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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3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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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john316.or.kr |
복이 있는 사람 (눅 1:39-56)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 사랑 >
성도가 가장 피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적 소수의 길로 초청하는 하나님의 초청에 대해 “부담이 된다!”고 하면서 거룩한 부담을 피하는 것입니다. 적절한 부담은 영혼을 맑고 밝게 해주고 삶의 의미를 깊게 해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저주와 질병과 멸망에 부담을 느끼시고 독생자를 보내 장렬하게 죽게 하심으로 영혼을 건지셨습니다. 그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갚으려는 부담은 복된 부담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이 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 독생자의 절규에 찬 기도에 하나님의 부담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래도 사람의 멸망을 더 부담스럽게 여기고 독생자를 죽이고 사람을 살렸는데 그 은혜와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자식의 잠자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그 자식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를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매 맞는 현장에도 계셨고, 십자가를 지는 현장에도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보통 사람은 “야! 이제 그만둬라!”라고 하겠지만 절대적 능력과 권세를 가진 하나님은 그냥 참고 보셨습니다. 그 참으심으로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자기가 만든 피조물과 자기 독생자의 목숨을 바꾸는 그 은혜와 사랑을 깊이 인식하면 하나님의 일에 대해 “부담이 된다!”는 말이 어떻게 나옵니까? 그 은혜를 깨달으면 가슴에서 터지는 눈물이 있어야 하고, 목숨을 요구해도 “아니요!”가 없어야 합니다. 그처럼 거룩한 부담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려면 형식적인 신앙을 벗고 아들을 죽이신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에 저려오고 가슴에 젖는 체험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 주님의 인내와 인자가 없었다면 사람은 주님의 능력의 말씀 한 마디면 재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큰 권세와 능력을 수시로 속 썩이는 사람을 척결하는데 쓰지 않고 질병과 사단과 죄를 척결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 사랑을 받고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부담스럽다고 피합니까? 사실 하나님이 주시는 부담은 결국 축복을 주시려는 부담입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자녀에게 빵을 사줬습니다. 그리고 “얘야! 아빠도 한 입 줄래!”라고 할 때 자녀가 부담을 느끼고 싫다고 하면 얼마나 철없는 모습입니까? 그때 아빠는 아들의 주는 태도를 보고 더욱 많은 것을 주려는 마음으로 헌신을 요구하는데 그것을 부담스럽게 여기면 어떻게 더 나은 축복이 주어지겠습니까? 이제 철없는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의 심정과 사랑을 느끼며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을 위해 새롭게 헌신을 다짐하십시오.
어느 날, 한 목회자가 부흥강사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주일날 아침만 되면 죽고 싶어요!” 그러면서 주일에 성도가 안 나오는 것이 너무 속상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부흥강사가 위로해주었습니다. “목사님! 실망 마세요. 주님도 오죽하면 죽으셨겠습니까? 주님이 죽었으니 이제 목사님은 죽지 말고 사세요.” 그런데 그 목회자는 자기 말대로 진짜 속 썩어서 죽었습니다.
누구에게 거룩한 사명을 맡겼는데 그 사명을 이행하지 않으면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자식이 속 썩이면 어떤 부모는 소리칩니다. “이놈 자식아! 나가 뒈져!” 그런데 목회자는 암만 속 썩여도 이렇게 말합니다. “집사님! 늘 힘내세요.” 겉으로는 그런 표현을 못해도 매일 그 영혼이 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 손으로 난 자식도 뒈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영혼은 수정할 부분이 많은 미완성 작품입니다.
이제 현실에서 수정할 부분을 고치려고 하고, 특히 물질문명에 빼앗겼던 부분이 있으면 그 빼앗겼던 것을 되찾고 하나님께 더욱 헌신하십시오. 요새 한국인의 인터넷과 TV 보는 시간이 평균 5시간이 넘는다고 합니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5시간을 TV와 인터넷에 뺏기고, 8시간은 잠자고, 나머지 시간도 의미 없게 보낼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낭비되는 시간들을 아껴서 말씀과 기도와 봉사에 더 시간을 쓰면 얼마나 좋습니까?
