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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위한 잔치

요한복음 김창인 목사............... 조회 수 2272 추천 수 0 2010.10.29 18: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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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2:1-11 
설교자 : 김창인 목사 
참고 : 광성교회 - 김창인 목사 제2설교집 -천국의배달부/모퉁이돌 에서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 12: 1-3>

요한복음 12장 1절에서 11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위한 잔치"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즉 날 때부터 죽는 날까지 잔치하는 일이 많습니다. 낳자마자 백일이 되면 부모님들이 백일 잔치도 해 주고 돌이 되면 돌잔치도 해 줍니다. 그리고 커서 장가도 가고 시집갈 때가 되면 결혼 잔치를 합니다. 나이 많아서 회갑이 되면 이번에는 자녀들이 회갑 잔치를 해 줍니다. 이렇게 잔치를 많이 하는데 이 잔치는 거의 자기를 위한 잔치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나사로는 집안에서 베풀어진 잔치는 좀 특이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그 받은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베푼 잔치가 본문에 나오는 잔치입니다. 즉 예수님을 위한 잔치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위한 잔치"는 어떠한 가정에서 베풀어 졌고 또 어떤 사람이 참여를 했고 어떤 결과가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을 본문이 가르쳐 주는 대로 증거 하려고 합니다.

 

I. 영에 속한 가정에서 잔치가 베풀어 졌습니다(1-3절)

 

예수님을 위한 잔치는 영에 속한 가정만이 할 수 있고, 영에 속하지 않고 육에 속한 가정은 할 수가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을 위한 잔치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지 땅에 속한 사람들은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땅에 속한 분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영에 속한 가정은 어떠한 가정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생명 있는 가정입니다(1절).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그러니까 분명히 나사로라고 하는 사람은 죽었던 사람입니다. 사람이 죽었다 하면 이미 생명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 즉 살아났다 하면 생명이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가정처럼 죽었다가 살아난 가정 즉 생명 있는 가정이 바로 잔치를 베풀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죽었던 집안은 초상집이었는데 잔치 집으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변화가 누구에 의해서 되었습니까? 예수님에 의해서 되어졌다고 하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2천년 전의 사건이지만 이 나사로의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영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주는 교훈은 너무 큽니다. 우리도 나사로 처럼 다 죽었던 사람입니다. 육신이 죽었단 말이 아니고 영이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나사로 처럼 예수님에 의해서 영이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만들어 놓으시고 맨 나중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만드셨는데 피조물 중에 사람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저 흙일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산영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이 살려준 산영입니다.

그 다음에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아담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즉 아담은 산영이 되었고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요, 우리는 역시 살아나는 영이란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산영이었는데 선악과를 따먹은 그 죄로 말미암아 살았던 영이 죽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죽은 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려 주는 영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살아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도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죽었는데 예수님에 의해서 즉 살려 주는 영에 의해서 살아난 자들이다 라는 영적인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생명을 받은 산영이 바로 하늘에 속한 사람이며, 이 사람이 바로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만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는 육신만 살아서 예배에 형식적으로 참여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모두 그 영이 살아서 영적으로 하늘에 속하고, 영적으로 영에 속하여 하늘나라 잔치에 다 같이 참여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보답하는 가정입니다(2절).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예수를 위해서 잔치를 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위한 잔치입니다.

