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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벧전2:1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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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2007·09·22
오늘은 많은 성도들이 고향에 가느라고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고향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성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추석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방문합니다. 옛날에는 고향 가는 사람들 때문에 버스나 기차가 콩나물시루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요즘에는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다시피 합니다. 평소에 서너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길이 열 시간 이상 걸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매년 사람들은 그 고생을 무릅쓰고 고향에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고향에 대한 절실함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가난한 시골 고향을 떠나서 서울이나 도회지로 돈 벌러 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도시에 가면 돈을 쉽게 벌 수 있었습니까? 객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막심한 고생들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방세를 제 때 못 내서 집주인에게 잔소리를 듣거나 심지어는 쫓겨나기도 합니다. 일하는 공장에서는 밤늦게까지 너무 힘들게 일을 시키면서 월급이라고는 쥐꼬리만큼 줍니다. 그것도 어떤 때는 몇 달씩 밀렸다가 주기도 하지요. 먹는 것도 변변치가 못합니다. 혹시 아프기라도 하면 누가 찾아와 위로해 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게 고생을 하다가 추석이 되어 고향에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길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집에 가면 귀한 자식이고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고향에 가면 반갑고 그리운 얼굴들이 있습니다. 편안하고 포근하고 아늑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힘들고 멀어도 명절에 고향 찾아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나그네에게 집고 고향보다 더 그립고 귀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우리를 향해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나그네는 여행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여행을 좋아하십니까? 저는 지난 연초에 여러분들의 배려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스라엘은 PLO측과 무력충돌이 일어나고 있어서 가지 못했고,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 코스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지금의 터키와 그리스 지역입니다. 성지순례 기간 동안에 성경에 나오는 땅들을 직접 발로 밟으면서 많은 것을 실감하며 배울 수 있었습니다. 가슴 벅찬 감격과 가슴 속에 아련히 차오르는 그리움 같은 것도 자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행 일정이 워낙 빡빡하고 이동하는 거리가 장거리여서 매일 강행군을 해야 했습니다. 새벽 5-6시에 일어나서 새벽밥을 먹고 길을 떠났습니다. 다시 호텔에 들어가는 시간은 밤 10-11시였습니다. 소아시아 코스를 제대로 순례하려면 두 배 이상의 일정으로도 부족하다고 합니다. 잠깐 둘러보고 서둘러서 사진을 찍고는 또 몇 시간씩 버스를 타고 이동을 했습니다. 너무나도 고되고 힘든 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되고 빠듯한 일정 가운데서도 잊을 수 없는 경험들이 많았습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의 발자취와 숨결, 그리고 그들의 고난과 신앙을 실감나게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지중해와 에게해의 낭만적인 풍경들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여행은 참 즐거운 일이이며, 많은 것을 보고 배우는 유익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행하는 사람의 이미지는 행복하고 즐거운 것입니다. 그러나 여행이 즐겁고 행복한 이유는 돌아갈 고향과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돌아갈 집이 없다면 여행이 즐거울 수 있겠습니까? 돌아갈 고향과 집이 없다면 여행은 고단하고 심지어는 비참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여행객은 노숙자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여행이 즐겁고 낭만적일 수가 있는 것은 돌아갈 집과 고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베드로가 말하는 나그네의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여행객이 아닙니다. 이 나그네는 관광객이 아니라 정처 없이 먼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치고 힘이 듭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는 말씀이 많은데, 그것은 그들이 불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처럼 휴가를 즐기거나 고향을 찾아가는 나그네가 아니라 지치고 피곤하지만 갈 곳도 없는 나그네인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가 세상에서 바로 그런 나그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을 하기 전, 9절에서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2:9상) 그런데 그렇게 영광스럽고 고귀한 우리가 한 순간에 나그네와 행인이라는 지치고 피곤한 불쌍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벧전2:11상)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우리의 신분과 현실 사이의 간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나그네와 행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고향에 가면 귀한 아들딸이고 사랑받는 사람들이지만, 객지에 나가서 고생하고 있을 때는 불쌍하고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세상이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발에 물집이 생기도록 피곤하게 여행을 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우리의 본향인 하늘나라를 향해 여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여행을 잘 마치고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먼저,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혼과 육체는 영적인 일과 세상적인 일을 대표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목적지를 향해서 여행하는 나그네가 중간 여행길에서 주저앉아버리면 아주 곤란하겠지요? 가다 보니까 너무 마음에 드는 곳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힘든 여행 포기하고 여기 눌러앉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난 성지여행 때도 너무나도 낭만적이고 경치 좋은 곳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곳들을 지나가면서 한 번 보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곳에 머물면서 좀 더 천천히 즐길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그렇게 했더라면 남은 성지 코스는 포기해야 했을 것입니다. 