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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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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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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감리교 사회 평신도국에서 의뢰하여 작성되었다. 평신도국에서 요청한 것이 "성서 전체"를 다루는 것이었으므로, 필자의 전공 분야가 아닌 구약성서까지 다루게 되었다. 이것은 학술적인 논문이 아니라, 사회 봉사에 대한 성서적 입장을 개괄한 것이다.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관련된 논문이나 책들이 있는지 찾아보았으나,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주(註)를 달지 않고, 개론 식으로 썼다. 이 논문은 감리교 사회 평신도국 사회봉사 백서에 실려 있다.
교회는 사회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그 책임을 이루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선교 2세기에 접어 든 한국 교회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선교 1세기에 교회의 선교가 주로 말씀과 은사를 통한 것이었다면, 선교 2세기는 문화와 사회적인 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상황이 이렇게 변화하였기 때문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책임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하며, 그 대답을 성실하게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있어서 성서는 매우 중요하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성서는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서는 그 어디에서도 "사회봉사론"을 펴지 않고 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서 잘 밝히고 있듯이, 성서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구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구원은 행동을 수반하게 된다. 하지만 강조점은 구원에 있다. 그리고 구원에 따르는 행위에 대하여 말하는 경우에도, 사회적인 봉사에 대해서보다는 신앙의 공동체 내에서의 책임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회봉사에 대한 성서적 입장을 찾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바로 그런 까닭에 이런 문제에 대하여 성서학자가 쓴 연구 논문이나 연구서를 찾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사회봉사에 대한 성서적 입장을 찾아낸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 될 것이다. 하지만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책임으로서 사회봉사를 말할 때, 성서적 근거를 찾지 않으면, 그 모든 논의는 흔들리는 터전 위에 설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앞서서, 사회봉사에 대하여 성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 바탕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참된 봉사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사회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그 책임을 이루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선교 2세기에 접어 든 한국 교회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선교 1세기에 교회의 선교가 주로 말씀과 은사를 통한 것이었다면, 선교 2세기는 문화와 사회적인 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상황이 이렇게 변화하였기 때문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책임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하며, 그 대답을 성실하게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있어서 성서는 매우 중요하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성서는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서는 그 어디에서도 "사회봉사론"을 펴지 않고 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서 잘 밝히고 있듯이, 성서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구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구원은 행동을 수반하게 된다. 하지만 강조점은 구원에 있다. 그리고 구원에 따르는 행위에 대하여 말하는 경우에도, 사회적인 봉사에 대해서보다는 신앙의 공동체 내에서의 책임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회봉사에 대한 성서적 입장을 찾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바로 그런 까닭에 이런 문제에 대하여 성서학자가 쓴 연구 논문이나 연구서를 찾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사회봉사에 대한 성서적 입장을 찾아낸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 될 것이다. 하지만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책임으로서 사회봉사를 말할 때, 성서적 근거를 찾지 않으면, 그 모든 논의는 흔들리는 터전 위에 설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앞서서, 사회봉사에 대하여 성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 바탕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참된 봉사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1. 구약성서에서의 사회봉사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갔는가를 그리고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도 역시 구원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변 사회를 섬기고 봉사해야 하는 대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싸우고 지켜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수 민족으로서 수 많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친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그러한 태도를 무조건 나쁘다고만 볼 수 없다.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을 수 있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이스라엘은 신정(神政) 국가였다. 일단 이스라엘인의 피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이방 나라"는 있었지만, 이스라엘 안에 "세속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거대한 하나의 교회(카할)였다.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행동은 사회봉사의 개념이 아니라, 형제애의 개념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세속 사회 안에서 어떠한 봉사의 활동을 할 것인가의 문제는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에게는 생소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방 민족은 점령하여야 할 대상이었으며,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랑해야 할 형제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구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식 안에서 사회봉사에 대한 개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구약을 그냥 뛰어 넘어야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구약성서 안에는 다양한 신탁(神託)들이 존재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기록된 말씀들이 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우려야 할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당시의 사회,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사회에 대한 책임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였지만, 그들에게 준 하나님의 말씀들은 사회적 책임성에 대하여 우회적으로나마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중심 되는 질문은 이러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도록 요청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구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신탁들을 점검해 볼 것이다.
1) 창조 이야기
구약성서를 펼 때, 우리는 먼저 창조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라는 점을 이야기적인 형식(narrative form)으로 선언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과 이 자연이 어떻게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혀 주고 있다. 물론, 이 이야기 안에 아직 "인간 사회"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를 생각할 때, 인간만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전을 보면, "사회"는 곧 "인간 사회"라고 정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말 사전을 보면, "사회"를 "공동 생활을 하는 인류 집단"이라고 정의하고 있고, 웹스터 사전(Webster's II)에 보면, Society를 "The totality of social relationships among human beings"("인류 사회의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사전적인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포함한다. 하지만 이것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일어난 큰 인식의 전환의 빛에서 수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 동안 서구적인 사고 방식에 따라서 우주의 주인으로서 인간만 생각을 해 왔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 중심의 사고와 행동이 온갖 환경의 파괴를 불러 왔고, 이제는 우주의 모든 존재가 나름대로의 가치와 존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발상의 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였다. 따라서 이제는 "사회"라는 말을 "인간 사회"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회는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모든 외적 환경을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회라는 용어를 이렇게 포괄적으로 이해할 때, 창조의 이야기는 인간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창조를 계획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
이렇게 말씀하신 후,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명령하신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여기에서 "다스리다"(라다)와 "정복하다"(카바쉬)가 사용되고 있는데, 그 동안의 서구 기독교는 이 용어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자연을 착취하는 모든 행동을 정당화 시켜 왔다. 그래서 환경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위에 인용한 두 구절이 환경 파괴의 주된 원인이라고 지적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서구의 정복 이데올로기의 입장에서 성서를 읽고 잘못 해석한 결과이지, 성서가 그러한 착취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창조 이야기에 나오는 이 두 단어는 인간의 착취를 부추기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두 말씀은 "하나님의 정원의 정원사"로서의 인간의 책임을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관리하고 선용하는 책임을 맡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여전히 창조의 정점에 있다. 하지만 모든 피조물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정반대의 이야기도 성립될 수 있다. 즉, 인간이 모든 피조물의 관리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창조의 정점으로서 인간의 책임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책임은 단지 다른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책임은 다중적이다. 인간은 먼저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또한 다른 인간에 대한 책임도 가지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선한 관리인으로서의 책임, 성실한 정원사로서의 책임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사회봉사"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우리의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 동안 우리는 사회봉사를 다른 인간에 대한 어떤 행동으로만 생각을 해 왔는데, 창세기의 이야기는 그 책임을 한층 넓혀 주고 있다. 우리가 부름을 받은 봉사는 인간 사회만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한 책임적인 봉사까지도 포함한다.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창조 이야기에 나타나 있는 이러한 책임을 자각하여, 환경을 보호하고 파괴된 환경을 회복시키는 일에 무엇보다도 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재앙을 주는 힘으로 작용하던 시기에는 인간이 자연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인간이 자연에게 재앙을 주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초래하는 자연 재앙을 더 이상 진행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또한 그 재앙으로 인한 파괴를 되돌리기 위하여, 책임을 가지고 일해야 할 것이다. 이제 시작되고 있는 21세기에는 환경 보존과 회복 운동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회봉사의 영역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창조 이야기는 매우 중요하다.
2) 선민의 존재 이유
우리가 구약성서에서 두 번째로 보는 것은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이다. 아버지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람은 하란에서 머물렀고, 그곳에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란에서 그냥 정착해 살려고 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1-3).
아브람은 이 말씀을 듣고 즉시 하란을 떠나, 어딘지 알 수 없는 약속의 땅을 향해 여행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믿음의 행동으로써 아브라함은 선민의 조상이 되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말씀은 선민(選民)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하나의 민족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 민족만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하나의 민족이 선민으로서 선택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선민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실행하도록 선택된 민족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족속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하려는 것이 선민을 세운 이유이다. 물론, 선민이 됨으로써 얻게 되는 특권도 있다. 구원의 반열에서 장자로서의 특권이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선민으로서의 의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선민은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다른 민족들에게 넓히는, 매우 중요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 선민으로서의 특권과 의무를 비교해 본다면, 의무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 속에서 사회봉사에 대한 암시를 발견한다. 물론, 이 말씀은 사회봉사에 대한 명령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선민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 주는, 구약성서 안에서는 매우 드물게 발견되는 말씀중 하나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다른 민족과의 투쟁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방 민족이란 정복의 대상이 될지언정, 결코 섬김과 봉사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는 잘못된 것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다른 민족을 투쟁과 정복의 대상을 보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민족은 섬김의 대상이다. 선민을 선택한 것은 선민만을 구원하고 축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선민은 자동적으로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민족에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노력은 물론, 일차적으로 선교적인 노력을 말한다.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선교적인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선교적인 노력은 단순히 말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활동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선민의 사회봉사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선민은 사회봉사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선민은 오히려 선교를 위해서 존재한다. 하지만 사회봉사는 선민의 삶의 중요한 양식이다. 사회봉사가 없이 선교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그러므로 선민은 사회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분명히 인식하고,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통하여 사회에 이바지하면서, 그 사회를 선민의 삶 속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들은 선민이 되었다고 하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 그들은 선민으로서의 특권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민족에게 있어서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를 망각하였다. 다른 민족들에게 여러 가지의 선한 활동을 함으로써 모두가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의무를 망각하였다. 어디 그 뿐인가?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민족을 정복과 파괴의 대상으로 생각하였고, 그렇게 행동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역사는 끝없는 전쟁의 역사가 되어 버렸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 21:33-46//막 12:1-12//눅 20:9-19)의 말씀에서 분명해지듯이, 하나님께서는 의무를 망각하고 특권에만 도취해 있던 이스라엘의 선민권을 박탈해 버리셨다. 그리고 새로운 선민을 세우셨다. 그 선민이 바로 교회이다.
