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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룻2:1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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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john316.or.kr |
뿌리 깊은 삶의 축복을 위한 3요소 (룻기 2:14-23)
<날개보다 뿌리가 중요합니다 >
요새 ‘두 날개로 날아오르는 교회’란 주제의 세미나가 유행입니다. 창공을 높이 나는 새가 되려면 두 날개가 균형 있게 잘 작동해야 됩니다. 교회에서 한 날개는 모두 모여서 예배하는 대 예배이고 또 한 날개는 가족의 정을 나누게 하는 소그룹 예배입니다. 그 2가지가 구비되어야 교회가 창공을 날게 된다고 합니다. 공감 가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날아오르는 것을 지상 최대의 가치로 두는 것입니다.
요새 한국 교회성장이 정체되면서 세미나가 성행하지만 ‘세미나’를 너무 다니면 ‘샘이 나’ 목회를 더 못할 때가 많습니다. 세미나 강사들이 어떤 방식으로 교회부흥에 성공했다고 세미나를 이끌면 듣는 사람들은 샘이 나서 자기도 그렇게 성공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달란트와 특성과 사명과 위치를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요새 세미나는 물고기에게 비행을 가르치고, 새에게 달리기를 가르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에는 정형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이 길을 가야 하고, 저 사람은 저 길을 가야 합니다. 획일적인 사고를 가지고 창공으로 날면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추락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공교롭게도 한국 교회를 보면 교회성장 세미나의 성행 시점과 교회성장의 정체 시점이 맞물려 있습니다.
물론 세미나도 필요하지만 외형주의를 부추기는 세미나들은 신중히 참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세미나에서 배우는 방법들은 대개 보면 날개를 다는 일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이런 말이 있습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 강한 날개로 높이 나는 것은 기분은 좋지만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날개도 중요하지만 뿌리는 더 중요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정체는 ‘강한 날개’보다 ‘강한 뿌리’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일시적 시련입니다. 교회가 다시 세상의 빛이 되려면 교회의 날개보다 교회의 뿌리가 건강해야 하고, 사회도 건강하게 되려면 날개 역할을 하는 사람보다 뿌리 역할을 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합니다.
< 뿌리 깊은 삶에 필요한 요소 >
어떻게 뿌리 깊은 사람이 될까요? 본문을 통해서 뿌리 깊은 삶에 필요한 3가지 요소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희생
어느 날,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이민 갔습니다. 거기서 곧 엘리멜렉이 죽습니다. 그래도 나오미는 두 아들과 함께 꿋꿋하게 살았고 두 아들을 모압 여인들과 결혼시켰습니다. 식구가 5명이 되면서 가정에 잠시 활기도 생겼지만 곧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세 여인만 남은 상황에서 나오미는 자신의 불행이 흉년이 들었다고 베들레헴을 떠난 것이 원인임을 깨닫고 귀향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과부 인생의 비참함을 알고 일찍 과부가 된 두 젊은 며느리에게 자유의 날개를 달아주려고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 모습 속에서 누군가에게 날개를 달아주려고 어둔 흙 속을 더듬는 뿌리의 고독을 봅니다.
같은 고통을 겪어도 어떤 사람은 더 자기만 알고 날개를 팔딱이지만 어떤 사람은 더 남을 공감하며 뿌리를 키웁니다. 나오미는 고통의 비료로 남의 아픔에 공감하는 뿌리를 키웠습니다. 결국 그녀는 역전 인생의 주인공이 됩니다. 날개를 키우면 후반전이 약해 결국 역전패하지만 뿌리를 키우면 후반전이 강해 결국 역전승합니다.
그 시어머니의 권고에 오르바는 날개를 달고 훌훌 날아가지만 룻은 날기를 거부하고 시어머니에게 뿌리를 내렸습니다. 시어머니의 상처와 눈물을 두고 도저히 떠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가는 곳에 저도 가고 어머니가 거하는 곳에 저도 거하겠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제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제 하나님입니다. 저도 어머니와 함께 죽겠습니다(룻 1:16-17).”
룻은 욕망을 극복하고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삶을 택했는데 이런 삶이 진짜 능력 있는 삶입니다. 초는 자신을 ‘태움’으로 빛을 발하지만 사람은 남을 위한 ‘애태움’으로 빛을 발합니다. 사람은 희생할 때 가장 빛나는 인생이 되고, 그때 가장 감동합니다. 그때는 할 말을 잃고 불평과 잔소리도 잊어버립니다.