터키 지방을 거쳐서 그리스로 들어갔습니다. 유럽의 분위기가 느껴지면서 모든 것이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농담으로 고향이나 우리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여행지에 불과했습니다. 성지순례를 마치려면 미련 없이 털고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성도는 모두 이 세상에서 나그네입니다. 세상에도 재미있고 즐길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생각은 최종 목적지를 향해 힘들더라도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육체의 생각은 힘든 여행 포기하고 이렇게 좋은 곳에 눌러앉아 살자고 합니다. 그래서 육체가 영혼을 거스려 싸웁니다. 베드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여정은 천국을 목적지로 하는 여행길입니다. 그런데 그 여행을 포기하고 이 세상의 즐거움과 행복에 안주하고자 하는 유혹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혼의 주장은 더 많이 기도하고 더 신실하게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육체의 정욕은 힘들고 피곤한 여행보다 이 세상이 제공하는 즐거움과 편리함에 더 많은 시간과 마음을 사용하자고 주장합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좋은데 왜 힘들게 고생하며 여행을 해야 하느냐고 합니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추석에 고향 가는 사람들이 여행이 힘들다고, 경치 좋은 곳이 나타났다고 해서 여행을 중간에 포기하고 주저앉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 천국을 향한 여행을 멈추거나 머뭇거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본향 천국을 향해 간단없이 나아가는 것을 볼 때 세상 사람들은 종종 우리를 비난합니다. 세상은 자기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고 나쁘다고, 악행을 한다고 비방합니다. 이번 아프카니스탄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세상은 교회를 파상적으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선교 자체가 큰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난하고 있습니다. 선교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명령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한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 할 수만 있으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복음을 전해야만 합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선교 자체를 비난합니다. 선교는 독선적이고 오만한 것이라고, 그러므로 기독교는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려는 시도를 중단하고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세상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그런 비방에 대항해서 싸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의 선한 모습을 보고 놀라고 감동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도는 시종일관 하나님 백성다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8)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3-14)
우리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며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아가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악행을 행한다고 더 이상 비방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지금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은, 그동안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잘못되고 나쁜 사례들을 얼마든지 댈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 모든 일들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비난한다고 함께 싸우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고,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행실을 올바르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1:12)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러 오실 때 우리의 거룩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의 나그네 삶은 힘들고 피곤합니다. 그러나 힘들고 피곤한 것이 우리의 목적지를 포기해야 할 이유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지금 그렇게 지쳐 있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나그네의 힘든 모든 일들을 이겨내는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먼저 성도는 이 모든 고난 속에서 하늘의 영광과 소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늘의 소망을 바라볼 때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들은 축소되고 우리는 그것을 능히 이길 수 있게 됩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18)
이러한 원리는 세상에서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을 보십시오. 오늘 그들이 많은 사람들의 인기와 갈채를 받으며 막대한 연봉을 받기까지는 피나는 훈련과 자기 절제가 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러한 훈련과 절제를 포기한다면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들의 훈련과 절제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지독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의 갈채와 많은 연봉을 위해서 기꺼이 그 모든 것을 감수합니다. 만일 아무 대가도 없이 그러한 것들을 감수하라고 하면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 세상 나그네 길에서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들을 잘 이겨내려면 하늘의 영광과 소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여정이 끝나는 대로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고통과 질병과 슬픔과 눈물이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죄와 죽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면서 지극한 영광과 완전한 축복 가운데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인생 나그네 길에서 당하는 잠간의 고난은 별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잠간만 참고 견디면 우리는 영원한 본향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나그네 인생길을 가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함께 이 길을 걸어가는 형제들을 주셨습니다. 이 형제들이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럽습니까? 그러므로 이 길을 걸어가는 우리는 결코 외롭거나 힘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 가운데 힘을 내서 이 길을 힘차게 달려갑시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위로하며 부축하고 끌어주면서 힘든 여행길을 기쁨과 감사함 속에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고향 가는 길이 어렵고 피곤할지라도 하늘 본향을 향한 소망과 기대 속에 행복한 여행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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