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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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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강종수 목사 |
참고 : | http://cafe.daum.net/st888 |
2011.2.13 주일 오전 예배설교
성경 : 요한1서3:16
제목 : 사랑을 알면 목숨을 내놓는다
요한1서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아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기독교신앙의 3요소라 하고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고전13:13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되면 왜 사랑을 해야 하고 성경은 왜 사랑의 가치에 대해 강조하고 사랑하라 명하고 있는가? 본문에는 형제를 위해 목숨도 버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알면 목숨을 내 놓는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신 가장 뚜렷한 증거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주시고 희생시키심으로 우리가 이제 그 공로를 믿어 속죄함을 얻고 영생하게 하신 역사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1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역사적으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은 안 믿는 자들도 책을 통해 알 수는 있으나 이 사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영혼 문제와 관련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도가 하나님도 사랑하고 또한 세상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내용을 깨달아 감동받고 지니고 평생 안고 가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 말은 그 사랑을 못 깨달으면 그 사랑의 권면이나 명령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깨닫습니까?
예수께서 바리새인집에 초청받아 가셨을 때 그 동네에 죄를 짓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창녀같은 한 여자가 와서 비싼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어드리는 장면에서 주님이 주신 말씀,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를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회개하고 죄 사함받았기 때문에 주를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내 속에 사랑이 없다는 말은 죄를 덜 회개했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이들이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사랑이 넘쳐나는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행2:45).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서 복지적인 차원으로 이웃을 사랑한답시고 봉사를 하기 전에 먼저 죄를 회개하면 자연히 사랑이 생깁니다.
본문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이렇게 먼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안다는 말은 체험적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죄를 뉘우쳐야 이 사랑이 체험됩니다.
2. 목숨을 내놓는 사랑
본문에,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한 말의 ‘목숨이라는 단어 푸쉬케(yuchv)는 단순한 목숨을 뜻한 것이 아니라 생애를 전부다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범사에 뭐든지 다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아무 것도 드린 적도 없고 오히려 원수같은 놈들이었는데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여 구원하시려고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시던 주님은 말씀하신대로 우리를 위해 목숨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종교철학이나 플라토닉한 사랑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돕고 마음을 쓰고 함께 나누는 실천적 사랑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을 알고는 있어도 실천을 안했습니다. 그런 이론적인 사랑은 소용 가치가 없습니다.
본문 뒤 바로 이어 나오는 요1서 3:17-18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야고보서 2장에서도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했습니다.
성도는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중심으로 삽니다. 어떻게 하면 성도답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잘 증거하는 것일까요?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론이 부족했다면 차라리 교훈가를 많이 배출해서 교회를 학교처럼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말만 가지고 안 되기 때문에 아들의 생명을 담보로 구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하나님을 알게하는 수단입니다. 그 이상 사람의 양심에 와닿게 하는 방법이 잘 없습니다.
주님이 내게 목숨을 주셨으니 마땅히 목숨 걸고 형제 사랑하는 것은 양심적으로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이라고 요 5:24에 말씀하고 있는데 형제끼리 고소나 하고 쌈질이나 한다면 본문 앞서 요일3:14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생명 충만한 삶을 얻고자하시면 형제를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떻게 그 맘을 가집니까? 날마다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면 가능합니다. 성도의 인격은 사랑의 정도로 표시합니다. 아무리 잘나도 사랑이 없는 자는 못난 자입니다. 사랑은 인정과도 다릅니다. 인정은 목숨까지는 못 내놓습니다. 아가페 사랑, 그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역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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