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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0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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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감사와 기쁨과 찬송
본문: 시100: 1-5
1.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천안 호두과자집 심복순 권사님이 지은 책 ‘다윗 왕보다 행복해 지려면’에는 크리넥스 티슈 상자 금고 이야기가 있습니다. 권사님은 쇠로 만든 금고를 사지 않고 다 쓰고 빈 티슈상자를 금고대용으로 쓴답니다. 요즘의 것은 상자 포장의 그림이 아름답고 폐품활용도 되며,도둑도 가져가지 않아 좋다는 짧은 얘기입니다. 티슈 상자처럼 겉으론 허술하지만 실속 있고 감사로 알찬 성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는 그의 것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1). 이 한 구절에서 하나님의 귀한 사랑을 배웁니다. 창조하신 하나님, 조성하신 하나님, 구속하신 하나님, 나를 지명하여 부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으로서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3절)이기 때문입니다. 양이 목자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 같이 이제 우리들은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양에게 있어서 목자는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지켜줍니다. 양의 필요를 압니다. 양이 아플 때 보살펴 줍니다. 양을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줍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목자 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인자하시며 성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5절). 인간은 누구나 한번쯤 선할 수 있습니다. 한번쯤은 인자하기도 합니다. 한번은 성실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그 성실하심은 영원합니다. “영원하고 대대에 미치리로다” (5절) 이것이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어제나 오늘,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변하고 세월이 흘러가면 달라지나 하나님은 변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변치 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함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늘 감사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감사의 표현을 크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33편 2절에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시편 91편 1, 2절에 “지존자의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사과나무의 사과, 밤나무의 밤, 배나무의 배, 대추나무에 대추가 열립니다. 그러나 인간의 열매는 입에 감사가 없으면 열매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입술의 감사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열매는 감사입니다. 감사하는 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너희는 내게 나아와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고 내 안에서 먹고 즐거워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2장 6절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소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여러분, 감사함과 즐거움으로 사는 복된 생애가 되기 바랍니다. 사람이 꼭 100% 좋아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플라톤이라고 하는 철학자는 인간 행복의 조건 다섯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먹고, 살고, 입고 살기에 부족한 듯한 재산, 내가 모두 쓰기에는 아직까지 부족한 것이 그것이 행복입니다. 모두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약간 부족한 물질,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부족한 듯한 외모, 너무 뛰어난 외모보다는 약간 모자란 듯한 것이 좋습니다. 그런 가정이 좋은 것입니다. 자기 살기에도 참 편합니다. 최고가 아닙니다. 세 번째, 자신의 생각에 1/2밖에 나는 성공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내가 성공의 반까지 와 있는 사람, 그것이 행복합니다. 한 사람에게는 이겨도 두 사람에게는 지는 체력, 열 명이라도 와 봐! 이것이 아니고 겨우 그저 비슷하게 살아가는 건강, 그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연설할 때 1/2만 박수가 나오는 것, 그런 말솜씨, 연설 웅변이 1/2밖에 박수를 못 이끌어 내는 사람, 그것이 행복입니다. 저도 이렇게 설교해도 끝까지 아멘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좋습니다. 모두 아멘 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다. 전부 칭찬해 주는 것이 좋지 않습니다. 행복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현대인들은 모두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고로 올라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주신 이 적당한 은혜가 참으로 크다고 생각하고 살아가야 매일 매일 감사하고 일생동안 감사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감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감사하는 민족이 잘 됩니다. 감사하는 성도가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부모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입니다.