제가 요새 아내에게 죽어지내는 편입니다. 가끔 새벽기도에 빠지면 이전에는 은근히 “빨리 자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요새는 아무 말도 못합니다. 제가 목회에 집중하라고 혼자 이사준비를 하는데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더 나아가서 남편으로서 이사 자주 다니게 하는 것부터 미안하니까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이사하면 손해가 많습니다. 돈도 들고, 몸도 힘들고, 마음고생도 합니다. 더 나아가 추억을 손상시키는 약간의 트라우마도 생기면서 기억력도 떨어집니다. 그래서 어르신이 이사 자주 다니면 마음도 서글퍼지고 기억력도 떨어지고 치매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그런 상황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으니까 요새는 아내의 처분만 기다리는 심정입니다. 그래도 불평 한 마디 없으니까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래서 할 말이 없습니다.
사람은 희생에 감동합니다. 그 룻의 희생이 동네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보아스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나오미 가문을 일으켰습니다. 살림살이의 요체는 희생입니다. 희생할 때 영혼의 뿌리도 깊어지고 공동체의 축복의 뿌리도 깊어집니다.
2. 공감
인생은 선택입니다. 그 선택의 순간에 오르바처럼 ‘실리’를 선택하지 않고 룻처럼 ‘의리’를 선택해야 축복도 주어집니다. 오르바는 ‘하고 싶은 일’을 선택했고, 룻은 ‘해야 되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해야 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만 축복은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되는 일’을 할 때 주어집니다. 결국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 오르바에 대해 성경은 더 이상 관심이 없지만 ‘해야 되는 일’을 한 룻은 성경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3천년이 넘는 지금까지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축복은 선택에 좌우됩니다. 선택에 따라 삶의 내용도 달라집니다. “이것을 먹을까 저것을 먹을까?”하는 작은 선택은 ‘삶의 빛깔’을 만들지만 “이 길을 갈까? 저 길을 갈까?” 하는 중요한 선택은 ‘삶의 의미’를 만듭니다. 선택의 순간에 오르바는 날개를 달고 시어머니로부터 훨훨 날아갔지만 룻은 욕망을 포기하고 시어머니에게 더욱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처럼 욕망을 포기할 때 삶의 의미는 커집니다.
물론 모든 성도가 룻처럼 살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뿌리 깊은 삶을 원하면 룻처럼 의리를 갖추어야 행복의 뿌리가 견고해집니다. 불의한 점만 없다면 힘들어도 하나님이 주신 만남을 끝까지 유지하십시오. 엘리사는 끝까지 엘리야를 좇아서 결국 2배의 영감을 받았고, 룻도 시어머니를 끝까지 좇아서 결국 축복의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은혜를 잊지 않고 충성하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옵니다.
요새 많은 성도들이 초대형교회를 선호해서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초대형교회로 훌훌 날아가지만 자신의 의미를 현저히 약화시키는 그런 선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건을 싸게 사려는 계산적인 마음으로 대형 마트를 찾을 수는 있지만 교회는 ‘계산’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의미’로 가는 곳입니다.
같은 돈과 시간을 써도 의미 있게 써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1억 원을 써도 그 돈이 서울 강남의 교회건축에는 2평도 못 사지만 필리핀의 선교캠프에서는 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 하나를 건축할 수 있고, 임병철 선교사님에 의해 몽골에 개척된 저희 선교연맹 소속의 12개 교회 중에 5개 교회에 차량을 사줄 수 있는 금액입니다. 그 의미 차이가 얼마나 천양지차입니까? 의미 없는 삶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다 무시하지만 의미 있는 삶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다 존중합니다.
요새 인터넷을 들어가 보면 대통령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과 저주를 퍼붓습니다. 인터넷의 자정노력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대통령을 욕하면서 대통령이 다니는 강남의 대형교회도 함께 욕합니다. 그것이 바로 초대형 교회를 섬기면서 자신의 의미가 작아진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만약 대통령이 작은 교회를 섬긴다면 대통령의 캐릭터와 관련된 욕은 현저하게 줄어들고, 더 나아가 캐릭터와 관련해서는 칭찬이 대세가 될 것입니다.
카터는 대통령일 때에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이었지만 퇴임 후에는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래 존경 받으며 활동하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가 퇴임 후에도 교회에서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며 가난한 자들을 위해 직접 집을 지어주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삶에 공감과 감동과 의미를 느낍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왜 유행처럼 초대형 교회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의미를 현저히 축소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긴 호흡으로 보면 상당한 인생 낭비에 가깝습니다. 삶에서 계산이 커지면 의미는 작아집니다. 자신의 물질과 위치는 높은 자리에서 특권의식을 가지고 즐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낮은 자리에 가서 어울리며 선한 일에 활용하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네티즌도 익명성을 활용해 무조건 비판합니까? 아닙니다. 칭찬할 때는 칭찬합니다. 이번에 아시안 게임 야구 금메달의 주역인 추신수 선수가 병역특례 혜택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샘내는 사람이나 비판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인터넷을 보면 칭찬 일색입니다. 곧 입대할 한 청년은 이렇게 썼습니다. “신수 형! 군대는 제가 갔다 올 테니 형은 열심히 운동해서 한민족의 우수성을 알려주세요.”
