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요15:12-16 |
---|---|
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john316.or.kr |
친구를 얻는 4가지 방법 (요 15:12-16)
<하나님의 칭찬을 바라보십시오 >
얼마 전 한 대기업이 사상 최대의 임원 인사로 많은 사람들이 새로 이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사상 최대의 기존 임원이 퇴사했다는 뜻도 됩니다. 임원이 되면 “좋겠다!”고 하지만 임원은 ‘임시직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위가 올라가는 만큼 책임도 올라가기에 중압감 때문에 임원 중에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연봉이 10억 원이고 60억 원이 넘는 주식을 보유한 한 대기업 부사장이 중압감 때문에 자살했습니다. 그처럼 ‘동료와의 경쟁’에서 이겨도 그 앞에는 새로운 ‘실적과의 경쟁’이 기다립니다. 직업의 목표를 ‘자아실현’에 두지 않고 ‘경쟁에서의 승리’로 두면 그 인생은 결코 복된 인생이 되지 못합니다. 왜 요즘 한국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잃고 있습니까? 지나친 외적인 성장경쟁 때문입니다.
요새 제가 초대형 교회의 건전한 분립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자 우리 교인들과 온라인 새벽기도 회원들이 걱정하며 말합니다. “목사님! 한국 사회에서 초대형 교회의 목사님들에게 찍히면 목사님이 힘들어질 것 같아 걱정돼요.” 그 얘기를 듣고 하나님께 평안을 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목사야! 두려워 말라! 온라인 새벽기도를 통해 말씀을 받는 1700여명의 목회자와 3700여명의 성도도 적은 수는 아니란다!”
저도 예전에는 교회분립에 관한 얘기를 안했지만 이번에 삼일교회 사건으로 교회의 초대형화를 통한 부작용을 절실히 느껴서 교회분립을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건전하게 분립하면 교회의 내적인 영향력은 더 확대됩니다. 그렇게 분립하고 선교해서 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면 초대형 교회를 위해서도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성도들이 초대형 교회로 유행처럼 몰려가면 주변의 작은 교회들이 고사됩니다. 반면에 초대형 교회는 예배드리러 가서 주차 때부터 경쟁하다가 다시 새로운 토지확보와 건축에 몰입합니다. 그것이 불신자들에게 어떻게 비치겠습니까? ‘힘의 나눔’은 감동을 일으키지만 ‘힘의 과시’는 반발을 일으킵니다. 결국 그 교회는 성장할지 모르지만 불신자들의 반발도 심해져서 오히려 전체적인 전도는 더 막힙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물론 교회건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목사님은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교회건축을 합니다. 옛날에는 교회를 건축하면 그 교회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렸기에 교회건축이란 극심한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 광명한 부흥의 때가 왔습니다. 그러나 요새는 교회건축의 극심한 고난의 터널을 지난 후에도 광명한 부흥의 때가 오지 않고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새로운 고난의 터널이 시작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 현실을 알면서도 어떤 목사님은 후임자에게 부흥의 기반을 물려주려고 건축하면서 때가 되면 빈손으로 기쁘게 물러나겠다는 아름다운 퇴장까지 생각하고 성도들의 기쁜 동의하에 무리수를 쓰지 않고 교회건축을 합니다. 그런 건축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반면에 외형적 성장에 대한 욕심 때문에 건축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면 그 결말이 비참해집니다. 열심은 좋은 것이지만 방향이 잘못된 열심은 가장 나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두매 출신의 왕 헤롯이 유대인의 민심을 얻으려고 건축한 거대한 성전을 보고 한 제자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보세요. 이 돌들과 건물들 어떻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경탄보다는 탄식을 하며 말씀했습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13:2).” 지금 한국교회를 보면 그 주님의 탄식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이제 거룩한 방향수정이 필요합니다. 외면보다 내면을 보고, 번듯함보다 올바름을 지향하고, 고집스런 안주보다는 아름다운 퇴장 소식이 많이 들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다! 할례는 마음에 하라!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의 칭찬을 바라보라(롬 2:28-29)!”
<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십시오 >
표범의 줄무늬는 밖에 있지만 사람의 줄무늬는 안에 있습니다. 이제 내면에 예수님의 정신을 새기고 예수님의 라인에 서십시오. 특히 12월은 신년을 맞이하기 전에 새롭게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성육신을 다짐하는 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욕망의 공동체가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교회가 욕망의 수렁에 빠지면 욕망의 수렁에 빠진 영혼을 구할 수 없습니다.
