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의 일

유다서 김창인 목사............... 조회 수 2677 추천 수 0 2010.10.29 18:03:19
.........
성경본문 : 유1:17∼23 
설교자 : 김창인 목사 
참고 : 광성교회 - 김창인 목사 제2설교집 -천국의배달부/모퉁이돌 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譏弄)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당(黨)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궁휼을 기다리라」 <유 1 : 17∼21>

17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계속 말하다가 20절에 가서 또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부른 다음에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유다는 본서를 이런 내용으로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자들의 할 일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랑하는 자라고 할 때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입니까? 본서는 유다가 썼습니다. 이 유다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가 있고 가룟 유다가 아닌 유다가 또 있습니다. 그런데 본서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그 유다가 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동생이 여럿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신 다음에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을 네 명이나 더 낳았습니다. 그 동생들 중에 첫 동생이 야고보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 되었던 사람 즉 야고보서를 쓴 사람입니다. 그리고 맨 막내가 유다입니다. 유다 역시 다른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 생전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다음에는 예수님을 믿고 오순절 교회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 되기도 합니다. 본서를 쓴 이 유다는 바로 예수님의 막내 동생인 유다입니다.

이 유다, 즉 감독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보고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유다 감독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1절에 그것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까? 그 부르심을 입은 자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란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하나님께서 불러낸 사람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사랑을 해주고 둘째로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첫째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둘째로는 유다 감독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의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려고 합니다.

 

I. 기억하는 일(17∼19)

 

1) 말씀을 기억하는 일(17절)

먼저 "기억하라"하였는데 기억하는 일 중에 첫째는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즉 사도들의 한 말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이 한 말이란 무엇입니까? 사도들이 한 말이라 해서 사도들이 제 마음대로 한 말이냐 하면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 사도들은 3년 4개월 동안 매일같이 예수님과 함께 지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떠 먹이듯이 가르치고 전해 준 복음을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것은 비록 사도들이 가르치고 전해주는 말이긴 하지만 내용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사도들이 전해 준말을 기억하라 하는 말을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누구의 이름도 아니고 어떤 사건도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 버려도 예수님의 말씀 즉 성경 말씀은 오래오래 기억하고 살아야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려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선생님이 가르쳐 줄 때 열심히 듣고 그 다음에는 깨우쳐야 됩니다. 그리고 깨우친 다음에는 우래 기억했다가 그것을 생활 속에 적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글을 바로 배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혹은 설교를 통해 깨우침을 받을 때에 열심히 들어야 되고 그 다음에는 말씀을 꼭 깨우치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 후에는 오래오래 기억했다가 생활 중에 그 말씀을 적용시킬 때에 문제가 풀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믿음 생활을 바로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집사님 한 분이 교회에 나오는데 가만히 지켜보았더니 조그만 신약 성경을 하나만 들고나옵니다. 신약성경만 주머니에 넣고 다니니 극장에 가는지 교회에 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 막 들어 올 때 그것을 꺼내 듭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을 읽을 때는 열심히 찾아보아도 구약이라면 아예 멍청하게 앉아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안 가지고 나오니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구약성경은 없이 신약성경만 가지고 집사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다 그 분의 생일 초대를 받아 갔더니 친척들이 많이 왔는데 친척들이 알고 했는지는 몰라도 그 중 한 분이 찬송가와 성경책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한마디 해주고 싶어서, 유다서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유다서는 지금 읽었지만 신약 맨 마지막 요한계시록 바로 전에 한 장밖에 없는 책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디서부터 찾는고 하니, 구약성경 창세기부터 찾아내려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한참을 찾아도 찾지를 못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 그 집사의 부인이 하는 말이 왜 이쪽에서만 찾느냐 저쪽에서 좀 찾아보라고 합니다. 아마 구약, 신약도 모르는지 이쪽, 저쪽 하더군요. 그러니 찾아집니까? 그러니까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하더니 더 못 찾습니다. 나중에 어찌해서 찾기 찾았습니다만 잠잠하고 있으면 체면이나 서지요! 자기 딴에는 체면 세운다고 하는 소리가 "아이고 목사님! 나는 또 유다사라는 줄 알고 구약에서 찾았지요"하더군요. 여러분 유다사는 구약에 있습니까? 제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참 야단났구나, 집사가 저 모양 저 꼴이면 어떻게 하나, 성경을 이렇게 안 읽고 성경을 이렇게 모르는 형편에 무엇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말씀을 읽고, 배우고, 깨우치고, 기억했다가 생활 속에 적용을 해야 합니다.

