는 자신의 낮춤이 있어야 합니다. 섬김이라는 것은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하는 행위인데, 자신을 낮추지 아니하면 절대로 섬김이 될 수 없습니다. 온전한 나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 님은 철저히 낮아졌는데 얼마만큼인고 하니! 빌립보서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최고 높은 자리에서 최고 낮은 자리까지 낮추셨는데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조금만 자기가 무시당했다 싶으면 길길이 뛰고, 조금만 자기가 남보다 못한 것으로 여겨지며 난리를 피우지 않습니까? 왜그런지 아시지요? 코드가 빠졌거나, 엉뚱한데 꽂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코드가 코드J에 꽂혀져 있습니까? 그래서 입에서 찬양이 마음에서 기쁨이, 행동에서 선함이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코드를 점검하세요.
/강재식 목사
본문: 로마서14:8-9
"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
옛날 어느 한 청년이 아름다운 젊은 여성과 결혼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청년이 길모퉁이에 서 있는데 고삐 풀린 말이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태운 채로 미친 듯이 질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청년은 뛰어나가 말고삐를 잡고 늘어져 마침내 세웠지만 그는 말발굽 아래 짓밟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새파랗게 질려 뛰어 내려온 약혼녀를 보며 청년을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우리는 흑암의 죄라는 미친 듯이 질주하는 말의 뒤에 묶여 꼼짝없이 사망과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보살피지 않으시고 갈보리산 위로 오르셔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를 사랑했노라'고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님에 대해서 예언하기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53:4-6)
예수님이 슬픔과 고난과 찔림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바로 나의 질고와 허물과 죄악 때문이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죄 때문에 아무런 죄는 없으신 예수 님께서 그 엄청난 고초와 죽음을 당하셨고, 그로 인해 나는 살았습니다. 영원한 형벌을 면하여 영생을 얻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데서 부터 말입니다. 여기에 나의 공로는 전혀 없고 순전히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되어졌습니다.
제가 오늘 제목을 "코드J를 맞춰라"라고 하였는데 J는 Jesus 즉 예수를 말합니다. 어느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로 인해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즉 내 삶이 바로 이 J코드에 맞춰진 것입니다.
마치 어떤 기계가 아무리 코드를 꼽아도 작동이 안 되다가 한 기계전문가가 와서는 그 기계에 맞는 새 코드를 만들어 주므로 그 코드에 꼽는 순간 작동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기계는 항상 전문가가 만들어준 그 코드에 꽂아야만 작동이 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어느날 성령님은 나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내 삶을 예수 코드에 꽂히게 하시고 새로운 인생 즉 거듭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죄 사함 받아 의롭다 인정도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도 부르고, 천국백성이 되어 성도라는 칭호도 주어지고, 하나님께 예배도 하고, 기도도 하고, 찬송도 하는 인생이 되는 J코드가 나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땅히 삶의 코드가 항상 J코드에 맞추어 살아야 행복한 삶, 형통한 삶이 이루어지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내 인생의 코드가 사탄의 코드에 꽂혀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미움, 시기 질투, 다툼, 분냄, 악독, 비방등이 내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인정하십니까? 그러나 내 인생이 예수 코드에 꽂히고는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온유, 충성, 절제가 쏟아집니다. 아니라고요? 그런 것이 내 삶에서 나오지 않는다고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코드가 잘못 꼽혀 있습니다. 다시 사탄에게 코드를 꼽았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오늘 본문에 인생을 예수 코드에 꼽고 사는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혹 그것은 너무하다.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이는 '예수를 믿어도 너무 빠지지 마라! 인생 망칠지 모르니까!'라고 합니다. 또 어떤 성도들은 그런 말을 듣고 그게 그런가? 하고 적당히 자기가 조절하며 신앙생활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저 안 잊어버릴 정도로 주일예배나 나가고, 어쩌다가 행사가 있으면 나가고, 스스로 깊이 빠지지 않게 적당히 조절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코드를 예수에게 꽂았다가 또 세상에 꽂았다가, 사람에게 꽂았다가, 자신의 생각에다 꽂으므로 스스로 잘 조절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아주 위험천만의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고요? 9절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즉 예수 님은 죽었다가 살아 나신 분이시기에 산 자와 죽은 자의 주인이십니다.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으면, 예수 님께서 살아도 책임지고, 죽어도 책임진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누가 여러분들의 인생을 책임집니까? 누가 살립니까? 죽으면 누가 책임집니까? 지난주에 말씀드렸지만 시편62:9절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니 저울에 달면 입김보다 가벼우리라"
시편146:3-4 "너희는 힘있는 고관을 의지하지 말며,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베드로전서1:24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라고 하였지 않습니까!
그 어떤 인생도 나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님만이 책임질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산 자의 죽은 자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살아도 주 위해, 죽어도 주 위해 사는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전적으로 주를 믿고 의지하는 삶이겠지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보면
1. 그 분의 말씀에 100% 순종입니다.
'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 영원토록 주를 찬송하리라' 그 어떤 말보다도, 그 누구의 말보다도 성경말씀이 최우선임을 확실히 하시기 바랍니다.
2. 그 분의 삶을 본 받아 사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1:6 "너희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서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느니라"고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주를 본 받는 삶의 첫 번째는 섬김이고 그 다음은 나눔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희생이며, 이것을 우리는 십자가를 진다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결과는 영혼의 구원입니다.
예수 님의 삶은 요약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김과 나눔에는 자신의 낮춤이 있어야 합니다. 섬김이라는 것은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하는 행위인데, 자신을 낮추지 아니하면 절대로 섬김이 될 수 없습니다. 온전한 나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 님은 철저히 낮아졌는데 얼마만큼인고 하니! 빌립보서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최고 높은 자리에서 최고 낮은 자리까지 낮추셨는데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조금만 자기가 무시당했다 싶으면 길길이 뛰고, 조금만 자기가 남보다 못한 것으로 여겨지며 난리를 피우지 않습니까? 왜그런지 아시지요? 코드가 빠졌거나, 엉뚱한데 꽂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코드가 코드J에 꽂혀져 있습니까? 그래서 입에서 찬양이 마음에서 기쁨이, 행동에서 선함이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코드를 점검하세요.
/강재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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