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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상2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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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john316.or.kr |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는 길 (사무엘상 22:1-2)
< 비전의 주체가 되십시오 >
전 세계에서 한국교회만이 특이한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형 교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청년 때는 전 세계에 30대 교회에 우리나라 교회가 10여개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지만 지금은 별로 자랑스럽지 않은 훈장으로 여겨집니다. 그만큼 한국교회가 외형주의에 치우쳤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한 목사님이 여 성도 추행 스캔들로 교회를 사임했습니다. 직설적이고 도전적인 말씀으로 많은 젊은이들을 움직였던 목사님인데 한국 교회에 큰 상처와 복음전파에 큰 장애물을 남긴 채 쓸쓸히 퇴장했습니다. 너무 매스컴이 떠들기에 무슨 일인가 하고 인터넷에 들어가 봤더니 남겨진 댓글이 눈뜨고는 보지 못할 댓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당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더니 전혀 반대 분위기의 글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글들 중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지난 15년 간 매주 예배에 참석하면서 한 번도 목사님과 만나 얘기한 적도 없지만 목사님을 여전히 존경하고 이 교회 교인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글을 보고 “대단한 짝사랑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매주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담임목사와 15년 동안 한 번도 대화를 못하고 담임목사가 자신의 이름도 모른다면 그것이 어찌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까?
성경에서 ‘선한 목자장’이란 별칭이 붙은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은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한다.”고 했습니다(요 10:2). 또한 “선한 목자는 양을 안다.”고 했습니다(요 10:14). 그런데 자신은 “우리 목사님!”이라고 하지만 목사는 자신의 이름조차 모른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신앙생활의 축복은 목자와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고 시간이 지날수록 영혼이 살지고, 지경이 넓혀지고, 비전이 구체화되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10년,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초대형 교회의 하나의 부품 같은 역할만 하고, 여전히 여왕벌을 섬기는 일벌의 위치에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물론 음지에서 제 역할을 하는 작은 부속이나 일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에 삶의 의미와 보람을 먹고 성장해야 합니다. ‘작은 것도 가치 있게 보는 것’과 ‘작은 존재로만 머물러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사장시키지 말고 영향력이 커지고 비전의 주체가 되는 꿈을 꾸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꿈을 품고 나가면 영적인 신분상승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 영향력의 성장을 추구하십시오 >
요새는 자기 힘만으로는 신분상승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노력하면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이 가능했지만 요새는 “개천에서는 용이 안 난다.”고 합니다. 그만큼 신분상승이 어렵다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매년 100명을 뽑는 고시에 패스하면 바로 신분상승이 이뤄졌지만 지금은 매년 1000명을 뽑으니까 고시에 패스해도 신분상승은 어렵습니다. 요새는 변호사 생존경쟁도 치열합니다. 또한 돈이 돈을 버는 시대이기에 신분상승의 길은 더욱 막혔습니다. 옛날에는 사다리를 타고 직접 지붕으로 올라갔지만 요새는 먼저 지붕에 올라간 사람들이 기득권을 지키려고 지붕으로 향한 사다리를 다 부숴버렸습니다.
그 경우에 지붕으로 올라가려면 지붕 위의 누군가가 줄을 내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연줄이 중요합니다. 좋은 친구나 좋은 리더를 만나든지, 아니면 좋은 사돈이나 후원자를 만나야 합니다. 또한 자신도 성질대로 살면 아무도 줄을 내려주지 않기에 자기를 스펙(specification, 사물인 경우에 쓰면 ‘특별한 기능’, 사람인 경우에 쓰면 ‘특별한 장기’)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전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살다 보면 인생에서 몇 번쯤은 줄을 내려줄 사람을 만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목이 없거나 자기의 고약한 성질 때문에 그 줄을 끊습니다. 결국 주님의 2대 성품인 ‘겸손과 온유’가 없으면 복된 신분상승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줄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줄’이지만 하나님의 줄도 대부분 사람을 통해 펼쳐지기에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특별히 ‘현재 성공해서 지붕에 있는 사람’보다 ‘앞으로 지붕 위로 올라갈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미 성공한 사람에게 줄을 대려는 것은 대개 본인의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끝납니다. 이미 성공한 사람은 자기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을 대등하게 대해줄 마음의 여유나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공한 사람에게는 자기 외에 수백 명, 수천 명이 줄을 대려고 하니까 혹시 줄이 닿아도 그 줄은 지극히 약한 줄이 됩니다. 그런 약한 줄은 사실상 거의 도움이 안 됩니다.
