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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48: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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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온 우주만물들아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본문: 시편 148편 1- 14절
1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3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4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5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6 그가 또 그것들을 영원히 세우시고 폐하지 못할 명령을 정하셨도다
7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8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의 말씀을 따르는 광풍이며
9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10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11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과 땅의 모든 재판관들이며
12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13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14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
이 시는 하늘의 모든 것들과 군대를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그들이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구원자이기도 한데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시인은 사람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이 마땅히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1절)라고 했는데 창조설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창세기 1:6-7)
이스라엘 백성은 하늘 위에도 땅 아래에도 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출애굽기 20:4).
시인은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7절)고 했습니다. 용이란 바다 속에 사는 괴물로 혼돈의 동물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천사가 인근 목자들에게 나타나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면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그때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 2:13-1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욥기 38:7)
하나님께서 창조주되시고 구원자가 되신다는 기쁜 소식은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과 방백과 땅의 모든 사사며 청년 남자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11-12절)에게도 알려졌습니다.
시인은 백성을 향해 하나님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13절) 두루 알려졌으므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저가 그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14절)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애굽기 19:5)
하나님은 “모든 성도 곧 저를 친근히 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거리로다 할렐루야”로 노래가 끝납니다.
결국 본서는 하나님께 지음받은 모든 것들이 그 창조자 하나님을 찬양함이 마땅한 의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로 창조자에 대한 피조물의 가장 기본적이고 축복된 자세는 바로 일치된 찬양의 모습뿐인 것입니다. 더욱이 지극히 연약한 존재임에도 그 어떤 피조물보다 가장 존귀히 여김을 받고 그 은혜를 힘입은 인간들이야 말로 더 크고 확실하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마땅합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1- 12)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존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옷깃에 맺혀있는 단추하나 마저도 꼭 필요한 위치에서 목적에 맞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에는 설계자의 필요에 의한 존재 목적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물건들은 각기 용도가 정해져있습니다. 어떤 것도 아무런 이유 없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왜 창조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모든 인간의 존재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삶의 이유와 존재의 의미를 오직 하나님의 창조의 뜻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창세기 2:7의 말씀을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흙으로 만드신 후에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흙이라는 말의 히브리어의 원뜻은 '땅의 티끌', 즉 '먼지'란 뜻입니다. 티끌, 먼지에 불과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부여하신 '생기'로부터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어 넣다(나파흐)'는 말은 '숨을 내쉬다', '부풀리다', '불붙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육체에 생명의 근원되는 하나님 자신의 기운을 불어넣으셨다는 점에서 인간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殿)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이제 인간 창조에 대한 이러한 성경적 이해를 가지고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한번 묵상해 봅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6:19)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을 본질적으로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1:28- 32)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상실한 마음의 상태에서 온갖 죄가 발생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그 상실한 마음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두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래 타락한 우리로 하여금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상실한 채로 살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성령을 불어 넣어 주신 것은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 일입니까? 요한복음의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20: 19- 22)
성령은 하나님을 상실한 채로 살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우리가 우리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주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 받은 사람이 맞습니까? 여러분이 성령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십니까? 여러분의 생각과 여러분의 삶이 어느 정도나 하나님 중심입니까?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영적인 분별력을 따라서 순종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 지으신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그러므로 이 땅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것은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삶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은 그 백성의 뿔을 높이신 하나님, 곧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광의 자리로 올리셨기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구원은 이 땅에서 뿐 아니라 장차 영원한 천국에서도 성도들의 변함없는 찬양의 제목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장차 누릴 천국의 기쁨을 이 땅에서도 누리도록 합니다. 또한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6)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시113: 1- 9)
찬송하면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가 생각납니까? 저는 야곱의 네 번째 아들 유다가 생각납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눈을 피해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쳤을 때 그는 그곳에서 첫눈에 반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바로 라헬이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야곱이 얼마나 라헬을 사랑하고 좋아 했는지 7년 동안 삼촌 라반의 집에서 고생하며 양떼를 돌본 시간을 며칠 같이 여겼다(창29:20)고 했습니다. 드디어 7년이 지나고 결혼하는 첫날밤을 치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사랑하는 라헬은 간곳이 없고, 옆 자리에는 처형이 되어야 레아가 누워 있었습니다. 레아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아버지의 물질적인 이익의 희생양이 되어 정략적으로 결혼한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여인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을 보면 여자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려면 남자가 여자보다 더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해야 합니다.