노먼 카슨슨은 웃음치료학자로 유명한 의사입니다. 어느 날 그에게 강직성 척추염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현대의학의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치료했지만 환자의 병은 조금도 진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환자에게 웃음치료법을 처방했습니다. 환자에게 집에 가서 실컷 웃어보라고 주문한 것입니다. 환자는 그의 말대로 몇 주 동안 계속 웃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병이 나았습니다. 그때부터 노먼 카슨슨은 웃음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웃으면 엔도르핀이 펑펑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또한 웃음을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암세포라는 사실도 알아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유명한 웃음치료학자가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웃음은 능력이며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웃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진정한 기쁨과 웃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4:7)
어떤 흑인 관광객이 조선호텔에 투숙했습니다. 그런데 호텔에 투숙해 있는 동안 호텔 보이가 얼마나 친절하고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그 흑인에게 시중을 잘 들었는지 아주 좋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자기 나라로 가는 날, 웃는 얼굴의 보이를 부르더니 참 수고했다면서 자기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몽땅 털어 내놓고 호텔 보이에게 주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 돈의 액수를 우리나라 돈으로 계산해 보았더니 이천만 원이나 되는 큰 돈이었습니다. 그 보이는 웃는 얼굴과 친절 때문에 큰 돈을 벌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알아 봤더니 흑인 관광객은 아프리카 어느 나라 황제였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웃으면 복이와요'라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복이 먼저 와야 웃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복이 오기 전에 이미 '웃었다'는 말입니다. 웃으니까 '웃는 복'이 따라오더라 이 말입니다. 웃음이 먼저입니다. 행복은 그 뒤에 저절로 따라옵니다. 웃을 일이 없다구요? 그냥 한번 웃어보세요. 웃음은 자신을 변화시키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전염되는 행복의 바이러스입니다. 웃음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입니다. 예수님도 먼저 '된 것으로 믿고 구하라' 하셨습니다. 일단 먼저 낫고 나서 그 다음에 믿으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낫기 전에 이미 나은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먼저 믿고 나중에 그 믿음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먼저 기뻐하면 나중에 기뻐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됩니다. 먼저 행복해 하면 나중에 행복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감사하면 감사 꺼리가 무지막지하게 생깁니다. 먼저 웃는 그것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자의 삶과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웃으세요. 웃으면 복이 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우리가 기뻐하고 웃으며 건강하게 살도록 하나님은 미리 우리 인체를 조직하셨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이처럼 기뻐하고 웃고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직하면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유머는 신앙의 전주곡이고 웃음은 기도의 시작이다"라고 강조했을까요? 웃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자녀의 삶은 어떠한 삶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삶, 하나님께 늘 영광 돌리는 찬송하는 삶이어야 한다 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찌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사는 것이 우리 성도의 삶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쁨으로 삽니다. 당연히 기뻐해야 합니다. 내가 먹어서, 잘나서, 좋아서 세상에서 기뻐한다면 그 기쁨은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적어도 위로부터 하나님께로 내려오는 기쁨, 하나님이 주신 기쁨, 내 안의 기쁨, 영적인 기쁨 이 기쁨이 있다면 참으로 최고의 축복이요 영광입니다.
요사이 기쁨에 대해서 각 학자들이 분야별로 많은 연구가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기쁨, 웃음이 굉장히 건강에도 효과가 있고 인생의 삶에 전반적으로 많은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웃음은 참으로 중요하답니다. 웃음은 치료하는데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웃을 때에 분비되는 엔케팔린이라고 하는 이 호르몬은 진통효과가 있어서 몰핀의 3백배의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엄청난 힘이 있는지 모릅니다. 미국의 메모리얼 병원에서는 외래환자를 대상으로 오랫동안 연구를 했는데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졸의 양을 줄여주는 역할이 바로 웃을 때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우리 몸의 스트레스는 긴장과 병을 가져다 주는데 이걸 막아내는 약은 없으나 웃음을 통해서 치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우리가 한 번 크게 웃으면 2일을 더 살 수 있고, 15초만 웃으면 이틀을 더 살 수 있다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시간 더 사는 게 얼마나 대단한데 한번만 크게 웃으면 이틀을 더 산다고 합니다. 한 번 웃으면 5분을 에어로빅 하는 것보다 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에어로빅을 해서 우리가 여러 가지 몸의 기능을 활발하게 하지만 내 마음, 내 정신, 영적인 것은 전달이 안 됩니다. 그래서 웃음은 근본적으로 안에 있는 가장 큰 뇌의 기능을 활발하게 움직여서 건강에도 그렇게 좋다고 합니다.