구원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교회는 새로운 이스라엘, 즉 새로운 선민이다. 옛 선민이 열매를 맺지 않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새로운 선민을 세운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근원이 되라"는 명령은 새로운 선민인 교회에게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끄는 선교 사역을 마땅히 담당해야 하고, 그러한 선교 사역을 위해서 교회는 이 사회에 대한 다양한 봉사 프로그램들을 마련하고 실천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이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마치 옛 선민을 무효화시켰던 것처럼, 새로운 선민의 자격도 중지시켜 버릴 수 있을 것이다.
3) 토라(율법)
그 다음으로 우리는 구약성서의 율법 규정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셨듯이(마 19:1-12//막 10:1-12), 하나님께서는 이미 완악해진 인간들의 마음을 고려하여, 완악해진 인간들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정으로서 율법을 주셨다. 유대교 안에서는 율법이 구원의 수단이 되어 버렸지만, 출애굽기와 신명기를 잘 읽어보면, 율법은 구원의 조건으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율법은 오히려 이미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규정한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율법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제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모든 율법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거룩"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 땅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히브리어에서 "거룩"(카도쉬)은 무엇보다도 먼저 "구별됨"을 의미한다. 즉, 부정한 것들로부터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율법의 많은 규정들은 부정한 것들이 무엇이며,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구별할 수 있으며, 만일에 부정하게 되었을 때에는 어떻게 다시 거룩해질 수 있는지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의적인 율법에서는 사회봉사에 대한 어떤 지침도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이웃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많지 않은 율법 규정들이다. 이 규정들도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사회봉사를 명령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삶의 상황에 대하여, 특히 어려운 사람들의 삶의 상황에 대하여 최소한의 책임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정신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율법의 한 규정은 밭의 소출을 거두어들일 때 이렇게 하도록 요청한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9-10).
이 율법 규정은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한 배려를 요청한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타국인"을 언급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구약성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타국인에 대하여 가지는 지배적인 감정은 배타적이고 호전적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치 않으신다. 오히려 선한 배려를 요청하고 있다. 이 율법 규정을 피상적으로 볼 때에는 그 선행의 정도가 약간 소극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 규정은 가난한 사람들과 타국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일 수 있다. 사실, 가난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물질적으로는 돕는 것이지만, 주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더욱 비참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찾아가 돕도록 요청하지 않고, 소출의 일부를 그냥 남겨 두라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은 자존심을 상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먹을 것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율법 규정은 소극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 규정을 통하여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것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 율법 규정은 가난한 사람의 물질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그의 인권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율법 규정은 사회봉사에 대한 명령은 아니지만, 사회봉사가 어떤 정신으로 행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가르침이다. 이 말씀에 의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의 사회봉사는 가진 자의 거만한 과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봉사는 또한 물질적인 것을 제공해 주는 대가로 인간적인 자존심을 파괴하는 행동이 되어서도 안 된다. 사회봉사, 즉 다른 사람의 곤경을 위해 행하는 모든 행동은 이 율법 규정이 보여주는 것처럼,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하며, 그 사람의 인권까지 배려해야 한다. 사회봉사 활동은,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어려운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활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인적(全人的)인 차원에서 계획되고 행해져야 한다.
그 뿐이 아니다. 율법은 가난한 동족을 적극적으로 도우라는 요청을 하기도 한다:
네 동족이 비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식을 취하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식을 위하여 돈을 꾸이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식물을 꾸이지 말라(레 25:35-37).
이 율법 규정은 앞의 것보다 훨씬 적극적인 행동을 요청하고 있다. 이 경우에는 그 사람이 더 이상 스스로 살아갈 수 없을 정도의 적빈(赤貧) 상태에 빠진 것을 두고 말한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가난이라면, 어느 정도의 소출을 남겨 둠으로써 도와 줄 수 있지만, 이렇게 완전히 잃어버릴 정도의 극한 가난에 빠지면, 좀 더 적극적인 도움의 손길을 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럴 경우, 도울 힘이 있는 자는 그를 자기 집에 들여 함께 살아야 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 때, 그는 결코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에게 허용되어 있는 것은 원금을 받는 것뿐이다. 물론, 이것조차도 그 사람이 꾸어준 것으로 다시 회복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도와준 것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이러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도우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이다.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는 또 다른 율법 규정도 이 점에서 시사적이다: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8-29).
구약성서의 십일조 규정은 다양하고, 그 기원이 복잡하다. 하지만 삼 년마다 한 번씩 행해지는 이 십일조는 다분히, 현대적인 의미의 "빈민 구제 제도"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삼 년에 한번씩 십일조를 모아 저축하였다가, 어려움이 생기는 사람들이 있으면 수시로 그들을 도와 주게 하였다. 결국, 이 십일조는 구제 기금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십일조는 전혀 구제 기금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는 구약성서의 여러 가지 십일조 전통 중에서 자신에게 이로운 한 가지만을 골라 쓰고, 사회적 책임을 위해서 제정된 십일조에 대해서는 외면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율법 규정들 가운데 사회에 대한 책임을 언급하고 있는 것들을 몇 가지 살펴보았다. 율법 규정들 가운데, 많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사회적 책임을 요청하는 것들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율법 지침들은 오늘의 교회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정신을 포함하고 있다. 오늘의 교회는 이 율법들로부터 사회봉사를 위한 바른 정신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오늘에 적용하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4) 예언정신
다음으로 우리는 예언정신 안에서 사회적 책임에 대한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예언자들이 관심하고 있는 문제들이 개인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했다는 점에 관심을 둔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유다를 책망하는 과정에서 예언자들은 사회적인 책임에 대한 망각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먼저, 이사야는 다음과 같은 신탁으로써 당시의 백성들을 꾸짖는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5-17).
이 신탁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의 신앙적인 행위를 외면하신다. 하나님은 그러한 신앙적인 행위를 하기 이전에 먼저, 사회적인 책임들을 다하라고 요청한다. 사회적인 책임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악한 행동을 버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적인 행위보다도 이러한 사회적 활동을 더 중시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당시의 종교적인 관념에 비추어 볼 때, 가히 혁명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신앙적인 의무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신앙적인 행위로써 사회적인 책임이 어느 정도 면해질 수 있다고 믿었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사야의 신탁은 충격적이었다. 신앙적인 행위로써 사회적인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이다.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하는 모든 신앙적 행위는 그 의미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신앙적인 행위들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예레미야의 신탁도 이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내 백성 너희 중에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의 매복함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조롱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 하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창대하고 거부가 되어 살찌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히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송사를 공평히 판결치 아니하니
내가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 같은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5:26-29).
여기에서 예레미야가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지도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책망 안에서 우리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이 사회적인 책임을 망각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착취함으로써 부를 누리게 되는 상황을 그냥 두지 않겠다고 벼르신다.
같은 맥락의 비판이 아모스의 신탁에서도 발견된다: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암 8:4-6).
여기에서도 공격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기득권자들이다. 이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고, 그들을 돕지 않는다. 이들이 사회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부(富)로써 그들을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것이, 앞에서 보았듯이, 율법 규정에서 요청하는 사회적 책임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러한 정신을 거부하였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들이 이미 소유한 것을 어떻게 더 늘리는가에 있었다. 아모스의 신탁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자들을 그냥 놔둘 리가 없다는 것이다.