초대형 교회가 건전한 분립에 나서면 내적인 영향력은 더 커지는데 왜 그런 의미 있는 일을 마다하고 초대형 교회를 고집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욕망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그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욕망은 영향력이 커지는 더욱 놀라운 축복을 못 보게 만듭니다. 게다가 왕 같은 제사장인 성도가 그런 욕망의 도구가 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이제 한국교회가 새롭게 되려면 초대형 교회들이 예수님의 정신을 따라 거룩한 분립에 나서야 합니다. 그 일을 교회 스스로 못하면 성도들이 자신의 의미를 찾아 거룩한 엑소더스를 해야 합니다. 그 길이 고난이 길이고 소수의 길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도 소수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을 때 사람들은 억지로 예수님을 붙잡고 왕을 삼으려고 했습니다(요 6:15). 그때 예수님은 그 군중들을 떠나 혼자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삶과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그 다음 날도 군중들이 뒤쫓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작심하고 기복주의를 조장하는 ‘육신의 떡’이 아닌 십자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 ‘생명의 떡’에 관해 말씀합니다. 그러자 군중들은 물론 많은 제자들조차 자신들의 기복적인 본능과 정치적인 본능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예수님의 곁을 완전히 떠났습니다(요 6:66). 저는 그 장면이 기록된 요한복음 6장 66절을 볼 때마다 요한계시록 13장 18절에 나오는 사단의 수인 666이 연상됩니다. 기복적인 본능과 정치적인 본능 때문에 예수님을 버리는 것은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소수의 길을 걸었지만 지금은 그 영향력에서 최대 다수가 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삶의 결말입니다. 소수의 길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진정으로 예수님의 뜻과 정신을 받들며 살면 ‘예수님과 자신’이 진정한 메이저그룹이 될 수 있다는 담대한 믿음으로 사십시오. 그래서 의미 없는 꼬리의 길을 떠나 의미 있는 머리의 길을 추구하십시오.
교회의 자발적인 분립과 선교의 과제를 리더가 인식하지 못하면 양떼라도 인식해야 합니다. 리더가 스스로 요단강을 건너면 그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지만 리더가 스스로 요단강을 건너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로 언젠가 급격한 추락의 때가 다가옵니다. 그 추락의 요인은 스캔들이나 질병이 될 수도 있고 성도들의 민심 이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 리더는 교회에 큰 부담을 지우고 쓸쓸히 퇴장할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최고의 길은 ‘주님의 도구’가 되는 길이고 최악의 길은 ‘욕망의 도구’가 되는 길입니다. 욕망의 공동체로 흡수되지 않고 욕망의 공동체에서 탈출하는 것이 그 공동체도 사는 길이고 한국 교회가 새롭게 되는 길입니다. 교회는 3백 명 이상 되면 딸 교회의 분립개척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3천 명 이상이 되면 딸 교회의 분립개척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리더가 못하면 양떼라도 거룩한 엑소더스를 통해 분립을 이뤄내야 합니다.
암이 무엇입니까? 혼자만 커지는 것입니다. 혼자만 커지면 다 죽습니다. 공룡의 존재했다면 왜 공룡이 멸망했을까요? 왜 사자와 호랑이가 점차 멸종될까요? 힘의 과시는 멸종의 길입니다. 이제 욕망을 위한 도구화의 길로 가지 마십시오. 그러면 자기도 죽고, 그 욕망의 주체도 죽고, 전체 교회도 죽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고 교회를 새롭게 정할 때는 비교적 작은 좋은 교회로 찾아가 그곳에서 진정한 친구가 되는 길을 선택하십시오.
< 진짜 친구를 얻는 방법 >
본문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행한 주님의 유언설교인 다락방 강화의 일부분입니다. 그 유언설교에서 주님은 소망과 위로를 주는 말씀을 많이 하는데 본문에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며 위로합니다. 어떻게 주님의 친구가 되고 좋은 친구를 얻을 수 있을까요?
1. 목숨을 버리십시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은 없나니. 여기서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큰 희생을 뜻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성도의 영원한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희생은 친구관계의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살다 보면 진짜 친구임을 테스트하는 때가 옵니다. 그때 십자가를 지고 고난 중에 함께 해주고 고난의 길을 함께 가자는 제의에 기꺼이 응해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입니다. 그처럼 친구가 힘든 상황일 때 함께 해주는 친구가 되십시오. 새로 교회를 선택할 때도 비교적 작은 교회를 선택하십시오. 그래야 의미 있는 진짜 친구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경은 이익관계를 만들지만 역경은 친구관계를 만듭니다.
