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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2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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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본문: 시편 23편 1- 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항상 인도하시고 방초 동산 좋은 곳에서 우리 먹여 주소서 선한 목자 구세주여 항상 인도하소서. 선한 목자 구세주여 항상 인도하소서.”
남북전쟁이 한창이었던 1862년, 메릴랜드의 한 초소에서 북군의 한 병사가 남군의 한 병사를 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남군 병사의 입에서 감미로운 찬송이 달빛을 타고 울려 퍼졌습니다. 총을 겨누었던 북군 병사는 도저히 남군 병사를 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둘은 델라웨어 여객선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는데, 그때도 남군 병사였던 사람은 여전히 복음성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던 북군 병사가 물었습니다.
“오늘 밤도 같은 노래를 부르고 계시는군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아이라 생키(Ira Sankey)입니다.” 북군 병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대전도자 무디와 함께 전도여행을 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가스펠 가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심을 믿고 내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면 위기 가운데서도 평안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때문에 우리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성취되고, 영혼은 소망의 항구에 닿기까지 보전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평안을 누리십시오.
푸른 초원에서 풀을 뜯는 양들을 보면 평화롭고 한가해 보입니다. 양은 털 이 흰색이기에 깨끗해 보입니다. 그리고 양은 고기와 털과 가죽이 사용되니 유용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양은 보기와는 다른 점이 많습니다. 양은 방향감각이 없는 동물입니다. 자기 집에 쉽게 찾아오지 못합니다. 풀밭에 닿은 코끝이 움직이는 대로 갑니다. 양은 무력한 존재입니다. 힘이 센 동물에 대해 자구책이 전혀 없습니다. 겁이 많아서 하찮은 토끼 한 마리의 출현에도 떼거리로 혼비백산합니다. 양은 쉽게 더러움을 탑니다. 아무리 쓰다듬어도 결이 나지 않습니다. 애완용으로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양의 문제는 목자를 만나는 순간에 해결됩니다. 목자가 양을 인도하면 양을 보호될 수 있고, 씻김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도 원래는 유용한 존재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물의 절정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은 영광스러운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로 늘 두려움에 떨며 삽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고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과 죽음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인간은 인생의 참된 길을 알지 못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양에 비유합니다.
“우리가 다 양 같아서…(사 53;6)” 인간은 양처럼 떼를 지어 살면서도 그리 평안하지 않습니다.
시편 23편은 시편에서 가장 진주같이 여겨집니다. 스펄젼은 시편의 진주라고 했고, 헨리워드 비처라는 설교가는 시편의 나이팅게일 이라고 했습니다. 알렉산더 맥클라렌이라는 분은 ‘이 시편을 읽고 눈물을 닦아보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성도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을 양에 비유했습니다.
본문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986년, 소련의 반체제 운동가인 나단 샤란스키라는 사람이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부인은 수용소 안에 감금되어 있는 남편에게 성경책을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그는 수용소 안에서 아침 저녁으로 시편을 읽으면서, 언제 석방될지도 모르는 형편에서나마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소련을 떠나라는 추방령과 함께 그가 석방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수용소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물을 압수당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가 늘 읽던 시편마저도 놓고 가야 했습니다. 그때 그는 ‘나에게 소망과 용기와 믿음을 준 이 시편 말씀 없이는 한 발짝도 떠날 수가 없다’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시편을 되돌려받고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목자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신 말씀을 빼앗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인생의 함정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따라가지 않고 곁길로 가다가 함정에 빠져서 고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선한 목자가 되셔서 불안과 공포와 함정 속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건져내십니다.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나는 여호와의 양이란 뜻입니다. 양들에게는 인식표가 있습니다. 양의 몸에 페인트로 목자의 이름 첫 글자를 적거나 목자의 고유한 무늬를 칠합니다. 그래서 어떤 주인에게 속한 양인지를 쉽게 구분합니다. 여호와께 속한 양은 여호와의 이름표를 달고 다닙니다. 나의 목자는 완전한 목자입니다.
내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 다음 나는 네게 부족함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이 과연 그러합니까?
