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3장
13.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으로 부터 자유) |
14.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
초기의 신앙에서는 누구도 마찬가지 이겠지만 나는 지금의 교회 모습을 거의 의심해 보지 않고 목사는
하나님의 신성한 종으로 조금의 부정함이 없는 거룩한 자로 여기고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변화된
자들로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생각하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나의 죄를
드러내시고 이 죄를 스스로 이길 수 없는 연약함에 싸여 있는 나를 발견하게하셨다. 그리고 목회자나 다른
교인들의 죄도 드러나게하시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는 모든자가 예외가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들도 나와 같은 죄인이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어 가는 동안 극심한 심리적인 고통으로 가슴 앓이를 해야했다.
오랜 신앙 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람들이과 나 자신이 여전히 죄에 매여 있는 것을 보고 "진리가 자유케하리라" 는 말씀을 받기 위해 진리를 향한 갈급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주님은 나를 이런 마음이 들도록 극한 상황까지 몰아가셨는데 죽느냐 사느냐가 달린 갈급한 심정으로 주님을향해 매달리게 하셨다.
세상의 일도 마음을 쓸 수 없도록 세상의 일에 집착을 하는 그때마다 율법의 정죄는 나를 위기로 몰아 넣었다. 극심한 혼란을 겪으며 고통하는 나는 주님 앞에 자신을 던지고 무릅을 꿇었다. 오랬동안 말씀과 기도 속에서 빛을 보고 난 뒤 말씀의 약속을 통해 심령에 펑안이 찿아왔다.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율법으로 부터 단번에 자유를 얻고 그때 부터 성령의 가르침으로 말씀을 깨달을 때 마다 깨닫지 못할 때의 마음의 굴레가 말씀으로 빛을 통해 벗을 수가 있었다. 오랜 세월이 필요하였다.
주님은 율법에 대해 성령의 조명으로 말씀을 주셨는데 모든 교파에 속한 목회자나 교인들, 교파를 자랑하지 못할 것은 모두가 율법 아래에 매여 있으므로 주님이 보시기에는 다 같은 것이다. (사이비 이단들은 아예 율법 아래에 들어가는 것 조차 제외된다) 율법은 세상에 속한 모든것들을 죄 아래에 두어 정죄하기 위해 두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애개는 죄가 율법에 의해 드러나는 역사가 있어 세상에 속한 광야의 교회가 거룩한 곳이기 보다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께 범죄하는 일들이 더 많이 생기는 일이 나타난다. 오늘날의 교회가 문제와 분쟁의 일이 생기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앞으로 교회 안에는 죄를 드러 나는 역사가 더 심각해 질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한다. 초대 교회는 바울이 복음을 통해 율법에서 벗어나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두게 하였다. (롬3:24) (엡3:8) 그러나 바울과 같은 복음의 말씀으로 심지 못하는 율법아래에 있는 목회자가 가르칠 때는 율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세는 율법의 선지자 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시내산에서 첫언약의 중보 (영적으로는 천사의 중보로) 로서 율법의 대표자였다. 모세는 새 언약의 예표인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믿음의 사람인 여호수아에게 자신의 자리를 넘겨 주어야만 하였다. 교회도 목회자의 대표성이 적용되므로 목회자가 율법의 영안에 있는 곳은 그 교회도 그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지금의 교회가 대부분(거의 다라고 보여진다) 율법아래에 있는 광야 교회이다. 이 광야의 교회는 완성된 교회가 아닌 시험과 훈련의 과정에 속하여 있다. 그러므로 많은 문제와 분열과 다툼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다툼과 분열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호3장3-4) 특히 제사장(목회자)와 교인들이 서로 불신하고 판단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죄로 인한 문제로 돌려 자신의 내면의 죄를 인정하고 남의 탓 만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 임을 인정해야한다. 모두가 예수님으로 향해 나아가 율법의 멍예를 벗고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진리가 자유케하는 예수님의 의를 입음으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것으로 교회가 성령의 교통으로 사랑의 교제의 코이노니아가 될 것이다. 인간의 타고난 성품은 아무리 도덕이나 지성이나 인격의 수단을 활용하여도 죄안에서는 죄에 무너지는 연약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교회 지도자는 낮은 자리로 내려가 섬기는 교회를 원하신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교의 특정한 신분으로 행세하였다. 이들 중에서 관원들이 임명되고 종교행사를 주관하는 위치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세력들이었다. 이들은 백성들의 위에서 군림의 위치에 놓임을 만족하게 생각하는 자들로 신분의 기득권을 가지고 자신들의 유익을 챙기고 있었다. 여기에서 분명히 해야하는 것은 서기관 들이나 바리새인들은 모세 오경을 보건데 율법의 규정으로 세워진 신분이 아닌 더우기 그들의 신분을 특별이 구별되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세운 제도적인 관행이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세운 종들은 레위족속으로 세워진 제사장 뿐이었으나 예수님 당시에는 제사장직도 돈으로 사고 파는 일이 있었고 유력한 가문에서 세워졌다고 하였다. 율법도 이들의 한낯 백성들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종교적인 기득권을 누리기 위한 인간의 탐욕으로 이용되었다.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은 어떤가? 말씀에 비추어 봄으로 무었이 잘못된 것인가 또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고민해 보아야한다. 에수님은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은 오늘날의 교회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혁되기를 원하시는 새로운 틀을 만드는 말씀을 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으로 만드신 것에 대해 모든 책임을 돌려서는 않된다. 사람들은 모든 것에 대하여 " ---하나님이 이렇게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이렇게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세우셨습니다" 왜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모든것이 기독교인 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이라면 심판의 (구원받지 못하는 ) 책임도 하나님께 돌리야 되는 것일까?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하나님은 인간이 하는 것에 대해 모든 것이 인간의 책임이 있는 것임를 성경은 나타내고 있다.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는 가는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뜻을 확인하고 사용해야한다. 심지어 주의해야하는 것은 마귀의 유혹과 역사도 하나님의 역사를 모방할 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에게도 이적과 기적 같은 역사가 있음을 성경이 말하고 있다.