2007년에 한 그룹이 교회에 등록했다가 바로 이듬해 기존 성도들까지 휩쓸고 나갔을 때 교회가 크게 어려웠습니다. 그때 인터넷으로 은혜 받던 몇몇 성도들이 서울과 인천에서 와서 등록해 겨우 숨을 돌렸습니다. 그때 그분들이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한 시간 거리를 운전하며 다니는데 그 한 시간도 일종의 소중한 예배시간입니다. 그런 귀한 친구들이 제단에 있기에 서로 얼마나 힘이 됩니까? 고난의 때는 진짜 친구를 얻는 때입니다.
가끔 하늘의 북소리를 듣고 유행을 거슬러 사는 사람을 봅니다. 그들은 거룩한 뜻을 위해 사람들이 말리는 길을 기필코 갑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어리석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아무개야! 정말 장하구나!”라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위로의 음성이 있는 것만 해도 그는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진정한 친구도 얻습니다. 그처럼 어려울 때 찾아오는 친구가 진짜 친구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그때 함께 해줄 친구가 있으면 그런 대로 살만 합니다. 왜 친구가 없습니까? 어려울 때 함께 있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려울 때 함께 해주면 좋은 친구를 얻고 나중에 그 친구로부터 큰 보상까지 받습니다.
이제 외모 보고 친구를 사귀지 마십시오. 진짜 오래 남는 친구는 마음이 잘생긴 친구입니다. 또한 자신의 이익을 따라 계산하지 말고 친구의 이익을 생각해주는 진짜 친구가 되고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있는 든든한 친구가 되어주십시오. 특히 주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의 뜻을 따라 때로는 어려운 길도 감수하십시오. 그러면 주님도 최대한 그의 신실한 친구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2. 말을 들어주십시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친구를 얻으려면 친구의 말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사오정처럼 친구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서 좋은 친구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어느 날, 사오정이 두 친구와 레스토랑에 갔습니다. 그때 한 친구는 “나는 콜라!”라고 주문했고 다른 친구는 “나는 오렌지 주스!”라고 주문했습니다. 그 주문을 듣고 사오정이 마지막으로 주문했습니다. “아저씨! 여기 커피 셋 주세요!” 살다 보면 그런 사오정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그런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겠습니까?
어느 날, 사오정이 오토바이 뒤에 애인을 태우고 시내에서 시속 100킬로로 “윙!” 하고 달렸습니다. 뒤에 탄 애인이 말했습니다. “오정씨, 무서워!” 그때 사오정이 “아니! 뭐가 무서워! 왜 그렇게 쫄아! 내 운전 실력을 몰라!”라고 하면서 시속 120킬로로 높였습니다. 또 애인이 소리치며 “오정씨, 무서워! 정말 날 사랑해?”라고 말하자 사오정이 시속 140킬로로 속도를 더 올리면서 소리쳤습니다. “응! 나도 사랑해!” 그런 사람과 결혼하면 평생 고생합니다.
어떤 사람은 고속도로에서 운전할 때 시속 180킬로로 달립니다. 혼자 달리는 것은 자유지만 옆에 사람이 탔는데도 그렇게 달립니다. 한번은 옆에 탄 친구가 말했습니다. “친구! 조금 속도를 줄여다오!” 그런데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말합니다. “왜 그렇게 쫄아서 있어! 친구도 못 믿어!”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깊은 친구관계가 형성되겠습니까? 친구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좋은 우정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말을 듣는다는 것이 100% 일치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때로 의견이 다를 수 있고 가치관과 성격도 다를 수 있지만 얼마든지 서로의 의견을 들어줄 수는 있습니다. 친구가 되는 가장 기초덕목은 말을 잘 들어주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언제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십니까? 말씀에 순종할 때입니다. 그처럼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면 주님과의 우정관계는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3. 좋은 것을 나누십시오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 들은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었다고 말씀합니다. 그처럼 자신의 비밀까지 나눌 수 있어야 진짜 친구가 됩니다.
친구를 얻으려면 좋은 것을 나눠줄 줄 알고, 무엇보다 복음과 말씀과 기도를 나눠줄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마음속에 있는 고민도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을 때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가 지금 나를 철저히 믿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관계가 더욱 깊어집니다. 이제 친구 앞에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벌거숭이가 되어 자신의 수치까지 다 드러내고, 친구는 그 나눈 비밀을 철저히 지켜주십시오. 입이 가벼우면 좋은 친구를 얻지 못합니다.
그처럼 자신의 수치까지 다 털어놓으면 그때부터 갈등하던 문제가 해결되면서 치유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반면에 문제와 상처를 털어놓지 않으면 속으로 곪고 시간이 지날수록 병이 깊어집니다. 그처럼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내밀한 친구의 존재는 영육간의 강건함의 또 다른 중요한 원천입니다.