어떤 목사님은 성도 집에서 정원일을 도와주다가 벼락을 맞아 죽습니다. 영국의 성경번역가인 필립스 목사님도 역작을 완성한 후에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여생을 마쳤습니다. 선한 일을 한 분들이 악한 일을 한 사람들 보다 이 세상에서 험한 고난을 겪는 것이 비일비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여러 재앙에서 보호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다윗은 왕궁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전체생애를 생각하면서 이 시를 읊었습니다. 다윗도 그의 삶에서 부족함이 있었던 때를 많이 체험했습니다.
사울 왕의 추적을 당해 산과 들로 10년 이상을 피해 다닐 때가 있었고, 자식간의 살인, 압살롬의 반역, 밧세바 사건 등으로 치욕 속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부족함이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본문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목자가 양을 구원해 나가는 일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목자가 양으로 하여금 구원의 목표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찬송가 434장 1절입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이 찬송가의 작사자는 페니 크로스비라는 미국 여성입니다. 그녀는 시력장애로 고생하다가 결국 사망했습니다. 이것이 만사형통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도록 주님이 도우시며 인도하시는 일에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놀라운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까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 다음에 환난과 박해와 기근과 적신을 언급하면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롬 8:35 ,37)’ 고 했습니다.
즉 크리스천으로서 승리의 삶을 사는데 필요한 모든 은혜를 공급받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면서 목자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에 부족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완전한 목자가 양을 완벽하게 기를 줄 아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받은 은혜가 부족해서 목자를 따라가는 길을 포기해야 합니까?
목자가 양떼를 돌보는 광경은 언제 보아도 가슴을 훈훈하게 합니다. 양들에 대한 목자의 돌봄이 너무도 진하게 와 닿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100:3)
본문 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숲 속 한 동네에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강아지는 너무도 더러웠고 오랫동안 길을 잃고 헤맸던지 굶주림에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아지 목에 달린 이름표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마도 주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개를 붙들었습니다. 그 개의 이름은 ‘밥스’였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작은 글자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나라 왕에게 속했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왕의 강아지였던 것입니다. 왕의 부처가 에딘버러 성에 휴가를 왔다가 그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주시는 목자이십니다. 즉 우리가 어디를 헤매던지 우리에게 이름표만 분명하다고 한다면 즉각적인 보호가 주어지게 되며 확실하게 주인에게로 인도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고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돌보아 주시고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 14:26∼27)
그러면, 목자는 자기 양을 어떻게 돌볼까요?
첫째로, 온순히 인도합니다. 선한 목자는 새끼 양이 못 걷거나 아픈 양이 쓰러질 때도 이끌고 갑니다. 한 마리의 양도 떼어 두고 가지 않습니다.
이사야 40:11에 “그는 목자같이 양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하였습니다.
만약 목자가 살 찐 양이 가치가 나간다고 이런 양만을 데리고 간다면 새끼양이나 병약한 양은 뒤로 처져서 따라가지 못하고 결국은 죽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양떼를 모는 목자의 모습이 감동적인 것은 한 마리 한 마리에 대한배려를 하면서 모든 양 떼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양들 가운데도 사람으로 치면 지진아가 있고, 박약아가 있습니다. 지체 장애가 있고, 허약한 양들도 정상적인 양들과 함께 동거합니다.
신자들도 영적인 허약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목자의 특성은 그들을 심히 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다른 건강한 양에 기준해서 몰지 않고 개별적으로 고려해 인내와 사랑과 지혜로써 각자의 형편에 맞게 인도합니다. 그러면서도 양떼들이 하나의 공동체로서 움직이게 합니다.
잘 난 양이 생각할 때는 못난 양들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발전이 늦고 그들이 교회 거대화에 장애가 된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발전과 성장은 경쟁이나 독주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어린 양을 돌보며 어미 양을 온순히 인도하는 목자의 사랑을 배우며 실천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둘째는 계속 친히 인도합니다. 도중에 중단하거나 취소하지 않습니다. 목자는 밤낮으로 양을 인도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땅에서 친히 인도하셨습니다.