예언서 가운데 이러한 성격의 신탁들을 다 찾으려면 한이 없을 것이다. 예언 정신은 그만큼 인간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데 있다. 이러한 잘못된 신앙은 그들의 삶 속에서 사회적 무책임으로 표현되었다. 그들은 이웃에 대한 책임을 망각하고,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부를 더 증대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이러한 이기적 노력이 이스라엘의 사회적 관계를 파괴시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비인간적인 삶으로 내몰았다. 그러면서도 신앙의 행위들(제사, 순례, 십일조 등)을 꼬박 꼬박 챙겼다. 이러한 신앙의 행위들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의인(義人)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하였다. 예언자들은 이러한 허위의식을 파괴시켰다. 사회적인 책임을 망각한 채 행하는 어떠한 신앙적인 행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신앙적인 행위들이 소용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신앙의 행위를 빌미로 사회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신앙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데 있어서 예언자들은 구약의 어느 인물들보다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이스라엘은 신정(神政) 국가였다. 일단 이스라엘인의 피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이방 나라"는 있었지만, 이스라엘 안에 "세속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거대한 하나의 교회(카할)였다.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행동은 사회봉사의 개념이 아니라, 형제애의 개념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세속 사회 안에서 어떠한 봉사의 활동을 할 것인가의 문제는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에게는 생소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방 민족은 점령하여야 할 대상이었으며,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랑해야 할 형제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구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식 안에서 사회봉사에 대한 개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구약을 그냥 뛰어 넘어야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구약성서 안에는 다양한 신탁(神託)들이 존재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기록된 말씀들이 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우려야 할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당시의 사회,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사회에 대한 책임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였지만, 그들에게 준 하나님의 말씀들은 사회적 책임성에 대하여 우회적으로나마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중심 되는 질문은 이러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도록 요청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구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신탁들을 점검해 볼 것이다.
1) 창조 이야기
구약성서를 펼 때, 우리는 먼저 창조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라는 점을 이야기적인 형식(narrative form)으로 선언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과 이 자연이 어떻게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혀 주고 있다. 물론, 이 이야기 안에 아직 "인간 사회"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를 생각할 때, 인간만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전을 보면, "사회"는 곧 "인간 사회"라고 정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말 사전을 보면, "사회"를 "공동 생활을 하는 인류 집단"이라고 정의하고 있고, 웹스터 사전(Webster's II)에 보면, Society를 "The totality of social relationships among human beings"("인류 사회의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사전적인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포함한다. 하지만 이것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일어난 큰 인식의 전환의 빛에서 수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 동안 서구적인 사고 방식에 따라서 우주의 주인으로서 인간만 생각을 해 왔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 중심의 사고와 행동이 온갖 환경의 파괴를 불러 왔고, 이제는 우주의 모든 존재가 나름대로의 가치와 존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발상의 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였다. 따라서 이제는 "사회"라는 말을 "인간 사회"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회는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모든 외적 환경을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회라는 용어를 이렇게 포괄적으로 이해할 때, 창조의 이야기는 인간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창조를 계획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
이렇게 말씀하신 후,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명령하신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여기에서 "다스리다"(라다)와 "정복하다"(카바쉬)가 사용되고 있는데, 그 동안의 서구 기독교는 이 용어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자연을 착취하는 모든 행동을 정당화 시켜 왔다. 그래서 환경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위에 인용한 두 구절이 환경 파괴의 주된 원인이라고 지적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서구의 정복 이데올로기의 입장에서 성서를 읽고 잘못 해석한 결과이지, 성서가 그러한 착취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창조 이야기에 나오는 이 두 단어는 인간의 착취를 부추기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두 말씀은 "하나님의 정원의 정원사"로서의 인간의 책임을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관리하고 선용하는 책임을 맡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여전히 창조의 정점에 있다. 하지만 모든 피조물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정반대의 이야기도 성립될 수 있다. 즉, 인간이 모든 피조물의 관리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창조의 정점으로서 인간의 책임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책임은 단지 다른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책임은 다중적이다. 인간은 먼저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또한 다른 인간에 대한 책임도 가지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선한 관리인으로서의 책임, 성실한 정원사로서의 책임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사회봉사"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우리의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 동안 우리는 사회봉사를 다른 인간에 대한 어떤 행동으로만 생각을 해 왔는데, 창세기의 이야기는 그 책임을 한층 넓혀 주고 있다. 우리가 부름을 받은 봉사는 인간 사회만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한 책임적인 봉사까지도 포함한다.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창조 이야기에 나타나 있는 이러한 책임을 자각하여, 환경을 보호하고 파괴된 환경을 회복시키는 일에 무엇보다도 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재앙을 주는 힘으로 작용하던 시기에는 인간이 자연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인간이 자연에게 재앙을 주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초래하는 자연 재앙을 더 이상 진행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또한 그 재앙으로 인한 파괴를 되돌리기 위하여, 책임을 가지고 일해야 할 것이다. 이제 시작되고 있는 21세기에는 환경 보존과 회복 운동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회봉사의 영역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창조 이야기는 매우 중요하다.
2) 선민의 존재 이유
우리가 구약성서에서 두 번째로 보는 것은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이다. 아버지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람은 하란에서 머물렀고, 그곳에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란에서 그냥 정착해 살려고 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1-3).
아브람은 이 말씀을 듣고 즉시 하란을 떠나, 어딘지 알 수 없는 약속의 땅을 향해 여행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믿음의 행동으로써 아브라함은 선민의 조상이 되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말씀은 선민(選民)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하나의 민족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 민족만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하나의 민족이 선민으로서 선택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선민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실행하도록 선택된 민족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족속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하려는 것이 선민을 세운 이유이다. 물론, 선민이 됨으로써 얻게 되는 특권도 있다. 구원의 반열에서 장자로서의 특권이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선민으로서의 의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선민은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다른 민족들에게 넓히는, 매우 중요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 선민으로서의 특권과 의무를 비교해 본다면, 의무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 속에서 사회봉사에 대한 암시를 발견한다. 물론, 이 말씀은 사회봉사에 대한 명령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선민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 주는, 구약성서 안에서는 매우 드물게 발견되는 말씀중 하나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다른 민족과의 투쟁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방 민족이란 정복의 대상이 될지언정, 결코 섬김과 봉사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는 잘못된 것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다른 민족을 투쟁과 정복의 대상을 보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민족은 섬김의 대상이다. 선민을 선택한 것은 선민만을 구원하고 축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선민은 자동적으로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민족에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노력은 물론, 일차적으로 선교적인 노력을 말한다.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선교적인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선교적인 노력은 단순히 말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활동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선민의 사회봉사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선민은 사회봉사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선민은 오히려 선교를 위해서 존재한다. 하지만 사회봉사는 선민의 삶의 중요한 양식이다. 사회봉사가 없이 선교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그러므로 선민은 사회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분명히 인식하고,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통하여 사회에 이바지하면서, 그 사회를 선민의 삶 속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들은 선민이 되었다고 하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 그들은 선민으로서의 특권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민족에게 있어서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를 망각하였다. 다른 민족들에게 여러 가지의 선한 활동을 함으로써 모두가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의무를 망각하였다. 어디 그 뿐인가?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민족을 정복과 파괴의 대상으로 생각하였고, 그렇게 행동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역사는 끝없는 전쟁의 역사가 되어 버렸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 21:33-46//막 12:1-12//눅 20:9-19)의 말씀에서 분명해지듯이, 하나님께서는 의무를 망각하고 특권에만 도취해 있던 이스라엘의 선민권을 박탈해 버리셨다. 그리고 새로운 선민을 세우셨다. 그 선민이 바로 교회이다.
구원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교회는 새로운 이스라엘, 즉 새로운 선민이다. 옛 선민이 열매를 맺지 않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새로운 선민을 세운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근원이 되라"는 명령은 새로운 선민인 교회에게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끄는 선교 사역을 마땅히 담당해야 하고, 그러한 선교 사역을 위해서 교회는 이 사회에 대한 다양한 봉사 프로그램들을 마련하고 실천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이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마치 옛 선민을 무효화시켰던 것처럼, 새로운 선민의 자격도 중지시켜 버릴 수 있을 것이다.
3) 토라(율법)
그 다음으로 우리는 구약성서의 율법 규정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셨듯이(마 19:1-12//막 10:1-12), 하나님께서는 이미 완악해진 인간들의 마음을 고려하여, 완악해진 인간들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정으로서 율법을 주셨다. 유대교 안에서는 율법이 구원의 수단이 되어 버렸지만, 출애굽기와 신명기를 잘 읽어보면, 율법은 구원의 조건으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율법은 오히려 이미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규정한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율법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제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모든 율법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거룩"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 땅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히브리어에서 "거룩"(카도쉬)은 무엇보다도 먼저 "구별됨"을 의미한다. 즉, 부정한 것들로부터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율법의 많은 규정들은 부정한 것들이 무엇이며,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구별할 수 있으며, 만일에 부정하게 되었을 때에는 어떻게 다시 거룩해질 수 있는지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의적인 율법에서는 사회봉사에 대한 어떤 지침도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이웃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많지 않은 율법 규정들이다. 이 규정들도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사회봉사를 명령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삶의 상황에 대하여, 특히 어려운 사람들의 삶의 상황에 대하여 최소한의 책임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정신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율법의 한 규정은 밭의 소출을 거두어들일 때 이렇게 하도록 요청한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9-10).