우리 맏딸이 고등학교 3학년이라 대학 입시를 준비하느라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사가 내 딸만 위해서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교회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모든 아들딸들을 위해 기도할 때 저는 일류대학교 붙여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에만 사천만 인구가 사는데 교인이 천만입니다. 사 분의 일입니다. 천만이 전부 일류대학만 붙여 달라고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입장이 곤란하시겠습니까? 다 일류대학을 붙여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력대로 붙여달라고 하면 됩니다. 여러분! 내 아들딸들이 시험 칠 때 제 실력을 제대로 못 나타내고 시험을 제 실력대로 못 치르니까 문제입니다. 제 실력을 백퍼센트 나타내 보십시오. 그것이면 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우리교회의 아들딸들 공부할 때 열심히 선생님께 배우고 그 다음에는 깨우치고 오래 기억했다가 시험장에 들어가는 날 아는 실력대로 그대로 쓰게 해주십시오"하면 되는 것입니다. 학생이 해야 할 일은 꼭 기억했다가 써먹는 일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꼭 기억했다가 여러분 생활 속에 적용하고 활용해서 문제를 풀고 성공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을 기억하는 일이 첫째입니다.

2) 마지막 때를 기억하는 일(18절)

둘째로는 "마지막 때를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말세가 되면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하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쉽게 설명해 드리면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제멋대로 산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믿는 교인들 중에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멋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기에 제멋대로 살고, 제멋대로 살다 보니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롱을 한다는 기록을 또 보게 됩니다. 기롱이란 말은 우리가 흔히 쓰는 "조롱"이란 말로 바꾸어 생각하면 이해가 빠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있어서 자꾸 조롱을 합니다. 누구를 조롱합니까? 잘 믿고 충성하는 사람들을 조롱합니다. 그러니까 잘 믿고 충성하는 사람에게 "예수를 믿고 그 따위 식으로 믿어야 되느냐? 그렇게 주일날 꼭 나가야 되느냐? 그렇게 충성해서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하느냐?"하며 조롱하는 소리를 합니다. 그러므로 말세에는 교인이 교인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중에 교인들에게 자꾸 상처를 받거든 말세의 징조인 줄 알면 됩니다. 즉 유다 감독이 우리에게 지적해 준 말세의 징조가 바고 이것이로구나 그렇게 알고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마지막 때인 줄로 기억하시고 더 좋은 자리에서 주님 영접할 준비를 해야 되겠다 하고, 준비하며 사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3) 쭉정이를 기억하는 일(19절)

다음에는 쭉정이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조롱하는 사람들, 즉 첫째로, 당을 짓는 자며 둘째로는 육에 속한 자며 셋째로는 성령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잘 믿고 충성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상처만 주고, 믿음이 떨어지면 좋아하고, 자기네와 한 패가 되면 좋아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교회 안에 드나들면서 당을 짓습니다. 패거리를 짓습니다.

교회 안에서 패거리라고 하는 것은 백해무익한 것이요,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것입니다. 남전도회가 있고 여전도회가 있고 청년회가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서 일하지 않고 왜 따로 패거리를 만듭니까? 마귀의 패거리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 힘을 과시하려고 패거리를 짓는 자들 즉 당을 짓는 자들은 육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육신에 속한 짓만 합니다. 모여서 기도하고, 전도하고, 성경공부 하는 것은 그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패거리에 속한 사람들은 육신의 일만 생각하고, 육신에 관한 것에만 관심을 갖고, 육신에 대한 것만 찾고 애쓰기에 육신에 속한 것은 제법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제법 큰 소리도 칩니다. 그런데 막상 있어야 할 성령은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쭉정이가 아닙니까? 겉으로는 제법 가진 것처럼 광채가 나지만 실상 속은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있어야 할 성령은 없고, 말씀은 없고, 은혜는 없다는 그 말입니다. 이것이 쭉정이입니다. 타작마당에서 쭉정이를 보십시오. 전부 불에 태워 버리고 맙니다. 교회 안에서 쭉정이를 갈라놓으려고 교회 안에 환란의 바람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면 누가 쭉정이입니까? 겉은 멀쩡하고 제법 갖추었어도 실속 즉 성령은 없는 사람이 쭉정이입니다. 불에 태워 버릴 수밖에 없고 지옥 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쭉정이가 기승을 부릴 때에는 말세인 줄 기억하고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억할 일은 말씀을 기억하고, 마지막 때에는 기롱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쭉정이의 말로를 기억하고 우리의 믿음 생활을 바로 해야 하겠습니다.