하늘 목자는 삯꾼 목자가 아닙니다. 자기 양이기에 친히 기르십니다. 깉고 강한 사랑으로 손수 기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친히 인도하십니다.
선한 목자가 자기 양을 인도해 가는 곳은 안식이 있는 곳입니다. 목자는 양을 인도하면서 쉬게 하고 먹거리도 마련합니다. 양을 한 초장에서만 계속 먹게 하지 않습니다. 초장지가 양들의 분뇨로 오염되기 전에 신선한 새 풀이 있는 곳으로 옮겨 갑니다.
쉴만한 물가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양은 급류를 싫어합니다.
털이 스폰지 같아서 물에 빠지면 체중이 급증해 쉽게 익사할 수 있습니다. 시냇물이 많은 목양지에서는 자주 있는 일입니다. 목자는 이러한 양의 두려움과 좌절을 압니다. 그래서 잔잔한 물가로 데리고 갑니다. 혹은 양의 갈증을 돕기 위해 급류를 피해서 멀찍한 곳에다 조용한 웅덩이를 만들고 양이 안심하면서 마시게 합니다.
2절은 평화로움과 인식과 부족이 없는 목가적 전경을 연상하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 모두가 원하는 이상향에 대한 그림입니다. 이 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평온한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편 23편은 목자의 목양 단면이나 일시적인 목양을 다루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양이 지나는 여정을 실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목자로 처음 믿고 따르는 출발과 함께 푸른 초장과 물가로 인도되고, 의의 길을 체험하며 영혼의 소생을 받아야 하는 위기를 겪고 사망의 골짜기를 거쳐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머물기까지의 전 생애가 다 포함되었습니다. 여기에 목자의 임재도 평생토록 따릅니다. 양은 도중에 애를 먹이고 길을 잃으며 반항하고 불순종하지만 그래도 하늘의 목자는 단념치 않고 계속하여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인도하십니다.
본문 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영국 런던에 프린스 휴거스라는 설교가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무신론자인 찰스 브레드레프라는 사람이 휴거스에게 ‘나는 무신론자이고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니 우리가 한번 군중들 앞에서 논쟁을 벌여 봅시다’라고 제의했습니다. 그때 휴거스는 예수를 믿고 치유를 받은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 100명을 데리고 오겠으니, 무신론자인 당신은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 중에서 거듭나고 새 사람이 된 사람 100명을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휴거스는 약속대로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 100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인 브레드레프는 단 한 명도 데리고 오질 못했습니다. 브레드레프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휴거스가 데리고 온 증인들이 ‘나는 예수님 때문에 거듭났습니다. 예수님 아니면 난 자살할 뻔했는데 예수님께서 내 상처를 치유해 주셨습니다’라며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증거하자 브레드레프도 그만 손을 들고 ‘당신들의 말이 옳습니다. 무신론자 치고 거듭난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영혼이 새롭게 되는 것은 제도나 학식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고유한 사역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여, 내 목숨을 다시 살려 주시고 내 영혼을 다시 소생시켜 주소서! 이 병든 몸을 고쳐 주시고 나를 다시 살려 주소서!”(사38:16)
아프리카의 정글에서 존스라는 선교사가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무리 헤매고 다녀도 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진맥진한 채 포기하고 있는데 원주민을 만났습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았지만 기본적인 대화는 할 수가 있었습니다. 길을 잃어버렸으니 길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원주민은 "나를 따라 오시오."라고 말하고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따라잡기가 힘들었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따라가던 선교사는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기진맥진하여 원주민을 붙잡고 "도대체 어디로 갑니까?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원주민이 대답했습니다. "길은 없습니다. 내가 바로 길입니다. 믿고 따라오시오." 원주민을 따라 나선 지 한참 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인생을 '길'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살아온 삶이나 살아가야 할 삶 역시 길인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살아온 길을 '나그네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에는 길이 있습니다.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삶의 방법과 학문의 공식에 이르기까지 길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인간답게 사는 방법을 몰라 방황하고 실패를 거듭하여 노년이 되어서야 바른 길에 대해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육체적인 죽음을 바라보며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길 이후에도 길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거나 무관심합니다. 문제는 안내자입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가이드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님은 스스로를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처소로 인도하는 길 되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한 처소에 대한 걱정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길 되신 예수님께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에게는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 해서 죄값을 치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순간, 아무런 대가 없이 예수님은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자가 되어주실 뿐 아니라 영원한 가이드가 되어주실 것입니다.(시23:1-3)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1:78-79)
