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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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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거짓과 아첨하는 입술
본문: 시12편 1- 8
1.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2.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4.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7.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8.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중국 전국 시대 위나라의 방총은 불모로 잡혀 있는 태자를 다시 고국으로 모셔오기 위해 조나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부재 중 혹 자신의 실각을 음모하지는 않을까 하여 이를 염려한 방총은 혜왕을 찾아뵙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상감마마,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제가 태자를 모시러 조나라에 갔을 때에 소인에 대한 참소와 모함을 할 자가 셋 이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점을 상감께서 부디 통촉하시옵소서.”
혜왕의 다짐을 받은 방총은 그제서야 조나라로 떠났는데, 아니나 다를까 방총의 생각대로 방총을 모함하고 참소하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미리 신신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혜왕은 그들의 거짓된 참소를 받아들였고, 이후 방총은 더 이상 혜왕에게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진리를 거슬러 악하고 비뚤어지고 거짓된 말을 하므로 불의가 드러납니다. 특히, 재판할 때에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은 그 재판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은 물론 사회에까지 해악을 끼칩니다. 그러나 악인의 거짓된 혀는 영원할 수 없습니다. 거짓말로 당분간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지만 금방 그 거짓이 드러나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눈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잠12:19)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잠12:22)
본문은 다윗이 당시 사회의 사악한 모습을 보고 통탄하는 내용으로서 특별히 거짓과 아첨이 판을 치고 정직한 자들이 낭패를 당하고 있는 잘못된 모습을 지적하고 있는 시입니다.
이 시는 다른 시편들보다 더욱 강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습니다. 다른 시들은 대부분 그 종결에 가서는 승리의 확신과 찬양으로 끝을 맺고 있으나 이 시는 악인이 도처에 득세함을 지적하고 있어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시들은 생명과 안전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들이지만 본 시는 원수들의 거짓된 입술과 위선에 대한 지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매우 유해합니다. 왜냐하면 거짓된 언어는 인간의 기본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파괴하는 첩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의 역사적 배경은 사울 왕이 망할 때쯤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에 나타난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의 모습이 그때를 방불케 하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자들이 없어지고 거짓말이 횡행하며, 야비하고 무가치한 자들이 득세하는 때는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시는 때입니다. 엘리야, 예레미야,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본문 1절을 읽겠습니디.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의로운 자는 다윗과 같이 이러한 때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도우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역대하 14장에는 아사가 등장합니다. 아사는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유다 사람을 명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며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신을 없이하여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아사는 견고한 성읍들을 유다에 건축하였습니다. 아사의 군대는 유다가 삼십 만이요 베냐민이 이십 팔만입니다. 그런데 구스 사람 세라가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 승을 거느리고 마레사에 도착하니 아사도 마레사에 마주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아사는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을 아사와 유다 사람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구스 사람이 도망하였습니다.
의로운 자는 그 입술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합니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이렇게 사악하고 부패한 시대에 있어서 경건한 사람들은 기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삼상 12:23). 이럴 때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경건한 자. 의로운 자, 정직한 자들이 핍박을 받고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한 아버지가 여섯 살짜리 아이를 옆자리에 태우고 가다가 그만 신호위반으로 교통경찰에게 걸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차를 세우고 운전면허증과 그 밑에 만원 짜리 몇 장을 살짝 감추어 건네주었다. 그러자 경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경례를 붙이며 그냥 보내 주는 것이었다. 아이는 눈이 똥그래져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괜찮다, 얘야. 다들 그렇게 한단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하루는 아이의 삼촌이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세금을 적게 낼 수 있는지를 아버지와 함께 의논하고 돌아갔다.
옆에서 의아해 하는 아이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괜찮아, 세금 제대로 다 내다간 남는 게 없어. 다들 그렇게 해"
아이가, 중학생이 되었다. 방학을 맞이해 과일가게에서 한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주인 아저씨는 싱싱한 과일은 잘 보이게 해 놓고 오래된 과일은 뒤에 감춰 두었다가 팔 때
끼워 파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괜찮아. 다들 그렇게 해서 과일을 판단다"
아이가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회사에 취직을 했으나 큰 횡령사건을 저지르고 그만 감옥에 수감되고 말았습니다. 면회를 온 아버지는 그래도 푸념하기를 "아이고 이놈아 넌 도대체 누굴 닮은 거냐! 너는 가르치지도 않은 짓을 했느냔 말이다" "괜찮아요 아버지, 다들 그렇게 해요. 전 재수가 없어서 걸린 것뿐이어요“
우리의 말 한 마디는 남의 인격에 큰 손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혀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잠13:3) 하였고,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마음이 궤세한 자는 강포를 당하느니라”(잠13:2) 하였습니다.
