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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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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무신론자의 어리석음과 악행
본문: 시 14:1-7
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5.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6.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7.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한 무신론자가 밤 늦은 시간에 교회 집사인 친구를 찾아와서 이렇게 따졌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네. 내게 하나님이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게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없는 것을 있다하는 거짓말장이들이야"
이 말을 들은 친구는 조용히 기도하더니,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약에 이 세상의 메뚜기들이 다 일어나서 태양을 가리우며 그 존재를 부인한다고 해보세. 그렇다고 태양이 없어지겠는가? 아니면 그 사실이 바뀌길 하겠는가? 자네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와 다를 바가 없네." 정말 그렇습니다. 모든 메뚜기가 태양이 없다한들 태양이 있다는 그 사실이 변하랴! 이렇듯 많은 어리석은 자들이 하나님이 없다 하지만 실재하시는 하나님이 어찌 없어지시겠는가. 다만 없다 하는 자의 어리석음만이 더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어리석은 자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태엽을 감아줄 에너지가 없는데 시계가 움직이고 있다. 태엽이 끊긴 시계를 수선할 사람이 없다. 시계방이 없는데 시계가 있다. 기관차가 없는데 기차와 시간표가 있다. 심지를 태울 기름부을 사람이 없는데 등불이 켜져 있다. 정원사가 없는데 뜰이 있다. 꽃을 만드는 사람이 없는데 꽃이 있다. 집을 짓는 데 설계자나 건축가 없이 모래, 시멘트, 나무 등을 마구 던지니 멋진 집이 생겨났다. 시계 바늘, 유리, 부속품 등을 통 속에 넣고 수없이 흔드니까 정확한 시간이 가는 시계가 되었다. 조건을 세울 사람이 없는데 조건이 있다. 도대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늘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은, 어리석은 무신론을 웃으실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시편 14편은 다윗이 어떤 형편에서 쓴 것인지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아니합니다. 혹 어떤 사람은 다윗이 사울에게 어려움을 겪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그의 아들 압살롬이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지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단지 추측에 불과합니다. 하여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유대인과 이방 사람들이 모두 죄 아래 있는 것과 모든 세상 사람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반적으로 우리 인간이 얼마나 타락했는가 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아멘.
종교개혁자인 루터는 독일 아이스레벤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기에 법대에 진학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운명적인 여름방학을 보낸 뒤 신학교로 옮기게 됩니다. 운명을 바꾼 그 사건은 친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더니 천둥 번개가 쳤습니다. 그들은 근처에 있는 커다란 나무 밑으로 피했습니다. 잠시 후 느닷없이 벼락이 떨어져서 나무가 쓰러졌고 미처 피하지 못한 친구는 나무에 깔려서 죽었습니다. 루터는 두려움에 떨면서 땅에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구원하시면 내 평생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루터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 뒤 바로 진로를 바꿨습니다.
누구든지 이러한 일을 당한다면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현대를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주장에 불과합니다.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어리석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악한 세상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불의한 시대의 특징을 밝히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다윗은 선언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온갖 악행을 자행합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불행은 바른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의인을 찾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 성에 의인 다섯 명이 없듯이 의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마치 중앙선을 넘는 모습과 같은 일들이 너무나 쉽게 자주 드러나고 있습니다. 쉽게 쉽게 중앙선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있어서 구별되지 않고 적당하게 함께 더러워져가고 있고 함께 썩어져 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오늘 다윗은 하나님이 없는 자, 어리석은 자,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다고 지적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부정하면서 죄악이 더욱 크게 기승을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이 없을 때 어리석음과 악행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하나님은 본문 2절~3에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탄식 하셨습니다.
전도서 7:25절에 보면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연구하여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얼마나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죄에 대한 지식은 어려운 지식이며, 죄는 스스로 이것이 죄라고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이런 가면을 벗기고 그 본성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병을 치료하려면, 병의 원인과 그 종류 그리고 그 병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아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는 죄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큰 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죄를 범하고 가슴 아파하는 모습을 “어리석음을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큰 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면 그 밖의 모든 다른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일을 큰 악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이것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의 값은 한 마디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큰 죄를 범하는데 이 죄는 하나님의 영화를 경멸합니다. 모든 죄의 밑바닥에는 실제적인 무신론의 요인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무신론자입니다.