양은 이상한 버릇이 있습니다.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도 모르는 움푹 들어간 곳에 가서는 혼자 뒤집히는 일이 있습니다. 뒤집히면 배에 가스가 차고 혈액순환이 안됩니다. 가스의 압력으로 몸이 퉁퉁 부어오릅니다. 호흡장애를 일으키고 먹은 풀은 소화하지 못해 배가 딴딴해 집니다. 그냥 두면 더운 날에는 30분 이내에 죽습니다. 잘 지탱해도 독수리나 사나운 짐승의 먹이가 됩니다. 양은 뒤집히며 절대로 혼자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목자는 양을 어떻게 찾아야 합니까? 온 산을 다 찾아 헤맵니다. 우선 하늘을 봅니다. 독수리가 원을 그리면서 맴돌게 되면 그 아래에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양은 독수리를 보고는 사지가 마비가 됩니다. 비명을 질러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두렵고 불안한 시간이 계속됩니다.
“내가 왜 어쩌다가 목자와 양 떼를 떠나 이렇게 되었는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뒤집혔는가? 후회를 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공중에는 독수리 떼가 곧 내려올 기세입니다. 땅에서는 간악한 여우들이 무서운 이빨을 드러내며 뒤집힌 양에게 바짝 접근해 옵니다. 이처럼 기막힌 곤궁에 빠진 양을 구해 줄 자가 누구입니까? 목자입니다. 목자는 뒤집힌 양에게 사랑을 부으십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상처를 싸매어 주시며 고난의 계곡을 통과하게 됩니다. 이 위대한 목자의 사랑과 돌봄이 있기에 마침내 내가 하나님의 귀빈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원수들이 오히려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잃은 양의 비유에서 나오는 결론은 무엇입니까? 이와 같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4)는 것입니다.
양과 목자에 대한 그림이나 조각품을 보면 목자가 양을 목에 걸치고 오는 모습이 많습니다. 뒤집힌 양, 잃어버린 양, 병든 양을 소생시키기 위해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의 모습은 화가 난 모습이 아니라 기뻐하고 평화로운 얼굴입니다. 목자가 양을 찾고 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마비가 된 양의 사지를 주물러 주고 온몸에 마사지를 하면 천천히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없어 하는 양을 격려해 줍니다.
전능하시고 영존하시는 창조의 하나님은 따스한 목자의 가슴을 가지신 분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저주하며 부인한 후에 주님이 베드로를 어떤 시선으로 대하셨습니까? 동정에 찬 시선이었습니다.
내 영혼이 소생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예배와 개인 경건생활에 활기가 없습니까?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고 성경 읽어도 은혜가 없고 기도를 해도 무기력합니까? 찬송을 부르는 것이 은혜의 시간이었으나 지금은 아무런 감동이나 기쁨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영혼이 소생되어야 합니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에서 의의 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마디로 목자의 길입니다. 주님 자신이 의의 길입니다. 양떼를 목자자신에게로 인도하는 것이 선한 목자의 최대 목양 목표입니다.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의의 길은 성품을 닮는 길입니다. 주님처럼 사랑의 삶을 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는 삶입니다. 의의 길은 열매의 삶입니다. 성령 안에서 행하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항상 기도로써 교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은 멀고도 가까운 길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약 주님의 인도를 순순히 따랐다면 천천히 두 세 달이면 갈 수 있는 길이었으나, 불순종했기에 사십년을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순종한 여호수아와 갈렙 외의 나머지 사람은 광야에서 전부 죽게 됩니다. 불순종한 사람은 불행한 순례로 끝났던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수평선이 보이는 모래밭 위를 걷는 꿈이었습니다. 긴 모래 길은 자신의 일생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모래 위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보였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것, 또 하나는 늘 동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일생을 통해 극심한 고통을 당했을 때마다 모래 위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없었습니다. "저와 늘 함께 하신다고 하셨잖아요."라고 그가 물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내 발자국이다. 네가 고통 가운데 있었을 때는 내가 너를 업고 지나왔단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돌보시고, 고통을 당하는 동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같이 생각되는 것은 여러분의 느낌일 뿐이지 정말로 그분이 멀리 계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아주 사소한 부분들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심지어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세고 계시는 분입니다.(마10:9-31) 머리카락까지 셀 정도로 관심이 많다면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고통에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겠습니까?