이 율법 규정은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한 배려를 요청한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타국인"을 언급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구약성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타국인에 대하여 가지는 지배적인 감정은 배타적이고 호전적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치 않으신다. 오히려 선한 배려를 요청하고 있다. 이 율법 규정을 피상적으로 볼 때에는 그 선행의 정도가 약간 소극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 규정은 가난한 사람들과 타국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일 수 있다. 사실, 가난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물질적으로는 돕는 것이지만, 주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더욱 비참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찾아가 돕도록 요청하지 않고, 소출의 일부를 그냥 남겨 두라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은 자존심을 상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먹을 것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율법 규정은 소극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 규정을 통하여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것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 율법 규정은 가난한 사람의 물질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그의 인권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율법 규정은 사회봉사에 대한 명령은 아니지만, 사회봉사가 어떤 정신으로 행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가르침이다. 이 말씀에 의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의 사회봉사는 가진 자의 거만한 과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봉사는 또한 물질적인 것을 제공해 주는 대가로 인간적인 자존심을 파괴하는 행동이 되어서도 안 된다. 사회봉사, 즉 다른 사람의 곤경을 위해 행하는 모든 행동은 이 율법 규정이 보여주는 것처럼,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하며, 그 사람의 인권까지 배려해야 한다. 사회봉사 활동은,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어려운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활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인적(全人的)인 차원에서 계획되고 행해져야 한다.
그 뿐이 아니다. 율법은 가난한 동족을 적극적으로 도우라는 요청을 하기도 한다:
네 동족이 비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식을 취하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식을 위하여 돈을 꾸이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식물을 꾸이지 말라(레 25:35-37).
이 율법 규정은 앞의 것보다 훨씬 적극적인 행동을 요청하고 있다. 이 경우에는 그 사람이 더 이상 스스로 살아갈 수 없을 정도의 적빈(赤貧) 상태에 빠진 것을 두고 말한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가난이라면, 어느 정도의 소출을 남겨 둠으로써 도와 줄 수 있지만, 이렇게 완전히 잃어버릴 정도의 극한 가난에 빠지면, 좀 더 적극적인 도움의 손길을 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럴 경우, 도울 힘이 있는 자는 그를 자기 집에 들여 함께 살아야 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 때, 그는 결코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에게 허용되어 있는 것은 원금을 받는 것뿐이다. 물론, 이것조차도 그 사람이 꾸어준 것으로 다시 회복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도와준 것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이러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도우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이다.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는 또 다른 율법 규정도 이 점에서 시사적이다: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8-29).
구약성서의 십일조 규정은 다양하고, 그 기원이 복잡하다. 하지만 삼 년마다 한 번씩 행해지는 이 십일조는 다분히, 현대적인 의미의 "빈민 구제 제도"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삼 년에 한번씩 십일조를 모아 저축하였다가, 어려움이 생기는 사람들이 있으면 수시로 그들을 도와 주게 하였다. 결국, 이 십일조는 구제 기금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십일조는 전혀 구제 기금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는 구약성서의 여러 가지 십일조 전통 중에서 자신에게 이로운 한 가지만을 골라 쓰고, 사회적 책임을 위해서 제정된 십일조에 대해서는 외면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율법 규정들 가운데 사회에 대한 책임을 언급하고 있는 것들을 몇 가지 살펴보았다. 율법 규정들 가운데, 많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사회적 책임을 요청하는 것들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율법 지침들은 오늘의 교회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정신을 포함하고 있다. 오늘의 교회는 이 율법들로부터 사회봉사를 위한 바른 정신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오늘에 적용하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4) 예언정신
다음으로 우리는 예언정신 안에서 사회적 책임에 대한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예언자들이 관심하고 있는 문제들이 개인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했다는 점에 관심을 둔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유다를 책망하는 과정에서 예언자들은 사회적인 책임에 대한 망각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먼저, 이사야는 다음과 같은 신탁으로써 당시의 백성들을 꾸짖는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5-17).
이 신탁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의 신앙적인 행위를 외면하신다. 하나님은 그러한 신앙적인 행위를 하기 이전에 먼저, 사회적인 책임들을 다하라고 요청한다. 사회적인 책임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악한 행동을 버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적인 행위보다도 이러한 사회적 활동을 더 중시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당시의 종교적인 관념에 비추어 볼 때, 가히 혁명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신앙적인 의무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신앙적인 행위로써 사회적인 책임이 어느 정도 면해질 수 있다고 믿었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사야의 신탁은 충격적이었다. 신앙적인 행위로써 사회적인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이다.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하는 모든 신앙적 행위는 그 의미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신앙적인 행위들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예레미야의 신탁도 이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내 백성 너희 중에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의 매복함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조롱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 하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창대하고 거부가 되어 살찌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히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송사를 공평히 판결치 아니하니
내가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 같은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5:26-29).
여기에서 예레미야가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지도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책망 안에서 우리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이 사회적인 책임을 망각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착취함으로써 부를 누리게 되는 상황을 그냥 두지 않겠다고 벼르신다.
같은 맥락의 비판이 아모스의 신탁에서도 발견된다: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암 8:4-6).
여기에서도 공격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기득권자들이다. 이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고, 그들을 돕지 않는다. 이들이 사회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부(富)로써 그들을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것이, 앞에서 보았듯이, 율법 규정에서 요청하는 사회적 책임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러한 정신을 거부하였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들이 이미 소유한 것을 어떻게 더 늘리는가에 있었다. 아모스의 신탁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자들을 그냥 놔둘 리가 없다는 것이다.
예언서 가운데 이러한 성격의 신탁들을 다 찾으려면 한이 없을 것이다. 예언 정신은 그만큼 인간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데 있다. 이러한 잘못된 신앙은 그들의 삶 속에서 사회적 무책임으로 표현되었다. 그들은 이웃에 대한 책임을 망각하고,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부를 더 증대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이러한 이기적 노력이 이스라엘의 사회적 관계를 파괴시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비인간적인 삶으로 내몰았다. 그러면서도 신앙의 행위들(제사, 순례, 십일조 등)을 꼬박 꼬박 챙겼다. 이러한 신앙의 행위들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의인(義人)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하였다. 예언자들은 이러한 허위의식을 파괴시켰다. 사회적인 책임을 망각한 채 행하는 어떠한 신앙적인 행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신앙적인 행위들이 소용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신앙의 행위를 빌미로 사회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신앙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데 있어서 예언자들은 구약의 어느 인물들보다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 신약성서에서의 사회봉사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도 역시 사회봉사를 명시적으로 명령하거나 규정하고 있지 않다. 신약성서의 주요 저자들은 공동체 내에서의 삶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봉사 활동에 대한 언급은 매우 드물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봉사 혹은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가르침으로 확대할 수 있는 가르침들을 신약성서에서 찾도록 노력할 것이다. 신약성서의 종교는 분명히 은둔자의 종교가 아니다. 물론, 종교의 일차적인 관심이 구원에 있고, 공동체 내에서의 삶에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구원의 삶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성서의 가르침들이 만들어 줄 수 있는 사회적 결과들을 주목하면서, 신약성서에서의 사회봉사에 대하여 논의해 볼 것이다.
