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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5: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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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창인 목사 |
참고 : | 광성교회 - 김창인 목사 제2설교집 -천국의 배달부/모퉁이돌 에서 |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은 자가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 (엡 5:1-3)
에베소서 5장 1절부터 14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성도의 마땅한 바"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3절) 하신 말씀 그대로 제목을 정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각계 각층의 사람을 총망라하고 있습니다. 또한 각계 각층의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네들의 마땅히 할 일이 있습니다. 예컨대 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선생님들 나름대로 마땅히 해야 될 일이 있고, 학생은 학생대로 해야 될 마땅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정에 들어와서 부모는 부모로서 해야 될 일이 있고, 자녀는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또한 사업가는 사업가 나름대로 마땅히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외채를 많이 얻어다가 국민이야 살든 죽든, 나라야 망하든 흥하든, 나 혼자만 잘 되면 된다는 이런 자세로 사업하면 곤란합니다. 사업가는 사업가 나름대로 하나의 공익성을 지니고 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사업가로서 마땅히 해야 될 도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할 일이 있습니다. 이처럼 각계 각층의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마땅히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이기에 성도로서 꼭 해야 될 마땅한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I. 사랑을 입는 일 (1-4절)
먼저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될 일 즉 마땅히 해야 될 일 즉 마땅한 바가 무엇이야 하면 사랑을 입는 일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베풀어야지 사랑을 받고 사랑을 입는 일이 어떻게 마땅한 일입니까? 하고 반문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번 바꾸어서 생각해 보면 그 뜻이 명확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사랑을 입어야지 미움을 입으면 어떻게 합니까? 즉 사랑을 받아야지 미움을 받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베풀기 전에 사랑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베풀 줄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낳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아서 사랑이란 받아 본 일이 없는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알아서 사랑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먼저 사랑을 입는 일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곳에 큰 부자가 있었는데 좋은 땅에 극상 품 포도나무를 심고 산울로 두르고 망대를 짓고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농부가 들어오게 되면 전혀 불편이 없도록 온갖 준비를 다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불쌍한 농부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에게 사랑을 베풀어서 아무 대가없이 들어가 마음껏 일하고 먹게 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지극한 사랑을 베풀었는지 모릅니다. 다만 가을에 추수한 다음에 세만 바치면 되는 것입니다. 농부는 기꺼이 응낙을 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1년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하고 보니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워낙 수확이 많은지라 세를 바칠 것을 생각하니 아까워졌습니다. 바칠 생각을 안 합니다. 그래서 주인이 종을 보내어 세를 바치라고 독촉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농부는 종을 때려 죽였습니다. 계속 종을 보냈으나 여전히 때리고 또 죽였습니다. 주인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그 악한 농부를 진멸해 버리고 세를 제 때에 낼 농부에게 주었다" 하는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으라고 한 소리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불쌍한 농부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극진히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도중에 마음이 변했습니다.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 선지자를 보내어 그 약속을 지키라고 계속 말씀으로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가 오는 대로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외아들을 보냈더니 외아들까지 죽여 버렸습니다. 그래 서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진멸 하시어 이 천년 동안 나라 없이 전 세계를 유랑하면서 갖은 수모와 갖은 어려운 고초를 다 당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에는 그렇게 사랑을 입었었는데 나중에는 사랑 받을 일은 하나도 안 하고 미움 받을 짓, 망할 짓만 골라서 행하다가 마지막에는 진멸 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받고 사랑을 입는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먼저 하나님께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하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도 사랑 받는 일을 많이 하 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 사랑의 내용을 본문이 가르쳐주는 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 하나님의 사랑(1절)
'우리가 누구의 사랑을 입어야 되느냐?' 할 때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되고" 즉 사랑을 입는 자녀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의 사랑을 입으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됩니다. 사람에게는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곤란합니다.
사람에게는 아무리 법 없이 살 수 있다고 칭찬을 받고 사랑을 받아도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다면, 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면 그것은 성도로서 전혀 합당치 않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꼭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본받습니까? 더욱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한 절만 거슬러 올라가면 4장 마지막 절에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본받을까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리고 5장에 와서 "그러므로"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윗 절과 연결을 시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용서하라는 것이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믿음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하나님이 과거는 없었던 것처럼 하여 용서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과거는 전혀 묻지도 않고 잊어버릴 정도로 깨끗이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 것처럼 남에게 용서를 베풀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마땅히 할 바입니다.
② 예수님의 사랑(2절)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어떤 사랑을 입는가? 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즉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는 죽었다는 말입니다.
미우라 아야꼬라 하는 일본 여가가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쓴 수필 한 토막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그 여자의 남편은 나이가 그녀보다 몇 년 아래입니다. 그런데도 남편이 끔찍하게 그녀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도 그 남편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이렇게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깊은 산골 아주 아름다운 자연 속을 거닐고 있을 때에 곰이 갑자기 나타나서 잡아먹겠다고 하면 자기는 곰한테 달려들면서 날 잡아먹는 동안 당신은 빨리 도망가세요."라고 하지 못하겠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남편 뒤에 숨었다가 곰이 남편을 잡아먹는 동안에 자기는 도망을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그것이 솔직한 심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곰과 같은 사망 혹은 저주에 자기를 던져버리고 우리를 살려 내셨다는 뜻입니다. 그 사랑을 입은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랑을 받고 또 베푸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입니다.