예수를 위해서 잔치를 했다는 구절은 오늘 읽은 본문과 누가복음 5장 29절 한 곳과 합하여 꼭 두 번나옵니다. 레위 마태가 세관에 앉은 것을 예수님이 보셨습니다. 주님은 마태를 보고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마태가 예수님과 그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위해서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와 죄인들이 거기 많이 참석하였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위해서 베푼 잔치는 회개하는 잔치였습니다. 지금까지 세리 노릇하고, 양심도 민족도 신앙도 다 팔아먹고, 돈이면 그만 이라고 살아오던 그 생활을 청산해 버리고 이제는 예수님과 새롭게 인연을 맺겠다고 회개하는 잔치였습니다. 자기의 친구들인 세리들과 죄인들은 다 불러모았습니다. 여기에는 그 사람들과 이제는 죄악의 인연을 끊어 버린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나는 이것으로 죄악을 끊고, 이것으로 세리 노릇하는 것 끊어 버리고 예수님과 새롭게 인연을 맺는다는 의미의 회개하는 잔치였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예수를 위한 잔치는 무슨 잔치입니까? 나사로의 잔치는 회개하는 잔치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나사로는 큰누이 마르다와 작은 누이 마리아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번 나사로가 죽었다가 예수님에 의해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삼남매가 예수님 앞에 잔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리므로 이것은 은혜를 보답하는 잔치였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잔치였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 즉 영이 생명을 받아서 영에 속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은혜를 받고 감사할 줄 압니다. 받은 은혜를 보답할 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보답하고 감사할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감사하는 자에게 더 많이 크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주었던 것까지라도 빼앗아 버리십니다. 예수를 위해서 감사하며 보답하는 잔치를 베풀어 드린 나사로의 가정처럼, 여러분들의 가정도 항상 보답하고 감사할 줄 아는 가정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화목한 가정입니다(3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극진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여기에 보면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앉은 자 중에 앉아서 예수님 말씀을 아주 재미있게 듣고, 막내 동생 마리아는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지고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이것은 형제 화목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 삼남매가 한 집안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집가서 다 따로 살고, 장가가서 따로 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에 보면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잔치가 열립니다. 베다니란 마을에 문둥이 시몬의 집이었고 나사로의 집이었는데 그 문둥이의 집이 막내 마리아네 집입니다. 그 문둥이 시몬이 바로 마리아의 남편입니다. 그 전에 문둥병에 걸렸던 것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이 마리아가 이번에 잔치를 베푼 것은 자기를 위한 잔치가 아닙니다. 자기 오빠를 살려준 그 은혜가 너무 너무 감사해서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나드 한 근이면 삼백 데나리온입니다. 그 때 자정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므로 요즘 우리 돈으로 치면 일년 품삯이 되는 거금입니다. 그 거금을 오빠를 위해 쓴 것입니다. 그 만큼 형제가 우애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얘기하신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잘 압니다. 한 부자가 농사가 잘 되어 더 쌓아 둘 창고가 없어서 걱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자는 배를 두드리면서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기가 막혀서 그 날 밤에 그 영혼을 불러 가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그렇게 쌓아 놓은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가난하고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부유하던 어리석은 자의 말로가 이렇게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가 가르치는 것은 영혼이 돈 때문에 만족하는 줄 아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들은 재산을 많이 쌓아 놓아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돈 버는 것을 예수 믿는 목적인 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돈을 쌓아 놓지만 누리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간청합니다. "내 형님이 아버지의 유산을 몽땅 가지고 나에게는 한 푼도 안 줍니다. 내 형님에게 명하여 유산을 좀 나누어주라고 한마디 말씀을 해 주십시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이 재산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니니 재산 가지고 형제와 싸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는 돈주고도 못 삽니다. 그런데 돈 때문에 형제와 싸우고 있습니다. 형제의 의를 끊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형제가 싸우는 가정, 한 푼이라도 더 가지려고 싸우는 가정이 있다면 오늘 본문의 마리아를 보시기 바랍니다. 여자는 돈에 더 약합니다. 그런데 오빠를 위해서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거금을 바쳐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뻐합니다. 이렇게 삼남매는 화목하면서 살았습니다.

땅에 속한 사람은 한 푼이라도 더 빼앗으려고 형제의 의를 끊으면서 까지 제 욕심을 차립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사람은 땅엣 것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형제 화목하는 법입니다. 나사로의 가정은 영에 속한 가정이요, 영에 속한 가정은 생명 있는 가정이었고, 보답하는 가정이었고, 화목하는 가정이었습니다.

 

II. 부끄러운 제자가 잔치에 참견했습니다(4-6절)

 

이 부끄러운 제자는 곳 가룟유다를 가리킵니다. 가룟유다는

1) 예수를 파는 제자입니다(4절).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유다가 말하되" 이 세상에서 스승을 꼽으라 하면 예수이상 꼽을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스승 중에 대스승입니다. 이런 스승을 만났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영광입니다. 제자로서는 큰 보배를 만난 셈입니다. 그런데 그 스승을 은 삼십에 팔어 버렸다는 것은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예수님보다 돈이 더 좋고, 예수님 보다 돈을 더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고 예수님을 팔아 버릴 사람입니다. 10년을 교회 다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돈은 쓰는 것이요, 돈을 사랑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돈을 사랑하면 형제의 의도 끊어집니다. 돈을 사랑하게 되면 교회 10년을 나왔어도 언제고 교회를 박차고 나가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가룟유다는 돈 때문에 스승도 팔아 버린 사람입니다. 우리는 돈 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사람을 파는 제자입니다(5절).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여기 보니까 가룟유다가 남의 잔치에 와서 감 놓아라 배 놓아라 참견하고 있습니다. 이런 얌체가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이런 엉큼한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가룟유다가 "이 향유를 어찌하여 허비하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부어 드리는 향유를 허비한다고 표현했습니다. 마귀의 자식은 낭비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찌하여 예수님께 부어드린 것이 낭비요, 허비입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왜 그것을 팔아, 그 엄청난 돈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가룟유다는 정말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돈은 가난한 구제하라고 갖다 주게 되면, 가난한 자 구제는 형식적으로 해 버리고 실제로는 자기 주머니를 채우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팔아서 돈을 벌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자 구제란 명목을 내세워 제 욕심을 채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룟유다는 도적놈입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은 이용해야지 사랑해서는 아니 되듯이, 사람은 사랑해야지 이용하면 안됩니다. 여러분들은 가난한 자를 이용해서 구제라는 명목으로 돈을 벌려는 이런 제자와는 상관없기를 바랍니다.