미국 메릴랜드 대학의 메디컬센터에서는 웃음은 심장병을 예방하는데도 가장 효과가 있다고 말하고 있고, 캘리포니아 로마린다 의과대학에서는 웃음과 면역체에 대한 연구에서 웃을 때에는 체내에서 병균을 막는 항체인 인터페론감마 호르몬이 많이 분비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동경의대에서는 만성통증 환자들에게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불치의 병도 다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신경계에는 웃음은 신체 전 기관의 긴장을 완화시켜서 암환자의 통증을 경감시킨다고 합니다. 호흡기에는 웃음은 산소공급이 두 배나 증가되어서 머리가 좋아진다는 임상 결과도 있습니다. 소화기에는 기분이 좋을 때 소화호르몬이 촉진되어 음식물의 소화를 돕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밥을 먹을 때는 웃는 이야기를 하라고 합니다. 밥 먹을 때는 돈 이야기하고 정치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합니다. 신경질 난다는 것입니다. 웃는 이야기를 하라는 것입니다. 웃으면 소화가 잘 되고 건강에 좋습니다. 근육계도 물론이고 웃으면 우리 몸의 650개의 근육 중에 231개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얼굴 근육은 15개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내분비계는 혈액 내에 아드레날린과 스트레스호르몬인 코티졸의 양을 확 줄여준다고 합니다. 웃으면 세포도 증가된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좋은 것이 웃음입니까? 우리 조상들도 여기에 대해서 이미 많은 경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문만복래’라고 웃으면 만복이 온다고 말했습니다. ‘일소일소 일노일노’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지고 한번 화내면 한번 늙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임금들은 장수를 위해 웃음내시를 두었다고 합니다. 궁궐이 늘 긴장하니까 내시 가운데 웃는 것만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두었다고 합니다. 새의 깃털로 환자의 환부를 간지럼을 태워서 치료하는 일도 이미 우리나라에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박장대소’라고 해서 손뼉을 치며 크게 하하 하고 웃는 웃음을 말합니다. ‘파안대소’는 즐거운 표정으로 한바탕 크게 웃는 것을 말하고, ‘포복절도’라고 배를 안고 막 넘어질 정도로 어떤 분은 배꼽이 빠졌다는 말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우리 조상들도 이미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웃는 웃음은 어디에서 옵니까? 억지로 웃는 웃음, 세상에서 웃는 웃음 그런 웃음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안에 안길 때, 주님께 돌아올 때, 주님과 만날 때, 창조주와 피조물이 만나고 아버지와 아들과의 만남, 나의 죄를 사해주신 구세주와의 만남에서 내 짐을 벗고 나를 자유케 하시는 사랑의 주님을 만날 때 우리는 웃음이 나옵니다. 웃음은 그때그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늘 웃음을 주님이 주시고 웃음의 샘이 늘 솟아나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 자녀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삭개오라고 하는 분은 세상에서 웃음을, 기쁨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지위도 높고 흔히 그렇게들 말합니다. 높고 많이 가지고 잘되면 기쁨이 오는 줄 알지만 삭개오는 다 가졌지만 기쁨이 없었습니다. 어디서 기쁨을 찾았습니까? 예수님에게서, 그를 만나면서 삭개오는 춤추며 주님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정에 기쁨이 찾아 왔습니다. 즐거움이 감사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므로 기쁨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과 만남에서 그의 품안에서 얻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은 그의 품안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신 만 가지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참 기쁨이 아닙니다. 잠깐의 기쁨 뒤에는 쓰나미 같은 새로운 태풍이 몰아쳐서 그 기쁨을 다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유럽의 격언에도 “5분 동안 기뻐하고 30년 슬퍼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잠깐의 기쁨 속에서 일생의 고통을 당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범죄에서, 죄악에서, 하나님을 떠난데서 기쁨을 찾는 것은 오히려 기쁨보다는 불행을 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참 기쁨은 주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내 영혼의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며, 죄의 짐을 벗겨주셔서 오는 기쁨, 안의 기쁨, 영적인 기쁨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임금이 되면 세 가지를 많이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은, 금을 많이 두지 말라. 이런 것을 많이 두면 오히려 근심이 더해집니다. “천석군은 천 가지 걱정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근심이 더 많이 옵니다. 또한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많이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살아보면 안 그렇습니다. 한 분도 우리가 이렇게 불안하고 긴장하는데 여럿이 있다? 전혀 그런 게 아닙니다. 여자를 많이 둔다? 절대로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임금에게 말합니다. 말도 많이 두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를 지켜주는 군대, 안전장치가 많을수록 긴장은 더 많습니다. 기쁨은 참으로 영적인 기쁨이고, 기쁨은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도 세상에서 모든 기쁨을 얻으려고 했지만 그는 기쁨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품안에서, 주님의 품안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부유해서 누리는 기쁨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기뻐할 사람이 몇 명이 있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은 어디 있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환경에서든지 우리는 기뻐합니다. 