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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시연 선생
【용포리일기 95】목침 아흔아홉개 집
문불여장성 백암산 기슭 용구동에 가면 목침 아흔아홉개 집이 있지.
너르나 너른 사랑방에 목침이 아흔아홉개나 놓여 있는 세상에서 제일 큰 집.
손룡정사 그 외딴 학당에는 평생 붓방아를 찧은 문사들이 사시사철 머리 조아려 드나드는데 이 집 주인 산암선생은 그저 수염을 쓱 쓰다듬으며 그냥 하룻밤 푹 자고 가게나 하며 목침 하나씩을 내주면 그 뿐.
행여 경인구(驚人句)하나 얻어 들으려던 문객들은 못내 헛헛해하며 억지잠을 청한다네.
그러면 꿈에 수염 허옇게 날리며 산암선생이 나타나 그 허연 수염을 쓱 휘둘러 자네 이마박에다 없을 무(無)자 알지(知) 크게 써서 각으로 딱 때려 붙인다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면 몸은 목침에서 굴러 떨어져 있고 대가리에서는 피가 나는 지 `남북'이 났는지 장성골 새벽닭들만 문불여 문불여 울어댄다네.
이때 산암영감 짓궂게 웃으며 나타나 어째 간밤에 편히 주무셨는가 그 목침 자네 갖게 선물일세 하고는 청려장 짚고 어디론가 아침 산책 나가신다네.
이 시대에 마지막 남은 선비인 산암 변시연 선생님이 저의 고향마을에 사십니다. 용구동 손룡정사라는 멋진 집을 지어 놓고 거기에서 지금도 여전히 한복을 입고 갓을 쓰고 고무신을 신고 아침저녁으로 낭랑하게 글을 읽으며 사십니다. 이번 추석에도 저는 먼발치서 손룡정사의 모습을 한 참 바라보다 왔습니다.
아마 저도 저런 모습으로 살고 싶은가 봅니다. 선생님처럼 몇 수레분의 책을 읽고, 65년 동안 날마다 일기를 쓰고, 32권이나 되는 책을 쓰시고... 선생님을 만나고 간 사람들의 방명록만 모아놓은 서가가 따로 있다는데, 선생님만큼 사는 것이야 언감생심 택도 없지만 비슷하게 흉내를 내면서라도 살고 싶은 마음입니다. 2006.10.10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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