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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전남일보] 체온 -김수석

신춘문예 김수석............... 조회 수 1376 추천 수 0 2011.02.08 23:39:53
.........

2011 전남일보 신춘문예 동화

 

체온/김수석

 

이게 뭐람! 오늘부터 겨울 방학인데, 나는 방안에만 누워 있다. 지독한 감기에 걸렸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제 비를 맞은 탓인 거 같다. 어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상하고, 얼굴이 빨개지고, 눈물이 고인다. 우리 반에는 설희라는 여자애가 있다. 별명이 얼음공주인데, 별명 그대로 쌀쌀맞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설희는 아무하고도 친해지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설희가 자꾸 좋아지는 걸 어쩌란 말인가? 설희만 보면 가슴이 떨리고 밤에 잠도 오지 않는다. 몇 번이나 편지도 써보고 고백도 해보려 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거절당하면 어떡하지? 반 아이들이 알면 얼마나 창피할까? 이런저런 걱정이 앞섰다.

그러다 겨울 방학식 날, 그러니까 바로 어제 고백을 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설희와 우리 집은 다리를 사이에 두고 갈라지기 때문에 학교에서 다리까지는 함께 갈 수 있다. 나는 마음을 졸이며 설희를 따라갔다. 얼음이 녹아 흐르듯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리 부근에 이르자,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제야 나는 용기를 내서 설희에게 말했다.

"설희야! 너한테 할 말이 있어… 그게 뭐냐면… 그러니까… 음… 나… 널 좋아해!"

나는 눈을 딱 감고 고백해버렸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다리가 덜덜 떨려서 서 있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설희는 얼음처럼 차고 단단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설희 쪽으로 조금 다가섰다. 그러자 설희가 질색하며 물러났다.

"가까이 오지 마! 난 너 안 좋아해! 저리 가!"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어제 아빠와 함께 봤던 다큐멘터리 프로가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며 울렸다.

'매일 세계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매년 12억의 인구가 기아로 허덕이고 있으며, 환경오염으로 인한 이상기후 현상으로 생태계는……'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뛰다가 우산도 던져 버렸다. 바람 때문에 빨리 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리 한가운데에 서서 소리쳤다.

"야! 김설희! 너 같은 애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걸? 다신 너 같은 애 보고 싶지 않아. 너 같은 앤 딱 질색이야!"

그리곤 집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비에 흠뻑 젖어서 집에 돌아왔지만, 샤워하는 것도 잊은 채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누웠다. 머릿속에서는 다큐멘터리의 해설이 계속 울려댔다.

'지구온난화현상으로 인해 북극의 얼음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으며, 살 곳을 잃어버린 북극곰 가족들은 살 곳을 찾아 긴 여행길에 오릅니다. 저기 어미를 잃어버린 아기 곰 한 마리가……'

나는 세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재앙과 고통을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하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너무나 분하고 창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설희한테 했던 말들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결국 밤새워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2

"무슨 방이 이렇게 뜨겁담? 태양아! 방학 첫날부터 낮잠만 자고 있을 거야?"

엄마가 방에 들어와서 나를 깨우셨다. 나는 잔소리꾼 엄마와 철없는 아빠, 그리고 치매에 걸리신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엄마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 5학년인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태양아, 정말 안 일어날 거야? 오늘부터 수영하고 논술학원도 가야 하는 거 잊은 건 아닐 테지?"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끄집어 올리며 말했다.

"엄마, 저 몸이 안 좋아요. 속에서 커다란 불덩이가 올라오는 거 같다고요!"

"이 녀석! 학원 가기 싫으면 항상 꾀병이지. 어서 빨리 일어나!"

엄마는 이불을 걷어내고, 내 엉덩이를 '찰싹' 때리시며 나를 일으켜 세우려 하셨다. 그러다 엄마는 화들짝 놀라시며 조심스럽게 내 이마에 손끝을 대셨다가 떼셨다.

"어머! 몸이 불덩이네. 어떻게 이렇게 뜨거울 수가 있지? 안 되겠다. 빨리 병원에 가보자!"

"거보라고요! 정말 아프다고요! 콜록! 콜록!"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일부러 기침까지 해댔다.