약한 종이 한 장은 새끼손가락 가지고도 찢어지지만 철판이나 나무판을 의지하고 있으면 주먹으로 쳐도 찢어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연약한 인간이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죄사함 받고 구원받을 뿐 아니라 이 세상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셔서 어떤 고난과 고통이라도 넉넉히 이기게 하십니다.
사망의 골짜기란 무엇일까요? 원문에는 깊은 어둠의 골짜기라고 했습니다. 극단적인 고통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죽음이 포함되며 육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영적인 죽음도 포함됩니다. 어두운 협곡입니다. 양의 일생은 하나의 순례입니다. 평생을 같은 장소에 계속 사는 양은 없습니다. 양은 그런 가운데 어두운 협곡을 지나가게 됩니다.
골짜기는 어떤 곳입니까. 골짜기는 상처가 많은 곳입니다. 내 몸에 계곡의 거친 상처를 입힙니다. 이 상처를 볼 때마다 골짜기의 고통을 다시 기억합니다. 골짜기는 내 영혼이 토설하는 하나님께 대한 의존과 탄원의 목소리가 메아리 치는 곳입니다. 이러한 골짜기의 체험을 거친 후에 양은 비로소 믿음의 정상에 오를 준비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은 신자들은 환난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통의 삶이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믿음 생활에 대한 깊은 회의가 일어나기도 하여 심령이 심히 불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골짜기의 체험은 극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골짜기 체험이 있습니다. 내가 어둠 속에서 신음하는 소리나 어둠 속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다른 양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골짜기에 있을 때 샘터가 있었습니다. 고통의 심연에서 받았던 따뜻한 엽서 한 장, 진심이 담긴 위로, 묵묵히 같이 울어주는 목자입니다.
골짜기는 깊고 어둡지만 우리는 이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목자되신 주님의 위로를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이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그의 지팡이와 그의 막대기로 우리를 안위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팡이는 본래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노인들이 사용하는 것처럼 끝이 구부러져 있습니다.
목자들은 그 지팡이를 거꾸로 들고 다니면서 양이 길을 가다가 옆으로 탈선할 가능성이 있으면 양의 목이나 다리에 이것을 걸어서 제 길로 올려 세웁니다. 그리고 이 지팡이는 야생동물이 침입할 때 이 지팡이로 때려칩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목자들은 이 막대기를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주님의 도우심, 이 주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이 캄캄한 어둠의 골짜기를 빠져나옵니다.
골짜기를 지나 저 광활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하늘에 이를 때에 주께서 나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시고 다시는 아픔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사망의 골짜기가 없는 저 높은 하늘에서 내가 세상에서 지났던 골짜기는 진정 은혜의 골짜기였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목자를 따라 가는 양의 삶이 사망의 골짜기를 하나의 분기점으로 해서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됩니다.
