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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3:2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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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john316.or.kr |
최후의 승리자가 진짜 승리자 (눅 13:22-30)
<성공은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좇습니다. 그러나 성공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성공을 좇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공은 돈과 권력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자신의 추종자가 많은 것도 아닙니다. 진짜 성공은 오래도록 선한 영향력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형과 숫자로 성공을 저울질하지 마십시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건중의 하나는 히틀러가 유대인 육백만을 죽인 것입니다.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가보면 금이빨을 뽑아 산더미처럼 모아둔 것들, 머리카락을 잘라 산더미처럼 모아둔 것들, 시계를 산더미처럼 모아둔 것들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람을 개별적인 주체로 보지 않고 편견과 집단화에 빠지면 그렇게 무서운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왜 홀로코스트가 있게 되었습니까? 상처와 편견으로 생긴 히틀러의 광기 때문입니다. 히틀러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행상을 하며 물건을 다 팔 때까지 집을 몇 달 간 비울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 히틀러의 어머니가 외로움을 참지 못해 이웃남자들과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그 중에 돈 많은 유대 남자와 어머니가 불륜관계를 맺는 것을 보고 히틀러는 그러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했지만 어머니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히틀러는 특별히 유대인과 여자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육백만의 유대인을 죽였고 주변에 여자가 많았지만 여자들을 끝까지 미워하고 독신으로 살다가 결국 비참하게 죽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히틀러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가 한때 사람들 눈에는 가장 성공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우상처럼 받들며 그의 말 한 마디에 열광했습니다. 그는 나치 종교의 교주였습니다. 그것이 성공입니까? 아닙니다. 성공은 숫자에 있지 않고, 현재 눈앞에 보이는 것에도 좌우되지 않습니다. 진짜 성공은 지속성이 있어야 하고 천국까지 그 영향력이 메아리쳐야 합니다.
또한 성공은 소원을 성취하는 것도 아닙니다. 소원을 이루고 허무를 느끼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간지 소설에 응모해서 그 동안 간절히 원하던 당선작을 낸 후 바로 다음날 자살했습니다. 유서의 내용은 평생소원이 이뤄져 문인이 되었지만 그 자리를 지키기가 너무 두렵고 부담이 되어서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성공한 후에 기쁨이 없고 불안한 것은 참 성공이 아닙니다.
< 성공의 주인공이 되는 길 >
진짜 성공에는 2가지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향력’과 ‘영속성’입니다. 그처럼 ‘영향력’과 ‘영속성’을 가진 진짜 성공의 주인공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본문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나안의 축복을 원하면서도 광야 40년의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광야가 없으면 가나안에 갈 수도 없고 주어진 가나안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기쁨과 행복은 그것을 얻기 위해 지불하는 수고와 희생과 고통에 비례합니다.
어떤 사람이 삼권분립을 ‘돈과 명예와 권세 중에 하나만 가지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처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이것저것 다 가지려고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회개란 버릴 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그처럼 회개하는 마음으로 욕심과 허영을 버리고 거룩한 비전에 집중해야 축복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복된 사람은 다음의 3가지 문제를 생각합니다. 첫째, “내가 누구냐?”를 생각합니다. 자기 생의 본래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내 나이가 몇이냐?”를 생각합니다. 가끔 보면 자기 나이를 잊고 어린이가 어른인 척 하고 어른이 어린이인 척 합니다. 자신의 나이와 분수와 한계를 알고 남이 한다고 다 하려고 하지 말고 남이 가졌다고 다 가지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내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그처럼 의미 있는 삶을 살려면 좁은 문으로 기쁘게 들어갈 줄 알아야 합니다.
가끔 스스로 질문하십시오. “내가 지금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그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행을 따라 세상의 인기와 지위를 추구하며 살면 곧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성공한 후에 기쁜 함성의 메아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네가 정말 의미 있는 삶을 사느냐?”는 딴 소리가 생깁니다. 얼마나 허망한 삶입니까? 항상 좁은 문으로 들어갈 줄 아는 헌신과 용기를 가지십시오. 그래야 의미 있는 작품 인생이 펼쳐집니다.