이제 들어야하는 말씀은 주님이 "그러나 너희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에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것과 외식하는 행위와 행사에 참석하여 높은 자리에 앉아 옷술이 넓은 옷을 입고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는 것과 랍비(선생) 이라는 호칭을 받는 것을 책망하시고 경계의 말씀을 주시고 계신다. 이 말을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에서도 이 말씀과 같이 그대로 보이는 것은 참으로 착잡한 심정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교회들이 가운을 입기 시작 했는지는 몰라도 초창기에는 보지 못한 것들이 서서히
마치 카톨릭을 닮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언젠가 어느 목사가 자신은 카톨릭 신부들이 집례하는 모습을 우리도 저렇게 예배하는 것도 괜찮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을 하는 것을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수 없지만 사람의 생각은 무언가 가식적인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것을 부인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 제단을 돌로 쌓을 때 철이나 연장을 대지 말라고 하셨다. 이유는 어떤 모양을 가식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만들거나 장식하는 것을 금하기 위한 말씀이다. 오늘날의 교회의 예배 모습은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일까 생각해 보아야한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에게 주신는 말씀은
1)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는 다 형제니라 - 진정한 선생은 그리스도이시다
2)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하지 말라 -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자이시다.
3)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지도자는 그리스도 이시다.
4) 큰자는 섬기는 자이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진다 - 예수님은 낮은 곳에서 섬김을 보여주셨다.
오늘날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 말씀은 그야말로 예수님이 그냥 겸손하라고 주는 말씀이거니 라고 해석하고
싶을 것이다. 랍비는 선생을 말하고 오늘날도 교회 선생은 사역자들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육체의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카톨릭이나 어떤 교파 에서는 교회지도자들을 '아버지'로 부른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신자가 신부에게도 "파더' 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지도자들이라고도 부르지 말라고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형제이다. '만인 제사장'이라는 말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동등한 위치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받을 자와 받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신앙의 초기 부터 모든자에게 적용되는 말이 아님을 성경이 나타내고 있는데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체험이 있는 자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에배소의 교회에게 바울은 4장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사역자는 성령의 은사로 세우심에 대하여 몸은 세례(성령의 세례) 를 통해 세워지는 데 이 세례는 로마서 6장의 세례와 같은 말이다. 이 세례를 물세례로 생각하면 성경의 해석이 혼란을 가져온다.
13. |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장) |
오늘날의 교회에서 세우는 직임에 대해서는 이제 성경의 기준으로 해석을 요구한다. 사람의 제도에 의한 것인지 성령의 부르심과 질서에 의한 것인지 판단해야하는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성도는 몸인 교회를 원하신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4장15-16)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그 몸의 지체라면 이런 상태의 교회로 될 수가 없다. 머리의 역활은 몸의 동작을 통제하는 모든 것을 머리의 지시에 따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들은 임의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시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모든 것을 하시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아닌것이다. 말씀을 가르치는 내용도 직임을 세우는 문제도. 헌금을 관리하고 운용하는 것도. 교회가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여러가지 활동과 또 사역자들을 배출하는 것에 대해서도 사실은 성경적인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그 밖에 예배의 내용과 교회를 섬기는 것과 목회자들이 사역에 임하는 자세와 행하는 모든 것이 사도들이 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전통을 따라가는 방법을 선택하고 만족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면 당연히 초대교회 때에 사도들이 교회를 운용했던 방식을 따라 갔을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초대교회나 지금이나 동일한 방식으로 역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 인자가 머리둘 곳이 없다" 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부인하거나 잊어 버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교회는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고 옆의 교회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지금의 모든 교회가 예수님을 머리에 두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머리로 두는 교회는 성령의 인도와 지시를 받고 직임을 세우는 것도 성령의 음성을 따라 세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목사들이나 장로들의 권한으로 교회가 운용된다. 일반 교인들은 때로는 둘러리에 불과하다. 교회에 대한 참견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교회들이 많다. 소수의 교인이 있는 교회들은 다소 이런 관행이 적으나 작은 교회도 사실 별 다른 것이없다. 왜 교회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문제를 살펴 볼 때이다. 예수님이 하셔야 하는 일을 목회자와 장로들이 다하고 있는 셈이다. 교회가 이제는 회개의 길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머리에 위치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은 몸의 위치로 내려와 예수님을 머리로 섬기고 교인들과 형제의 사랑을 실천하는 낮은 위치의 사역을 택해야한다.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는 교회로서 그 분 아래에서는 누구나 같은 형제로 연합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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