1)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
예수의 가르침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께서 종말론적인 구원의 통치를 시작하신다고 선포하였다. 예수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 아래에 들어가, 그의 백성으로서 사는 것을 의미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하나님의 관심에 따라서 사는 것을 의미하였다. 예수는 이러한 삶에로 그의 추종자들을 불러 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이러한 삶을 사셨다. 예수의 사회적 활동은 하나님의 관심에 의해서 규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제도 아래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이 사회에서 그들에게 뒤집어씌운 온갖 차별들을 철폐하고, 그들에게 구원의 호의(好意)를 전해 주기를 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러한 은혜를 선포하는 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억눌린 자들에게 다가갔다. 당시의 유대교적 사고에 의하면, 이들은 접촉해서는 안 되는 자들(the untouchable)이었다. 그들과 접촉하는 것은 부정에 전염되는 일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서 아무런 동정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을 갈파하였고, 그 관심을 자신의 사역 속에 실현시켰다. 그래서 그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식탁을 열어 주었다. 당시에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에게 열었던 식탁은 결코 빈민 구제적인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좀 더 종교적인 것이었다. 즉, 한 사람의 종교 지도자가 여는 식탁은 작은 천국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식탁에는 철저한 검사를 통해서 어느 정도의 거룩성을 실천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만이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이 식탁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하나님께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하였다. 바리새인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식탁을 자주 열었는데, 세리나 죄인들 같은 사람들은 결코 그 안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 사람들은 자신들을 "저주받은 자"로 인식하게 되었고, 좌절하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식탁을 열고, 그들을 맞아 주었다. 이 행동은, "이제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너희를 받아 주신다"는 메시지를 보여 준 것이다. 이 식탁 교제(table-fellowship)는 비록 그들의 가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방편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의 애정과 관심을 확인시켜주며,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살도록 도와주었다. 예수는 그들을 계속 먹여 살릴만한 재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대대적인 빈민 구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물질적인 도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을 제공해 주었다.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고 다른 인간에 의해서 버려지지 않았다는 위로! 실로 이 위로는, 당시의 종교적 의식 안에서는, 그 어떤 물질적인 도움보다도 더 중요한 삶의 힘이 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회봉사 활동에 있어서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한다. 사회봉사 활동, 특히 교회가 행하는 사회봉사 활동은 결코 물질적인 것으로 끝이 나서는 안 되겠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사회봉사 활동은 배고픈 자의 배를 채워주는 일도 해야 하겠지만, 그것과 더불어 그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봉사 활동은 그 대상자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며, 그들에 대하여 아무런 조건이 없는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음을 확인시켜줌으로써, 아직도 살아야 할 가치가 있음을 스스로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 예수의 식탁 교제는 이 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무엇이 진정으로 필요한지를 알게 해 주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으로써 온갖 어려움에 처해있던 사람들에게 봉사하셨다. 특히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가 베풀었던 치유 사역과 축마(逐魔) 사역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고, 그 성령의 능력으로써 각종 병든 사람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이러한 사역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성령을 통하여 지금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 주신다. 그런데 예수는 단순히 자신의 능력의 과시로서 이러한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자기 과시로서 이러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병든 자를 "민망히 여기는"(막 1:41) 마음으로 행하였다. 즉, 고난 중에 있는 사람에 대한 간절한 연민의 마음으로 인하여 그의 능력을 사용하였다는 말이다. 손이 움직여지기 전에 먼저 마음이 움직여졌다는 뜻이다. 예수는 그의 능력으로써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 했을 뿐,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내세우려는 의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사실은,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기적 행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야기에서 분명해진다(마 16:1-4//막 8:11-13). 예수는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결코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셨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는 치료를 받은 사람들에게 침묵할 것을 명령하였다. 물론, 이렇게 명령을 한 까닭은 자신의 메시야적인 정체를 가능한 한 드러내지 않기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자기 과시욕을 거부한 행동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예수의 치유 사역과 축마 사역을 통해서 우리는 사회봉사에 있어서 유념해야 할 또 다른 가르침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사회봉사 활동이 그 주체의 자기 과시로서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에서, 오직 그들을 고통 중에서 풀어주기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사용하였다. 그 능력을 보고 주어지는 찬사에 대해서 그는 철저하게 귀를 막고 있었다. 그는 치유 사역으로 인하여 자신의 인기가 높아질 때, 그것을 즐기기는커녕, 오히려 숨기에 바빴다. 그가 하려고 했던 것은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으로써 봉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봉사로 인하여 생기는 모든 찬사와 인기는 그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의 사회봉사 활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준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써 봉사를 한다. 그 능력은 성령의 능력일 수도 있고, 물질적인 능력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능력으로써 봉사를 할 때, 교회는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말하여 한다. 할 수 있는 한 자신을 숨기고, 오직 고난받고 있는 사람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만 행해져야 한다.
이 맥락에서 예수께서 주신 한 마디의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구제에 대한 가르침을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 6:2-4).
여기에서 말하는 자선은 개인 개인이 행하는 사회봉사 활동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철저히 자신을 숨기라고 명령한다. 그러한 활동을 통하여 스스로의 신앙심을 과시하거나, 남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유혹을 피하라고 요청한다. 돕는 것은 다만 상대방의 곤경을 없애주려는 단순한 동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사회봉사 활동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교회는 사회를 향해서 행하는 활동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려는 유혹을 거부하고, 철저하게 사회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봉사 활동을 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사회봉사 활동은 "사회를 위한 봉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봉사"가 되어 버린다. 예수께서는 사회봉사가 진정으로 사회봉사가 되게 하기 위해서, 철저히 자신을 숨길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앞서, 예수께서 이 사회에 주려고 했던 것은 참된 삶의 모델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었다. 예수께서 일차적으로 관심을 두고 일을 했던 것은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과 삶을 고쳐서, 참된 삶을 되찾게 하는 것이었다. 참된 삶이란 새로운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그가 선포했던 하나님의 나라였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도록 사람들을 불러 들였고, 그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아 보이셨다. 이것이 그가 이 사회에게 주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치유 사역과 축마 사역 그리고 기타의 봉사 활동은 그에 따르는 부수적인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구원의 선포였다.
사회봉사 활동을 함에 있어서, 교회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어떤 활동을 통하여 이 사회에 가장 중요하게 봉사할 수 있는가? 예수의 사역을 근거로 대답을 한다면, 구원의 선포이다. 교회는 구원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이 구원에로 인도하여 들이는 활동을 통하여 가장 중요한 봉사를 할 수 있다. 다른 모든 봉사 활동들은 이러한 본질적인 봉사 활동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교회의 봉사 활동은 선교 활동과 함께 행해져야 하며, 선교 활동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선교 활동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중요한 봉사 활동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선교 기능과 사회 봉사 기능은 결코 나누어서는 안 되는 복합적인 기능이다. 선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봉사 활동이요, 사회봉사 활동은 선교를 돕는 활동이다. 선교와 봉사를 나누어 생각하는 전통 때문에 두 기능이 지나치게 분화되어 왔으나,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교회가 본질적으로 예수의 사역을 연장하는 공동체라면, 선교와 봉사는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선교와 봉사는 이 사회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로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을 가진 동일한 활동이다. 다만, 표현 방법이 서로 다를 뿐이다.
2) 바울
신약성서에서 가장 많은 글을 쓴 사람은 바울이다. 하지만 사회봉사라는 주제에 집중하여 바울의 편지들을 읽어보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바울의 주된 관심이 교회 내의 문제들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바울이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판단은 바울의 편지가 가지고 있는 성격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편지들은 수신 교회의 내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준 "문서화된 설교"이다. 따라서 이 편지에서 바울은 수신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을 다룰 뿐이다. 바울이 그의 편지들 안에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별로 언급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러한 문제가 이쓔로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의 편지들을 볼 때에도, 사회봉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에 한정해 연구하면 안 된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청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씀들을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교회가 이 사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이 선교하던 당시의 교회는 아직 사회적으로 무엇을 베풀만한 물질적 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교회가 물질적인 것으로 사회에 봉사한다는 것은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교회는 아직 사회에게 베풀만한 "은과 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교회가 사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복음뿐이었다. 바울이 볼 때 이 사회는 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타락하여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이 사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참된 삶을 얻는 것이었다. 이 일을 위해서 교회는 이 사회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고후 5:18-20).
세상을 죄의 나락 속에서 구해 냄으로써,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을 받드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바울이 생각할 때, 교회가 이 세상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봉사는 선교였다.
"선교"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우리는 우선 "말"을 생각한다. 선교는 무엇보다도 먼저 "언어의 사건"이라는 생각이 널리 자리를 잡고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선교는 언어의 사건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이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선교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따라서 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심하게 주의를 하여, 먼저 개인적으로 깨끗하게 살 것이며, 할 수 있으면,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는 생활도 해야 한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빌 2:14-15).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는 여러 가지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모든 문제들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정신의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 사회는 하나님 없이 살아감으로 인하여, 그 정신이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것이 되어 버렸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세상 가운데서 "빛들로 나타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올바른 정신으로 옳게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이 진리를 볼 수 있게 하고, 결국 하나님과 화해될 수 있게 하는 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대안 공동체"(alternative community)이다. 즉, 바깥 사회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고, 삶의 대안(代案)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대안적 삶을 제시함으로써, 결국 그 사회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선적으로 대안 공동체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도 대안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교회가 먼저 교회가 되라" 혹은 "그리스도인이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말이 된다.
이것은 사회봉사에 대한 교회의 사명을 생각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다. 교회 혹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 자체에 대한 관심을 게을리한 채, 성급하게 사회봉사 활동에 빠져서는 안 된다. 교회는 사회 자선 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분명히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고, 사회에 대한 봉사를 마땅히 행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이 우선이며, 무엇이 근본인지에 대해서는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자신의 삶에 대하여 철저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조급하게 사회봉사를 운운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먼저 스스로 교회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데 힘을 써야 한다. 그럴 때,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다. 물론, 자신의 삶에 대한 집착 때문에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게을리 하는 것도 옳지 않다. 교회는 먼저 교회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최선의 힘을 기울이면서, 동시에 주어진 능력을 가지고 사회에 대한 봉사를 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인 봉사도 역시 교회가 교회 다와지는 한 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대가 되는 것은 옳지 않다. 봉사 활동에 바쁜 나머지, 교회다운 삶을 이루는 데 실패한다면, 그 교회는 마침내 교회로서의 존재까지 위협을 받는 지경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가난한 성도에 대한 구제 활동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믿지 않은 사회에 대한 구제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 당시의 교회는 주로 낮은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비교적 교회가 소그룹이었기 때문에, 바깥 사회에 대하여 어떤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다. 대신에 바울은 가난한 성도들에 대한 구제 헌금을 요청하고 있다. 이 요청을 하는 과정에서 바울은 매우 중요한 하나의 원리를 제시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그리스도인들이 헌금을 하여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른 것이라는 뜻이다.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가난하게 되심으로써 믿는 자들을 부요하게 하셨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처럼 행동해야 한다.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스스로 가난해 져야 한다. 바울은 이 원리를 신자들 사이의 구제에 대하여 적용하고 있지만, 꼭 그렇게 국한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믿지 않는 자들도 선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궁극적으로는 "잠재적인 신자들"이다. 넓게 보면, 그들도 역시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들이다. 따라서 이 원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넓히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의 사회봉사 활동은 기독론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한 방법이 바로 사회봉사 활동이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를 희생하여 우리를 구원했듯이, 우리도 스스로를 희생하여 다른 사람들을 부요케 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적인 구제 활동에 대하여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다. 교회의 사회봉사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닮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교회는 아무리 봉사 활동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하여 자만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자기 희생을 생각한다면, 교회의 자기 희생은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넘치지 않기 때문이다.