2. 축복의 기회를 잡으십시오
본문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이 말씀은 축복의 문은 항상 열려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일단 축복의 문은 닫히면 그때는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살면서 누구나 축복의 기회가 몇 번쯤은 옵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그 기회를 놓칩니까? 근시안적인 안목 때문입니다. 축복의 기회는 거의 예외 없이 처음에는 좁은 문의 모습으로 옵니다. 그래서 근시안적인 안목으로 그 좁은 문을 외면하기에 축복의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축복의 기회는 대개 변화로의 초청으로 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선한 변화를 추구하십시오. 변화 없는 승리는 없습니다. 요즘 한국 교회의 위기는 “변화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인생의 위기도 “변화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가끔 인생의 무의미와 권태에 대한 느낌이 커질 때가 있는데, 그 느낌도 변화의 세계로 도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때 그 변화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왜 변화를 두려워합니까? 변화하면 안정이 훼손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선한 변화는 안정을 찾는 길입니다. 시간은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고 세상은 자신을 중심으로 돌지 않습니다. 그런 급변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안정을 얻습니까? 자신이 선하게 변하면 됩니다. 세상은 변하는데 자신만 부동자세로 서 있으면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그런 죽은 안정을 추구하면 얼마 후에는 진짜 죽습니다.
고속도로에서 다른 차들은 휙휙 지나가는데 자기 차만 가만히 서 있으면 그때는 더 위험합니다. 그때 안정을 얻으려면 주변에 달리는 차들과 속도를 맞춰가야 합니다. 밤길에 차를 몰고 갈 때도 차가 십여 대 씩 몰려가야 더 안정이 됩니다. 그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과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에 지혜롭게 보조를 맞추며 한 자리만 고수하지 말고 선한 변화를 의식적으로 추구하십시오.
변화에는 무의식적인 변화와 의식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무의식적인 변화는 녹스는 변화지만 의식적인 변화는 창조적인 변화입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여기까지 왔나?”라고 깜짝 놀라는 변화나 유행을 따라 휩쓸려가는 변화도 죽은 변화입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선한 변화를 추구하고 창조적인 소수의 길을 추구하면 가장 적절한 때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축복의 기회를 붙잡게 될 것입니다.
3. 주님의 인정을 받으십시오
본문 26-27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주님과의 관계를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것보다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과의 인격관계에서 주어지는 주님의 인정이 없으면 아무리 화려하고 다채로운 종교행위를 해도 주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십니다. 주님과의 깊은 인격관계는 행복과 성공의 제일 원천입니다.
어느 날, 여우가 고양이에게 자랑했습니다. “고양아! 나는 꾀가 많아서 적으로부터 숨는 방법을 많이 알고 있어.” 고양이가 대답했습니다. “부럽다! 나는 한 가지 밖에 없는데.” 바로 그때 저 멀리서 사냥개들이 몰려왔습니다. 고양이는 즉시 나무로 뛰어올라 나뭇가지 사이로 자기 몸을 숨겼습니다. 그리고 여우에게 말했습니다. “여우야! 이것이 내가 적을 피하는 방법인데 너는 어떡할래?”
그때 여우는 자기가 아는 여러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만 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어느새 사냥개들이 덮쳐서 그 여우를 잡아 죽였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고양이가 중얼거렸습니다. “한 가지 안전한 방법이 복잡한 100가지 방법보다 낫구나!” 그처럼 행복과 성공을 준다고 내세우는 수많은 세상적인 방법보다 예수님의 인정을 받는 한 가지 일만 잘해도 얼마든지 행복과 성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주님의 인정을 받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십시오. 그것을 위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더 나아가 이웃 사랑도 실천하십시오. 이웃을 외면하는 성공은 진짜 성공이 아닙니다. 성공하고 보니까 주변에 아무도 없거나 자신을 욕하는 사람만 있다면 그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세상의 승리에는 상대적으로 패자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이기면 한 사람은 지고, 한 사람이 쓰러져야 한 사람이 영광을 얻습니다. 초대형 교회가 승리를 자축할 때 수많은 개척교회 목회자들이 쓰러진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진짜 성공으로 보실까요? 경쟁에서 도태한 것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남의 울음을 통해 성공하고, 남의 실패를 통해 성공하는 종류의 승리는 사실상 패배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진짜 승리는 공동승리여야 하고 기쁨과 영향력에 있어서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무엇을 하든지 혼자 커지려고 하지 말고 같이 커지려고 하십시오. 그처럼 성장과 나눔을 잘 조율하는 지혜를 갖추십시오. 그런 지혜가 없으면 종말이 비참해지고, 천국에서는 더욱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했습니다(요 16:33). 그 승리의 고백은 남과 비교한 상대적인 승리의 고백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절대적인 승리의 고백입니다. 그런 절대적인 성공을 추구해야 그 성공을 주님이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4. 최후의 승리자가 되십시오
본문 28-30절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은 선민임을 자랑했지만 그 자랑과 교만으로 오히려 하나님 나라 밖으로 쫓겨나고 대신 사방에서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꼬리가 나태와 게으름 중에 있으면 계속 꼬리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머리가 겸손과 성실로 자신을 가꾸면 계속 머리로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최후의 승리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까? 창조적인 소수의 길을 선택하고 끝까지 인내할 때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기에 제자들은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결혼생활, 친구생활, 직장생활 등을 보면 처음에는 잘하다가 나중에는 그만 홱 돌아설 때가 있습니다. 그처럼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떠날 때도 미워하며 떠나지 말고 새로운 비전을 바라보며 홀가분하게 떠나십시오.