이때부터 레아는 어떻게 하면 자신이 동생 라헬보다 더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하는 것이 그녀 인생의 큰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창세기 29:31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레아가 야곱으로부터 천대 받고, 그로 인해 마음에 고통 받고, 남편으로부터 멸시를 받는 모습을 보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 연약하고 남편으로부터 소외당하여, 외로움 속에 있었던 연약한 여인의 고통의 신음 소리를 하나님께서는 들으시고, 그녀에게 4명의 아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첫째는 르우벤으로 그 뜻은 “보라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없는 야곱과 라헬에게 당당하게 이제 내가 아들을 낳았다라고 인간적으로 자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자랑 속에서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남편의 사랑을 받기 원했으면 아들의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짓고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할 것이다”라고 선언 했겠습니까?
그러면, 그녀의 기대와 바람처럼 야곱은 그녀를 사랑했나요? 결코 아니었습니다. 레아는 자신이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함을 한탄하면서 한스럽게 다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낳고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였으므로 내게 이 아들을 주셨도다”(창29:34)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들의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했습니다. 시므온이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 야곱이 그녀를 사랑했을까요? 역시 야곱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오직 라헬만을 사랑했고, 그 모습을 보면서 레아는 다시 고통의 피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녀는 세 번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레위라는 아들이었습니다. 레위라는 뜻은 “연합하다”“하나가 되다”라는 의미의 이름입니다. 왜 이름을 레위라고 지었겠습니까? 그녀는 레위를 낳고 하는 말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라고 자신의 소망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녀는 진실로 남편과 연합하기 원했고, 하나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남편 야곱은 레아보다는 아직도 라헬을 사랑하였습니다.
결국, 그녀가 낳은 마지막 아들이 바로 유다였습니다. 그런데, 유다를 낳은 후에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남편의 사랑에 붙들려 사는 여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과거 세 명의 자녀에게 보였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말을 합니다. 과거에 그녀가 자녀를 출산한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서 자녀를 생산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남편의 사랑은 그녀에게 오지 않았고, 그녀는 깊은 절망과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여인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그 자녀의 이름 속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를 임신하고 유다를 출산하면서 그녀의 인생의 가치관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그녀는 네 번째 아들을 출산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창29:35) 할렐루야!
그리고는 네 번째 아들의 이름을 유다로 짓습니다. 유다라는 말은 찬송이라는 뜻으로서 “내가 하나님을 찬송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녀가 네 번째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여호와를 찬송하리라는 의미로 찬송이라고 지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녀는 네 번째 아들 유다를 낳으면서 인생에서 어디로부터 오는 사랑이 더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최고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세 명의 아이들을 낳았지만 남편의 사랑은 그녀에게 육체적인 것에 불과했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설움에 고통당하고 있을 때, 그녀를 돌보고 그녀를 위로하고 그녀에게 안식을 준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녀는 이제 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그녀는 남편의 육체적인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영적인 돌보심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레아는 세 아들을 낳은 후에야 이제 사람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깨닫고 고통 중에 기도 소리에 응답하신 그분의 이름을 찬송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녀는 더 이상 남편의 사랑에 매달리지 않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녀는 세 자녀를 출산하면서 남편으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는 인간적인 고통과 눈물과 외로움의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녀가 네 번째 아들 유다를 낳는 순간 그녀는 사람을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사랑을 주신 그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 그녀는 너무나도 감격하고 감사하면서 “이제 내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녀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 속에는 더 이상 남편에 대한 원망도,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소외감도,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 남편의 사랑을 구걸하듯이 매달렸던 모든 어둠의 그림자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제부터 내가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과 찬송뿐이었습니다. 