3) 누가문서
누가문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이 두 책은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점에서 "누가문서"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 두 책은 신약성서 전체의 25퍼센트 정도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크다. 하지만 그 동안의 신약 연구에 있어서 누가문서의 비중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다. 그 중요성에 있어서 결코 바울의 문서들에 비하여 떨어지지 않는데, 그러한 중요성이 인정되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누가문서가 사회봉사에 대하여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누가문서가 개인 개인의 사회적 봉사 활동에 대하여 매우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특히, 예수를 믿기 이전에 행한 사회 봉사 활동에 대하여 강조를 한다.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조건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우리는 한 로마 백부장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는 이방인이었다. 그의 종이 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유대인의 장로들이 예수께 와서 이렇게 말을 한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눅 7:4-5). 즉, 이 백부장은 비록 통치자로서 가버나움에 주둔하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웃 사람들에 대한 매우 세심한 배려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사회적 봉사 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한 예가 회당을 지어 준 것이었다. 유대인 장로들은 백부장의 이 봉사 행위를 언급하면서, 예수의 은혜를 입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예수를 알기 이전의 선행도 하나님 앞에서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사도행전에서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저자는 고넬료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그가 경건하며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 10:2). 이 표현을 두고 볼 때, 고넬료는 유대인의 회당에 드나들면서 유대교에 대하여 배우던 이방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들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God-fearers)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고넬료는 비록 이방인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문서 저자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불완전하다. 고넬료의 구원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예수를 만나야 한다. 사도행전 10장은 고넬료가 예수의 복음을 알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고넬료가 예수의 복음을 듣게 된 것은 전적인 은혜였다. 고넬료가 예수를 찾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그에게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이방인들이 많고 많은데, 그 가운데서 왜 고넬료가 선택되어 이런 은혜를 받았는가? 그가 본 환상에서 천사가 이런 말을 한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 10:4). 즉, 고넬료가 예수의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아 구원을 얻게 된 것은 사회에 대한 그의 봉사 활동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예를 통해서 볼 때, 저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행한 봉사 활동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것이 구원에 대한 충분한 조건은 되지 못한다. 누가문서에서도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관계를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구원받기 이전의 선행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구원에 이르는 데 있어서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에 이른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누가문서의 저자에 의하면, 구원의 사건은 개인 개인의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하고, 이러한 삶의 변화는 사회적인 책임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상은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두드러지게 표현되고 있다. 삭개오는 예수의 방문을 받고 회심을 한다. 그 회심의 표현으로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 19:8). 예수를 만난 결과, 그의 삶의 방식이 변한 것이다. 그 삶의 변화가 사회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의 구원을 확인해 주었다. 삭개오가 재산을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삶의 변화를 초래한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재산의 선용에 대한 누가복음의 강조를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그 어느 복음서 저자보다도 재산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의 제자는 재산을 선하게 활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제자를 "청지기"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강조는 사도행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저자는 9장에서 다비다라는 여자가 죽었다가 베드로를 통해서 다시 살림을 받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는 이미 예수를 믿는 "여제자"였다. 이 여제자를 소개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행 9:36). 즉, 다비다는 예수를 믿은 결과로 사회적인 봉사 활동을 많이 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누가문서 저자는 인간의 사회적인 봉사 활동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를 믿기 이전에도 사회적인 봉사 활동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며, 그 봉사는 하나님의 호의를 입게 만들어 준다. 그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면, 더욱 더 많은 사회 봉사 활동을 해야 한다. 회개는 단순히 마음의 변화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삶의 변화로 나타나야 하며, 삶의 변화는 사회적인 활동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이럴 때, 구원된 자의 삶의 질은 온전해 질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누가문서 저자가 신앙의 공동체를 "대안 공동체"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바울의 공동체 구상에서 신앙 공동체를 대안 공동체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누가문서 저자는 똑 같은 생각을 사도행전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저자는 초대 교회의 삶에 대하여 전하면서, 세 번이나 요약을 한다(행 2:43-47; 4:32-35; 5:12-16). 이 요약문에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신앙 공동체의 매력적인 삶이다: "그들은 하나가 되어 자주 모였고, 서로 돕는 가운데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다. 바깥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 매료되어, 그 공동체는 날로 늘어갔다." 이것이 바로 대안 공동체의 모습이다. 저자는 이렇게 원시 공동체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그려 줌으로써, 모든 교회는 이러한 공동체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따라서 누가의 비전에 있어서도, 교회는 진정으로 선한 사회적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 먼저 교회 다와 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그리스도인 다와 져야 한다. 그러한 삶을 살도록 힘쓰는 것이 먼저이다. 그러한 노력을 그만두고, 바깥으로만 나간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회적인 봉사 활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신앙은 분명히 사회적인 활동을 통하여 표현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표현되기 위해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먼저 확실하게 교회 다와 지고 그리스도인 다와 지는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점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1)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
예수의 가르침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께서 종말론적인 구원의 통치를 시작하신다고 선포하였다. 예수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 아래에 들어가, 그의 백성으로서 사는 것을 의미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하나님의 관심에 따라서 사는 것을 의미하였다. 예수는 이러한 삶에로 그의 추종자들을 불러 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이러한 삶을 사셨다. 예수의 사회적 활동은 하나님의 관심에 의해서 규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제도 아래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이 사회에서 그들에게 뒤집어씌운 온갖 차별들을 철폐하고, 그들에게 구원의 호의(好意)를 전해 주기를 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러한 은혜를 선포하는 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억눌린 자들에게 다가갔다. 당시의 유대교적 사고에 의하면, 이들은 접촉해서는 안 되는 자들(the untouchable)이었다. 그들과 접촉하는 것은 부정에 전염되는 일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서 아무런 동정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을 갈파하였고, 그 관심을 자신의 사역 속에 실현시켰다. 그래서 그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식탁을 열어 주었다. 당시에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에게 열었던 식탁은 결코 빈민 구제적인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좀 더 종교적인 것이었다. 즉, 한 사람의 종교 지도자가 여는 식탁은 작은 천국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식탁에는 철저한 검사를 통해서 어느 정도의 거룩성을 실천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만이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이 식탁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하나님께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하였다. 바리새인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식탁을 자주 열었는데, 세리나 죄인들 같은 사람들은 결코 그 안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 사람들은 자신들을 "저주받은 자"로 인식하게 되었고, 좌절하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식탁을 열고, 그들을 맞아 주었다. 이 행동은, "이제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너희를 받아 주신다"는 메시지를 보여 준 것이다. 이 식탁 교제(table-fellowship)는 비록 그들의 가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방편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의 애정과 관심을 확인시켜주며,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살도록 도와주었다. 예수는 그들을 계속 먹여 살릴만한 재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대대적인 빈민 구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물질적인 도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을 제공해 주었다.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고 다른 인간에 의해서 버려지지 않았다는 위로! 실로 이 위로는, 당시의 종교적 의식 안에서는, 그 어떤 물질적인 도움보다도 더 중요한 삶의 힘이 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회봉사 활동에 있어서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한다. 사회봉사 활동, 특히 교회가 행하는 사회봉사 활동은 결코 물질적인 것으로 끝이 나서는 안 되겠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사회봉사 활동은 배고픈 자의 배를 채워주는 일도 해야 하겠지만, 그것과 더불어 그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봉사 활동은 그 대상자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며, 그들에 대하여 아무런 조건이 없는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음을 확인시켜줌으로써, 아직도 살아야 할 가치가 있음을 스스로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 예수의 식탁 교제는 이 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무엇이 진정으로 필요한지를 알게 해 주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으로써 온갖 어려움에 처해있던 사람들에게 봉사하셨다. 특히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가 베풀었던 치유 사역과 축마(逐魔) 사역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고, 그 성령의 능력으로써 각종 병든 사람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이러한 사역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성령을 통하여 지금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 주신다. 그런데 예수는 단순히 자신의 능력의 과시로서 이러한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자기 과시로서 이러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병든 자를 "민망히 여기는"(막 1:41) 마음으로 행하였다. 즉, 고난 중에 있는 사람에 대한 간절한 연민의 마음으로 인하여 그의 능력을 사용하였다는 말이다. 손이 움직여지기 전에 먼저 마음이 움직여졌다는 뜻이다. 예수는 그의 능력으로써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 했을 뿐,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내세우려는 의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사실은,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기적 행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야기에서 분명해진다(마 16:1-4//막 8:11-13). 예수는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결코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셨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는 치료를 받은 사람들에게 침묵할 것을 명령하였다. 물론, 이렇게 명령을 한 까닭은 자신의 메시야적인 정체를 가능한 한 드러내지 않기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자기 과시욕을 거부한 행동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예수의 치유 사역과 축마 사역을 통해서 우리는 사회봉사에 있어서 유념해야 할 또 다른 가르침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사회봉사 활동이 그 주체의 자기 과시로서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에서, 오직 그들을 고통 중에서 풀어주기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사용하였다. 그 능력을 보고 주어지는 찬사에 대해서 그는 철저하게 귀를 막고 있었다. 그는 치유 사역으로 인하여 자신의 인기가 높아질 때, 그것을 즐기기는커녕, 오히려 숨기에 바빴다. 그가 하려고 했던 것은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으로써 봉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봉사로 인하여 생기는 모든 찬사와 인기는 그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의 사회봉사 활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준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써 봉사를 한다. 그 능력은 성령의 능력일 수도 있고, 물질적인 능력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능력으로써 봉사를 할 때, 교회는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말하여 한다. 할 수 있는 한 자신을 숨기고, 오직 고난받고 있는 사람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만 행해져야 한다.