또한 이미 성공한 사람과 줄을 댄 초기의 개척공신들은 나중에 줄을 대려고 치고 올라오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치열한 정치 싸움이 벌어지고, 심지어는 교회 내에서도 그런 정치 싸움이 자주 벌어집니다. 누가 자기가 이미 확보한 줄과 기득권을 놓치고 싶겠습니까? 기득권에 대한 사람의 집착은 무섭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정치적인 동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정치적인 습성을 알고 주님은 인격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물론 “양의 이름을 안다.”는 말은 단순히 이름만 아는 것 이상의 관심을 가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목자가 최소한 양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기도해줄 정도까지는 알아야 합니다.
저는 매일 교인들과 온새기 회원 중에 7명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전체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합니다. 사람에게 축복의 말과 축복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그런 구체적인 축복기도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우리 목사님! 우리 성도!”란 말이 가능하겠습니까? 그 기도하는 일도 교인이 3-4백 명 이상 되면 힘들어지기에 어떤 학자는 3-4백 명 정도 이하의 교회가 가장 이상적인 교회라고 주장합니다.
사실상 교인이 3-4백 명만 되어도 얼마든지 큰일을 합니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훈련된 가신 318명으로 막강한 세력을 떨친 그돌라오멜의 북방 4개국 연합군을 물리치고 롯을 구했습니다. 기드온도 3백 용사로 미디안의 대군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켰고, 다윗도 소외된 자 4백 명과 함께 다윗 왕조를 이뤄냈습니다.
그처럼 교인이 3-4백 명 정도까지는 목자가 매일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면서 바른 목양관계를 이룰 수 있지만 교인이 3-4백 명이 넘어가면 새로운 교회 개척에 힘써 교회의 본질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일인지 모릅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체 교회를 키우는 것보다 계속 ‘딸 교회(daughter church)’를 세우는 것이 훨씬 영향력이 커집니다.
교인이 3-4백 명이 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목양’이 ‘경영’으로 변합니다. 물론 큰 교회가 큰 힘을 선용하면 유익도 있기에 목양개념의 일부를 희생하며 교회성장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목자가 매일 기도해주지는 못해도 최소한 교회에 비교적 잘 나오는 양의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합니다. 그 숫자의 한계가 어느 정도일까요? 사람마다 다르지만 대략 3천 명 정도가 최대 한계인 것 같습니다.
결국 교인이 3천 명 이상 넘게 되면 교회의 본질은 현저히 약화되면서 목회자는 “힘이 정의다!”라는 생각에 깊이 젖게 되고, 교회는 정치와 경영의 현장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인이 3천 명이 넘어가면 분립교회 개척을 통한 교회의 영적인 다이어트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 교회와 목회자의 생명력과 이름을 더 영속적이게 만드는 길이고, 불신자들에게도 교회를 교회답게 보이게 만드는 길입니다.
< 인생을 의미 있게 사십시오 >
불신자들은 교회로부터 ‘힘’보다 ‘사랑’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교회로부터 힘을 느끼면 그 교회 출석 교인들은 기분이 좋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불신자들의 마음은 더 닫히고 심지어 반발하면서 더 전도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분립을 모르는 초대형 교회의 요새 별명은 ‘마이너스 일당 백 교회’입니다. ‘한 명 자기 교인을 늘리면서 백 명의 불신자들의 마음을 닫게 하는 교회’란 뜻입니다.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반면에 교회가 커져도 교회 분립과 선교를 힘쓰며 교회 본연의 모습을 지키면 그 교회는 ‘플러스 일당 백 교회’가 됩니다. 그러면 보이는 숫자적인 성장은 더뎌도 보이지 않는 영향력의 성장은 오히려 촉진됩니다.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처럼 교회의 본질을 지키려는 목자들이 많아질 때 한국교회는 다시 한 번 세상의 빛과 희망이 될 것입니다.
만약 목자가 교회의 본질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의식 있는 양떼라도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여왕벌 밑에서 10년, 20년 이상 계속 일벌로 있는 것으로 성도의 책임을 다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자기의 의미를 더욱 찾을 수 있는 곳으로 ‘플러스 일당 백 교회’를 꿈꾸며 개척의 길에 나서야 합니다.
