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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7: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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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본문: 시편 7편 1- 17
1.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2.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4.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
5.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셀라)
6.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꺠소서 주꼐서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
7. 민족들의 모임이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8.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9.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다
10.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2.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13.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14.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15.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16.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17.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한 간악한 스코틀랜드인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말을 빌렸는데 사고였는지 거칠게 다루었는지 모르지만 그 말이 죽고 말았습니다. 자연히 주인은 자기가 입게 된 손해보상과 함께 말 값을 지불하라고 주장했습니다. 변호사는 손해배상은 기꺼이 지불하겠지만, 당장 현금이 없으니 현금대신 약속 어음을 받겠냐고 말 주인에게 묻자, 그 말 주인은 기꺼이 승낙했습니다. 그러자 변호사는 지불할 기한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시간은 마음대로 하시죠."라고 말주인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간악한 그는 심판의 날에 지불하도록 어음을 발행했습니다. 결국 말 주인은 그 문제를 법정에 가져갔고, 거기에서 변호사는 자신의 변호에서 판사에게 어음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판사는 어음을 보고 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약속어음은 완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심판의 날이므로 내일 지불할 것을 판결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쉬지 않고 천천히 돌아갑니다.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쉬지 않고 돌고 있는데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이 돌아감에 따라 갈린다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가는 것 같아도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악의 모양을 버리고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잠18:5)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계19:2)
다윗은 많은 위기를 만났습니다. 양치기였던 어린 시절에는 사자와 들짐승의 위험 가운데 있었습니다. 소년 시절에는 골리앗의 위험 속에 있었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사울 왕의 위험 속에 있었습니다. 무수한 전쟁과 압살롬의 반역에 이르기 까지 그는 위험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많이 거쳤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이 위험을 극복하고 구원을 얻었습니까?
1. 다윗은 긴급한 상황 속에서 기도하였습니다.
목사님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기도가 응답된다고 말씀하십니까? 기도가 응답되는 것은 우연입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연의 일치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기도는 응답되는 게 아니고 우연히 그저 그렇게 요행으로 된 것입니다.
템플 목사님은 그 청년의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래, 청년의 말도 일리가 있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도하면 우연이 생기고 기도를 안 하면 우연이 안 생긴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기도하는 거라네.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우연이든 아니든, 기도하면 응답이 오기 때문에 기도가 중요하네."
본문 1, 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다윗에게는 심각한 원수가 있습니다.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6절)
여기서 "진노로 일어나사"란 자초지종을 다 들은 후 이 극악한 자들에 대하여 판결을 내리 시기 위하여 진노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악한 자들과 성도들은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악한 자들은 모든 사람 들이 자기를 절대시해 주기를 바라는데 성도들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들의 몇 가지 특징은, 먼저 힘이 있어야 하며, 머리가 비상하게 좋아야 한다는 것과, 교만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그리스도인들을 죽도록 미워하는 것입니다.
본 시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지은 시로, 표제에 의하면 '베냐민 사람 구시'가 나 오는데, 구시는 다윗이 피해 다닐 때 다윗을 사울에게 밀고한 사람일 것입니다.
아마 구시라는 사람이 다윗을 사울에게 밀고했는지 아니면 직접적으로 그를 대면하여 욕했 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해서 성도들이 반드시 그런 사람들에게 고통을 받아 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국가의 공권력을 가진 사람이 악한 사람이면 성도가 그런 사람의 미움의 대상이 되었을 때에는 그 미움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성도가 가장 피하기 쉬운 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다윗은 다급하여 하나님의 성전으로 피하였는데 사울 왕은 다윗을 도운 하나님의 제사장들 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삼상 22장).