 

II. 건축하는 일(20∼21절)

 

1) 자기를 건축하는 일(20상반절)

20절부터 21절에는 건축하는 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첫째는 자기를 건축하는 일입니다. 20상반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자기의 인생을 건축하는 건축자인데 믿음 위에 건축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집을 지을 때 터를 든든히 하고 집을 지으면 그 집은 견고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집을 잘 지어도 기초가 든든하지 못하면 그 집은 쓰러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일평생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믿는 사람, 그것도 착실히 잘 믿는 사람이 되라 이 말입니다. 믿음 위에다 나를 세우고, 믿음 위에 내 가정을 세우고, 믿음 위에다 내 사업을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펄벅여사가 쓴 책 중에 '대지'(大地)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펄벅은 미국에서 중국에 파송한 선교사의 딸입니다. 이 분은 중국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랐기 때문에 중국을 너무 잘 압니다. '대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해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주인공 왕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가난한 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을에 황씨 성을 가진 부자가 있었는데, 그 집에서 종으로 있던 아랑이라고 하는 아가씨와 결혼을 합니다. 종과 가난한 총각이 결혼하다 보니 처음에는 남의 집 땅을 부쳤습니다. 그러다가 돈을 벌어 땅을 조금씩 사 가지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뭔가 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몇 해 흉년이 계속되는 동안에 망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도시로 나가 인력거를 끌었습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밀며 돈을 벌었습니다. 고생스러웠지만 행복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돈을 많이 모으게 되어 금의환향(錦衣還鄕)하여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때마침 부자 황가 집안이 망해서 집도 팔고 땅도 파는 형편이라 그 집도 사고 땅도 다 사버렸습니다. 그래서 종이 옛날 주인집에 주인으로 들어앉았습니다. 이쯤 되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때 그 남자, 왕릉이 딴 생각을 합니다. 변심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귀하던 아내가 싫어졌기 때문입니다. 땀에 찌들고 온갖 고생에 찌든 모습이 보기 싫습니다. 손을 한번 만져 보아도 터지고 늙고 거칠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젊은 여자가 그리워졌습니다. 그래서 창녀를 자기 첩으로 맞이합니다. 창녀 출신인지라 남자 비위를 얼마나 잘 맞추어 주겠습니까! 그런데도 시원치 않아서 손녀 뻘 되는 젊디젊은 소녀를 또 첩으로 맞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동안 내내 함께 고생한 아내는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남편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돈은 좀 가졌지만 남편을 빼앗긴 그녀가 행복했겠습니까?

이것이 뭘 가르치는지 아십니까? 성공이라 해서 다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공이 오히려 행복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럼 왜 그랬습니까? 성공이라 해서 모두 행복을 빼앗아 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남편에게 믿음이 있었다고 해보십시오. 자신을 믿음 위에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가정을 믿음 위에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한 행복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는 것입니다.

2) 기도로 건축하는 일(20하반절)

두 번째로는 기도로 건축하는 일입니다. 즉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라고 했는데 우리는 건축할 때 기도로 건축해야 됩니다. 나를 쌓아 갈 적에 기도로 쌓아라, 그 말입니다. 즉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산으로 올라가는데 열 두 제자를 거느리고 가다가 아홉 제자는 산밑의 동네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 데리고 산꼭대기로 올라가 기도를 깊이 하는 중에 변화가 되셨고 천국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즉 제자들이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 지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정신을 차리도록 하신 후 산 아래로 내려옵니다. 산 아래에 내려와 아홉 제자들에게 이르렀더니 제자들이 조롱거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와서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하였으나 고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 한 마디로 귀신을 쫓아주시고 집에 들어갔을 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즉 "주님! 우리는 왜 쫓아내지 못합니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얼마 전에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하러 방방곡곡에 보냈을 때에는 우리가 귀신들린 사람에게 말씀 한마디로 명령만 내리면 귀신이 척척 나가더니 그 때는 되던 일이 지금은 왜 안됩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대답하기를,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마 17 : 20)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사건이요 똑같은 물음에 대하여 마가복음 9장 29절에는 '기도하지 않은 까닭이라'고 대답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믿음이 적은 연고요 기도하지 않은 연고 즉 믿음이 적은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뜻은 그 전에 잘되던 일이 지금 왜 안 되느냐? 하면 그것은 기도 안 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 봅시다. 그 전에 잘 되던 사업이 안 됩니까? 기도 안 해서 그렇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기도 안 하면 그 전에 잘되던 일도 지금 안 될 수 있습니다. 즉 전혀 예기치 않았던 망신을 당하고 구경거리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나를 건축해 나아갈 때 꼭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일해야 합니다. 나를 기도로 건축하는 사람 즉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지키며 건축하는 일(21상반절)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했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일을 하라"그런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지키며"라는 말씀은 하나님 사랑이 테두리를 벗어나서 벌받을 짓, 망 할 짓 하지 말며 미움받을 짓 하지말고 하나님의 사랑 받을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유대 나라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부부가 결혼해서 살다가 아이를 못 낳으면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할 절대적인 조건이 됩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한국 사람들 이상으로 족보를 귀중히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야를 보낼 것을 약속하고 허락한 다음부터는 메시야가 어느 족보를 통해 오느냐가 상당한 관심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족보를 귀중히 여겼고 아들이 없게 되면 참 서러워합니다.