여러분, 이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안 계시다고 해서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리석어서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니, 안 계시기를 바라는 데서 나온 생각입니다. 하나의 상상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까? 그 이유는 자신들의 잘못된 생활 때문입니다. 저희는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 없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본래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율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양심입니다. 그런데 이 양심은 우리가 죄를 범하면 괴로움을 줍니다. 고통스럽게 합니다. 양심이 우리를 책망합니다. 가책을 줍니다. 그러므로 이 가책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상상해 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심판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다면 반박당할 것이 두려워서 입 밖에 내지 못하고 그의 양심의 항의를 잠잠케 하고 그의 악한 길을 담대히 하기 위해 그것을 은밀히 마음에 속삭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9-20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신앙의 기초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사람은 이성적으로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 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특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소위 종교성입니다. 어떤 짐승은 사람처럼 영리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짐승에게는 종교성이 없습니다. 짐승에게는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알 만하게’ 지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이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그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소위 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소위 사상가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없다”고 어리석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루를 살고 저녁에 자리에 눕게 되면 마음 가운데 무슨 생각이 납니까? 내가 어떤 것은 잘못했고, 어떤 것은 바르게 했다는 생각이 납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양심이 하는 일입니다. 이 양심은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 때부터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다음에 날이 서늘할 때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나타나시니까 아담과 하와가 슬그머니 숲 속으로 숨었습니다. 왜 숨었어요? 양심의 가책이 그를 숨게 하였습니다.
죄를 범하면 하나님이 두려워집니다. 왜요? 양심의 가책을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양심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양심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시는 양심의 하나님이시요, 도덕적인 주재자인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을 알 만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특별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시편 103:7절에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특별히 택해서, 그 사람들 가운데서 선지자를 택하여, 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를 계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8절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본래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품속에 계신 독생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얼굴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활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죄인된 우리 인간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를 통해서 구속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분명히 알 수 있으리만큼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소행이요, 사실 죄악이 자기의 눈을 가리워서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죄는 인간의 심각한 병입니다. 왜요? 죄는 하나님의 영화를 경멸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의 밑바닥에는 실제적인 무신론의 요인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할 수 없으나, 그의 주권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판단이 아니고, 그의 상상에 불과합니다. 그는 현재 아무것도 없다는 것으로써 그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패한 마음과 가증된 행실을 그나마 무마시키려면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는 그 양심의 항의를 잠잠케 하고 그의 악한 길을 담대히 하기 위해서 그것을 은밀히 그의 마음속으로 속삭일 뿐입니다. 죄인은 사실 어리석은 자입니다. 죄를 범하면서 “하나님이 어찌 알랴?” 하는 자처럼 어리석은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숨을 수 없습니다.
시편 139:1-12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숨을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모르게 무슨 일이라도 한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이 알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빠져서 내 심령의 눈이 아주 어두워지고 그의 양심이 아주 마비되기 전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죄는 인간의 성품을 타락시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는 악행을 저지를 뿐만 아니라 내세를 준비하지 않습니다.
어느 귀족의 집에 바보 하인이 있었습니다. 귀족은 너무 미련한 하인을 쫓아내면서 지팡이 하나를 주고 말했습니다. “이 지팡이를 갖고 나가라. 다니다가 너보다 더 미련한 바보를 만나면 주어라” 바보 하인이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아도 자기보다 더한 바보가 없었습니다. 수 년이 흐른 어느 날 그에게 옛 주인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는 자기를 내쫓은 주인이지만 지난날의 정이 생각나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주인님! 아주 많이 아프시군요” “그래, 나는 곧 떠나야 할 것 같다” “어디로 떠나시는데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로 가야 한다” “거기가 어딘데요? 먼가요? 언제쯤 오시는데요?” “이 바보야! 세월이 흘러도 너는 여전히 바보구나. 이 세상을 떠난다는데 언제 오느냐고 묻다니. 나는 결코 돌아올 수 없다” “그럼 그곳에 가시기 위해 무엇을 준비하셨나요?”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다” “정말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면 이 지팡이를 갖고 가세요. 전 단지 이 땅의 것만을 소홀히 했으나 당신은 영원한 것을 소홀히 했으니까요 이 막대를 받으십시오"