본문 5절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베푸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개혁의 기치를 들었을 당시에 교황청의 세력은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아주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교황은 한낱 수도사에 불과한 루터 같은 사람은 수천 명도 더 파멸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름스 의회 앞에서 루터가 심문당할 때 그는 으르렁거리는 이리 떼 속에 서있는 어린 양과 같았습니다. 아무도 그가 거기서 살아 나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하물며 그가 주장하는 종교개혁이 성취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전까지는 교황청은 그에게 아무 위협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리를 깨우치고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조 항의문을 내건 다음부터 교황청은 무서운 원수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의 용기 있는 결단을 통해 우리는 참다운 진리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원수의 부릅뜬 눈앞에서 상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처럼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만큼 삶을 활기 있게 만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의 가치를 더욱더 잘 알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전과 비교해서 오늘 우리의 삶은 참 많이 풍요로워졌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정말 예전과 비교해서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전에 쌀밥 한 그릇 먹는 게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요즈음 쌀밥 한 그릇 먹는다고 누가 행복해하나요? 전에는 부모님들이 도시락을 싸주면, 도시락 반찬으로 계란을 넣어주시면 정말 잘사는 집이었습니다. 제가 어려서 우리 동네에 텔레비전 있는 집이 딱 한 집 이었습니다. 저는 그 집을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부러울 것이 없는 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요즈음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쌀밥도 먹고, 좋은 반찬도 먹고, 텔레비전뿐만 아니라, 자가용도 있고, 많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만큼 우리의 마음도 풍요로워졌을까요? 꼭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부족해합니다. 더 좋은 것을 갖지 못해서 안타까워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부족하기에 계속 부족함을 느낍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마음은 물질적인 풍요로만은 다 채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진정 충만히 채우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사랑이 우리를 채워야 참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빈 그릇이 있습니다. 그 빈 그릇이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에만 참된 행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빈 공간을 만드셨습니다. 전도서 3:11절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영원을 사모하고 영원히 살고자하는 마음을 만드셨습니다. 영원한 것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만이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으로 채워져야만 인간은 참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공간을 하나님으로 채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돈으로, 명예로, 권력으로, 쾌락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계속해서 더 채우고 더 채우려고 하지만, 하나님이 아니면 결코 그 공간은 채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잔이란 무엇입니까? 다윗의 마음과 영혼입니다. 다윗의 인생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그냥 아무런 감정 없이 국어책 읽듯이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감격과 환희, 기쁨가운데서 외친 것입니다.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인생의 참된 환희, 기쁨, 감격을 누린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여인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는 남자를 다섯 번씩이나 바꾼 여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의 목마름이 채워지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의 부끄러움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늘 피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삶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그녀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의 목마름이 채워졌습니다. 이 여인은 이제 물길러 가져갔던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람들에게 가서 외칩니다. 요4:29절입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것은 기쁨의 외침입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을 발견한 사람의 환희의 외침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다윗처럼,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처럼 환희의 외침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맘에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외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시16:5)
음산한 죽음의 계곡에서 두려워하며 고통스러워하던 양이 이제 ‘내 잔이 넘친다’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이 고백은 왜 나오게 되었습니까?
이 5절은 석양의 은총을 묘사합니다. 목자들은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우리에서 건기로 여름에서 겨울로 한 계절을 지나게 될 때, 양들을 높은 고원지대로 인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때때로 높은 고원지대에 가게 되면 거기에는 수평의 바위들이 하얀 고원을 펼쳐내는 장소들이 있는데 종종 팔레스타인이나 중동지방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푸른 바위가 펼쳐지는 고원지대를 발견하게 되면 목자들은 함성을 지르면서 바위들을 깨끗이 닦습니다. 여기서 목자들은 양을 한 마리씩 끌어안고 머리에 기름을 붓기도 합니다. 기름으로 씻어주고 물로 목을 적셔주기도 합니다. 이 때 양들은 아주 행복해 합니다.