사람은 별 사람이 없고 좋은 것 별로 없습니다. 특별한 장소, 특별한 집, 특별한 기구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이 계신 곳에, 주님과 함께 있을 때에 기쁨이 있고, 주님이 내 짐을 벗겨주시고 내 형편을 아시며 나와 동행하실 때 우리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두 청년이 길을 가다가 곰에게 쫓겨 한 사람은 도망쳐 나무위로 올라가고 한 사람은 굴속으로 숨었습니다. 그런데 굴속에 들어간 이 친구가 자꾸만 한 십분 있으면 뛰어나옵니다. 그 곰은 지금 나무에 올라간 친구를 보고 밑에서 지키고 있는데 이 친구는 자꾸만 나옵니다. 나왔다가 곰이 돌아보면 또 굴속으로 들어가고 합니다. 그래서 나무위에 있던 친구가 “야! 가만히 있어 그러면 곰이 갈 것 아니야.” 그러니까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야! 굴속에도 지금 곰이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굴속에도 곰이 자고 있습니다. 그래서 들어갔다가 또 뛰어나오고 나오니까 또 곰이 있고. 우리는 세상에서 기쁨을 얻으려고 하면 저기 가도 어려움이 있고 직장에 가서도 힘들고 집에 오면 또 집에 곰이 있고, 어디 곰이 없는 곳을 찾아보면 없습니다. 다 곰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어디가도 곰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주신 선물, 내 마음 속에 있는 이 참된 기쁨은 아무나 빼앗을 수 없네. 만왕의 왕이 내게 주신 기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뻐합니다. 늘 기뻐합니다. 이 기쁨은 참 기쁨입니다. 영원한 기쁨입니다. 안의 기쁨입니다.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조금 전에 기뻤다가 슬펐다가 하는 일이 없습니다. 평생 기뻐하는 기쁨, 항상 기뻐하는 기쁨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참 기쁨, 저와 여러분이 누리는 기쁨인 줄로 믿습니다.
벨기에의 어떤 왕이 길을 산책하다가 어린아이 두 명이 자동차 앞에서 위기에 있습니다. 유럽의 왕들은 운동을 많이 합니다. 왕은 잽싸게 달려들어서 건져냈습니다. 그 다음 날 신문에 크게 났습니다. “왕이 두 명의 어린 생명을 살려내다.”라고 대서특필을 했습니다. 왕이 살린 아이라고 계속 신문마다 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그 벨기에 왕이 아닌 만왕의 왕이 십자가에 자기를 생명을 던져서, 영영 죽을 마귀에게 끌려가는 죄의 짐을 짊어지고 있는 우리를 건져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만왕의 왕이 살려 준 생명, 만왕의 왕이 구원하신 구원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기쁜 것입니다. 이것이 해방입니다. 영원한 저주, 멸망에서 출애굽입니다. 엑소더스입니다. 애굽에서, 갈대아 우르에서, 하만의 간계에서 건지시고 우리를 넘어뜨리는 모든 저주와 멸망에서 건져주셨으니 우리가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뻐하게 되어 있고 기뻐해야 되고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찬송가 151장 1절만 함께 부르겠습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같은 나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만왕의 왕이 우리를 위해 주신 이 기쁨,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그래서 이 기쁨은 잠깐 웃는 그런 웃음이 아니기에 이 기쁨의 가치는 무한합니다. 세상에 없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기쁨이지 않습니까? 전도서에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천 년을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아무 의미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오래 사느냐, 지위가 높으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날마다 근심하며 살 바에야 그게 무슨 기쁨입니까? 축복이 아닙니다. 어디 있든지 주님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가장 복 있는 성도이며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는 가치 있는 삶인 줄로 믿습니다. 느헤미야 8장 10절에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시편 37편 4절에는 “기뻐하라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으로 기뻐하며 우리의 모든 삶이 늘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고, 이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 기쁨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우리 성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참 귀합니다.
베토벤은 서른두 살에 유서를 썼습니다. 그 유서의 내용은 “잠시 후면 나의 생은 마감하게 될 것이다. 이 불온한 존재여!”하고 자기를 절망 중에 비관하면서 유서를 적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절망 중인 인생이라도 주의 품안에 안기우면 저주는, 절망은, 불행은 물러갑니다. 주님 밖에 있었던 아픔과 상처는 그 품안에 오면 다 씻어집니다. 어린아이가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아이를 안아 보면 아무리 슬퍼도 어머니 품안에 안기면 울음이 끝납니다. 품안에 안기는 즉시 울음을 정리합니다. 그래도 조금 우는 애들은 엄마가 뚝! 그러면 뚝입니다. 그냥 끝납니다. 어머니 품이기 때문에. 약이, 돈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그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해도 그 울음을 그칠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의 품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을 품어 줄 수 있는 곳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주 예수 넓은 품 예수의 품안에 오면, 교회는 주님의 품안에 오는 것입니다. 주의 날개 아래 주 예수의 품안에서 영원한 기쁨과 평안과 자유가 있기를 바랍니다.