어떤 사람은 “주일성수도 힘든데 누가 삼일예배까지 만들었느냐?”고 불평합니다. 혹자는 주일 사이가 너무 기니까 삼일예배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출애굽기 19장 10-11절 말씀을 보면 “오늘과 내일을 준비하고 삼일에 여호와의 임재를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처럼 주일은 안식하는 날이고 삼일은 말씀을 새롭게 받는 날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힘들게 누가 새벽기도를 만들었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새벽기도 시간만큼 복된 시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 복이 있는 사람 >
이제 뜨겁게 믿으십시오. 이론가가 아닌 은혜에 젖은 체험가가 되어 그 체험을 이웃에게 나눠주십시오. 요새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참된 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1.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
어느 날, 천사가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말합니다. “마리아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다. 네가 수태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당시에 처녀가 아이를 낳으면 돌에 맞아 죽든지 아니면 평생 핍박과 조롱 중에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단호히 말합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절).” 오늘날 습관적으로 “아멘!” 하는 사람이 많은데 진짜 “아멘!”의 신앙은 마리아처럼 힘든 고난이 예상될 때도 “말씀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복 받고 성공하라!”라는 말씀에는 “아멘!”을 잘하지만 “죽도록 헌신하라!”는 말씀에는 “아멘!”을 잘 안 합니다. 그러나 “죽도록 헌신하라!”는 말씀에 더 “아멘!”을 하십시오. 죽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이 시대에 저를 하나님의 일에 멋지게 쓰시고 선교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제가 힘써 감당케 하소서!” 그처럼 힘든 명령이 주어져도 “아멘!” 할 때 삶에 능력과 기적이 나타납니다.
말씀에 자신이 거침돌이 되지 않고 힘써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도 거침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왜 내게 하나님의 역사가 없나?”라고 탄식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정과 자신의 심정이 일치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이 일치하게 하십시오. 그때 하나님이 “네가 내 심정을 가졌구나!”라고 생각하고 무엇을 구해도 동의해 주실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내가 네 죄를 짊어졌다!”고 하는 예수님의 호소입니다. 그 호소에 응답하고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믿음은 ‘될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된 것을 소유하는 것’, 즉 ‘주님이 갚아준 것을 내 권리로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채찍에 맞은 아픔이 항상 마음에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있으면 헌신이 전혀 아깝지 않고 두렵지 않습니다.
어느 날,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차렸는데 자녀가 “안 먹어!”라고 해도 얼마나 가슴이 아픕니까? 제가 네트영어를 강의할 때 그 강의 효용성을 절실하게 느끼기에 저의 아이들이 그 공부에 집중하지 않아도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하물며 예수님이 매 맞고 죽기까지 해서 복음을 주었는데 그 호의가 거절당할 때 그 수모와 아픔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주님의 죽음을 자살로 만드는 것이고 주님의 크신 은혜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물고기가 물이 없어 죽는다면 믿어집니까? 그런데 태평양 바다보다 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이제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젖고 말씀에 깊이 젖으십시오. 교회에 오는 것은 알아달라고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젖으려고 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내 헌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 사장이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어도 기쁜데 이 땅에서 주를 위해 수고한 것을 천국에서 보상받을 때 그의 영적인 연봉은 최고가 될 것입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가 전도하다 돌에 맞아 죽을 때 사람들은 그를 비참하게 여겼지만 주님은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영혼에 경의를 표하고 영접했습니다. 그만큼 죽도록 헌신하면 그의 천국보상은 누구보다 찬란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죽을 때 하나님이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 “아무개야! 수고했다!”라고 경의를 표하신다면 얼마나 영광스런 일입니까? 이제 하나님이 때로 감동 가운데 어려운 요구를 해도 마리아처럼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원합니다.”라고 하십시오. 그처럼 하나님의 일에 부담을 느끼지 말고 오히려 거룩한 부담이 없음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며 말씀대로 순종하십시오. 그때 그의 삶이 진정으로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2. 굳건한 믿음을 가진 사람
천사가 전하는 소식을 마리아가 기쁘게 수용함으로 마리아는 예수님을 수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태하자마자 그 사실을 친족인 엘리사벳에게 알리고 자문도 받고 싶어서 갈릴리에서 유대까지 먼 길을 재촉해 갔습니다. 그 길은 먼 길이고 엘리사벳의 집이 언덕 위에 있었기에 산으로 올라가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은혜도 나누고 문안도 하고 자문도 구하려고 급히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39-40절).