사랑으로 시작했으면 사랑으로 끝내십시오. 도중에 딴 소리를 하지 마십시오. 어느 순간이라도 사랑하는 일에 낙심하거나 미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 인생은 패배한 인생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끔 이런 말을 내뱉습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어디에 있어?” 그런 푸념이 맞는 말일지라도 사실 그런 푸념을 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실패자란 표시입니다.
왜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습니까? 믿을 사람 많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모두를 매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과거에 잘못 하나 때문에 누군가를 영원히 믿지 못할 사람으로도 매도하지 마십시오. 누군가가 잘못했으면 책망할 때 그 잘못만 책망하십시오. 그 잘못 하나로 몇 달 전, 몇 년 전의 잘못까지 들춰내면 그것은 더 잘못된 태도입니다. 게다가 “사람이 그러면 못써!”라고 인격마저 자극하면 그 사람은 돌아서서 생각합니다. “비록 내가 잘못했지만 인간 됨됨이는 당신이 더 나빠!”
한 가지 잘못 때문에 인간성을 따지거나 미래의 운명까지 거론하지 마십시오. 오늘 실패한 사람이 끝까지 실패하는 것은 아니고 오늘 꼬리가 내일도 꼬리는 아닙니다. 머리가 꼬리 될 수 있고 꼬리가 머리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잃지 말고 최선을 다해 꿈과 비전을 향해 달려 나감으로 최후의 승리자가 되십시오.
< 최후에 승리하는 축복 >
벌써 한 해가 다 지나갔습니다. 금년에도 많이 바빴습니다. 교회는 이상한 그룹에 의해 시련을 당한 재작년의 아픔을 딛고 점차 궤도에 올라가는 중입니다. 금년에 다시 2%의 상회비와 2%의 개척선교비를 내기 시작했고 매달 정기 선교후원도 최선을 다해 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이 방문하면 작지 않은 선교헌금을 했습니다. 항상 멋지게 나눔을 실천하는 우리 교회에 하나님은 더욱 큰 축복을 내려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면 그 축복을 더욱 멋지게 쓰고 나눠주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초대형교회의 분립에 대한 말씀을 듣고 한 네트영어 수강생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요새 작은 교회 편을 많이 드네요.” 그러나 무조건 작은 교회 편을 들어 초대형 교회의 분립을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초대형 교회가 건전한 분립에 나서면 그 교회와 그 담임목사는 더 영향력이 커집니다. 그 복된 일을 외면하고 일시적인 영화에 불과한 ‘자기 덩치 키우기’에 너무 매달리는 것이 안타까워서 교회분립 얘기를 자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초대형 교회의 문제점을 얘기합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초대형 교회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까? 동의하기 힘듭니다. 아니면 한국 교회를 위한 것입니까? 그것도 동의가 안 됩니다. 아니면 그 교회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까? 크게 보면 그것도 쉽게 동의되기 어렵습니다. 이름 불러가며 기도하는 목자의 축복기도도 받지 못하고 심지어 목자가 이름도 모르는 것이 어떻게 축복이 되겠습니까? 교회가 한 사람을 위한 교회가 되면 안 되고, 성도도 한 사람을 위한 도구가 되면 안 됩니다.