다윗은 이제 정말 이 넓은 하늘 아래서 피할 곳이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주께 피하오니"라 고 노래하는데, 이는 세상에서는 다윗이 피할 수 있는 곳이 전혀 없을지라도 하나님께는 피할 곳이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렇게 급할 때 하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어야 합니다. 열쇠를 아무리 많이 가지고 다녀도 급할 때 문을 열 수 없는 장식용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본문 3- 5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셀라)”
이 다윗의 기도가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간구에는 불완전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상대적인 의를 가졌을 뿐입니다. 절대적인 의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기도 중에 응답을 체험하였습니다.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14절)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15절)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출8: 26- 27)
이 구절에서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라는 말은 '악한 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라는 뜻으로 악한 자들은 온갖 허위를 지어내서 성도에 대하여 악한 풍설들을 퍼뜨립니다. 악한 자들은 성도들을 모함하기 위하여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악하게 부풀리거나 아니면 없던 일을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만들어내서 선전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이렇게 쫓길 죄를 짓지 않았으며 지금 악한 자가 이렇게 하는 이유를 모르 겠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가 성도를 미워하는 이유는, 성도가 절대로 악한 자에 대하여 고분고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악한 자를 높여주지 않습니다.
이 어두움의 때에, 정의는 완전히 숨어버리고 불의만 권력을 휘두를 때에, 성도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악의 세력에 붙어서 아첨하면서 높은 자리를 하나씩 차지합니다. 그러 나 악의 세력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며 나중에 그 악한 자 와 함께 심판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악한 자에게 미움받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억울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의 지위와 제산을 다 잃어버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신앙 양심을 절대로 팔아먹어 서는 안 되는데, 이유는 선한 양심이 있어야 다시 하나님의 손을 잡고 일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다윗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의지하였습니다.
본문 7, 8절을 보겠습니다.
“민족들의 모임이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온 세상 사람들을 증인으로 대동하시고 정식 재판을 열어달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는 죄를 짓기 않기 때문입니다. 환난과 핍박 가운데 있는 성 도들 매 순간순간 죽음의 고비를 만나고 있기 때문에 감히 죄를 지을 염두를 내지 못합니다. 믿는 자들이 주로 언제 죄의 유혹에 빠지는가 하면 이런 고비가 다 지나가고 생활이 아주 편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나의 의와 성실함'은 모든 악한 사람들은 양심을 버리고 악한 권력자에게 붙어서 아부하고 아첨하지만 자기는 끝까지 그 유혹을 뿌리쳤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의로운 자로서 살아가려고 힘을 기울였습니다. 의로운 삶이란 빛과 같습니다. 작은 의라도 빛을 가지고 있으면 어두움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높은 하늘에 올라서 땅을 바라보니까 집에 있는 빛이 그 높은 하늘까지 보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깜깜해도 작은 빛이라도 존재하면 살만 합니다. 다윗은 이런 인간의 의로운 삶을 살려고 힘을 썼습니다. 다윗의 '의'란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인 '의'나 순결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를 고소할 악인들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의로운 것을 말하는 것(Calvin)입니다.
다니엘 5:1-31을 보면 벨사살은 느부갓네살 왕과는 달리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교만하다는 사실은 잔치 중에 있었던 사건이 말해 줍니다. 벨사살은 술에 만취된 나머지 유다로부터 탈취해 온 성전의 기명들을 하찮케 여겨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벨사살의 무감각한 신앙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실례라 할 수 있으며, 나아가 바벨론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을 출현시켜 벽에 글을 쓰도록 하셨습니다. 벨사살과 그의 무리들은 그 글의 내용보다 손가락 자체에 더 큰 놀라움을 가졌을지 모릅니다. 번민에 싸여 있는 벨 사살 왕 앞에 불려온 다니엘은 그 글의 내용에 대한 해석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벨사살이 바벨론의 최후 왕이 될 것이며 나라 또한 두 개로 나누어질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서 다니엘은 벨사살에 임한 하나님의 공의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벨사살은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함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심판은 꼭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며, 행한 대로 갚으시는 심판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너희의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겔33:20)
본문 11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의 속성은 공의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와 악을 두고 보실 수 없으시지요.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죄와 악이 그 앞에 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감찰하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9절)
행위뿐만 아니라 마음과 양심까지 살피신다 하였으니 하나님 앞에 그 무엇도 숨길 수 없습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뿌리 내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 양심만 나를 정죄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안전하고 평안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단지 악한 자 들이 성도들의 행복을 빼앗으려고 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사람의 행위와 마음과 양심으로 지은 모든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고 사람은 반드시 죄의 보응을 받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의로운 우리아를 궤휼로 죽게 하였습니다(삼하11~12장). 다윗은 이 죄를 침상이 눈물에 뜨도록 회개하여(시51편) 용서를 받습니다 (삼하12:13).(하나님의 사랑)