그녀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순간 그녀는 인생의 어둠의 동굴과 빛이 사라진 그늘에서 빠져 나와 참된 빛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믿음의 고백을 통해 태어난 유다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복을 받았겠습니까? 받지 않았겠습니까? 유다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엄청난 축복을 받는 큰 지파로 성장하였습니다. 창세기 49:8절 이하에는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서 절하리로다”라고 야곱은 자신의 네 번째 아들 유다를 크게 축복하였습니다. 유다는 야곱의 축복대로 형제들의 찬송이 되는 지파였습니다. 이처럼 자녀도 육신의 욕망에 따라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출산 할 때 축복받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성령에 충만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성막을 세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브살렐입니다. 그가 어디 지파 사람이었겠습니까? 그는 당연히 유다지파의 사람이었고, 광야에서 모든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대해 불신하였을 때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가나안 땅은 우리들의 밥이라고 외쳤던 갈렙 역시 유다지파의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의 고난 중에서도 가장 크게 번성한 지파가 바로 유다지파였고, 가나안 땅에 들어 갈 때도 가장 먼저 선봉이 되어 믿음으로 들어간 지파 역시 유다지파였습니다. 유다 지파는 다윗부터 시작해서 23대에 이르는 시드기야 왕까지 유다를 다스리는 왕이 끊이지 않았고, 만왕의 왕이시며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유다지파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결단이 필요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계속해서 인간의 사랑을 구하면서 시기와 질투와 분노라는 어둠의 삶에 있겠습니까? 아니면, 인간으로부터 오는 사랑보다 더 크고 무한한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고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고백하시겠습니까? 나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던 찬송하는 레아,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찬송하리라”고 믿음의 결단을 내리는 레아가 되기를 진실로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150:6절에는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찬송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심지어 시편 22:3절에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3:15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5:19절 이하의 말씀에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 날 때에 베들레헴에는 천군과 천사들의 찬양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는 천사장의 나팔 소리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끝임 없이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예배는 찬양으로 시작해서 찬양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의 가정과 인생에서 멈춰서는 안 될 것이 찬양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장로님 가정의 부부싸움이 있었답니다. 화가 난 장로님이 방에서 밖으로 나가 어슬렁거리자 권사님이 간절한 목소리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라고 찬양을 하였답니다. 그러자 밖에 있는 동안 화가 풀린 장로님이 그 찬양에 화답하여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라고 찬양을 하면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이 문을 열면서 “참 반가운 신도여 이리 와서~~”라고 하면서 문을 열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악한 귀신에 붙들려 고통당하고 있었던 사울에게 찬양을 통해 그 악신을 몰아내었던 다윗의 찬양을 잘 알고 있습니다. 찬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고 강하고 능력이 있는지 사울을 괴롭게 하던 악신을 제압하고 떠나게 한 것입니다. 찬송 중에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마음에 고통이 있고, 마음을 괴롭게 하는 악한 영이 역사하고 있습니까? 이 시간 찬송과 기도를 통해 떠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바울 선생과 실라 선생님이 빌립보 감옥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39대의 매를 맞고, 손과 발에는 착고가 채워진 상태에서 지하의 어둔 감옥에서 던져졌습니다. 살을 애는 듯한 고통이 그들을 엄습해 왔고, 어둠은 그들을 더욱 두렵게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두 분은 고통과 두려움을 찬송과 기도를 통해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그 어둠의 감옥에서 소리를 내어 기도하기 시작했고, 큰 소리로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얼마쯤 기도하고, 찬송했을 때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감옥 문이 활짝 열리고 말았습니다. 할렐루야!