왜 그렇습니까? 메이저리거의 티를 내지 않고 낮은 자세로 동료와 국민들에게 다가선 것이 공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사람들의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의외로 쉽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과 위치를 가지고 낮은 데로 임하면 인생의 의미는 저절로 커지고 그것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며칠 전에 저의 아이들이 <성균관 스캔들>이란 프로를 보고 ‘유아인’이란 배우가 좋다면서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얘들아! 외모를 보지 말라. 외모 보면 마음고생이 많아져. 잘생긴 남자와 결혼하면 결혼 후에도 수많은 여자들이 좋아한다고 접근할 텐데 그런 모습조차 너그럽게 보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런 자신이 없으면 외모만 보고 결혼하지 말라.”
일전에는 둘째 딸이 배우 ‘김수로’가 마음에 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김수로가 누군가 알아보니까 얼굴은 주연급은 아닌 것 같은데 듬직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둘째 딸을 칭찬해주었습니다. “네가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그래서 김수로 같은 사람이라면 일단 외모는 “오케이(OK)!”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아인 좋다고 할 때는 드러내놓고 반대할 수도 없고 해서 ”노케이(NOK)!“ 했습니다. 아마 부모들의 마음은 대략 비슷할 것입니다.
집단주의와 유행을 거부할 줄 알아야 영적 안목이 열리고 자기 의미를 키울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선해도 ‘사람들’은 악합니다. 집단주의는 양심과 도덕성에 큰 위협이 됩니다. 사람 속에는 선의 씨앗도 있고 악의 씨앗도 있습니다. 어느 씨에 물을 주느냐에 따라 인생은 크게 달라집니다. 힘이 있어도 자기 욕심을 제한하고 사람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면 선의 씨앗이 자랍니다.
진짜 힘과 능력은 ‘이웃의 아픔에 대한 공감’에서 나옵니다. 그처럼 스스로 뿌리가 되어 남에게 삶의 자양분을 공급하고 남의 지친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는 나오미와 룻이 되십시오. 한국 부모들은 그런 뿌리사랑의 거장들이지만 문제는 그 사랑이 가족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공감대가 넓은 사랑을 추구하고, 아무 계산도 없이 재정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곳에 호주머니를 비우는 선교하는 마음을 추구하십시오. 그때 하늘과 땅도 감동할 것이고, 더 나아가 자신도 자신에게 감동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이고 축복입니다.
3. 사람됨
룻이 역전 인생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보아스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누가 보아스를 만납니까? 룻과 같은 여인이 만납니다. 룻은 겸손하고 사랑 받을만한 모습이 많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가지면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사람이 됩니다. 악처는 남편을 철학자로 만들지만 양처는 남편을 인격자로 만듭니다. 결국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을 만나고, 인격적으로 된 사람이 인격적으로 된 사람을 만납니다.
본문에서 식사를 마치고 룻이 다시 이삭을 주우려 하자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곡식이 가장 많이 떨어져 있는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도록 배려했습니다(15절). 더 나아가 룻을 도와줄 때 곡식 단을 그냥 주기보다는 룻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일하다가 곡식 단을 떨어뜨린 것처럼 해서 많은 이삭을 얻게 했습니다(16절). 그래서 얻은 양이 본문 17절 말씀을 보면 보리 한 에바쯤 되었습니다. 한 에바는 12되 정도의 분량으로, 당시 일꾼들의 하루 품삯이 보리 반 되 정도임을 생각할 때 엄청난 분량입니다.
그 양식을 기쁜 마음으로 시어머니에게 보여드리고 같이 배불리 식사한 후에 그 남은 양식을 시어머니에게 드렸습니다(18절). 얼마나 사려 깊은 며느리입니까? 그때 나오미가 호의를 베푼 사람에 대해 묻자 룻이 보아스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롯을 보아스와 재혼시켜 끊어진 대를 잇고 가문을 일으킬 수 있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룻이 다른 밭에 가지 않고 다른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도록 조치했습니다(22절). 결국 룻은 시어머니의 말대로 순종해서 보아스의 마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장면들을 보면 만남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귀향할 때 나오미에게 룻은 부담스런 존재였지만 점점 룻은 나오미의 생명줄과 소망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처럼 사람을 볼 때 현재의 모습으로 보지 말고 그 안에 있는 축복의 가능성을 통해 보십시오. 특히 무대 앞의 사람보다 무대 뒤의 사람을 더 소중하게 보십시오.