이 맥락에서 예수께서 주신 한 마디의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구제에 대한 가르침을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 6:2-4).
여기에서 말하는 자선은 개인 개인이 행하는 사회봉사 활동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철저히 자신을 숨기라고 명령한다. 그러한 활동을 통하여 스스로의 신앙심을 과시하거나, 남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유혹을 피하라고 요청한다. 돕는 것은 다만 상대방의 곤경을 없애주려는 단순한 동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사회봉사 활동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교회는 사회를 향해서 행하는 활동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려는 유혹을 거부하고, 철저하게 사회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봉사 활동을 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사회봉사 활동은 "사회를 위한 봉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봉사"가 되어 버린다. 예수께서는 사회봉사가 진정으로 사회봉사가 되게 하기 위해서, 철저히 자신을 숨길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앞서, 예수께서 이 사회에 주려고 했던 것은 참된 삶의 모델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었다. 예수께서 일차적으로 관심을 두고 일을 했던 것은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과 삶을 고쳐서, 참된 삶을 되찾게 하는 것이었다. 참된 삶이란 새로운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그가 선포했던 하나님의 나라였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도록 사람들을 불러 들였고, 그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아 보이셨다. 이것이 그가 이 사회에게 주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치유 사역과 축마 사역 그리고 기타의 봉사 활동은 그에 따르는 부수적인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구원의 선포였다.
사회봉사 활동을 함에 있어서, 교회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어떤 활동을 통하여 이 사회에 가장 중요하게 봉사할 수 있는가? 예수의 사역을 근거로 대답을 한다면, 구원의 선포이다. 교회는 구원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이 구원에로 인도하여 들이는 활동을 통하여 가장 중요한 봉사를 할 수 있다. 다른 모든 봉사 활동들은 이러한 본질적인 봉사 활동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교회의 봉사 활동은 선교 활동과 함께 행해져야 하며, 선교 활동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선교 활동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중요한 봉사 활동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선교 기능과 사회 봉사 기능은 결코 나누어서는 안 되는 복합적인 기능이다. 선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봉사 활동이요, 사회봉사 활동은 선교를 돕는 활동이다. 선교와 봉사를 나누어 생각하는 전통 때문에 두 기능이 지나치게 분화되어 왔으나,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교회가 본질적으로 예수의 사역을 연장하는 공동체라면, 선교와 봉사는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선교와 봉사는 이 사회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로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을 가진 동일한 활동이다. 다만, 표현 방법이 서로 다를 뿐이다.
2) 바울
신약성서에서 가장 많은 글을 쓴 사람은 바울이다. 하지만 사회봉사라는 주제에 집중하여 바울의 편지들을 읽어보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바울의 주된 관심이 교회 내의 문제들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바울이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판단은 바울의 편지가 가지고 있는 성격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편지들은 수신 교회의 내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준 "문서화된 설교"이다. 따라서 이 편지에서 바울은 수신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을 다룰 뿐이다. 바울이 그의 편지들 안에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별로 언급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러한 문제가 이쓔로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의 편지들을 볼 때에도, 사회봉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에 한정해 연구하면 안 된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청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씀들을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교회가 이 사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이 선교하던 당시의 교회는 아직 사회적으로 무엇을 베풀만한 물질적 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교회가 물질적인 것으로 사회에 봉사한다는 것은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교회는 아직 사회에게 베풀만한 "은과 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교회가 사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복음뿐이었다. 바울이 볼 때 이 사회는 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타락하여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이 사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참된 삶을 얻는 것이었다. 이 일을 위해서 교회는 이 사회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고후 5:18-20).
세상을 죄의 나락 속에서 구해 냄으로써,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을 받드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바울이 생각할 때, 교회가 이 세상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봉사는 선교였다.
"선교"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우리는 우선 "말"을 생각한다. 선교는 무엇보다도 먼저 "언어의 사건"이라는 생각이 널리 자리를 잡고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선교는 언어의 사건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이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선교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따라서 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심하게 주의를 하여, 먼저 개인적으로 깨끗하게 살 것이며, 할 수 있으면,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는 생활도 해야 한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빌 2:14-15).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는 여러 가지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모든 문제들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정신의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 사회는 하나님 없이 살아감으로 인하여, 그 정신이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것이 되어 버렸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세상 가운데서 "빛들로 나타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올바른 정신으로 옳게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이 진리를 볼 수 있게 하고, 결국 하나님과 화해될 수 있게 하는 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대안 공동체"(alternative community)이다. 즉, 바깥 사회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고, 삶의 대안(代案)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대안적 삶을 제시함으로써, 결국 그 사회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선적으로 대안 공동체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도 대안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교회가 먼저 교회가 되라" 혹은 "그리스도인이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말이 된다.
이것은 사회봉사에 대한 교회의 사명을 생각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다. 교회 혹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 자체에 대한 관심을 게을리한 채, 성급하게 사회봉사 활동에 빠져서는 안 된다. 교회는 사회 자선 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분명히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고, 사회에 대한 봉사를 마땅히 행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이 우선이며, 무엇이 근본인지에 대해서는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자신의 삶에 대하여 철저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조급하게 사회봉사를 운운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먼저 스스로 교회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데 힘을 써야 한다. 그럴 때,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다. 물론, 자신의 삶에 대한 집착 때문에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게을리 하는 것도 옳지 않다. 교회는 먼저 교회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최선의 힘을 기울이면서, 동시에 주어진 능력을 가지고 사회에 대한 봉사를 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인 봉사도 역시 교회가 교회 다와지는 한 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대가 되는 것은 옳지 않다. 봉사 활동에 바쁜 나머지, 교회다운 삶을 이루는 데 실패한다면, 그 교회는 마침내 교회로서의 존재까지 위협을 받는 지경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가난한 성도에 대한 구제 활동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믿지 않은 사회에 대한 구제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 당시의 교회는 주로 낮은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비교적 교회가 소그룹이었기 때문에, 바깥 사회에 대하여 어떤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다. 대신에 바울은 가난한 성도들에 대한 구제 헌금을 요청하고 있다. 이 요청을 하는 과정에서 바울은 매우 중요한 하나의 원리를 제시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그리스도인들이 헌금을 하여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른 것이라는 뜻이다.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가난하게 되심으로써 믿는 자들을 부요하게 하셨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처럼 행동해야 한다.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스스로 가난해 져야 한다. 바울은 이 원리를 신자들 사이의 구제에 대하여 적용하고 있지만, 꼭 그렇게 국한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믿지 않는 자들도 선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궁극적으로는 "잠재적인 신자들"이다. 넓게 보면, 그들도 역시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들이다. 따라서 이 원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넓히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의 사회봉사 활동은 기독론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한 방법이 바로 사회봉사 활동이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를 희생하여 우리를 구원했듯이, 우리도 스스로를 희생하여 다른 사람들을 부요케 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적인 구제 활동에 대하여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다. 교회의 사회봉사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닮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교회는 아무리 봉사 활동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하여 자만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자기 희생을 생각한다면, 교회의 자기 희생은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넘치지 않기 때문이다.