그때 마리아의 문안을 받은 엘리사벳은 임신 6개월이었는데 무엇인가 자신에게 이상한 기운이 생기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기 뱃속의 아기가 마리아의 문안을 듣고 뱃속에서 기쁘게 뛰놀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큰 소리로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고!(42-43절).”
그런 엄청난 축복의 말을 듣고 마리아가 의아하게 엘리사벳을 쳐다보자 엘리사벳은 자기가 그렇게 말한 연유를 말해주었습니다. 본문 44-45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이 구절에 나오는 ‘믿은’이란 과거형 단어는 마리아의 꾸준한 믿음을 잘 보여줍니다. 결국 마리아가 그렇게 복된 존재가 된 것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요새 많은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비극이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움의 소원이 없는 것입니다. 새로움의 소원, 목표, 꿈, 노력이 없으면 새로운 창조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복된 삶을 살려면 새로워지려는 소원을 가지십시오. 현실은 힘들어도 스스로를 불행하고 무능하고 희망이 없는 존재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항상 자신은 가장 행복할 수 있다고 믿고 자신에게 무한한 축복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으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안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고후 5:17). 하나님 안에 있으면 인생은 180도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어떤 일을 하실까에 대한 큰 기대를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하며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십시오.
물론 축복된 변화는 쉽지 않습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좋은 습관이 생기려면 최소한 6주간 그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합니다. 영어에 익숙해지려면 적어도 6주간은 매일 영어만 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처럼 믿음의 틀이 생기게 하려면 계속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더 이상 어려운 문제도 크게 보이지 않고, 미운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고, 절망보다 희망이 크게 보일 것입니다.
어느 날, 미국 샌디에고에서 한 사람이 자동차를 물로 몰아서 자살했습니다. 나중에 조사해 보니까 그 자동차에 이런 팻말이 있었습니다. “Jesus is the Answer(예수가 해답이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예수님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know about God)’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know God)’이 중요합니다. 즉 하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 알기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인격적인 믿음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고 나가면 반드시 복된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
엘리사벳의 예언적인 축복의 말을 듣고 마리아는 잠깐 동안 그때까지 이뤄진 일을 상기해보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 예수님의 수태소식을 들은 일과 친족인 엘리사벳의 말을 더빙하면서 마리아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가장 복된 현실임을 분명히 인식했습니다. 그러자 바로 그녀의 입술에서 찬양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찬양이 바로 본문 46-55절에 나오는 세칭 ‘마리아의 찬가’입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찬양이 무엇인지 잘 알려줍니다. 찬양이 무엇입니까? 첫째, 찬양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47절), 둘째,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 찬양에서 마리아는 하나님을 최고로 높이고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함을 찬양했고(49절),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영원성을 찬양했습니다(50-55절). 셋째, 찬양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자신을 낮춘 후에 다시 하나님 안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일어서는 것을 원하십니다.
본문 4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라.” 살면서 마리아처럼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나는 부족한 점이 많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제 후로는 복된 자가 되고 예수 믿고 인물이 되리라.” 하나님 안에서는 누구나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나갈 때 하나님이 그 영혼을 통해 찬송과 영광을 받습니다.
다시 한 번 거듭 말씀드리지만 어떤 경우에도 패배의식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때로 실패해도 예수 믿고 인물 되는 거룩한 비전을 향해 계속 도전하십시오. 에디슨은 140번의 실패 후에 전구를 발명했습니다. 어느 날, 한 신문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140번이나 실패하면서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에디슨이 말했습니다. “저는 140번 실패한 것이 아니라 전구를 만들 수 없는 140가지 방법을 발견한 것입니다.”