선한 사람과 대화를 하면 선한 영향을 받아 마음이 기쁘고 즐거워지지만, 악한 사람과 대화를 하면 악한 영향을 받아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러워집니다. 악인의 악한 생각과 악한 마음으로 우리를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말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인을 상대하지 말고 피하여야하겠습니다.
악한 세대의 특징 중 하나는 언어의 타락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이 혼란스러울 때 먼저 언어가 타락(墮落)됩니다. 의심과 시기심이 배여 있는 말, 거짓말과 독설을 자주 사용한다면 분명 그 사람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만 마디의 말을 쏟아놓습니다. 때로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남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지만 지혜롭고 소망이 되는 말은 남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잠언 16장 24절은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우리의 말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고 절망한 자에게 희망을, 낙심한 자에게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야고보서 3장 5절에도 “혀는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작은 키가 큰 배의 방향을 바꿀 수 있듯이 말 한마디는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말씀으로 일으키셨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이 뱉어낸 말로 인해 남에게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자신의 삶도 거기에 얽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정적인 말은 우리의 인생을 부정적으로 이끌지만, 긍정적인 말은 우리의 인생을 소망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아름다운 언어의 축복이 우리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어느 날 저녁 왕과 신하들이 뜰을 걷고 있었습니다.하늘엔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이었습니다.왕은 한 신하에게 물었습니다.
“여보게 저 쪽에 떠있는 별이 보이는가?” “폐하, 잘 보입니다.유난히 반짝이는군요”
다른 신하에게 물었습니다.
“너무나 잘 보입니다.영롱하게 빛나는 것이 나라에 경사가 있을 듯하옵니다”
왕은 또 다른 신하에게 물었습니다.
“폐하, 찬란하기 그지 없습니다”
왕은 다시 뒤처져 따라 오는 신하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눈에도 저 별이 영롱하고 찬란하게 보이는가?” “폐하, 죄송하옵니다.제 눈엔 별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저 별이 정말 안 보이는가?” “예, 아무리 보아도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왕은 별이 안 보인다는 신하를 신임하고 그의 조언을 듣곤 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도 온통 거짓과 아첨과 기만으로 뒤범벅입니다.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온통 거짓과 허위로 치장하고 있습니다.별이 안 보인다고 말하는 양심세력의 출현이 요청됩니다.아첨과 아부는 의사소통이 아니라 조종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아부하는 이유는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얻어 내고자 함입니다. 물론 사람에게 아첨하고 아부하는 것도 나쁘지만, 하나님께 아부하는 것은 훨씬 더 나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아부를 하는가?
첫째,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마음으로 찬양하지 않는 것이 아부입니다.
둘째,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 아부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기도 중에도 이같이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구하지 않으며 기도하는 것이 아부입니다.
이렇게 일상적으로 기도하면서 약속을 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나님, 오늘 복음을 전하며 살겠습니다.” 혹은 “주님, 오늘 유혹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그 약속대로 실천할 의지가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자주 이스라엘 백성은 이처럼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습니다. 제물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복을 사려고 했습니다. 틀에 박힌 예배 의식을 행하면서 하나님께 아부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마음을 가지십시오. 정직하지 못함, 성실하지 못함, 기만으로 하나님께 아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직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은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감추려 하지 말고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신실하게 기도하십시오.
칭찬과 아첨은 다릅니다. 칭찬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발견하고 격려해 주는 말이지만, 아첨은 장점이 될 수 없는 것까지도 장점인 양 떠벌이는 입에 발린 말입니다. 칭찬은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도 할 수 있는 멋진 말이지만, 아첨은 나보다 힘이 있는 자에게만 하는 비굴한 말입니다. 칭찬은 상대방에게 힘이 되어 주지만 아첨은 상대방을 넘어뜨립니다. 칭찬은 대가를 바라지 않지만, 아첨은 대가를 기대하는 계산된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비판하기보다는 격려하고 칭찬하기 좋아하는 우리의 모습을 기대하십니다. 그러나 아첨하는 혀는 끊으실 것입니다. 긍정적인 자아인식과 자랑은 다릅니다.