하나님은 골짜기를 통과한 양에게 자비와 능력으로 최상의 상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는 음산한 골짜기의 체험을 한 양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목자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원수들에게는 상이 베풀어지지 않았으며, 양 혼자만 초대를 받았던 것입니다. 목자의 넘치는 상은 오직 한 마리 양을 위한 것입니다. 원수들의 눈에도 너무 놀라운 존재로 비칩니다. 계곡에서는 신음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밤을 지새는 허약자로 보였습니다. 때가 되면 주께서 인정해 주시고 상을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잠13:13)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8)
본문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이 이 시편을 쓸 무렵은 그의 나이는 이미 노령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는 지나간 일생동안 여러 가지 비애와 실망,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자녀들의 요구를 아시고 풍성히 채워 주시며,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온갖 두려움을 내어 쫓아 버리신 분이셨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알고 있는 그 하나님과 함께 지평선에 먹구름이 끼어 잇는 것을 볼 때에도 내일은 반드시 해가 밝게 비치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말씀입니까? 주님께서도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굴까요? 가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밤이 깊어 가는데 돌아갈 집이 없으면 얼마나 쓸쓸할까요? 그보다 더 애처로운 것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고, 영원한 집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생이 끝날 무렵에 어두운 무덤만 기다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가실 곳이 준비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목자로 삼으세요. 부족함이 없는 축복을 받습니다.
이 구절은 드디어 안식의 집에 도착한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저 언덕 너머 해지는 곳, 우리를 위해서 주께서 예비하신 황홀하고 따뜻한 집, 이 집의 이름은 여호와의 집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4: ·1 -3 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것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라고 약속했던 그 영원한 집, 우리는 이 집에서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세상의 모든 상처를 뒤로 하고, 주께서 나를 인도하신 그의 승리를 감격해 하며 여기서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나온 사망의 골짜기를 지금 어떻게 느낍니까?”
고통 속에서도 손을 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물론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서 살 때에는 쉽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라고 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아주 거두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번 책임지기로 하셨으면 절대로 중간에 포기하는 법이 없으십니다.
‘정녕’이라고 했습니다. 확실히 라는 뜻입니다. 참사랑은 때때로 사랑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푸른 초장 대신에 거친 자갈밭을 지나거나 평강 대신에 두려움의 계곡을 걷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려울 때도 늘 가까이 계십니다. 사랑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숭고한 목표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영원히 거하리로다’ 는 무슨 의미일까요? 구원의 확신을 말합니다.
영원한 안전에 대한 고백이며 확신입니다. 목자를 따라가는 양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실수도 하고 죄의 유혹으로 넘어지기도 합니다. 자신의 눈에 좋은 곳을 골라 가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가장 좋은 것이 복음이요 가장 믿을 수 있는 분이 주님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한 곳에서 주님의 인자하신 얼굴을 마주 대하고 살 수 있는 아버지의 집을 사모하게 됩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신념이나 나의 일생의 줄기찬 순례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이었음을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기까지 도달하는 동안에 내 걸음마다 발자국마다 나를 붙들고 인도하셨습니다. 때로 나는 인생의 길에서 악을 경험했습니다. 때로 어두움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과 악까지도 선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믿음과 희망을 갖고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삶의 짐이 너무나 무겁고 피곤하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내가 가는 걸음이 흔들리고 방황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주께서는 우리가 가는 걸음이 결코 평안한 길만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길은 의의 길이어야 합니다.
눈을 열어 내 곁에 변함없이 동행하시는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의 임재를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삶이 다 마치는 날,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실 그분이 내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고 내 상처를 치유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18: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험하고 악한 이 세상을 홀로 가기에는 우리는 심히 약하고 불완전합니다. 홀로 가는 이 세상은 실로 위험하고 불안과 슬픔과 고통만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참된 목자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간다면 이 세상은 그다지 어둡지만도 심각하게 위험스러운 곳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선하고 유익한 곳으로 인도하시고 평안과 위로를 베푸시며, 영원한 승리와 구원을 베푸시는 참된 목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우리의 영원한 목자로 삼아 그분만을 따르며 참된 위로와 소망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순종을 다하는 선한 양이 될 때,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더욱 기쁘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안위하시며 승리와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 기도: 우리의 피난처요 보호자 되신 주님,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해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배우게 하옵소서. 더 나아가 우리의 잔이 넘쳐나서, 많은 사람들을 축복하는 주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나의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게 하소서. 그리고 주님을 늘 찬송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소서. 하나님의 축복의 상에 참여케 하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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