본문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 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어떤 모임에서 하나님이 존재하느냐의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토론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한 중년 남자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하나님이란 존재는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럼 내가 5분 내에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습니다. 그 중년 남자는 품에서 날이 선 칼을 꺼내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 하나님은 5분 내에 여기 이 칼로 나를 죽이십시오. 그러나 5분 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없는 것이요.” 1분, 2분, 3분.....5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남자는 의기양양해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것 보시오. 하나님은 이미 죽었거나 아예 없습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이 존재하고 지금도 살아 있다면 나같이 신성모독적인 사람을 그냥 두겠습니까?” 모두 잠잠했습니다. 바로 그때 그 모임에 참석했던 할머니 한 분이 그에게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에게도 자녀들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물론 있지요.” 그러자 할머니는 “지금 당신 손에 잡고 있는 그 칼을 당신 아들이 들고서 아버지인 당신에게 ‘이 칼로 나를 죽이시오.’ 한다면 당신은 그 아들을 죽일 수 있겠어요?” 그러자 그 남자는 “할머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내가 어떻게 내 손으로 아들을 죽인단 말입니까?” 그러자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그것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자녀들인 우리를 죽이시기는커녕 죄 지은 우리를 구하시려고 독생자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을 칼로 죽인단 말입니까? 비록 하늘을 향하여 침을 뱉는 당신이지만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우리를 심판하고 벌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분이십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광기어린 선언을 했습니다. 그는 신이 죽었기 때문에 이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뛰어난 초인만이 권력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니체의 이 사상을 기점으로 결국 무신론적 허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시작됐습니다. 그의 사상에 화답이나 하려는 듯이 수많은 초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레닌, 마오쩌뚱, 김일성, 저 일본의 천황 등입니다. 이들이 나타나 1,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고, 공산혁명을 주도했습니다. 저들은 모두가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이 무신론자들은 그동안 인류가 겪어보지 못했던 전쟁과 살상과 인권유린의 악을 저질렀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범죄든 다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한 평범한 주부가 화장품 가게에서 15분 동안에 무려 7차례 절도행각을 벌인 것이 보도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진열되지 않는 화장품을 달라고 주문하고는 주인이 그것을 찾는 동안 진열된 화장품을 가방에 정신없이 넣었습니다. 그러기를 7번. 의심이 생긴 주인이 감시 카메라를 보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이 분이 만일 감시 카메라가 찍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도둑질을 할 수 있었을까요? 무신론자들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보신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기 때문에 그 큰 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악에 가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래서 실천적 무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장삼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땀 흘려 일해서 은 삼백 냥이라는 큰돈을 벌었습니다. 이 돈을 상자 속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한 밤중에 일어나 이 은을 상자에서 꺼내 단지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보는 사람이 없나 주위를 살피면서 뒷밭에 구덩이를 파고 단지를 꼭꼭 묻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던 장삼은 나무판에 이렇게 써서 단지를 묻은 밭에 꼽아 놓았습니다. [이 곳에 은 삼백 냥 없음] 그리고 나서야 안심하고 돌아가서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그 밤중에 장삼의 행동을 몰래 훔쳐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옆집에 사는 아얼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장삼이 잠든 것을 보고는 몰래 담을 넘어와 단지를 파내어 은 삼백 냥을 훔쳐갔습니다. 이 아얼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던 사람입니다. 이 아얼은 분명히 장삼이 다음 날 돈이 없어진 것을 알면 자기를 의심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꾀를 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무판에 이렇게 써서 꽂아두었답니다. [옆 집 아얼이 절대로 훔치지 않았음] 참으로 어쩌구니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두 사람은 바로 저요, 여러분이요, 우리 모든 인간들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인간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믿고 인정하면서도 손과 발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다고 말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많이 아는 것 같지만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보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너무나 몰라요.
하나님은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십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가 하여 살펴보았더니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다 치우쳤다는 말입니다. 순서가 바꿔졌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찾아야 할 인간이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찾는다는 말입니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합니다. 그래서 배로 하나님을 삼는 사람도 있다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점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짐승처럼 사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경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 육신만 먼저 생각하고 찾는 사람의 삶은 혼돈입니다. 짐승같이 삽니다. 문화시설 속에 살면서도 짐승처럼 삽니다. 그저 한 마디로 말해서 개처럼 삽니다. 거룩한 것을 속된 것으로 바꿔 버립니다. 우리가 찾는 순서가 바뀌게 될 때 이렇게 더러워집니다. 타락하고 맙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 세상에 사는 인생을 살펴보았더니,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했더니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 인간의 비극이 있습니다. 다 치우쳤다는 말입니다. 다 함께 더러운 자가 되었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생활이 어떻습니까? 로마서 1:29-31절을 보십시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여기 21가지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19-21절에도 육체의 일을 말하면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로마서 3:10-18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여기에 사람이 범하는 죄악된 생활을 대부분 기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깨닫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치우쳤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아니합니다. 오히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다 치우쳤습니다. 마치 지남침의 방향 감각이 무디어진 것과 같습니다. 우리 심령의 지남침인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 나아가야겠는데, 그래야 지남침의 바늘이 바른 구실을 해서 방향을 바로 정하겠는데 세상의 것에 마음이 끌려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었습니다. 쓸모없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유가 변해서 먹을 수 없이 되는 것처럼 우리 인간의 마음이 부패해서 썩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불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의 본성은 다 한 가지로 쓸모없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도 찾지 아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의 것을 찾는 데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을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러지는 않았습니까? 실제적 무신론자는 아니었습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찾기 위해 나오셨습니까? 칼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다 배우고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의 마음은 텅 빈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습니다.