실패를 잘 활용하면 그 가운데 놀라운 창조성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실패보다 더 나쁜 것은 “난 안 돼!”란 패배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비전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여러분 속에 심어주셨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작은 일부터 하나씩 정복하십시오. 자기불신을 초래하기 쉬운 큰 성취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감을 줄 수 있는 작은 성취를 늘려 가십시오. 그처럼 자신감와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나가면 반드시 그의 앞에 놀랍고 복된 일이 펼쳐질 것입니다.
4.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람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를 자세히 살펴보면 핵심내용이 하나님이 높은 자는 낮추시고 낮은 자는 높이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복된 자입니까? 연약한 자에게 힘을 주고, 비천한 자를 높여주시고, 주린 자를 배불려주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정신을 따라 선교하는 마음을 가지고 낮은 데로 내려가 이웃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선교의 핵심내용은 성육신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와 사랑을 실천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처럼 잘 사는 곳을 버리고 못 사는 곳으로 들어가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자기 복만 생각하는 기복주의는 진짜 복을 얻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복을 나눠주십시오. 불신자들이 교회에 기대하는 것은 바로 그런 성육신의 삶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축복은 이기주의에서 이타주의로 변화되는 축복입니다. 이제 세상 것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가장 큰 불행은 영혼을 팔아 육신의 만족을 구하고, 일시적인 것들을 위해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절 한번만 하면 능력과 권세를 주겠다는 사탄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치십시오. 그런 유혹을 뿌리칠 때 영혼의 크기도 커지고 누리는 자유의 크기도 커집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정신에 마음을 붙들어 매면 세상의 각종 결박들이 신비하게 풀어집니다.
철이 없을 때는 나눔을 외면하며 보이는 것에 집착했지만 예수님의 정신이 충만해지면 삶은 새로워집니다. 그처럼 성령으로 충만해서 유혹과 욕망을 이겨내십시오. 신앙생활은 이기심에 대드는 것이고, 욕망에 맞서는 것이고, 유혹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제 덧없는 패션(fashion, 유행)을 따라 살지 말고 거룩한 패션(passion, 열정)을 따라 살고, 영혼을 ‘분노와 욕심’으로 내모는 정욕을 따라 살지 말고 영혼을 ‘사랑과 평화’로 이끄는 성령을 따라 사십시오. 그래서 남과 싸워 이기기보다 자신과 싸워 이기십시오. 자신을 이기는 능력이 진짜 능력입니다.
물론 자신을 이기는 것은 어렵습니다. 배고픔이나 졸음도 이기기 힘든데 어떻게 달콤한 유혹을 이깁니까? 가끔 이길 때도 있지만 질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항상 성육신의 정신을 깊이 새기고 성령의 은혜를 따라 살면서 주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중매자가 되어 진짜 아름다움은 영혼의 깊이와 영혼의 맑음에 있음을 삶으로 드러내 보이십시오. 눈앞의 것만 추구하지 마십시오. 멀리 볼 줄 알아야 사람답게 됩니다.
사람을 잘못 키우면 버릇이 나빠지듯이 개도 잘못 키우면 버릇이 나빠집니다. 버릇이 나쁜 애완견들은 주인 품에서 까불면서 낯선 사람만 보면 앙앙댑니다. 그런 개들은 별로 정이 가지 않습니다. 반면에 사람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시골 개들은 더 정이 갑니다. 그처럼 하나님도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불평하는 사람보다 내일의 소망과 믿음이 주는 느긋함을 가지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이제 성육신의 정신을 품고 유혹과 고난 중에도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비전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궁즉통(窮卽通)이란 옛말처럼 ‘길이 막히면 곧 길이 열리는 역사’가 있고, 구즉통(久則通)이란 옛말처럼 ‘오래 일하면 곧 길이 열리는 역사’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때로 고난도 당하지만 성육신의 삶을 계속 실천하면 영혼의 뿌리는 깊어지고, 그때 열매도 풍성해질 것입니다. 항상 성육신의 정신을 가지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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