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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종됨의 관계

누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453 추천 수 0 2010.11.19 08: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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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7:5-1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433699 

emoticon

 

누가복음 17:1-10절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네 가지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이 네 가지 중에는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것도 있고, 나오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나오더라도 서로 위치가 다릅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 네 가지를 한 군데로 모아 편집했습니다. 그 이유는 각각의 항목이 서로 연결된다고 보았거나, 아니면 제자들이 모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가르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겠지요. 1-2절은 실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살이에서 서로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의도하지 않아도 실족하거나 실족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연자 맷돌을 목에 달아 바다에 던지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그만큼 엄중하다는 뜻입니다. 3-4절은 용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경고하고,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죄를 짓고 회개하면 그를 용서하라는 겁니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한 번도 용서할 줄 모릅니다. 이것도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가르침입니다.

 

겨자씨 믿음

 

오늘 설교의 본문은 세 번째 가르침부터 시작됩니다. 5-6절은 믿음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이 예수님에게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5절) 그들의 이런 요청은 기특해 보입니다. 부자가 되게 해달라거나 출세하게 해달라거나, 또는 건강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더해 달라는 겁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아는 것에 불과하지 실제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믿음보다 경쟁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이 믿음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정생활이나 자녀교육에서도 이런 이유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자녀들에게 가장 크게 기대하는 것은 공부와 경쟁력입니다. 말은 믿음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경쟁력입니다. 믿음은 나중에라도 회복할 수 있지만 경쟁력은 지금 당장 확보하지 않으면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어떻게 교육하는 게 신앙교육인지를 잘 모르기도 합니다. 우리의 숙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절) 예수님의 대답은 동문서답처럼 들립니다. 믿음을 더해달라고 했으면 ‘더해주마’라고 하든지 더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든지, 또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셔야만 했습니다. 겨자씨는 씨 중에서도 아주 작은 씨입니다. 뽕나무는 겨자씨에 비교할 없을 정도로 큽니다. 어른이 올라가도 될 만한 크기의 나무입니다. 뽕나무를 바다에 옮기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겨자씨처럼 작은 믿음만 있어도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뜻일까요? 믿음에는 작은 믿음과 큰 믿음이 따로 없다는 뜻일까요? 그러니 믿음을 더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믿음에도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의 관계에서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 부모와 자식이 있습니다. 자식들은 일반적으로 부모를 믿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부모를 의심하는 자식들도 있습니다. 사춘기 때는 거의 모든 자녀들이 부모를 의심합니다. 그 시절을 정상적으로 통과하면 다시 믿음의 단계로 접어듭니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이와 똑같지는 않지만 믿음의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믿음이 형편없이 부족하거나 없습니다. 그 증거들은 세상걱정과 자기연민에 사로잡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걱정을 크게 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완전히 초월해서 사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마치 전쟁 중에도, 비바람 속에서도 엄마 품에 안겨 평화롭게 잠자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믿음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을 더해달라는 제자들의 요구는 정당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겨자씨와 뽕나무 이야기를 하신 걸까요?

 

그것은 믿음의 본질에 대한 생각의 차이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의 크기를 어떤 가시적 능력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같은 사람들의 능력이 가득했을 겁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백세에 얻은 이삭을 번제 형식으로 하나님께 바칠 생각까지 했던 인물입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능력을 보였습니다. 엘리야는 초자연적 능력이 가장 출중했던 인물입니다. 이들처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제자들도 남에게 보일만한 능력을 갖고 싶었겠지요. 그들은 믿음이 클수록 더 큰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큰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오늘도 많은 신자들이 믿음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일을 무작정 밀고 나가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이 200명밖에 나오지 않는 교회를 몇 년 안에 1천명으로 키우겠다고 큰 소리 치거나 무리하게 헌금하는 것을 믿음의 크기로 말합니다.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믿음이 없다고 낮추어 말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사람에게 나타나는 큰 능력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았습니다. 뽕나무를 바다로 옮기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불가능합니다. 겨자씨 같이 작은 믿음으로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은 그런 일이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능력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뽕나무를 옮기는 일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능력을 보이기 위해서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소치입니다. 능력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큰 능력을 나타내려고 믿음을 더해달라는 것은 월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런 능력이 없으니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말인가요?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한 노력도 아무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미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큰 일을 희망하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네 번째 가르침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무익한 종