③ 감사하는 사랑(3-4절)
다음에는 감사하는 사랑입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랑 이야기를 하다가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두고두고 감사할 그런 사랑을 우리가 체험하고 그런 사랑을 말할 수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옛날 모세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유명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에 참으로 어렵게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공주의 아들로 자라다가 나중에는 미디안에 가서 40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였습니다. 망명생활을 하다가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서 부름을 받기까지 40년 동안 그가 믿음생활을 잘한 것만은 아닙니다. 신통치 못한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 불러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모세는 그 때 그 일이 너무너무 고마워서 그것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기 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 모아 놓고 축복해 줄 때 가장 훌륭한 요셉 지파를 앞에 놓고 "가시떨기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가 요셉의 머리에 임할지라"고 축복했습니다. 40년 전 자기가 미디안 광야의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름 받던 그 때 그 사랑을 잊지 못해서 죽을 때까지 기억하고 있다가 죽을 때도 그 간증을 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그만큼 두고두고 감사할 하나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이것이 귀합니다.
그러면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사는 동안 믿음생활이 아주 시원치 못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들을 낳으면 난지 팔일 만에 할례부터 행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기의 아들들이 다 장성했을 때까지 아들 형제에게 할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사 애굽으로 돌아갈 때에 하나님이 목덜미를 붙잡아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는데 아내가 알아차리고서 차돌로 아들 형제의 양피를 베어 모세 앞에 던졌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엉터리로 믿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를 세워 이스라엘의 최고의 지도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것이 너무너무 고맙고 감격스러워 죽을 때까지 그 소리를 하고 죽은 것입니다. 그 어려운 중에서도 모세가 항상 하나님께 충성한 근본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감사할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일, 즉 죽을 때에라도 잊지 못하고 감사할 수 있는 그 사랑을 입는 일이 성도로서 마땅한 바입니다. 그 사랑을 입은 자 만이 시험과 환난을 이기고, 남에게도 베풀 수 있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II. 믿음으로 사는 일 (5-10절)
둘째로 믿음으로 사는 일입니다. 우리 사람의 육신은 떡으로 삽니다. 떡 없이는 못삽니다. 사람의 육신은 떡으로 만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에게 좋은 옷감을 주는 누에는 뽕으로 삽니다. 누에에게 뽕 아닌 다른 것 즉 뽕 보다 더 좋은 것을 준다 해도 뽕이 아니면 못 삽니다. 누에는 뽕으로만 만족합니다. 그리고 송충이는 솔잎으로 만 삽니다. 아무리 다른 좋은 것을 갖다 줘도 송충이는 못삽니다. 솔잎으로만 삽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되느냐 하면 바로 믿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믿음이 아니면 말하지 않고, 믿음이 아니면 정하지 않고 동하지 않는, 믿음으로만 사는 사람, 이것이 곧 믿는 사람입니다. 누에가 뽕으로 살고, 송충이가 솔잎으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이론도 아닙니다. 믿음은 곧 행동입니다. 믿음은 곧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 것인가? 하는 것을 본문이 가르쳐 준대로 찾아보겠습니다.
① 순종하는 믿음 (5-7절)
첫째로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 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5절).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6절). 순종치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7절). 참예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불순종하는 일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말은 소극적인 표현이요, "하라"하는 말은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나쁜 짓 하지 말라 하는 말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좋은 짓, 착한 일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불순종하는 일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을 적극적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순종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즉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② 변화되는 믿음 (8-9절)
다음에는 변화되는 믿음으로 살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8상반절). 분명히 "전"이라고 하는 시제가 나옵니다.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또 분명히 "이제"라는 시제가 나왔습니다. "주안에서 빛이라." 옛날에는 어두움의 생활을 했는데 오늘날에는 빛의 생활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낮과 밤만큼 변화가 됐다는 뜻입니다.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8하반절-9절)는 말씀은 전에는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뒷골목에 앉아서 창피해서 얼굴도 들지 못할 일을 서슴없이 했었습니다. "그런 너희가 이제는 빛이라"는 말씀을 보면 천하에 누가 봐도 정말 자랑스러운 일을 하는 그런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긴 사는데 무슨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까?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 가는 믿음, 옛날과 지금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이 달라지는 그런 변화되는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③ 분별하는 믿음 (10절)
다음에는 분별하는 믿음입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썼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게 된 데는 큰 뜻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과거에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분별을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실수를 범했었습니다. 여기서 시험하여 보라는 말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이런 말을 뼈아프게 했습니까?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을 제일 잘 믿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재산을 빼앗고 옥에 가두고 때려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 인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 양심에 조금도 가책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쁨으로 자행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 깨우침을 받고 보니 자기가 엄청난 잘못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슬프게 해드리고 괴롭게 해드리면서도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줄 알았었기 때문입니다. 분별을 못한 탓이었습니다. 즉 어느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인들을 보고 내 과거를 너희가 알지 않느냐? 