변화는 두려운 일입니다. 특히 개척자의 길은 모험의 길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좋은 뜻을 위해 자기를 죽음으로 내몬다’는 의미를 가진 ‘decide(결심하다)’가 필요하고 ‘좋은 뜻을 위해 자기를 극단으로 내몬다’는 의미를 가진 ‘determine(결단하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10년, 20년 동안 인생의 큰 의미와 진전 없이 일개미로 있기보다는 차라리 그 모험이 낫습니다. 거룩한 뜻 안에서는 실패도 전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도 개척자의 길을 가게 하소서! 그러나 직접적인 개척자가 될 수 없다면 능력 있는 개척자를 만나서 뜻 깊은 길을 가도록 좋은 만남을 허락하소서!” 좋은 개척자를 만나 그와 거룩한 비전을 공유하며 나갈 때 그 인생은 가장 의미 있는 인생이 됩니다.
가끔 보면 사람의 줄이 없어도 하나님이 직접 줄을 내려주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창조성을 가지고 인물이 된 사람들입니다. 백 명 중에 한 명, 천 명 중에 한 명꼴로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빌 게이츠나 안철수 씨처럼 누구도 따라오기 힘든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능력으로 인물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초창기 멤버가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강철왕 카네기와 함께 일한 사람들 중에 43명의 백만장자가 나왔습니다. 좋은 줄을 초창기에 잡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창조성을 가진 사람과 초창기에 함께 하는 멤버가 되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몇 십 년 동안 일개미의 인생으로 사는 것보다 인생을 훨씬 의미 있게 사는 비결입니다.
저도 매일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게 주신 성경 전권 파일의 비전과 네트영어의 비전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전해주는 하나님의 줄이 되게 하소서!” 저는 하나님이 영적 영향력의 비전으로서 ‘성경 전권 파일의 비전’을 주셨고, 영적 영향력을 뒷받침하도록 ‘네트영어의 비전’을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 비전이 처음에는 허황된 비전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은 점차 구체적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 네트영어 선생님들에게 “제 줄을 잡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 제의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줄을 붙잡으라는 뜻도 있지만 비전 안에서 그들도 실질적인 축복을 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도 있습니다. 축복의 줄은 초창기에 함께 하는 일꾼이 적을 때 잡아야 그 축복의 줄이 견고해집니다. 초장기에 제의된 믿음과 축복의 줄을 잡지 못하면 규모가 커진 다음부터는 더 이상 견고한 축복의 줄이 드리워지지 않습니다.
왜 사람들이 축복의 줄을 잘 잡지 못합니까?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버스가 지나간 다음에 버스를 잡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과 정성을 드릴 때도 먼저 드리는 것과 나중에 드리는 것은 축복의 열매 차이가 천지차이가 됩니다. 야곱은 에서보다 별미를 조금 먼저 이삭에게 드렸기에 축복권을 독점적으로 계승받았습니다. 그처럼 개척 초기의 헌신은 ‘영적인 별미’지만 성공한 후의 헌신은 ‘보통 음식’이 됩니다.
그 원리도 모르고 요새 많은 사람들이 성공적인 초대형 교회로 유행처럼 몰려가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의미는 약화되고 영혼의 크기는 작아집니다. 교인이 3천 명이 넘어간 이후에 등록한 성도들은 본인은 “우리 목사님!”이라고 불러도 그것은 거의 짝사랑일 뿐입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한다.”고 생각하면서 담임목사가 자기 이름도 모르는 것을 괜찮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하는 것’과 ‘목양관계의 기본이 형성되지 않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이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거룩한 신분상승의 꿈과 인물이 되는 삶을 추구하십시오, 교회와 교인의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힘과 지위와 물질을 거룩한 일에 잘 쓰면 신분상승과 경제적 축복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물질과 지위가 있어도 겸손하게 섬김의 자리에 서고 선교와 구제에 힘쓰면 그것이 얼마나 복된 모습입니까? 그 모습에 사람들이 머리를 숙입니다.
어떤 성공한 사람은 자기의 사회적인 위치가 어느 정도니까 어느 정도 규모의 교회에 다녀야 된다고 오해합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그런 정치적인 본능을 억제하지 못해 자기 인생의 의미와 영향력을 현저하게 약화시키며 살고 있습니다. 큰 사람이 존경 받는 것도 아니고 작은 사람이 무시 받는 것도 아닙니다. 존경은 크게 되어 겸손히 작아질 때 받는 것이고, 무시는 작다고 스스로도 작게 여기니까 받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유명한 한 최고위 인사는 강남에 있는 30-40명 되는 작은 교회에서 주보를 나눠주며 겸손히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더욱 존경스런 모습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강남의 큰 교회에 다녔다면 무슨 큰 감동이 있겠습니까? 최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작은 교회에서 소리 없이 섬기니까 그 모습이 훨씬 더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감동을 꿈꾸며 영적 개척공신의 길을 찾아 나서십시오.