베토벤은 주님의 품안에 안기면서 그는 새 생명을 얻었고 기쁨이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작곡한 것이 바로 교향곡 심포니 No 9입니다. 베토벤이 은혜 받아가지고 새 사람이 되어서 예수 안에서 누린 그 기쁨이 바로 찬송가에 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바하, 헨델이 지은 것도 있고 베토벤이 지은 것도 있습니다. 훌륭한 분들이 작곡한 게 있습니다. 베토벤은 이 세상에서 인기와 명예와 돈과 기쁨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허무함이 왔습니다. 자기 자신을 넘어 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품안에 안겨서 그는 장수하고 그 이후에 불후의 작품들, 인류역사에 가장 문화적으로 훌륭한 유산을 우리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심포니 No 9는 곡도 장엄하고 아름다우며 감동적입니다. 가사도 감동적입니다. 이 두 가지를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거기에 영감까지 같이 넣은 그런 곡은 인류역사에 많지 않습니다. 심포니 No 9은 정말 최고의 작품입니다. 이 얼마나 귀합니까? 기뻐하며 경배하세 영광의 주 하나님. 우리가 왜 하나님께 경배합니까? 기쁨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를 경배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자에게는 기쁨이 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기쁨이 없어집니다. 세세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33편 1절에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바로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시편 64편 10절에도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시편 97편 12절에도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그 거룩한 기념에 감사할찌어다.”하였습니다. 그리고 시편 30편 11절에 “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하였으며, 이사야 61장 10절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주님이 내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나의 베옷을 벗겨주셨습니다. 슬픔을 옮기셨습니다. 영원히 기뻐하는 기쁨, 천국 가서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 주님이 주신 기쁨인 줄로 믿습니다. 이 기쁨을 주신 주님을 끊임없이 섬김으로 기쁨이 옵니다. 신명기 12장 7절에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26장 11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우리는 성전, 주의 전에 나와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을 인하여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이 있을 때에 즐거움이 옵니다. “네가 즐거움으로 나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너희 기쁨이 떠나갔다. 너희는 기쁨으로 살려고 해도 기쁨을 찾을 수 없고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도 너희 모든 가진 것이 날아갔느니라.”고 했습니다. 기쁨이 아버지 집에,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기쁨이, 즐거움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3백만 명이 우울증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군에 있는 젊은이들도 얼마나 우울증에 빠진 젊은이가 많은지 모릅니다. 대학생들도 우울증에 빠진 학생들이 너무 많습니다. 군에서도 군인들에게 한 마디 말을, 꾸중을 못합니다. 자살해 죽어버립니다. 집에서도 말 못합니다. 이들이 그걸 소화를 못 합니다. 학교에서도 그런 말 못합니다. 너무 연약합니다. 우리가 군 생활 할 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납니다. 부모님들도 무섭게 우리 자녀들을 향하여 꾸중하셨습니다. 자나 깨나 만나면 꾸중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트레스가 안 됐습니다. 주님을 믿으니까 우리는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기계를 의지합니다. 산업화시대를 살아갑니다. 너무 과학을 의지합니다. 너무 지식을 믿습니다. 믿어야 할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는 멀어지고 너무 과학적으로 살아갑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너무 지식이 앞섭니다. 요건 먹으면 안 된다 요건 몸에 나쁘다 그래서 고기도 먹으면 안 된다 그러고 설탕도 넣으면 안 된다 쌀밥도 먹으면 나쁘다고 합니다. 너무 먹을 음식이 없습니다. 계란도 노른자는 못 먹고 흰 것만 골라먹고 성경에 보면 감사함으로 먹으라고 했습니다. 독수리를 보십시오. 다 썩은 것 거기에 구더기, 벌레, 병균이 이글이글해도 먹으면 소화가 다 됩니다. 아무 탈 없습니다. 악어가 오물 구덩이에서 진흙 구덩이에서 고기를 먹어도 소화가 다 됩니다. 삶아먹지 않아도 소화가 다 됩니다. 어디 소화제를 먹습니까? 아무 부작용이 없습니다. 고기를 왜 안 먹습니까? 잘 먹고 그 대신 열심히 운동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면 깨끗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근심이 없기를 바랍니다. 먹는 것도 맛있게 잘 먹어야 합니다. 저는 음식을 맛있게 먹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먹습니다. 잠을 또 맛있게 잡니다. 가족에게 제일 좋은 선물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웃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돈 없는 사람에게는 이보다 좋은 게 없습니다. 가족들에게 웃음을 선물하기를 바랍니다. 남편에게 무슨 선물을 해야 되느냐? 자녀에게 무슨 선물을 해야 되느냐? 만나서 웃자라는 겁니다. 웃기는 것입니다. 같이 웃는 것입니다. 