3) 양심을 파는 제자입니다(6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저는 도적이라고 말씀합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했습니다. 속으로는 도적놈인데, 겉으로는 제자라는 간판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구제하라고 돈을 갖다 주면 슬그머니 훔쳐갑니다. 양심을 팔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나 자신은 못 속입니다. 혹 몰라서 나 자신을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못 속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 번 두 번 훔쳐간 것이 아니라 그 전에도 많이 훔쳐간 모양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를 도적이라고 밝힌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또 훔쳐 가려고 그 따위 소리를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가룟유다는 양심을 팔아서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 돈을 버는데 양심도 팔아 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양심을 팔아먹은 제자, 가룟유다와는 상관이 전혀 없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III. 인정받는 신자가 잔치를 주도하였습니다(7-11절)

 

1) 생활의 인정을 받았습니다(7-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저를 가만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마리아를 못살게 굴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봉사 열심히 하는 사람을 시기해서 봉사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가룟유다와 똑 같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이 봉사 잘하면 그냥 내버려 둘 일이지 왜 자꾸 시기해서 너 친목파다, 친목파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친목파는 목사와 친한 파라는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긁어 가지고 기어이 봉사를 못하게 만들도 맙니다. 가룟유다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즐겁게 해 드리고,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예수님을 위해서 그렇게 봉사하는데 간섭하고 못하게 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에게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왜 말이 많으냐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 구제는 언제나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나는 오늘이 지나면 그만이라는 뜻입니다. 가난한 자 구제하는 것도 귀하고, 나 자신을 위해 쓰는 것도 다 귀하지만 예수님께 봉사가 되고,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예수님을 위한 일을 먼저 하겠다는, 예수 우선주의 마리아의 생활태도,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다 할 수 없으니 어느 것부터 먼저 해야 되느냐 하는 우선순위를 결정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먼저, 하나님 우선" 이것이 우리의 생활 순서가 되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것을 인정해 주십니다. 생활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요, 참예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먼저, 하나님 먼저라는 순위를 정해 놓고 삶으로 예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 어린양 혼인 잔치에도 참예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신앙의 인정을 받습니다(9절).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큰 무리가 여기 예수님께서 계신 줄을 알고 왔습니다. 여기란 바로 나사로가 있는 곳 베다니 나사로의 집입니다. 그 곳에 예수님이 계신 줄 알고, 예수님도 보고 나사로도 보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로가 있는 곳에 가면 예수님도 거기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을 만나려면 나사로가 있는 곳에 가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알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도 보고 나사로도 보러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여러분들도 나사로의 가정처럼 정말 아무아무 집에 가면 예수님이 계신다, 아무가 있는 곳에 예수님이 계신다고 소문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블레셋 땅에 갔을 때 블레셋의 장관 비골이 왕 아비멜렉을 모시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여호와께서 함께 계심을 분명히 보았으므로 너희와 우리 사이에 언약을 맺자"고 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블레셋 땅에 가서 아내와 더불어 누가 묻거든 아내가 아니라 누이동생이라고 하자고 했습니다. 아내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블레셋 왕이 사라를 즉시 데려가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빼앗기고 손도 못쓰고 어디 가서 말 한마디로 못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하나님께서 그 아비멜렉 왕의 집에 여자라는 여자는, 심지어 여종의 태까지 몽땅 닫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꿈속에 나타나셔서 왕을 야단쳐서 혼내 놓았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아침에 일찍 당장 아브라함의 아내를 돌려보내면서 엄청난 선물을 함께 보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왕이 와서 하는 말이 아브라함아 네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심을 분명히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곳 즉 아브라함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3) 봉사의 인정(10-11절).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한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많은 사람을 예수 믿게 하는 것이 봉사 중에 최고의 봉사입니다.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인정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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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92 마태복음 내가 아는 예수 마14:22-33  김창인 목사  2010-10-29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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