PGA 골프 선수 중에 아프리카 짐바브웨 출신 닉 프라이스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이 선수는 슬럼프가 없는 선수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기자가 그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프라이스 선수는 “제가 어릴 때 우리 아버지께서 어려움이 있을 때는 휘파람으로 노래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난 게임이 풀리지 않을 때는 휘파람을 붑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여러분도 얼마든지 인생의 문을 찬송을 통해 열 수 있습니다. 시113편 2절에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인생의 문을 열겠습니까? 어떤 축복을 받겠습니까? 레아는 인생의 고난을 찬송을 통해 극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녀의 이름을 유다라고 했고, 유다는 그 이름대로 하나님의 찬송 거리가 되었고, 영원한 축복의 뿌리요 시작하는 영원한 축복의 근원지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래전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약을 가르치던 교수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수님은 예배 시간에 이상하게 찬송을 부르지 않습니다. 알고 보았더니 이 교수님은 대단한 음치였습니다. 학생들은 이 교수님을 ‘찬송 음치’라고 놀리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희한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교수님이 어찌된 일인지 예배 시간에 크고도 힘차게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너무나도 신기해서 강의 시간에 조심스럽게 “교수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교수님께서 찬송을 다 부르시고 ... ” 그랬더니 겸연쩍은 표정으로 자신의 신앙을 간증하였습니다. 그분이 밤에 꿈을 꾸었답니다. 천국 문에 이르러 노크를 했더니 베드로가 사도가 나오더니 누구냐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자신은 어릴 적부터 예수님을 믿었고, 지금은 신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 사도가 무슨 장부 같은 것을 뒤지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공부는 많이 해서 아는 건 많은데, 찬미의 제사를 올린 기록이 없소이다. 천국은 지식이 많은 신학 박사를 원하는 게 아니라 찬송을 열심히 부르는 사람을 원합니다. 그러니 다시 가서 찬송을 많이 부르다가 오시오!”라고 하면서 천국 문이 탕 하고 닫는 것입니다. 닫는 소리가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음치기 때문에 주님을 찬송하지 못한 것을 크게 회개하고, 마음으로 찬양 드리기 위해 힘써서 찬양의 제사를 드리기로 결심했다고 결론을 맺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성도여러분, 우리에게도 꿈과 비전이 있듯이 하나님에게도 꿈과 비전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시113편 3절의 말씀처럼 해 돋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 하나님의 이름이 찬양을 받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꿈과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온 세상이 온 민족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게 하는 꿈과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부터 환경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부터 우리 입술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피리가 되고, 나팔이 되고, 수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쓰러지지 말고 그 자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계를 찬양의 도시로 만들고, 이 나라를 찬양의 나라로 만드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하나님이 꿈꾸시고,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것처럼 이 온 우주 만물과 열방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나라와 민족과 가정과 개인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모든 인생의 문제가 찬양을 통해 해결되고, 악한 귀신들이 찬양을 통해 물러가고 제압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빌립보서 2:5-11에서 보면 예수님의 비하와 승귀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분은 원래 하나님의 본체 이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 되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앞에서 만민이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비참한 상태에서 존귀한 상태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비참한 상태로부터 존귀한 상태로 인도 하십니다. 사망과 고통가운데 있는 저희를 구원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통치하시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복된 자리 영광스러운 자리로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보잘 것 없고 하찮기 만한 저희들을 가장 영광스러운 왕의 자리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왕 되신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분의 왕 되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분의 구원하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분의 통치하심과 인도하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 찬양은 단지 그분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찬양할 때 우리도 함께 그 분께서 주시는 은혜를 만끽 할 수가 있습니다. 찬양은 우리 인간 본래의 임무입니다. 찬양 받기 위해 존재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찬양 받기 위해 삼라만상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입니다. 찬양을 통해서 왕이신 주님을 영화롭게 하시길 바랍니다. 찬양하심으로 그 분께서 주시는 축복과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영원히 찬양받으실 주님!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도 능히 역사하시는 주님을 찬송하게 하소서. 우리 생활에서 찬송이 가득하게 하시고 주님만을 찬송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찬양하는 삶을 통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나 믿는 사람들에게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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