< 다윗의 사백 인이 주는 교훈 >
본문은 성경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본문 중의 하나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이면서 이스라엘의 민족 영웅으로 떠올라 사람들은 사울 왕은 ‘천천’이라고 했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질투에 사로잡힌 사울 왕을 피해 다윗은 계속 죽음의 위협 속에 쫓겨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본문의 아둘람 굴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아둘람 굴은 다윗에게는 영원히 기억될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 굴에서 다윗 왕조의 기초가 싹텄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싹텄습니까?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다윗 가족을 비롯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는데 주로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 즉 환난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 등 사백 명이 모였습니다. 그 사백 명이 나중에 다윗 왕조의 기초가 되고 그들 중에 상당수는 개국공신의 지위를 누립니다. 이 장면은 몇 가지 영적 교훈을 줍니다.
1. 연약한 사람도 가치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가치 없게 보여도 하나님 안에서 가치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교회를 보면 때로는 연약해 보이는 사람들이 더 큰 역할을 합니다. 여자들이 겉으로는 약해보이지만 가정과 교회의 수많은 일들이 여성 중심으로 이뤄집니다. 연로하신 분들도 겉으로 보기에는 힘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회에 얼마나 큰 힘이 됩니까? 교회에서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 군단’은 몇 가지 탁월한 장점이 있습니다.
첫째, 어르신 군단은 협조를 잘합니다. 교회가 어떤 뜻을 세우면 젊은 사람들은 주저해도 어르신 군단은 묵묵히 협조하니까 교회에 큰 힘이 됩니다. 둘째, 어르신 군단은 기도를 많이 합니다. 새벽잠이 없고 시간도 많으니까 기도에 전념하는데 그 기도가 사실상 최고의 일입니다. 셋째, 어르신 군단은 꾸준합니다. 예배와 각종 모임의 개근상은 거의 어르신들이 차지합니다. 넷째, 어르신 군단은 교회의 위기 때 최선봉에 서서 위기를 기회로 만듭니다.
결국 교회에 가장 힘이 되는 그룹이 겉으로는 약해보이는 어르신 군단입니다. 그처럼 약해보이는 사람도 소중하게 보십시오. 그들에게도 위대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특히 환난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선교 마인드를 가지면 하나님이 그에게 큰 축복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2. 꿈꾸는 소수가 역사를 바꿉니다
사울 왕의 군대에 비해 다윗의 4백 명은 얼마나 작은 숫자입니까?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불의한 이 현실을 개선하게 하소서!” 지금도 소외된 자는 이런 꿈을 가질 것입니다. “내가 사회의 부조리를 개선해 보리라!” 빚진 자는 이런 꿈을 가질 것입니다. “내가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모순을 해결하리라!” 마음이 원통한 자는 이런 꿈을 가질 것입니다. “내가 꼭 정의가 통하는 사회를 만들리라!”
다윗의 4백인이 가진 최대 무기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그들이 소유한 거룩한 꿈입니다. 그 꿈을 이루려고 같은 처지에 놓인 다윗에게 몰린 것입니다. 그들이 굴속에서 함께 생활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열악한 환경입니까? 그런 환경 속에서도 일치단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가진 꿈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거룩하고 찬란한 꿈을 가지십시오. 꿈이 있으면 소수의 무리가 모여도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캠브리지 대학에서 마음에 맞는 젊은이 7명이 감동 가운데 ‘영국을 하나님의 나라로’란 꿈을 품고 손을 맞잡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꿈을 사용하셔서 마침내 그들 7명은 하나 같이 영국교회 부흥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캠브리지 7인을 꿈꾸십시오. 자신을 가치 없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도는 엄청난 지위와 신분을 가진 존재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찬란한 꿈을 꾸고 기도하고 나가면 하나님은 그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꿈이 없는 다수의 일원이 되지 말고 꿈을 가진 소수의 일원이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 꿈을 구체화시켜주실 것입니다.
살다 보면 공동체 선택의 순간이 옵니다. 그때 ‘힘 있는 편’보다 ‘의로운 편’을 선택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거룩한 신분상승의 은혜와 족장 가문의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꿈이 있는 사람을 쓰시고 축복하십니다. 이제 개척과 선교의 꿈을 가지고 새롭게 일어서십시오. 그처럼 눈앞에 이익이 적어도 의로운 소수의 편에 서고 다윗의 사백 인에 가담하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 거룩한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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