 

하지만, 그건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내 체온은 엄마와 병원에 가는 도중에도 계속 올라갔다. 병원에선 내 체온을 내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나는 각종 해열제를 먹고 얼음물에도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내 병을 밝혀내기 위해 수많은 검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내 체온은 도무지 내려갈 줄 몰랐다. 오히려 더 뜨거워지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체온을 쟀을 때는, 체온계가 펑하고 터져버렸다. 회사에서 일하시던 아빠도 내 소식에 놀라서 급히 병원으로 달려오셨다. 의사선생님께서 고개를 저으시며 말씀하셨다.

"보통 사람의 체온은 사십 도를 넘으면 생명이 위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헌데, 자녀분의 체온은… 잴 수도 없을 만큼 높습니다. 체온을 내리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저희로선 도저히 손쓸 방법이……"

의사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시기도 전에 엄마와 아빠는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우셨다. 의사선생님도 고개를 떨구셨다. 이런 맙소사! 내가 죽게 되다니! 나도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내게 닥친 재앙에 비하면, 어미를 잃은 북극곰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됐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게 닥친 이 일이 사실 꼭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병원에 다녀온 이후, 부모님은 내가 학원에 안 가도, 방학숙제를 안 해도 뭐라고 하지 않으셨다. 게다가 아빠는 벽걸이 시계 뒤에 숨겨놓으셨던 비상금으로 고급레스토랑에서 외식도 시켜주셨다. (레스토랑은 에어컨을 가장 세게 틀었음에도, 모든 손님이 땀을 뻘뻘 흘리며 식사를 해야 했다.) 그리고 엄마는 적금을 깨서 내가 가지고 싶어 했던 게임기를 사주셨다. 나는 이참에 평소에 가지고 싶었던 물건들의 목록을 적어서 엄마에게 드렸다. 엄마는 그 목록을 받고도 한참을 우셨다. 오직 할머니만이 밥 시간이 지났는데 어딜 다녀오는 거냐고 호통을 치셨다. 내가 할머니보다 먼저 죽게 생겼다는 것도 모르시고 말이다.

장가도 못 가보고 죽게 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이렇게 지낼 수만 있다면 몸 좀 뜨거운 게 뭐가 대수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엄마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으시고 내 열을 재기 위해 스토브용 장갑을 끼고 들어오셨다.

 

3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그렇다고 체온이 내려간 것도 아니었다. 나는 평소와 똑같았다. 다만, 몸이 몹시 뜨거울 뿐이었다. 부모님도 차츰 평소와 다르지 않게 날 대하기 시작하셨다. 물론 엄마의 잔소리도 다시 시작됐다.

"태양아. 너 학습지가 며칠이나 밀린지 알고 있니? 방학숙제는 안 할 거야? 그렇게 온종일 게임기만 붙들고 있을 거니?"

게다가, 엄마는 보일러 기름값 걱정에서 해방되셨다며 내심 좋아하시는 눈치다. 아빠는 이번에는 텔레비전 선반 액자에 비상금을 모으시기 시작했다.

"쯧쯧… 멍청한 녀석! 사람은 체온을 나눠야 살아가는 게지……."

치매에 걸리신 할머니가 내 이불 안에 고구마랑 계란을 넣으시며 말씀하셨다. 내 체온으로 할머니의 고구마와 계란은 군고구마와 맥반석 계란이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아버지는 '세상에 요런 일이!'라는 프로에 전화하셨다가, 엄마한테 된통 잔소리를 들으셔야 했다. 하지만, 막상 방송국 아저씨들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엄마는 잠시만 기다리라며 곱게 화장을 하고 나오셨다.

'아! 진짜 이게 뭐람! 여자한테는 차이고, 몸은 불덩이가 되고, 집안의 보일러가 되어버린 꼴이라니!'

 

나는 슬슬 외출도 하기 시작했다. 다만, 내 열기에 다른 사람이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 소방관 아저씨들이 입는 방열복을 입어야 했다. 나는 너무나 창피해서 안 나가겠다고 했다.

"엄마, 이런 옷을 입고 나가면 모두 나를 이상하게 볼 거라고요. 전 나가기 싫어요. 그냥 집에서 보일러가 되는 편이 나아요!"

엄마는 그런 나를 문밖으로 떠밀며 말씀하셨다.

"태양아, 이게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어떡하겠니? 사람은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거야!"

그리고는 문을 잠가버리셨다. 그러다 다시 문을 열고는 가방 하나를 던져주셨다.

