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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차 한잔 마시면서 전해드리는 햇볕같은이야기
♣♣그 3922번째 쪽지!
□ 마르다와 마리아의 영성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입니다. 예수님이 이 믿음 좋은 자매의 집에 오셨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좋아하여 예수님의 발치에서 그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다는 대접하는 것을 좋아하여 예수님이 드실 음식을 준비합니다.(눅10:38-42)
마르다와 마리아를 편하게 구분하자면, 마리아가 '영성'의 사람이었다면, 마르다는 '실천'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영성'은 수도자들의 영역이었고, '실천'은 목회자와 평신도들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로 수도자가 없어져 버린 개신교 안에는 사실상 '영성'은 없어지고 '실천'만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드실 요리는 잘 만들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은 잘 알지 못합니다.
마르다 같은 '실천'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어도 '마음'으로는 읽을 줄 모르고 머리인 '지성'으로만 읽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쪼개고 분석하고 연구해서 서론, 본론, 결론으로 생선토막 내듯 나누어 자세히 연구합니다. 이것은 마치 자동차를 완전분해해서 나사 하나의 쓰임새까지 다 알지만, 정작 그 자동차를 운전할 줄은 모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해서 아는 것보다, 성경이 나에게 하는 말에 귀기울여 들어서 알아야 합니다. 그 귀기울임이 바로 마리아의 '영성'입니다.
예수님의 발치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기도가 '관상기도'입니다. 관상기도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비법과도 같은 기도인데, 그 방법이 생소하여 많은 오해를 받고 있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많은 분들이 관상기도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있어 다행입니다. ⓒ최용우
♥2010.11.2 불날에 좋은해, 밝은달 아빠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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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숨 원고 2010-11] 마르다와 마리아의 영성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입니다. 예수님이 이 믿음 좋은 자매의 집에 오셨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좋아하여 예수님의 발치에서 그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다는 대접하는 것을 좋아하여 예수님이 드실 음식을 준비합니다.(눅10:38-42)
마르다와 마리아를 편하게 구분하자면, 마리아가 '영성'의 사람이었다면, 마르다는 '실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영성’과 ‘실천’은 서로 다정하게 한 집에서 살았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영성’은 수도자들의 영역이 되었고, '실천'은 목회자와 평신도들의 영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로 수도원과 수도자가 없어져 버린 개신교 안에는 사실상 '영성'은 없어지고 '실천'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드실 갖가지 요리는 잘 만들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은 잘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르다 같은 '실천'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어도 '마음'으로는 읽을 줄 모르고 머리인 '지성'으로만 읽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쪼개고 분석하고 연구해서 서론, 본론, 결론으로 생선토막 내듯 나누어 자세히 연구합니다. 이것은 마치 자동차를 완전분해해서 나사 하나의 쓰임새까지 다 알지만, 정작 그 자동차를 운전할 줄은 모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서 10년도 넘게 QT를 하며 성경말씀을 꼼꼼히 살피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기 위해 날마다 실천 목록표를 만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더 기도하고 더 봉사하고 더 헌금하고, 주일에는 교회에서 여섯일곱가지 일을 맡아 충성을 다하며 ‘실천’ 하였지만, 주일저녁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하나님은 아니계시고 알 수 없는 허무함이 몰려왔습니다.
신앙에 대한 회의가 몰려올 때 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 고전에 관심을 갖도록 이끌어주셨고, 지나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난 영성의 대가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실천’적인 나의 신앙생활과는 전혀 다른 아주 고요하고 정적이며 ‘영성’적인 것이었습니다. 나의 신앙생활이 “오늘은 교회에 몇 명이나 출석하였나? 헌금은 얼마나 나왔나?”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들의 신앙은 “오늘은 주님이 내 마음에 오지 않으셨네. 내 마음이 너무 분주했어. 오호, 어찌할꼬” 하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성경에 머물러 있던 나의 신앙은 성경이 가리키는 그 끝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지 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가?” 라는 선문답이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해서 아는 것보다, 성경이 나에게 하는 말에 귀기울여 들어서 알아야 합니다. 그 귀기울임이 바로 마리아의 '영성'입니다.
기도를 하고 있으면서도 지금 내가 하는 기도가 참 이기적이고 기복적이고, 어찌보면 천박하구나... 무당들이 알지 못하는 소리로 굿을 하고, 염불을 외우는 것과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에 그냥 기도하다가 딱 멈추고 한탄할 때가 있었는데, 수도원 수도자들이 해왔던 조용히 ‘침묵’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는 침묵기도를 배운 뒤로는 이런 한계가 단숨에 극복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발치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기도가 '관상기도'입니다. 관상기도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비법과도 같은 기도인데, 그 방법이 생소하여 많은 오해를 받고 있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많은 분들이 관상기도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있어 다행입니다. ⓒ최용우
*최용우 전도사 <시인, 햇볕같은이야기 http://cyw.kr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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