한 부부가 랍비에게 찾아왔습니다. 랍비의 판결은 절대적입니다. 아들을 못 낳아서 헤어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랍비가 남편에게 묻기를 아내가 마지막 한 가지 소원을 이야기하면 그 요청을 들어주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남편이 이혼을 하는데 못 들어주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 아내도 아기를 못 낳아 이혼을 당할 수밖에 없는데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럼 그렇게 하겠다고 둘이 모두 약속하고 돌아가서 집안 식구들을 다 모아 놓고 그 동네 장로를 청했습니다. 왜요? 장로는 증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혼 잔치입니다. 이혼 잔치를 베풀고 잘 차려 먹고 마지막으로 부인을 불러 네 소원을 얘기해 보라고 했습니다. 이때 이 여자가 이런 저런 요구를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재산을 달라든지, 쫓겨나지만 한 달에 몇 번만이라도 들려 달라든지, 그밖에도 등등 여러 조건을 많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때 부인이 잠자코 있다가 하는 말이 "요청이 하나 있습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남편은 들어주겠다고 재확인했습니다. "그럼 내 남편을 내게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요청을 들어주기로 했으니 이혼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랍비가 "이혼할 없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둘은 아이 없이 평생 잘 살았더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자로서는 한 밑천 가지고도 남편에게 버림받고 사랑 못 받고 아낌을 받지 못한다면 뭐가 그렇게 좋겠습니까? 차라리 돈이 없을지라도 남편에게 아낌 받고 사랑 받는 여자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 안에 자기를 늘 지키면서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행복합니다.

4) 도움받아 건축하는 일(21하반절)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로 하여금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들 힘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주님의 도움 없이는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 되라"이 이야기를 이번 가을에 더 절실히 느껴집니다. 봄철과 여름철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적당한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셨습니까? 농사가 너무너무 잘되었습니다. 그래서 매스컴을 통해 금년은 풍년 들었다고 얼마나 떠들었습니까? 그러나 가을철에 한 달 내내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일을 본 적이 있습니까? 벼를 세워 둔 곳에 비가 오니 쓰러지고 벤 것은 논에 둥둥 떠서 잠기고 그러다 보니 갑자기 말릴 수도 없고 벼를 겨우 훑어서 찧어 보니 품질이 저하되고 싹이 나서 못 먹게 되었습니다. 벼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느끼고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먹게 해야만 먹는다는 말씀입니다. 농사만 그렇습니까? 사업도 그렇습니다. 사업도 잘 되어 이제는 먹는가보다 했더니 먹지 못하는 일이 왜 그렇게 많습니까? 하나님이 먹게 해야 먹고 누리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도움 즉 예수님의 도움으로 모든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 우리 가정을, 우리 자신을, 우리 사업을 건축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III. 도와 주는 일(22-23절)

 

1) 의심하는 자를 돕는 일(22절)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긍휼히 여긴다는 말과 도와준다는 말은 왜 혼동하느냐 할지 몰라도 긍휼은 도움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내가 보니 저기 아주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때 내가 도와주기는 해야 되지만 도울 힘이 없습니다. 도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말로만 끝나고 마음으로만 끝나 버립니다. 사람은 무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쌍한 사람이 있을 때 말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기만 하면 반드시 도와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긍휼은 반드시 도움을 전제로 합니다.

의심하는 자를 도와주라. 예수를 믿고 싶지만 자꾸 의심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고 싶어 하지만 의심하는 사람들을 도와 주어서 잘 믿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도마라고 하는 제자를 삼년이나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부활한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의 간증을 다 듣고도 못 믿겠다고 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옆구리를 보여 주시고 손의 못 자국도 보여 주시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중에는 그가 어떻게나 열심히 믿었는지 복음을 들고 인도까지 갔다고 합니다. 이 때 복음이 중국 대륙으로 와서 경교(景敎)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경교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의심하는 자를 도와 발로 믿게 하고 잘 믿게 하는 것이 우리들의 해야 할 일입니다.