"아참, 논술학원 다녀오는 거 잊지 마라. 이미 기한이 한참 지나서 환불도 안 해준다더라. 사랑한다! 아들!"

우리 엄마는 정말 너무한다.

 

나는 시간이나 대충 때울 요량으로 사람들이 드문 골목길만 택해서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외진 골목 모퉁이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빼고 골목 안을 살펴봤다. 설희였다! 설희가 동네의 불량한 형과 누나들한테 둘러싸여 있었다. 설희의 가방은 내팽개쳐져 있고, 옷과 머리는 엉망이었다.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누나가 설희를 손끝으로 툭툭 밀치면서 말했다.

"너희 아빠 데리고 우리 동네에서 떠나. 너희 때문에 속 편하게 살 수가 없잖아. 더러운 병균이 득실거리는 주제에 어딜 마음대로 돌아다녀! 허! 얘 눈 좀 봐! 너 어딜 똑바로 쳐다보는 거야!"

설희는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차갑게 형과 누나들을 응시했다. 내가 설희에게 고백하던 날, 나를 바라보던 그 시선처럼. 나는 더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만둬요!"

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형과 누나들은 잠시 멍하니 말을 못 잇고 있었다. 그러다 한꺼번에 배꼽을 잡고는 웃기 시작했다.

"야! 꼬마야! 네가 무슨 정의의 사자 파워레인저라도 되니? 옷차림하고는! 머리가 어떻게 된 거 같은데… 다치기 전에 그냥 가라, 응!"

나는 방열 헬멧을 벗고 소리쳤다.

"그만두라고요! 왜 자기보다 어린 여자아이를 괴롭히는 거예요!"

머리가 노란 형이 나에게 다가와 가소롭다는 듯이 내 볼을 '툭' 쳤다. 하지만, 그 형은 손이 내 볼에 닿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내가 다가서자 형과 누나들은 겁에 질려서 냅다 뛰기 시작했다. 설희도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설희는 쏟아져버린 가방 안의 물건들을 애써 차분히 주워담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 조금 우쭐한 마음도 들었다. 정말로 내가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이라도 되는 거 같았다. 그리고 그런 영웅이 구한 여자는 항상 영웅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나는 설희에게 멋쩍게 말했다.

"괜찮니? 다치지 않았어?"

나는 설희에게 다가가려다가, 나의 뜨거움과 고백하던 때의 일이 생각나서 한 발짝 물러났다. 그 순간 나는 보고 말았다. 설희의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하지만, 설희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꾹 참고 있었다.

"왜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거야? 너도 똑같아! 넌 뭐 다른 줄 아니?"

설희는 가방을 챙겨서 날 지나쳐 뛰어갔다. 뭐 꼭 '고맙다'는 말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설희도 정말 너무한다.

 

4

사람의 적응력이란 정말 대단하다. 우리 가족이 나의 뜨거움에 적응을 해나가고 있었다. 여름이 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그때까지는 나를 치료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실연의 아픔도 차츰 사라져갔다. 나는 학원도 다녔다. 하지만, 이대로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우울해진다. 나는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다른 사람의 구경거리는 될망정, 누구 하나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으니까.

나는 마음이 울적해질 때마다 진짜 금붕어라도 된 것처럼 수영장에서 열심히 수영 연습을 한다. 내가 방열복을 벗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나는 별도의 시간에 수영장을 썼는데, 내가 연습을 하고 나가면 동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께서 온천을 하러 들어오셨다. 수영장엔 '온천 겸업'이라는 간판도 내걸렸다.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들어오니, 엄마가 거실에서 전화를 하고 계셨다.

"어머! 그게 정말이에요? 엄마도 없는 애가… 아빠까지 그렇게 돼서… 불쌍해서 어째요? 그것도 보통 병도 아니고. 어이구! 끔찍해라. 에이즈라니. 어쩌다 그렇게 몹쓸 병으로 돌아가셨대요?"

에이즈라니? 무슨 말이지? 나는 엄마의 전화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래요. 일단 부조금은 봉구 엄마가 잘 걷어서 전해줘요. 근데 설희라는 애가 우리 태양이랑 같은 반이지요? 태양이한테 말해서 그 아이 곁에 가지 말라고 해야겠어요. 물론 아닌 건 알지만… 그래도 혹시 알아요? 뭐요? 태양이 곁에는 어차피 아무도 안 간다고요? 아니! 봉구 엄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해요? 우리 태양이가 뭐가 어때서요? 사내아이가 뜨겁게 크는 거지! 참나! 전화 끊어요!"