그러나 죄의 보응으로서 그의 가정은 강간과 살인으로 얼룩졌습니다.(삼하13~) 심은 대로 거둔 것이지요.(하나님의 공의)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하나님의 사랑은 회개를 통해 죄를 용서하십니다. 죄의 저주인 영원한 멸망을 면하게 해주시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정의롭습니다.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느니라."(나1:2)
반드시 죄에 대하여 물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5:28)
하나님께서는 깜깜한 불의와 불빛 같은 의를 분별하십니다. 불의가 의를 삼키려는 것에 대하여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선악간 행위를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을 때,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3.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원수가 빠뜨리기 위해 파놓은 웅덩이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본문 9절을 보겠습니다.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다”
다윗은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통치자를 세우시는 이유는 백성들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은혜가 사라지고 많은 고통과 상처가 있는 후에 비로소 깨닫는 것은, 성경적인 교회가 얼마나 아름답고 복되며 귀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본문 3- 5절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셀라)”
그러나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십니다. 때가 되면 공의롭게 심판하십니다.
성도들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직접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 그때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는 말입니다.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7:6)
"나를 위하여 깨소서"라는 것은 자신의 사건을 예외적으로 밤중이라도 심리해 주셔서 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간청입니다.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욥34:21)
본문 10, 11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성도는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방패로 삼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자의 방패가 되어주셔서 일 분 일 초 단위로 지켜주십니다. 마치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와 같습니다.
다윗은 구원을 하나님 안에서 찾았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57:1),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시61:4)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방패삼아 주의 날개 아래 피하고 있는 신앙의 용장, 그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거대한 방패와 그 방패를 든 방패지기를 대동하고 나타나는 골리앗과 오직 구원은 여호와께 있음을 믿고 하나님을 방패삼아 담대하게 골리앗을 향해 나아가는 다윗은 대조적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회개합니다. 회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귀한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너무 성급하게 우리를 심판하시는 바람에 회개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는 식으로 핑계를 대기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악한 짓을 할 때 에 충분한 시간을 주셔서 그 사람 속에 있는 모든 죄를 다 드러내십니다.
본문 12, 13절을 읽겠습니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하나님이 분노하시면서도 가만히 두는 이유는 갈 데까지 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권력자를 마치 잔칫집 돼지처럼 생각하시기에, 단칼에 잡을 수 있도록 칼을 갈고 계십니다. 악한 자로 하여금 회개할 것 같으면 회개하게 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마음껏 자기 안에 있는 악을 드러내게 됩니다.
다윗은 회개하여 사망과 영멸을 면하였습니다. 그러나 회개치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의 칼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치 않는 자를 향해 그의 활을 당기시는 것입니다. 사울왕을 보십시요. 그는 그의 죄를 회개치 않으므로 여호와의 영이 그를 떠나 악렁에 사로잡혔습니다.(삼상18: 10) 번민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엔돌의 접신녀를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습니다.(삼상28: 7~25)
그러므로 그와 그의 세 아들과 그를 따르는 모든 자가 길보아 산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고 말았습니다.(삼상31: 6)
또한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정죄되심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으나 끝내 회개에 이르지 못하므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마27: 3~5)
뉘우치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지금까지의 행위를 뉘우치고 돌이켜서 다시는 그 길을 되밟지 않는 것이지요. 세상과 인간을 향하던 발걸음을 온전히 돌이켜 주님께로 향해 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눅3: 8) 회개치 않는 자의 최후는 기어이 비참한 결말을 보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죄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죄에는 반드시 보응이 따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느니라."(나1:2)
더구나 지은 죄를 회개치 않을 때에는 더욱 비참한 결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사랑하는 심령들이여, 하나님 앞에 범죄하기를 두려워하며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생활 중에 이 정도야 뭐 별거 아니겠지 하고 가벼이 여기며 짓는 죄들이 있습니다. 새끼줄을 잡아당기니 소가 끌려오더라는 말처럼 가벼운 죄에 무서운 죄가 딸려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르고 짓는 죄보다 알고서도 범하는 죄 "짐짓 죄"는 더 무거운 죄이지요.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하듯이 죽은 듯한 죄도 다시 살피는 조심성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찬양합니다.