전에 무디 선생이 어릴 때 해를 등에 지고 뛰었더니 아무리 빨리 뛰어도 그림자가 앞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뒤로 돌아 해를 앞으로 바라보며 뛰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림자가 뒤에 있고 자신이 앞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빛되신 하나님을 따르지 아니하고 그것을 등지면 언제나 어두움을 따르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결국 이 세상을 향하여 살면서 모든 죄악을 행하며 진리에서 벗어나 더러워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길에서 탈선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찾을 마음조차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찾지 아니하고 다른 것을 겸해 찾습니다. 하나님보다 먼저 세상 것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찾노라고 하지만 열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계속 찾지 아니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을 찾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 회개해야 할 때 회개하지 아니합니다.
윌리엄 피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아이가 어릴 때 길을 가다가 10불 짜리 하나를 얻어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후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길을 걸을 때면 항상 땅을 내려다 보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결과 길에서 얻은 것이 단추 29,516개, 바늘 54,172개, 돈 24불을 더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얻은 것이 하나 있는 데, 허리가 완전히 구부러지고, 성품은 매우 인색해졌다고 합니다.”
땅만 내려다 보고 길에서 무엇을 찾느라고 한 사람의 결국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1)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를 찾으십니다.
원어 성경을 보면 찾는다는 동사로 히브리어 ‘다라쉬’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따르다’, ‘자주 가다’, ‘묻다’, ‘도움을 청하다’ 등입니다. 그러니까 평소에도 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가운데 선을 행하는 자도 역시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상을 살펴보십니다. 왜냐하면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러다 노아를 만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만나셨습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기뻐하십니다. 예수님도 갈릴리 바닷가에서 몇 사람의 어부를 만나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만나셨습니다. 교회사를 통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나셨으며 루터와 칼빈, 웨슬레, 무디와 빌리 그래함을 만나셨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이 땅에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내게 가장 영향력 있는 분이 누구일까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내 아내에게 가장 영향을 줄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자녀에게 가장 영향을 줄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아내와 자녀를 설득하기 전에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설득해야 하지 않을까요? 영향력 있는 하나님께 내 자신이 먼저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역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통해 달라지도록 우리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일만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찾으셔야 합니다. 모든 형식적인 행위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늘 중심으로 옳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찾는 여러분을 하나님은 만나 주십니다. 크게 도와주십니다.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28:5)
(2) 하나님을 찾는 자와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본문 5절에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악인이 온통 세상을 지배하고 승자로 군림하는 듯이 보입니다. 코앞에 이득 때문에 양심을 저버리고 돈만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양심을 속이고 불법을 자행하고 약자를 등치는 세상입니다. 돈을 하나님처럼 섬기기 때문에 그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부정하게 뇌물을 주고받으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인과 함께 하십니다. 불의한 시대에 의롭게 산다는 것이 때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은 무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캄캄할수록 작은 불빛이 더욱 멀리 빛을 발하듯, 소수 의인의 믿음이 용기와 희망이 되어 역사의 새벽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미술가이며 시인인 제임스 스메탄이라는 사람은 몹시 가난 하게 살았습니다. 그에게 “당신은 왜 교회에 나갑니까?” 하고 묻자 “축복을 받으려고 나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무슨 축복입니까?”하고 묻자 “분노와 경멸, 그리고 냉대를 갖게 하는 유혹이 사라지고 기쁨과 만족이 가득 차게 되고 하나님의 섭리에 만족하게 되는 것이지요. 어둡고 복잡한 생각으로 꽉 찬 마음으로 교회에 가면 평안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돌아오지요. 모든 근심은 사라지고 내가 구원받은 기쁨과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평안과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아 만난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지키시며 인도하십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 노래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편 23:1~6)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느끼는 단계에서 이제는 체험적으로 느끼는 단계로, 머리로만 알았던 하나님을 이제는 가슴으로 느끼는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지녀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를 찾는 자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3)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하나님은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본문 6절에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현재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입니다. 