긍정적인 자아인식은 자신이 삶을 살아가는 긍정적인 태도이지만, 자랑은 제삼자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함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마음과 자랑하는 혀는 주님께서 끊으실 것입니다.
“권력을 잡고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자는 낟알 하나 남김없이 쓸어가는 폭우와 같다.”(잠28:3)
권력의 맛! 한 번 맛보면 헤어나지 못하는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알콜중독, 일중독, 쇼핑 중독 등 중독도 많으나 '권력 중독'만큼 심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권력의 맛을 보려면 다음의 두 가지에 능숙해야 한다고..
첫째가 '거짓말'입니다.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입만 벌리면 거짓말이 얼굴색 변하지 않고 잘도 나옵니다. 곧 들통 날 것도 아니라고 잡아 뗍나다. 결국 거짓말은 밝혀집니다. 아첨을 보십시오. 국회의원 공천 받기 위해 아부하고, 새 장관이 들어서면 두 시간 내에 장관 명패와 명함을 만들어주는 아첨파도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아첨은 그것을 하는 사람은 물론 듣는 사람 모두를 망친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모두 그의 이웃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그들의 아첨하는 입술은 거짓과 함께 쏟아냅니다. 주님께서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잘라내기를 기원합니다.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악인과 우매자는 교만과 자랑의 말을 합니다.
어느 소대가 사격장에서 사격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한 사병이 총을 두 발이나 쏘고서도 목표물을 맞히지 못했습니다. 울화통이 터진 상사가 사병의 손에서 소총을 빼앗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상사는 "이런 멍텅구리 같으니라구. 너는 눈도 없나? 잘 봐."라고 말하면서 총을 겨냥하고 쏘았지만 목표물에서 멀리 떨어진 고에 맞았습니다. 그러자 상사는 그대로 교만하게 사병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봤지? 이 바보야. 그게 바로 네가 쏜 방식이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은 남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의 말만 들으라고 소리를 높이고 남에게서 배울 것이 없다 하고 남을 가르치려고만 듭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발전할 가능성도, 변화될 가능성도 없는 '구제불능'이 되고 맙니다. 요즘은 특히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자기만 지혜롭고 경건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은 터무니없는 착각에 도취되어 무례히 행하고 교회공동체에 해를 끼치고 다툼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이웃을 섬김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우리의 인격을 성숙시켜야겠습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잠26:12)
"미련한 사람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불러 일으킨다."(잠18:6)
2절 말씀에 두 마음은 우리의 전 인격이 일치하지 못하고 분열된 것을 가르킵니다. 표리부동, 언행불일치, 배반, 변질 등입니다. 인간은 생각, 말, 행동의 세 가지 활동으로 그 삶을 살아갑니다. 사고와 행동은 인간의 내적 삶과 외적 삶을 대표합니다. 언어는 사고와 행동의 중간에 존재하면서 이 양편에 관계하고 있습니다. 언어는 사고의 산물이며, 행동의 동행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말은 나와 이웃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말'보다 '대화'는 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사회는 대화로써 이루어지고 유지됩니다. 그런데 이 대화가 거짓되고 표리 부동하며, 아첨하고 자고하는 것이 되었을 때 그 사회는 심각한 부패와 타락에 빠지게 됩니다. 극도의 불신 사회가 되어 사회 기강이 무너져 버리고 불법이 성하게 됩니다. 이것은 파멸에 직면한 사회의 말기적 현상으로서 선지자 미가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미 7:5). 이러한 불신 풍조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날, 즉 '형벌의 날'(미 7:4)이 임했을 때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7)고 했습니다. 언어는 영혼의 표현이며, 상호 인격의 교류입니다. 이 언어가 기만으로 차 있을 때 정당하고 건전한 인간관계는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언어 현상이 기만으로 차게 될 때에 나타나는 사회 현상은 경건하고 진실한 자들이 사회에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진실한 자가 악한 시대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감추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왕상 199:18). 하나님이 그들을 감추어 두시는 것은 타락한 시대를 심판하신 후 새로운 시대의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악인이 득세합니다. '야비한 사람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날뛴다'(8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4절)라고 고합니다. 의인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대한 오만한 경멸을 표시하고, 안하 무인으로 횡행하는 사회가 되며 거친 행동이 박력으로 통하고 변칙적인 성과가 유능할 것으로 인정되며, 온유 보다는 포악이 효과를 거두는 불법적이며 잔인한 사회가 됩니다. 사회가 이렇게 되면 힘없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탄식이 높아집니다. 그들은 부당하게 인권이 유린되고 억울한 대접을 받으며, 억눌림 속에서 살게 됩니다(5절). 사회가 타락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과 경외심의 상실, 그리고 책임감의 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4절).