본문 14절을 보겠습니다.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악인은 죄악을 낳고 죄악으로 건축합니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미3:10) 그러나 죄악은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전 보르도 지역 경찰 책임자인 모리스 파퐁은 반인류적 범죄로 징역 20년을 구형 받았습니다. 파풍은 나치의 프랑스 지배가 끝난 뒤에도 샤를 드골 대통령의 밑에서 파리 경찰국장을 지냈으며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시절에는 예산 장관을 역임하는 등 탄탄대로를 달려왔습니다. 그가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된 계기는 81년 한 신문에 의해 유대인들을 대거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에 보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실을 입증하는 서류들이 공개되면서부터 입니다. 모든 공직을 사퇴하고 조용히 살기를 원했던 그였지만 유태인 희생자 가족과 단체들의 고발에 따라 지난 83년 정식으로 기소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의 반인류 범죄로 프랑스 전직관리가 법정에 선 것은 파퐁이 처음입니다. 악인 중에는 당대에 재앙을 받아 죄 값을 치르는 사람도 있지만, 죽을 때까지 형통하고 잘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는 날 그가 평생 누렸던 것들은 더 이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는 빈손으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죽음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드시 악의 실체는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할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잠24:19-20)
악인이 죄악을 도모하며 행악하는 것을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여 해산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악한 자의 치명적인 실수는 머리는 좋은데 스스로 통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거짓은 반드시 드러나고, 죄악의 결말로 심판을 받습니다.
본문 15- 16절을 읽겠습니다.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악한 자는 악한 일을 하는 데 점점 더 감각이 없어지게 됩니다. 마치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더욱더 자극적인 죄를 원하고 더 심한 악을 원하게 되는 결국 '자기가 판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원수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대신 빠졌으나 구원할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의 머리를 부수어버리십니다. 그때 우리 성도들의 모든 누명이 벗겨지며 그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본문 1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하나님의 의를 붙들 때, 구원이 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다윗은 한 가지 더 힘을 쓴 사실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윗은 물론 자신의 의를 귀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붙들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 속에 바로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떠오르니까 온 세상이 순식간에 변합니다. 깜깜한 어둠이 사라집니다. 하얀 구름이 드러납니다. 아름다운 세상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결국은 우리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드러납니다. 지금까지 어둠 속에서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작은 빛들은 어디 존재가 있었느냐는 듯이 사라집니다. 다윗이 감사하는 까닭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우리 모ㄷ든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빛이심을 우리는 원수와 대적은 단지 다윗을 향해 창을 던지는 그런 사람 이상일 수 있습니다. 다윗의 명성과 사회적인 지위를 떨어뜨리려고 온갖 거짓된 말을 일삼는 모든 자들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원수를 제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처음에 악한 자의 박해를 받을 때에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악한 자가 하나님처럼 느껴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지킨 결과 하나님께서 악한 자를 멸망시키시고 의인들을 높이 드실 때에,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과거와는 다르게 더 뜨거운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 25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하였습니다. 회개와 심판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지금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심판받지 아니하게 됩니다. 그 말씀 들으면 살아납니다. 이 은혜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12: 47- 48)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냉대하면 그 누구도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의를 좇으며 그분만을 믿고 나아갈 때 우리의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앞서 우리를 지키시며 영육간의 대적들을 막아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 기도: 공의로우시고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죄에는 반드시 보응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죄를 두려워하며 멀리 하는 경각심을 키워 주시옵소서. 선에는 장성한 자가 되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는 말씀을 따라 더욱 선을 행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의 도우심과 동행하심으로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세상일에는 열심이면서 주님의 일은 경홀히 여기므로 나중 심판받는 자 되지 않도록 우리의 약한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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