우리가 존귀한 자로 계속 쓰임을 받으려면 두 가지를 피해야 합니다. 하나는,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 말아야 하고, 또 하나는 남에게 모함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워낙 험악하여 내 힘으로 이를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위험한 때에 피할 곳이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피난처가 있습니까? 그 피난처가 어디입니까? 물론 좋은 부모나 친구, 선배가 있으면 어느 정도의 위안이 되고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은 그 누구도 궁극적 피난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한계가 있어 더 이상은 보호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46:3~4의 말씀에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고 하셨습니다. 궁극적인 피난처는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피난처가 되어 나를 보호하시고 안전히 거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시도다.”라는 고백을 할 때 비로소 성숙한 성도의 자리에 이른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힘은 한계가 있습니다. 또한 변합니다. 젊음의 힘, 돈의 힘, 권세의 힘, 지식의 힘 등 모든 힘은 유한하며 또한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영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우리들의 참된 피난처가 되시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로 괴로워하십니까?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어 외로워하십니까? 우리에게는 소망 가득한 피난처가 있습니다. 슬픔에 잠기어 절망이 되십니까? 위로의 피난처가 있습니다. 두려우십니까? 함께 계시는 피난처가 있습니다.. 위험 닥치고 시험이 와도 우리를 보호해 주는 피난처가 있습니다. 인생 살아가다 지치고 용기가 없어질 때 혼자, 울지만 마시고 영원한 이 피난처로 나아오십시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생은 운명이나 팔자가 아닙니다. 모든 방법이 다 실패할 때라도, 모든 문이 다 닫혔을 때라도, 여전히 주님은 나를 붙들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만 바로 되면 우리의 미래는 앞날은 열립니다. 위기는 위기로 끝나지 않아요. 위기는 기회가 되는데, 망할 기회도 되고 축복과 도약의 기회도 됩니다. 어느 길을 가느냐? 바로 나에게 달려있어요. 어느 길을 가느냐에 따라 고통일 수도 있고 기쁨일 수도 있습니다. 멸망의 길이 될 수도 있고, 성공의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불행의 길이 될 수도 있고 행복의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한 지역의 재난이 마치 바이러스가 퍼지듯 전 세계로 퍼져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세계화의 특징은 속도입니다. 비약적인 기술혁신 때문에 최신 발명품마저 금세 진부해 지는 사태가 광속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또한 냉전 시대가 '친구'와 '적'의 세계였다면 세계화 시대는 친구건 적이건 모두가 '경쟁자'로 바뀌는 시대입니다. 세계화의 시대 속에 사람들은 더욱 두려움에 쌓여 있습니다. 실직의 두려움, 미래의 불확실성의 두려움, 아무리 튼튼한 회사도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는 두려움, 앞으로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살 수 있을지 모르는 두려움 등입니다. 그래서 많은 질병들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요동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도우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요새가 되십니다. 환란 중에서도 섬세하게 도우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주님을 생각해 보세요. 순간 순간 우리를 돌보시며 지켜 주십니다.
(4)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돌이키시어 즐겁게 하십니다.
비록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범죄 하므로 포로로 끌려가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 된 곳에서 돌이키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구원받은 그의 백성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는 것” 보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기쁨이 있고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이 없다'라는 책은 백악관 국가장애인위원회 정책 차관보였던 강영우(姜永祐) 박사의 저서입니다. 시각장애자인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모델인 루즈벨트를 소개하며 사람은 위기를 당할 때나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서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루즈벨트는 하버드 출신으로 탄탄대로를 걷습니다. 변호사가 되고 윌슨 행정부의 해군차관보를 지내고 1920년에는 민주당 부통령후보가 됩니다. 그런데 그에게 청천 벽력같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육체적인 피곤을 틈타 소아마비 균이 침범한 것입니다. 현재 의학 같으면 고칠 수 있지만 당시는 치명적 질병이었습니다. 결국 39세에 루즈벨트는 소아마비에 걸려 하반신이 마비되고 맙니다. 모든 사람들은 루즈벨트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휠체어를 타고 밑바닥의 인생을 다시 시작합니다. 재산을 털어 조지아주의 윔스 프링스에 재활센타를 세우고 그 곳에서 재활운동을 시작합니다. 40년을 살았던 고향을 떠나 하나님만 더욱 의지합니다. 눈물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1928년에 뉴욕주 상원의원에 복귀하여 정치를 재개합니다. 결국 1945년 4월 12일에 대통령이 되어 12년을 백악관에서 보내게 됩니다. 루즈벨트는 장애의 고통이 있었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았습니다.