본문 5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시련은 성장의 법칙이요, 우리의 인격은 폭풍우와 긴장 속에서 형성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시련과 번민 속에서 필사적으로 하나님을 찾다가 마침내 그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육체에 음식이 필요하듯 신앙생활에는 시련이 필요합니다. 명예, 행복, 건강, 평안한 환경은 인간의 영혼을 잠들게 합니다. 시련은 고르지 못한 땅을 평평하게 만드는 불도저와 같이 이 세상의 높고 낮은 것을 고르게 다져놓습니다. 돈 있는 사람에게 전혀 시련이 없다면 가난한 사람은 하늘에 대해서 크게 원망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부자가 모르는 시련이 있고 부자에게는 가난한 자가 모르는 시련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슈바이처 박사는 ‘고통과 시련의 참된 의미를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서 깨닫는 자는 결코 외롭지 않다. 왜냐하면 시련을 당하는 자는 모두 그의 형제이기 때문이다. 수천 년 동안 내려온 고통의 역사는 아직도 누구에게나 이어지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어려운 형편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그런 어려운 상태가 되면 사람들은 흔히 낙심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그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은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불의하고 간악한 위협으로부터 우리가 가장 안전하고 영원히 보호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안전지대, 그 분의 능력과 은혜로 둘러쳐진 안전지대에 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안에서의 안전지대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만을 겸손하게 의지히고 복종하며,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안전지대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끝가지 신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분문 6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독일의 어느 여 성도는 성경을 읽어 내려가다가 특별히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구절마다 줄을 긋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도 그렇게 하시는 분이 많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여 성도는 말년에 가서는 이 습관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나는 이제 성경을 읽어 내려 가다가 성경말씀에 줄을 긋는 습관을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 전체가 제게 있어서는 아주 소중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하고 귀중할 뿐만 아니라 영원합니다. 흙도가니에 단련한 은 같아서 변하지 아니합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 105)
의로운 사람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일곱 번 단련한 은과 같이 전혀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지대에 두리라'(5절)고하신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한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반드시 실천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기도하는 자의 신앙을 강화합니다. 그것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방향은 말씀에 의하여 인도하며, 신앙의 능력은 기도에 의하여 강화됩니다. 의로운 사람은 악한 세대에서 기도로써 자신을 무장하고 악의 세력을 극복해야 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무기입니다. 능력입니다. 확신입니다. 우리는 이런 어려울 때 일수록 기도해야합니다. 기도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있는 한 거기에는 교만하고 사악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그들이 비열한 수단으로 성도를 괴롭게 하고 믿음을 파괴하려고 위협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이 악한 세대로부터 지키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8- 29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거짓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곧게 서고 하나님의 품 그 팔 아래 있을 때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말씀 위에 곧게 서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 36- 37)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거늘 의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잠10: 6)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잠10:20)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잠10:32)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잠15:28)
말에는 이상한 힘이 있습니다. 칼이나 송곳이 달려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의 마음을 사정없이 찌르고 도려냅니다. 많은 부부들이 서로의 인격을 건드리는 말이 불씨가 되어 부부싸움을 하거나 심하면 이혼까지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장하는 자녀들 앞에서는 특히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보고 들은 대로 따라 할뿐더러 성인이 되어서도 그 인격형성과 잠재의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말이 누구의 입에 담기느냐에 따라 유익한 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부터 거짓과 아첨하는 말, 분과 악의와 훼방과 우리 입의 부끄러운 말들을 벗어버리고(골3:8)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엡4: 29)
* 기도: 정직을 기뻐하시는 주님, 오늘도 나의 언어 습관을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고 나의 입술이 남에게 유익을 주는 지혜자의 혀로 삼아 주시옵소서! 내 입술과 혀에 파수꾼을 세우사 필요하고 적절한 말을 하게 하소서. 황무지 같은 이 세상에 기쁨과 소망을 가져다주는 말과 행동을 하면서 사는 인생이 되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나에게 거짓과 아첨하는 입술을 제거하여 주시고 혀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내 입으로 슬픈 자를 위로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께 찬송함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하오니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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