가끔 조연급 연기자들이 연기를 잘해서 좋게 되면 저도 신납니다. 조연이 존중받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꽃꽂이도 주연이 되는 꽃보다 배경이 되는 안개꽃이 꽃꽂이를 더 빛나게 합니다. 그처럼 사회의 안개꽃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래서 사람을 평가할 때 성공으로 평가하지 말고 성품으로 평가하고, 성취함보다는 성숙함으로 평가하십시오. 그런 안목을 가진 사람이 사실상 인생의 좋은 친구도 얻습니다.
항상 이런 명제를 잊지 마십시오.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을 만난다.” 룻기 2장을 보면 룻이 만난 보아스는 이상적인 남성상입니다. 그는 일군들이 복을 빌어줄 정도로 존경받았고(4절), 자상하고 신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오미도 훌륭한 시어머니였습니다. 본문 19절 말씀을 보면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온 자부를 위로합니다. 또한 룻에게 보아스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었고 며느리를 내 딸이라고 합니다(22절).
가끔 보면 딸과 며느리를 구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명절 때만 가끔 나타나는 딸에게는 한 보따리 선물을 주면서 같이 사는 며느리는 구박합니다. 그러나 지금 함께 사는 자녀가 제일 소중한 자녀입니다.
또한 본문을 보면 나오미의 말투가 얼마나 따뜻합니까? 그처럼 따뜻한 말을 많이 해주고 충고할 때도 자존심은 최대한 지켜주십시오. 어떤 분은 자존심은 깨져야 된다고 하면서 남의 자존심을 뭉갭니다. 그러나 내 자존심은 죽이되 남의 자존심은 존중해 주십시오. 눈이 작으면 “눈이 작아서 제대로 보이겠냐?”고 하지 말고 “눈에서 예리한 지혜가 번뜩인다.”라고 해주십시오. 자존심을 지켜주는 사람이 존경심을 얻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을 구하기 전에 먼저 좋은 사람이 되십시오. 외모는 조금만 참고하십시오. 마음과 인격이 훨씬 중요합니다. 사람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인격의 중요성은 시간이 지나고 많은 사람을 겪으면서 더울 절실하게 느낍니다. 사람이 기분이 나빠 보십시오. 그러면 어떤 때는 부모도 보이지 않고 목회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외모가 보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외모가 좋아서 처음에는 호감을 가지고 축복의 줄을 던져봅니다. 그런데 여러 번 대하면서 그의 사람됨에 실망하면 그 다음부터는 꼴 보기가 싫고 내던진 축복의 줄을 회수하게 됩니다. 결국 ‘꼴’보다 ‘골’이 중요합니다. 골이 비면 안 됩니다. 가장 심한 욕 중의 하나가 “골이 비었다.”는 욕입니다. ‘꼴’은 조금 부족해도 ‘골’은 꽉 차 있어야 합니다. 그처럼 외모보다 내면을 가꿀 때 좋은 사람도 만나고 곧 인생 역전의 기회는 찾아옵니다.
< 인생 역전의 기회는 옵니다 >
사실 나오미는 아무 소망도 없이 며느리가 주워온 곡식으로 연명하는 거의 거지 처지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아스 얘기를 듣고 나오미가 얼마나 마음이 들떴겠습니까? 나오미는 착한 며느리 룻을 보아스에게 재혼시키고 자신의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는 소망을 품었습니다. 너무 살기 힘들어서 며느리를 모압 지역에 남겨두고 귀향해서 간신히 연명하다 죽을 줄 알았는데 착한 며느리 때문에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축복의 길은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끝까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절망의 때를 지나면 희망의 때는 반드시 옵니다. 이제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계속 희망적인 생각을 품으면 희망의 날은 오지만 계속 절망적인 생각을 하면 절망적인 일만 생깁니다. 환경은 절망적이어도 생각은 절망적이 되지 마십시오. 현재 성공한 모습이 없어도 인생과 신앙에 회의를 품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성공’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때로 어려움에 처해도 “나는 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라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믿음과 희망을 품고 열심히 사십시오. 그러면 인생 역전의 축복의 기회는 반드시 옵니다. 특히 하나님의 뜻대로 교회를 섬기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산다면 이미 역전 인생에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낙심한 눈으로 땅만 보지 말고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은 하나님께로 인도함 받는 것입니다.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께 인도함을 받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면 축복의 뿌리를 깊어집니다. 그리고 뿌리 깊은 삶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축복을 불러옵니다. 항상 소망을 잃지 않고, 연약한 사람도 소중히 여기는 선교하는 마음을 가지고 축복을 예비하는 뿌리 깊은 영혼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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