남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부족 중에는 나이가 30을 넘지 못하고 죽는 부족이 있다고 합니다. 이들의 수명이 짧은 원인을 학자들이 조사하여 규명했는데, 그들이 사는 토담사이에 이상한 벌레가 번식하여 독소를 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부족들에게 세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살충제를 뿌려 벌레를 죽이라. 둘째, 살고 있는 토담을 헐어라. 셋째, 다른 곳으로 이주 해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조상들이 그렇게 살았으니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지금도 나이 30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답답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읍시다. 부르짖어 기도합시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매달립시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낙심하고 좌절하지 말고, 억울하고 속상하다고 괴로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나의 모든 것을 해결하여 주실 하나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본문 3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나치 독재에 저항했던 20세기의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독재자 히틀러가 하나님 행세를 하던 역사적 상황에서 하나님을 ‘절대타자’(絶對他者)라고 강력한 어조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독일 국민이 히틀러를 마치 하나님처럼, 구세주처럼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해가던 상황에서 ‘하나님은 절대타자이시다’, 즉 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자리에 오를 수는 없다며 강력히 히틀러 독재체제를 비판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역사 속에 나타난 수많은 독재자들이 다 이런 범주에 속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섬김을 강요할 때, 이것도 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독재자들이나 부정한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자들의 공통점은 자신을 신격화하고 우상화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맹목적인 충성을 받아내기 위한 아주 야비한 방법입니다. 여러 가지 그럴듯한 구호들이 난무하고 귀에 솔깃한 정책이 등장하지만 그 이면에는 냄새나는 인간의 야욕만이 들끓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타락 위에서만 구축될 수 있습니다.(롬3:11- 12)
본문 4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옥스퍼드대학교의 대표적 진화생물학자이며 베스트셀러 '만들어진 신'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 교수가 거액을 기부하여 영국 전역을 운행하는 버스 800대에 광고를 부착하였습니다. '아마도 신은 없을 것이다. 걱정 말고 인생을 즐겨라‘
'아마도'라는 말은 무신론에 대한 불확실성의 증거입니다. 인본주의자들에게 신이 없다는 사실은 인생을 즐기는 조건입니다. 신이 없기 때문에 인생을 즐긴다는 것은 자신들의 죄와 그 죄의 결과가 벌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증거입니다. 단지 신이 없으므로 죄에 대한 인간의 본능을 억지로 감추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식의 발달과 계몽주의는 인간사에 큰 공헌을 했지만 인본주의와 무신론이라는 서자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무신론자들이 얼마나 악을 행한다고요? 떡 먹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먹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잡아 구덩이에 던지고 난 후 앉아서 음식을 먹은 것과도 같습니다.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합니다. 노아 홍수 때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으면서도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했습니다. 이 얼마나 악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무지몽매한 일입니까? 더구나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만 보고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돈 많은 사람일수록, 권세 있는 사람일수록 두려워합니다. 점치러 오는 사람의 대부분이 돈 많은 재벌 회사 사장 부인, 장관 부인들이라고 합니다. 왜요? 두려워서 그럽니다. 믿음이 없으니, 의지할 데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이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합니다.
5절에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위로합니다.
6절에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7절에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구원하심이 하나님께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합니다. 이 세상은 악합니다. 어둡습니다. 타락했습니다. 점점 더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팔이 나타나시면 이 세계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죄와 사탄의 지배는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다시 오심은 모든 이스라엘의 소망이며 그리스도인의 기대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기뻐할 것이며 우리의 구원은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 되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혜롭게 살아 최후의 승리를 바라보며 힘차게 사십시다.
* 기도: 온 우주만물을 지으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창조주 하나님에게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세상에는 어리석게도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리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게 하소서. 무신론자들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악행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우리가 악행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여 복종하게 하소서.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루속히 평화통일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정치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을 사랑하고 정의롭게 통치하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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