이 세상 잠깐이면 다 끝나는 세상이고 우리 선배들도 다 가셨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 가셨습니다. 안 가는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지나놓고 보면 다 잠깐 왔다 가는 나그네인데 왜 우리가 긴장하고, 왜 미워하고, 왜 이렇게 욕심내고, 왜 이렇게 불안해하고, 날마다 날마다 나 혼자 사는 것처럼 이렇게 고통하며 살아가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를 믿어도 예수로 기뻐하지 않고 주님이 주신 한없는 은혜가 있는데도 은혜쪽으로 보지 않고 이 세상을 바라보니 고민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쁨이 충만하여 가정과 심령과 삶을 천국으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인도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일에 우리는 왜 교회에 나옵니까? 우리는 주일을 기쁨의 날로 알고 감사함으로 나와서 오늘 말씀 시편 100편에 있는 대로 그 궁정에 와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의 샘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기쁨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낚시를 그렇게 좋아해도 주일은 낚시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낚시가 주는 기쁨과 하나님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후버 대통령도 주일은 반드시 오락을 하지 않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켰다고 합니다. 멕켄리 대통령은 여행을 그렇게 좋아하고 관광을 좋아해도 주일만큼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윌슨 대통령은 주일에 일하지 못하도록 온 국민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우리나라에 와서도 최전방에서도 주일예배를 반드시 드린 것이 카터 대통령이었습니다. 워싱턴과 링컨 대통령은 전쟁 중에도 주일을 지켰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든 어떤 경우에든 이 날은 거룩한 날, 생명의 날, 구원의 날, 축복의 날로 알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쉬운 게 아닙니다. 시간을 내어야 하고 다른 것은 못하고 나오는 게 이 날입니다. 어느 것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힘들여서 나옵니다. 좋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날을 지킴으로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이 날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열심히 빨리 걸어 나와야 됩니다. 뛰어 나와야 됩니다. 본 시편을 지은 시인은 우리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또한 오늘날 성도들이 예배를 어떤 정신으로 드려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진실로 우리는 기쁨을 가지고 바른 예배의 대상이신 유일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아감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으며 또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원동력과 지혜를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데밀 카네기의 [웃음 예찬]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웃음을 별로 소비되는 것은 없으나 건설하는 것은 많으며. 주는 사람에게는 해롭지 않으나 받는 사람에게는 넘치고 짧은 인생으로부터 생겨나서 그 기억은 깊이 남으며. 웃음이 없이 참으로 부자가 된 사람도 없으며. 웃음을 가지고 정말 가난한 사람도 없다. 웃음은 가정에 행복을 더하며.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친구 사이를 더욱 가깝게 하고 피곤한 자에게 휴식이 되며. 실망한 자에게는 소망도 되고. 우는 자에게 위로가 되고. 인간의 모든 독을 제거하는 해독제이다. 그런데 웃음은 살 수도 없고 빌릴 수도 없고. 도둑질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웃음은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웃는 얼굴로 만남으로써 서로의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마지못해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자원하며 기쁨으로 나오는 사람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하루를 하나님을 만난 기쁨으로 시작하고 그 기쁨을 웃음에 담아 하루 하루를 매듭짓는다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멋있고 아름다울까요.
오늘도 예수 안에서 웃고 살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웃음의 선물을 많이 건네주는 삶을 살면서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기쁨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 주님의 말씀과 뜻을 따름으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웃음과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는 영원한 기쁨이 있음을 내 이웃에게도 전하게 하옵소서. 평생을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송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풍성한 삶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기쁨 넘치는 마음을 갖게 하소서. 추수할 수 있는 기쁨, 감사할 수 있는 기회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온 땅이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르는 날이 속히 오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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