엄마는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으셨다.

"엄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엄마가 주저하시다, 확고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태양이 왔니? 어휴~! 그래. 설희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근데 그게 보통 병도 아니고. 참… 어쨌든 너 설희라는 애하고 가까이하지 않는 게……."

나는 엄마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현관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얘! 어디 가는 거야? 방열복 입고 나가야지!"

 

나는 뛰고 또 뛰었다. 세상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기아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지구온난화로 아기 곰은 엄마를 잃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내게 닥친 것들이 세상의 전부인 양. 아무것도 모르면서 마치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이 똑같은 체온으로 살아간다고 믿는 것처럼. 나는 정말 바보다!

나를 스쳐 가는 사람들이 내 열기에 소스라쳐 몸을 피했다. 나는 더욱 뜨거워졌다. 단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내 뜨거운 몸 위로 '톡, 톡, 톡'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새 설희의 집에 와 있었다. 하지만, 설희는 없었다. 마침 길을 지나가는 봉구 아주머니를 만났다.

"아이고! 뜨거워라!"

"아줌마! 설희 아버지 장례식장이 어디에요?"

"요 앞, 인정병원인데……."

나는 급히 인사를 하고는 병원으로 뛰어갔다.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설희가 손님도 없는 장례식장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차갑던 얼음공주 설희가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고 싶은 말들이 아주 많은데, 머릿속이 뒤죽박죽돼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고! 설희야!"

그때, 봉구 아주머니가 들어오셨다. 나와 설희의 시선이 마주쳤다. 설희가 입술을 질근 깨물고는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아줌마는 설희를 안타깝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어린 것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아버지는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그래도 이렇게 착한 딸이 있어서 행복하셨을 거야. 이건 얼마 안 되지만……."

아줌마는 하얀 봉투를 내미셨다.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앉아 있던 설희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더니,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얘! 설희야~!"

봉구 아줌마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설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셨다.

 

나는 뒤늦게 설희를 따라 뛰어갔다. 밖에는 소나기가 퍼붓고 있었다. 설희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찾아다닌 끝에, 내가 고백했던 그 다리 위에서 설희를 발견했다. 설희는 비에 흠뻑 젖은 채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설희의 몸은 덜덜 떨렸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설희의 몸에서 몽글몽글 한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설희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러자 설희가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마! 모두 우리 아빠를 무슨 벌레 보듯 했어. 더러운 병이라도 옮을까봐 벌벌 떨었으면서, 겉으로 위하는 척하지 말란 말이야. 다 필요 없다고… 그냥 날 내버려둬……."

나는 방열복에 갇혀 지내야 하는 외로움과 아무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 서운함을 생각했다. 설희와 설희 아빠는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을까?

"설희야. 네 마음 이해해……."

"도대체 네가 뭘 이해한다는 거야? 우리 아빠가 얼마나 외롭게 돌아가셨는지 알아?"

울음을 삼키려 애쓰는 설희의 모습이 너무나 슬퍼 보였다.

"근데, 나도 그 사람들하고 똑같았어. 항상 겁이 났었단 말이야. 아빠가 마지막으로 내미신 손도 다정하게 잡아드리지 못했어."

악문 설희의 입술 사이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설희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설희의 눈물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설희가 말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아빠랑 손잡고 놀이공원에도 가고 싶었는데… 네 말이 맞아… 나 같은 거… 정말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거야!"

내가 설희에게 다가가자, 설희가 소리쳤다.

"저리 가! 제발 저리 가란 말이야!"

나는 나의 뜨거움도 잊은 채 설희를 감싸 안았다. 나는 엉엉 울면서 말했다.

"미,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는 설희의 차가움에 몸을 떨었고, 설희는 나의 뜨거움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설희의 푸르게 언 입술도, 나의 빨갛게 달궈진 얼굴도 서서히 제 빛깔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와 설희는 서로 안은 채 말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있었다. 우리의 어깨를 때리며 험상궂게 쏟아지던 빗줄기도 점차 가늘어지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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