그러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분별하지 못하게 되면 믿음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괴롭게 해 드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력 있는 신앙, 이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우리 한국교회 특별히 한국 장로교회의 아버지라 할 만한 분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기 전에는 약 장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약국을 경영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때 매달 수입이 80원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돈 가치로는 굉장한 액수였습니다. 실컷 먹고 입고 쓰고도 남는 돈이었습니다. 마음껏 쓰고도 좋은 일도 할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기도하고 은혜를 받으니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돈 벌어서 먹고사는 것으로만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결국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매달 80원이나 되는 수입을 포기하고 목사가 될 생각을 하니 용기가 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 평양에 있는 장대현 교회에서 전도사로 오라는 청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활비는 6원을 준다는 것입니다. 6원과 80원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나는 돈입니다. 80원을 포기할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히고 또 80원 때문에 전도사를 그만 둘까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워 견딜 수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이 참 훌륭합니다. 부인이 "당신의 마음에 느껴지는 소명이 그렇게 뜨겁다고 하면 80원이 문제냐 그 이상의 것이라도 포기하고 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부인의 말에 힘을 얻었습니다. 전도사로 부임했고 신학교에 갔고 목사가 되어서 우리 한국 장로교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가 평생에 교회를 세운 것이 60개가 넘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례를 베푼 사람이 3천 명이 넘습니다. 그리고 그가 부흥회를 다니면서 얻은 결신자가 6만 명입니다. 그 당시 장로교 감리교 통틀어서 삼십만 명일 때 그랬으니 대단한 숫자입니다. 그가 매달 80원이라는 거금을 포기하고 6원짜리 전도사로 갈 때 그는 "이제부터는 믿음으로만 산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6원을 가지고 자녀교육을 못 시킨 것도 아니요, 굶은 것도 아니요, 할 것은 다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입니다.
III. 책망하는 일 (11-14절)
다음에는 책망하는 일입니다. 책망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책망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다윗의 사건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릴 때마다 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다른 소리를 안 합니다. "하나님, 이 아들을 다윗처럼 꼭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 되게 해 주세요" 하고 끝냅니다. "대통령이 되게 해주십시오, 시장의 되게 해 주십시오"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나로 왕 되게 해 주십시오","나 대통령이 되게 해 주십시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살 때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하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적합한 자리에 갖다 앉혀 놓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에는 한 번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이고 그 여자를 빼앗았습니다. 그 때 나단이라고 하는 별로 이름도 없는 선지자가 와서 책망을 했습니다. 그럴 때 다윗은 그 앞에 꿇어 엎드리고 통회를 하고, 자복을 했습니다. 성경은 다윗을 성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성군이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잘못을 했지만 잘못했을 때 책망을 받아들일 줄 아는 왕이었기 때문에 그를 성군이라고 한 것입니다. 잘못한 것을 깨닫고 회개할 줄 아는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런 면에서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보다 더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입니다. 남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더구나 왕에게 말입니다. 그러나 나단은 마땅히 해야 될 말이기에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윗이 바로 섰고 나라가 바로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책망이라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책망이 귀한 책망인가 하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찾아봅시다.
① 참여하지 말고 책망 (11-12절)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첫째로는 참여하지 말고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부끄러운 일에 참여해 놓고 책망하면 그것은 책망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의 일에는 절대 참여하지 말고 책망을 하라는 것입니다.
② 구원을 위한 책망 (13절)
둘째로는 구원을 위한 책망 즉 개종을 위한 책망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우리말 성경을 보면 이해가 잘 안 갑니다. 여러 번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아니합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 드립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외도를 하고 첩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하고 자랑거리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어두움의 일이라 그럽니다. 그런 사람에게 깨우쳐 책망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잘못을 뉘우치고 모든 것을 해결하고 교회로 오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될 때에 빛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개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하는 말은 바로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책망할 때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책망해야 합니다.
③ 말씀으로 책망(14절)
마지막으로는 말씀으로 책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 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구약 성경을 인용해서 이렇게 책망하라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책망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감정과 기분을 가지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의 이해 타산을 가지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라는 것입니다. 책망의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를 하면서 감사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발람 선지자는 말 못하는 나귀에게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이 나귀를 통해서 책망을 안 하시고 내 아내를 통해 서 책망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내 아내가 여러분들 앞에서는 나한테 잘하는 것 같아도 집에 가면 나를 얼마나 못살게 구는지 모릅니다. 당신 목사노릇 그렇게 하려면 그만 두라고 합니다. 어떻게나 가시노릇을 하는지 모릅니다. 저의 눈에 가시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잘못한 것을 알게 되면 그 잘못을 들고 돌아다닐 것입니다. 이 집사의 집, 김 집사의 집, 박 집사의 집으로....... 그러나 우리 집사람은 나보고만 이야기하지 다른 사람은 알까봐 쉬쉬합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닙니까! 이것이 진짜 책망입니다. 우리가 이런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구원을 위해서 어두움의 일을 책망하면 여러분들의 남편과 가정과 온 나라가 바로 서고 구원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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