3) 누가문서
누가문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이 두 책은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점에서 "누가문서"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 두 책은 신약성서 전체의 25퍼센트 정도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크다. 하지만 그 동안의 신약 연구에 있어서 누가문서의 비중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다. 그 중요성에 있어서 결코 바울의 문서들에 비하여 떨어지지 않는데, 그러한 중요성이 인정되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누가문서가 사회봉사에 대하여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누가문서가 개인 개인의 사회적 봉사 활동에 대하여 매우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특히, 예수를 믿기 이전에 행한 사회 봉사 활동에 대하여 강조를 한다.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조건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우리는 한 로마 백부장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는 이방인이었다. 그의 종이 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유대인의 장로들이 예수께 와서 이렇게 말을 한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눅 7:4-5). 즉, 이 백부장은 비록 통치자로서 가버나움에 주둔하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웃 사람들에 대한 매우 세심한 배려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사회적 봉사 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한 예가 회당을 지어 준 것이었다. 유대인 장로들은 백부장의 이 봉사 행위를 언급하면서, 예수의 은혜를 입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예수를 알기 이전의 선행도 하나님 앞에서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사도행전에서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저자는 고넬료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그가 경건하며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 10:2). 이 표현을 두고 볼 때, 고넬료는 유대인의 회당에 드나들면서 유대교에 대하여 배우던 이방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들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God-fearers)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고넬료는 비록 이방인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문서 저자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불완전하다. 고넬료의 구원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예수를 만나야 한다. 사도행전 10장은 고넬료가 예수의 복음을 알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고넬료가 예수의 복음을 듣게 된 것은 전적인 은혜였다. 고넬료가 예수를 찾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그에게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이방인들이 많고 많은데, 그 가운데서 왜 고넬료가 선택되어 이런 은혜를 받았는가? 그가 본 환상에서 천사가 이런 말을 한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 10:4). 즉, 고넬료가 예수의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아 구원을 얻게 된 것은 사회에 대한 그의 봉사 활동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예를 통해서 볼 때, 저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행한 봉사 활동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것이 구원에 대한 충분한 조건은 되지 못한다. 누가문서에서도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관계를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구원받기 이전의 선행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구원에 이르는 데 있어서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에 이른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누가문서의 저자에 의하면, 구원의 사건은 개인 개인의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하고, 이러한 삶의 변화는 사회적인 책임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상은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두드러지게 표현되고 있다. 삭개오는 예수의 방문을 받고 회심을 한다. 그 회심의 표현으로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 19:8). 예수를 만난 결과, 그의 삶의 방식이 변한 것이다. 그 삶의 변화가 사회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의 구원을 확인해 주었다. 삭개오가 재산을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삶의 변화를 초래한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재산의 선용에 대한 누가복음의 강조를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그 어느 복음서 저자보다도 재산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의 제자는 재산을 선하게 활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제자를 "청지기"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강조는 사도행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저자는 9장에서 다비다라는 여자가 죽었다가 베드로를 통해서 다시 살림을 받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는 이미 예수를 믿는 "여제자"였다. 이 여제자를 소개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행 9:36). 즉, 다비다는 예수를 믿은 결과로 사회적인 봉사 활동을 많이 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누가문서 저자는 인간의 사회적인 봉사 활동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를 믿기 이전에도 사회적인 봉사 활동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며, 그 봉사는 하나님의 호의를 입게 만들어 준다. 그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면, 더욱 더 많은 사회 봉사 활동을 해야 한다. 회개는 단순히 마음의 변화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삶의 변화로 나타나야 하며, 삶의 변화는 사회적인 활동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이럴 때, 구원된 자의 삶의 질은 온전해 질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누가문서 저자가 신앙의 공동체를 "대안 공동체"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바울의 공동체 구상에서 신앙 공동체를 대안 공동체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누가문서 저자는 똑 같은 생각을 사도행전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저자는 초대 교회의 삶에 대하여 전하면서, 세 번이나 요약을 한다(행 2:43-47; 4:32-35; 5:12-16). 이 요약문에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신앙 공동체의 매력적인 삶이다: "그들은 하나가 되어 자주 모였고, 서로 돕는 가운데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다. 바깥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 매료되어, 그 공동체는 날로 늘어갔다." 이것이 바로 대안 공동체의 모습이다. 저자는 이렇게 원시 공동체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그려 줌으로써, 모든 교회는 이러한 공동체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따라서 누가의 비전에 있어서도, 교회는 진정으로 선한 사회적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 먼저 교회 다와 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그리스도인 다와 져야 한다. 그러한 삶을 살도록 힘쓰는 것이 먼저이다. 그러한 노력을 그만두고, 바깥으로만 나간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회적인 봉사 활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신앙은 분명히 사회적인 활동을 통하여 표현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표현되기 위해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먼저 확실하게 교회 다와 지고 그리스도인 다와 지는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점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3. 결론: 성서의 사회 봉사 신학
이상과 같이 우리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안에서 사회 봉사 혹은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관계가 있는 말씀들을 살펴보았다. 서두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성서는 사회적인 봉사 활동에 대하여 명시적으로 지시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사회적인 책임을 요청하고 있는 본문들이 많이 있다. 이제 이러한 본문들이 암시하고 있는 "사회 봉사 신학"에 대하여 정리할 차례이다.
첫째, 성서적으로 볼 때, 우리는 "사회"에 대하여 좀 더 넓게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창세기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이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회는 다만 "인간 사회"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이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회는 모든 피조 세계이다. 따라서 사회적 봉사는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하여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둘째, 우리가 "교회"(에클레시아)로서 선택된 것은 사회적인 책임을 위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선택된 백성이었고, 신약에서는 교회가 선택된 백성이다. 하나님께서 이들 선민들을 선택하여 세운 까닭은 그들을 통하여 이 사회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그 선택의 특권을 상실하였다. 교회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교회는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을 누리는 데에만 몰두해서는 안 된다. 이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이 축복 안에 함께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이런 점에서 볼 때, 교회가 사회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봉사는 바로 선교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교회는 가지고 있는 물질로써 구제를 해야 하기도 하고,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들이 사회를 위해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일들이다. 하지만 교회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책임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이 참된 인간의 삶을 발견하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이 사회에 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봉사이다.
넷째,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신앙과 사회적인 책임적 활동을 구분하고 있지 않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러한 경향을 질책하였다. 신앙적인 활동을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시키는 잘못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참된 신앙은 사회적인 활동을 통하여 표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예수에게서 더욱 명료하게 나타났다. 그는 종교적인 의무만을 다하면 거룩하다고 생각하던 당시의 종교인들을 비판하면서, 참다운 거룩성은 사회적인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즉,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것은 신앙인이 마땅히 담당해야 할 의무라는 것이다.
다섯째, 봉사활동은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행해져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문제이다. 정신적인 압박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정신적인 해방을 경험하게 해 주고, 사랑을 잃은 사람에게 사랑을 경험하게 해 주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 사회에게 무엇을 떼어 주려는 방식의 봉사 활동보다는 더불어 사는 방식의 봉사 활동을 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물질적인 차원에서의 구제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구원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여섯째, 바깥 사회에 대한 모든 활동에 앞서서, 교회가 우선 교회 다와 지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다와 지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대안적인 삶의 모델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더욱 효과적인 봉사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여섯 가지 이외에도 더 많이 열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써 중요한 것들은 모두 정리가 된 셈이다. 앞으로의 교회의 사회 봉사 활동은 성서의 이러한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행해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교회답게 사회를 통전적으로 구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첫째, 성서적으로 볼 때, 우리는 "사회"에 대하여 좀 더 넓게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창세기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이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회는 다만 "인간 사회"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이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회는 모든 피조 세계이다. 따라서 사회적 봉사는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하여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둘째, 우리가 "교회"(에클레시아)로서 선택된 것은 사회적인 책임을 위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선택된 백성이었고, 신약에서는 교회가 선택된 백성이다. 하나님께서 이들 선민들을 선택하여 세운 까닭은 그들을 통하여 이 사회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그 선택의 특권을 상실하였다. 교회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교회는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을 누리는 데에만 몰두해서는 안 된다. 이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이 축복 안에 함께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이런 점에서 볼 때, 교회가 사회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봉사는 바로 선교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교회는 가지고 있는 물질로써 구제를 해야 하기도 하고,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들이 사회를 위해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일들이다. 하지만 교회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책임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이 참된 인간의 삶을 발견하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이 사회에 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봉사이다.
넷째,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신앙과 사회적인 책임적 활동을 구분하고 있지 않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러한 경향을 질책하였다. 신앙적인 활동을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시키는 잘못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참된 신앙은 사회적인 활동을 통하여 표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예수에게서 더욱 명료하게 나타났다. 그는 종교적인 의무만을 다하면 거룩하다고 생각하던 당시의 종교인들을 비판하면서, 참다운 거룩성은 사회적인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즉,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것은 신앙인이 마땅히 담당해야 할 의무라는 것이다.
다섯째, 봉사활동은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행해져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문제이다. 정신적인 압박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정신적인 해방을 경험하게 해 주고, 사랑을 잃은 사람에게 사랑을 경험하게 해 주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 사회에게 무엇을 떼어 주려는 방식의 봉사 활동보다는 더불어 사는 방식의 봉사 활동을 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물질적인 차원에서의 구제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구원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여섯째, 바깥 사회에 대한 모든 활동에 앞서서, 교회가 우선 교회 다와 지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다와 지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대안적인 삶의 모델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더욱 효과적인 봉사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여섯 가지 이외에도 더 많이 열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써 중요한 것들은 모두 정리가 된 셈이다. 앞으로의 교회의 사회 봉사 활동은 성서의 이러한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행해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교회답게 사회를 통전적으로 구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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