어떤 분은 큰 교회에 대한 시기심 때문에 그런 말씀을 자주 하는 줄 오해합니다. 외적인 교회 크기로만 수평비교를 하면 시기심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상 인생의 행복과 의미는 외적인 크기가 아닌 내적인 크기와 자기긍정에 달려 있습니다. 목회자가 자기 사역에 기쁨을 느끼고 “저는 행복한 목회자입니다.”라고 하면 누가 뭐래도 그는 행복한 목회자이고 남을 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의미를 느끼며 살면 행복합니다. 목회도 의미를 남기면 더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 인생의 의미나 목회의 의미는 결코 외형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면 요새 한국 교회에 뜬다는 대형교회 목사님과 대형교회의 담임으로 부임한 젊은 후임 목사님이 부러워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모습일 뿐입니다. 진짜 승리자는 현재 의미 있는 삶을 살면서 최후에 웃을 수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저희 교회의 영적인 의미가 부족하지 않도록 현재까지 31개의 설교파일을 완성케 하셨습니다. 금년에 사도행전 파일과 스가랴 파일을 완성했고 요한복음 파일은 완성 직전에 있습니다. 앞으로 2023년에 성경 전권 파일이 완성되면 그 파일은 기독교 역사에 오래 남을 반영구적인 자산이 될 것이기에 그 의미는 한시적인 초대형 교회의 담임목사 자리가 가진 의미에 비할 바 아닙니다. 그러므로 큰 교회를 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저희 교회에 문화적인 사명과 경제적인 의미도 부족하지 않도록 네트영어를 주셨습니다. 이제 2014년부터 본격적인 론칭(launching)을 하면 네트영어를 통해 주신 물질로 수많은 선교교회의 개척과 선교사후원의 꿈을 멋지게 펼칠 것입니다. 성도들이 거룩한 큰손이 되길 계속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성도들은 물론 저 자신도 그런 축복의 대열에 포함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축복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자신에게도 얼마나 큰 축복이 되는지를 절실히 체험하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큰 은혜를 입으려면 리더도 잘해야 하지만 좋은 동역자도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바울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나바, 실라, 디모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같은 좋은 사역 동역자가 있었고, 루디아와 같은 좋은 후원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큰 교회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좋은 평신도 동역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에게도 그런 좋은 동역자를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2008년 이상한 그룹에 의해 성도가 휩쓸려 나갈 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겠지.” 그때 시련 중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시련 중에도 여전히 성경전권 파일의 대 역사는 계속되고, 네트영어가 있고, 온라인 기도식구들이 있고, 교회에 남은 식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시련을 통해 주어진 큰 은혜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로소 목회자와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친 진짜 친구들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남은 사람들과는 피보다 진한 형제애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참된 개척멤버가 형성되며 진짜 개척다운 개척이 시작되었고 성도들과 비전의 공유가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남은 성도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불러가면서 매일 그들의 축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거룩한 큰손의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을 속속 일으켜주시고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계속 “아름다운 분립의 모델이 되고 최고로 나눠주는 교회가 되자!”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 온라인 새벽기도 멤버 중에도 좋은 동역자들을 많이 일으켜주셨습니다. 그들 중에는 저희 교회에 매달 십일조까지 보내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만 명이 넘는 교회의 목사님도 있고, 초대형 회사의 회장도 있습니다. 또한 저의 홈페이지에 있는 요삼일육 선교센터를 때가 되면 본인이 건축하겠다는 사람도 있고, 그 외에 은밀한 기도 후원자들이 많습니다. 그런 동역의 손길들이 얼마나 큰 힘과 의미와 소망을 주는지 모릅니다.
현재만 보고 누구를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마십시오. 최후에 승리하는 자가 진짜 승리자입니다. 현재의 모습이 부족해도 상관없습니다. 매일 자신의 의미를 찾아서 자신의 할 일에 최선을 다하면 거룩한 큰손의 비전은 점차 구체화될 것입니다. 그처럼 최후의 승리자를 꿈꾸며 최선으로 다함으로 이 땅에서도 의미 있게 살고,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듣는 복된 성도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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