 

예수님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일반적인 제도였습니다. 그걸 배경으로 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네 번째 이야기입니다. 종이 밭을 갈거나 양을 쳤다고 해서 집에 돌아와 대접을 받는 게 아닙니다. 종은 주인의 식사준비를 해야 하고, 주인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후에 종은 먹을 수 있습니다. 주인의 명령을 다 따랐다고 해도 주인에게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이런 일을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아무리 종이라 하더라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2천 년 전입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였습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해야 하고, 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받을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10절)

 

이 가르침은 제자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리새인을 향한 충고이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적인 행위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율법을 자기들보다 더 잘 지키는 사람들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모범적으로 살았습니다. 기도, 헌금, 구제, 금식 등, 모든 신앙생활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오늘로 바꾸면 믿음 좋은 장로님들, 또는 그런 정도의 신앙 연륜이 있는 분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분들은 시간과 물질을 전폭적으로 교회에 투자합니다.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기준으로만 보면 그렇게 살아야만 장로가 될 수 있습니다. 본인이 즐거워서, 본인의 신앙고백으로 그렇게 교회에 묶여 산다면 누가 뭐라 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분들이 있어야만 교회 공동체가 힘을 얻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걸 자랑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노골적으로 자랑하는 분들도 있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종이 주인의 명령을 다 행한 후에 “나 이만큼 했으니 알아주시오.”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인정받으면 아무리 큰 고생이라고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인정받지 못하면 아무리 쉬운 일이라고 하기 싫어집니다. 교육적으로도 인정은 효과가 큽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마음의 움직임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수고를 우리가 죽은 뒤에 하나님이 인정해주기를 바랍니다. 이런 마음을 무조건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역시 인간적인 성정을 모두 포기하고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사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에서도 가능하면 서로를 인정해주는 태도는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할 만큼 했다는 자세가 아니라 ‘무익한 종’이라는 자세로 돌아서야 합니다. 이런 자세는 손해 보는 일일까요? 그것이 손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기독교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한 것입니다. 무익한 종의 자세는 자기 무능력에 대한 열등감도 아니고 자기 합리화도 아니고, 세계 현실에 대한 정확한 통찰이며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특히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태양을 보십시오. 태양이 우리를 위해서 빛을 내지 우리가 태양을 위해서 연료를 공급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한다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오늘 우리의 소비 중심적인 삶을 보십시오. 전쟁과 폭력을 보십시오. 남북의 이념갈등을 보십시오. 지역감정을 보십시오. 혹시 교회봉사를 생각하시나요? 구제와 선교활동을 생각하시나요? 물론 귀한 일이지만 그것도 아주 작은 일이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종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걸 모른다면 교만입니다. 교만이 바로 죄입니다.

 

저는 앞에서 겨자씨와 같은 믿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대답을 무익한 종에 대한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이제 대답을 찾으셨겠지요? 자신이 무익한 종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대답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뭔가 한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겨자씨 믿음으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은 곧 종의 실존을 받아들이는 결단입니다.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할 게 아니라 종됨의 실존에 집중해야합니다.

 

이런 삶이 비굴하게 느껴지시나요? 니체가 비판했듯이 노예근성인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영적 시각을 맞추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입니다.(히 11:1) 무엇을 바랍니까?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를 바랍니다. 믿음은 그것의 현실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종말에 이루실 부활의 세계입니다. 믿음은 그것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전혀 새로운 세계의 확실성을 알게 합니다. 이것보다 더 큰 능력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내 능력과 업적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걸 아는 사람은 ‘종됨’을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즉 궁극적인 생명 현실 앞에서 자신이 무익한 종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거기에 사로잡힌다면 여러분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뽕나무가 뿌리째 뽑혀 바다로 심겨지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아멘. (성령강림절 후 열아홉째 주일, 10월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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