초대형 교회에 등록하면 진정한 목자 친구를 얻기 힘들고 대개 피상적인 관계만 형성됩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저주는 ‘피상’이란 말이 있습니다. 피상적인 관계는 불행의 원천이고 인격적인 관계는 행복의 원천입니다. 이제 자신을 의미 있게 나눠줌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발전시키십시오. 무엇보다 주님께 자신을 드리십시오. 예배에 힘쓰고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하고 거룩한 비전에 헌신하면 은밀한 상담자이신 성령님과 인격적인 깊은 친구관계가 형성됩니다. 그 관계는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기쁨과 행복의 원천입니다.
4. 선택하고 세워주십시오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인생은 선택이듯이 우정도 선택입니다. 자신이 어떤 친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색깔은 현저히 달라집니다. 좋은 친구는 좋은 선택의 열매입니다.
또한 좋은 친구를 얻으려면 먼저 친구를 세워주십시오. 주님은 12제자에게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했습니다. 친구 선택도 중요하지만 선택한 친구를 세워주는 것도 그만큼 중요합니다. 이제 친구를 사귈 때 무엇을 얻으려는 계산적인 목적을 가지지 말고 오직 섬기고 세워주려는 목적만 가지십시오. 즉 덕을 보려고 하기보다는 덕을 주려고 친구를 사귀십시오. 그처럼 남이 높여주는 사람이 더욱 높아집니다.
살면서 친구처럼 중요한 존재는 없습니다. 자살자의 90%가 친구가 없다고 합니다. 자녀에게 친구가 없는 것이 염려 되면 부모가 친구가 되어주면 되고, 무엇보다 친구 되신 주님을 영접함으로 성령님과 깊이 교제하면 됩니다. 친구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이단 교주들은 대부분 신학교에서 왕따 당해서 혼자 지내던 독불장군이라고 합니다. 마음과 얘기가 통하는 친구가 주변에 있으면 이단에 빠질 확률도 현저히 낮아집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사슴들이 떼를 지어 있으면 아무리 연약한 사슴도 맹수가 쉽게 공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슴이 혼자 떨어져 풀을 뜯으면 곧 맹수의 공격 목표가 됩니다. 그처럼 사단이 호시탐탐 영혼을 삼키려고 할 때 좋은 친구가 곁에 있으면 자기를 더 잘 지킬 수 있습니다. 이제 좋은 친구를 잘 선택해서 그 친구를 세워주십시오. 또한 우리를 친구 삼고 세워주시는 주님이 우리 곁에 있음도 항상 잊지 마십시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택했다고 강조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잡았다면 얼마나 힘들고 불안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우리 손을 잡아주니까 얼마나 든든하고 안심이 됩니까? 항상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된 사랑을 입은 존재임을 기억하십시오. 현재의 처지가 어려워도 그것도 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뤄주실 것입니다.
< 열매를 많이 맺는 삶 >
왜 주님이 12제자를 선택해서 세웠습니까? 본문 16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로 하여금 많은 열매를 맺게 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다 받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12제자를 축복하려고 선택한 것입니다. 그처럼 주님은 성도가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변함없이 예배하고 변함없이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그로부터 최고의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1873년 어느 날, 미국의 스패포드란 사업가가 무디의 영국 부흥집회에 가족들과 함께 참석하려고 배 예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출발 전날, 중요한 비즈니스 때문에 자신만 일정을 연기해 다음 배를 타게 되었고 아내와 세 딸은 그냥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빙산에 부딪쳐 침몰해 세 딸을 한꺼번에 잃고 아내만 살아남았습니다. 그 전보를 받고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안고 아내를 만나러 영국행 배를 탔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 중에 선장에게 세 딸을 잃은 장소를 물어보고 그곳을 통과할 때 갑판에 올라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세 딸이 울부짖는 악몽이 잠시 떠올랐다가 곧 이어서 강 같은 평화가 마음속에 흘러 들어왔습니다. 그때 지은 찬송시가 바로 “내 영혼 평안해!”란 찬송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우리를 선택하신 주님은 고난과 역경 중에도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끝까지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저를 선택한 주님의 선택이 헛되지 않게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소서!” 하나님은 그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거룩한 소수의 삶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선택 받는다는 것은 이미 소수가 된다는 개념을 포함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거룩한 소수의 길을 추구함으로 주님의 친구 되는 축복을 얻고 더욱 영향력이 넘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