2) 끌어내어 돕는 일(23절)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이것은 이단에 빠져 헤매는 사람들을 끌어내라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단둘이서 살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다시 재혼하여 자녀는 낳고 나름대로 살아갔습니다. 그 아버지는 장사를 했는데 크게 성공을 했습니다. 제법 재산도 모아 부자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이 이단에 빠졌고 그 다음에는 본인까지 재산을 다 바치고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 목사인 아들이 얼마나 기도했고 얼마나 찾아가서 권면했습니까? 그런데 나중에 전부 망하고 난 다음에 비로소 깨닫고 이단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 아들 목사가 아버지와 이복형제들의 학비까지 대고 생활비를 대어줄 정도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힘에 겹지만 아들은 그래도 아버지를 끌어내야 했습니다.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했다는 말입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서 구원한 것처럼 우리도 이단에 빠진 형제들을 어떠한 짐이 된다 할지라도 끌어내어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4392 마태복음 내가 아는 예수 마14:22-33  김창인 목사  2010-10-29 2128
4391 사무엘하 신앙의 결정체 삼하9:1-13  김창인 목사  2010-10-29 2063
4390 역대하 정직한 자의 생활 대하19:1-11  김창인 목사  2010-10-29 2362
4389 사무엘상 선민의 밑천 삼상12:19-25  김창인 목사  2010-10-29 2154
» 유다서 사랑하는 자의 일 유1:17∼23  김창인 목사  2010-10-29 2677
4387 요한계시 금 촛대 교회 계2:1∼7  김창인 목사  2010-10-29 2584
4386 누가복음 예수의 사람 눅19:28∼40  김창인 목사  2010-10-29 2917
4385 사무엘상 역경을 이긴 사람 삼상1:4-20  김창인 목사  2010-10-29 3988
4384 요한복음 일하는 사람 요9:1-12  김창인 목사  2010-10-29 3515
4383 요한복음 베데스다의 은혜 요5:1-18  김창인 목사  2010-10-29 3816
4382 에배소서 성도의 마땅한 바 엡5:1-14  김창인 목사  2010-10-29 2826
4381 출애굽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 출13:17∼22  한태완 목사  2010-10-28 4829
4380 로마서 코드 J를 맞춰라 롬14:8-9  강재식 목사  2010-10-28 1948
4379 마태복음 하나님 앞의 겸손 마6:14-18  김서택 목사  2010-10-28 2426
4378 룻기 베레스의 세계 룻4:18∼22  박상훈 목사  2010-10-27 2692
4377 룻기 오벳이 태어남 룻4:16∼17  박상훈 목사  2010-10-27 2954
4376 룻기 기쁨을 회복한 나오미 룻4:14∼17  박상훈 목사  2010-10-27 1957
4375 룻기 보아스가 룻을 취함 룻4:13  박상훈 목사  2010-10-27 2070
4374 룻기 백성과 장로들의 축복 룻4:11∼12  박상훈 목사  2010-10-27 2041
4373 룻기 보아스의 선포 룻4:9∼10  박상훈 목사  2010-10-27 1824
4372 룻기 기업 무를 권리를 얻은 보아스 룻4:7∼8  박상훈 목사  2010-10-27 2126
4371 룻기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하는 친족 룻4:5∼6  박상훈 목사  2010-10-27 2084
4370 룻기 네가 아니면 내가 무르리라 룻4:3∼4  박상훈 목사  2010-10-27 1986
4369 룻기 성문에 앉은 보아스 룻4:1∼2  박상훈 목사  2010-10-27 2286
4368 룻기 가만히 기다리라 룻3:16∼18  박상훈 목사  2010-10-27 2192
4367 룻기 보아스의 곡식제공 룻3:14∼15  박상훈 목사  2010-10-27 2187
4366 룻기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룻3:12∼13  박상훈 목사  2010-10-27 1597
4365 룻기 청혼수락 룻3:10∼11  박상훈 목사  2010-10-27 1832
4364 룻기 청혼 룻3:6∼9  박상훈 목사  2010-10-27 1774
4363 룻기 룻의 결혼을 위한 나오미의 작전 룻3:1∼5  박상훈 목사  2010-10-27 2588
4362 룻기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 룻2:20∼23  박상훈 목사  2010-10-27 1818
4361 룻기 일하고 돌아온 룻 룻2:17∼19  박상훈 목사  2010-10-27 1861
4360 룻기 식사 시간에 룻2:14∼16  박상훈 목사  2010-10-27 786
4359 룻기 보아스와 룻의 두번째 대화 룻2:11∼13  박상훈 목사  2010-10-27 4486
4358 룻기 보아스와 룻의 첫번째 대화 룻2:8∼10  박상훈 목사  2010-10-27 3325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