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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1:4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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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2007·09·08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는 있는 모양입니다. 의사의 사망진단이 내려진 후 몇 시간이 지나 회생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나온 책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까지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요? 그들이 경험했다는 사후 세계의 체험도 다양한 것으로 보고되어 있습니다. 대개 신앙이 좋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거나 천국을 체험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끔찍하고 두려운 광경을 보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사망진단이 내려진 후 비교적 짧은 시간이 지난 후 회생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대개 사람이 죽으면 사흘 되는 날 장사를 지냅니다. 이렇게 죽은 지 사흘 이상 되어 무덤에 장사된 후에 살아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무덤에서 썩어가고 있던 나사로를 살려내셨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나사로를 부르심
나사로의 무덤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신 후 무덤 속에 있는 나사로를 부르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43절)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죽은 나사로를 부르시자 죽어서 썩어가고 있던 나사로가 일어나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며, 모든 것을 말씀으로 가능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대부분의 이적들은 단지 말씀만 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병을 고쳐주실 때나,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실 때, 또는 귀신을 쫓아내실 때도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실 때도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이라고 외치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실 때도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실 때는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 단지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창1: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창1:20)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창1:24)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오직 말씀으로 모든 것을 만들어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불러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의 능력과 권세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씀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오늘 우리가 듣고 있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매일 묵상하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당신은 이 말씀의 능력을 체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말씀을 굳게 붙들고 사십시오.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인도하심을 받도록 하십시오. 뭔가 신비로운 것이나 특별한 것을 추구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오직 이 말씀을 붙들고 사십시오. 말씀을 붙들고 사는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며, 바르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죽은 자가 무덤에서 나오다.
죽은 사람에게 수의 입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장례절차는 상당히 복잡한 것 같습니다. 시신에게 수의를 입히는 과정만 해도 그렇습니다. 아마 유대인들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사람들은 그에게 수의를 입히고 시신을 동여 매 장시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오늘 짧은 본문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장례절차에 따라 수의를 입혀 온몸을 묶어서 무덤에 안치했던 바로 그 시신이 무덤에서 걸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44상)
이 장면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나사로는 지금 수의를 입혀 꽁꽁 묶어서 장사를 지냈던 그 모습으로 걸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온 몸이 묶여있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난 나사로는 아마도 겨우 걸어서 나왔을 것입니다. 얼마나 생생하고 실감나는 설명입니까? 이 짧은 설명은 현장에서 그 사건을 직접 본 사람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어떻게 썩어서 냄새가 나던 사람이 그렇게 살아날 수가 있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벌써 썩었던 부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러한 의문은 성경을 자세히 살펴볼 때 쉽게 해소됩니다. 성경은 죽은 지 나흘이 지난 사람만이 아니라 아무리 오래 된 사람도, 그래서 형체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사람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는 모든 죽은 자들이 다 살아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20:1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수의에 싸인 채로 무덤에서 걸어 나온 나사로를 풀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44하) 이 말씀은 나사로는 정상적인 상태로 온전히 살아났음을 의미합니다. 잠깐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가 다시 무덤으로 들어가거나, 금방 다시 죽지도 않을 것입니다.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환영도 아닙니다. 나사로에게는 이제 더 이상 수의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살아났던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은 죽은 자도 살려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어서 죽은 지 오래 되어 부패했거나, 심지어는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살려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이보다 더 크고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죽음은 우리의 한계요 종착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주님께는 죽은 자나 산 자가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죽음이 더 이상 마지막이 아닙니다. 한계가 아닙니다. 믿고 구원을 받은 자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게 될 것이며, 영원히 죽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죽음에 직면합니다. 세상에는 사건과 사고가 많아서 늘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늘 어려운 일들을 당하면서 살아갑니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큰 문제에 직면할 때도 우리는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는 매일 순간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하면서 절망합니다. 이제 믿음이 많이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죄에 걸려 넘어지면서 우리는 다시 처음 믿음 없었던 그 자리로 추락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얼마나 비참하고 낙심이 됩니까? 이런 경우도 죽는 것과 비슷한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을 일상으로 겪으면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얼마나 절실합니까?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내 안에 살아계신다면 우리는 이 모든 일들 가운데서도 부활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서는 세상과 육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감사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신 주님께서는 매일의 삶 속에서 늘 죽는 우리를 소생시켜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도록 합시다.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는 길은 말씀을 굳게 붙잡는 데 있습니다. 말씀을 굳게 붙들고 부활의 능력을 힘입으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내 이름을 불러 주셔야
주님께서는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나사로를 지명하여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즉시 나사로는 죽음에서 일어나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죽은 사람들 중에 오직 그 이름이 호명된 나사로만 살아났습니다. 다른 죽은 사람들은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 개인과 주님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아시는가,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가, 주님께서 나의 이름을 불러주시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 자신이 개인적으로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있지 못하다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 다 같이 앉아서 예배드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단지 여기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주로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름을 개인적으로 부르실 것입니다. 그 때 이름이 호명되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 이름을 불러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열 처녀 비유를 생각해보십시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갔다 오는 동안에 신랑이 왔습니다. 그래서 준비된 사람들은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이 닫혔습니다. 나중에야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들이 헐레벌떡 와서 문을 두드리며 열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마25:11-12) 주님은 그들을 알지 못하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자들만 아시고 불러주신다는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주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시겠습니까? 오늘 당신은 주님과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살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개인적으로 주님을 진심으로 믿고 사랑하며 인격적으로 교제하던 성도의 이름을 불러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기를 힘쓰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인정해주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예고편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요5:21에서 이미 선언하셨던 말씀이 진리임을 보여줍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이적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적입니다. 이 이적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표적은 예수님 자신이 죽으신 후에 부활하실 것과 종말에 주님을 믿는 자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실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은 성도가 부활할 것에 대한 예고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육체는 죽기 전과 똑같은 육체였습니다. 그러나 종말에 부활하게 될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입고 살았던 몸과는 완전히 다른 몸을 입게 됩니다. 죄와 연약한 것이 없으며, 죽거나 병들거나 늙지도 않는 영광스러운 육체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은 우리 부활의 첫 열매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단지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사로는 다시 살아난 후에 결국은 다시 죽었습니다.
우리 부활의 첫 열매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더 이상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몸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장차 부활할 때 주님과 같은 몸을 입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3:2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15:51-5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죽기 전에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면 우리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고 우리 몸이 완전히 썩을 때까지 주님께서 오시지 않는다 해도 아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 죄와 질병과 사고와 문제들에 시달립니다. 때로 우리는 살았다 할 것이 없다 싶은 상황에 빠지기도 합니다. 어려운 질병에 걸리거나 큰 문제를 만나면 두려워지고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주님에게는 우리의 모든 죄와 죽음과 연약함과 한계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고통당하며 신음하는 우리에게 부활의 능력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주님만 온전히 의지하면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르실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실 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주님과의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당신의 이름을 불러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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