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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3:1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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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466737 |
정용섭 목사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마 3:13-17, 주현절후 첫째 주일, 2011년 1월9일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 받은 사건은 공관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다 나옵니다.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뜻이겠지요. 마태복음의 보도는 나머지 두 복음서의 보도와 약간 차이가 납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 전하는데 반해서 마태복음은 다른 이야기를 보충했습니다. 세례를 받기 전에 예수님이 요한과 대화를 나눈 장면이 그것입니다. 요한이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14절)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이 거론하지 않은 대목을 마태복음이 언급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세례 문제가 훗날 논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세례 요한의 설교와 세례는 주로 도덕적인 죄에 집중됩니다. 도덕적인 죄는 물론이고, 원죄마저 없으신 분인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논란이 될 만합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요한과의 대화를 통해서 이 문제를 해명하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답변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절)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모든 의’를 이루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세례가 왜 의의 근거가 되는 걸까요? 의는 구원이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사건은 인류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일어났던 신학논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처음 그리스도교가 시작될 때의 핵심은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그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인간과 똑같은 육신을 갖고 존재할 수 있었느냐 하는 문제제기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에서 살았던 예수님은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걸 가현설(docetism)이라고 합니다. 아주 순수하고 열정적인 신앙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이런 가현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예수는 온전한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온전한 사람이라는(vere Deus, vere homo)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반은 신이고, 반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온전한 신이면서 동시에 온전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존재는 세상에 예수님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런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가 실증적으로 분석해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존재 신비입니다. 이를 다른 신학 용어로 바꾸면 성육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의 육체를 입고 역사에 나타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런 성육신에 대한 확증입니다. 성육신은 인간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이런 논리에서 볼 때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 세례가 필연적이라는 본문의 진술은 옳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근본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과 상관없는 도그마가 아닙니다. 다음의 사실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의 몸은, 즉 사람의 삶 자체는 구원이 임해야 할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할 대상입니다. 우리의 몸이 늙고 병들고 결국 썩겠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몸을 하찮게 여깁니다. 더나가서 자학적이기까지 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거꾸로 어떤 사람들은 몸의 욕망에만 집중합니다. 물질적인 토대가 확장된 세상에서 사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경향이 크게 나타납니다. 심리적으로 자아숭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예수님의 몸과 똑같습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할 공간이기도 합니다. 성육신 신앙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자학에 떨어지거나 자아숭배에 치우치지 않고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도록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힘을 쓸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세례를 받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면서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대화를 전한 뒤에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가 누구냐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똑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세례 장면이 특이합니다. 세례는 요단강에서 베풀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몰려나왔을 겁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그 순간에 몇 가지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으며,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습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하늘은 열리거나 닫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우주 전체가 하늘입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시적인 표현입니다. 이런 장면을 명화로 본 적이 있을 겁니다. 낮은 구름이 깔렸다가 한쪽의 구름이 걷히면서 하늘이 보이고 빛이 내리비치는 그림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비둘기 자체가 성령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평화의 영인 성령이 함께 했다는 뜻이겠지요.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는 보도도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시적이고, 영적인 표현입니다. 고대인들의 신화적 표상이 거기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성서에 신화적인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서 불편하게 생각할 건 하나도 없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신화는 자연스러운 이야기 방식이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 이야기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유치하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그런 신화적 표상에 궁극적인 진리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들린 소리가 바로 초기 그리스도교가 예수님에게서 경험한 궁극적인 진리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7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더 정확하게는 외아들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교의 초석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그 사실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도신경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에 이어서 두 번째로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고백을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아들을 둘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아들과 딸을 두지 않습니다. 신이 자식을 둔다는 것은 헬라 신화에나 나올만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문제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해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신앙의 신비로운 세계를 세상의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성만찬을 생각해보십시오.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로 믿는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빵과 포도주라는 물질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지만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로마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화체설, 기념설, 임재설 등으로 나뉩니다. 어떤 입장이든지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것을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듯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단지 성인이나, 도덕선생이나, 인생 상담자로, 또는 마술사로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이면 아들이고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어떻게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물론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페르조나’, 즉 격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신 존재이지만 예수님은 제한적인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대상으로 인식하고 기도를 드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시아’, 즉 본질에서는 동일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대답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다음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근거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고, 4세기 교부들은 왜 예수님이 격으로는 하나님과 구별되지만 본질(우시아)로는 동일하다고 생각했을까요? 근거가 있어야 믿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닙니까.
요즘 우리는 주현절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금년은 3월6일 주일까지 9주간이나 계속됩니다. 주현절이 끝나면 사순절이 6주간 이어지고, 그 다음이 부활절입니다. 주현절 바로 앞은 성탄절이었습니다. 그 앞은 대림절이었습니다. 교회력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 내용을 차례대로 담고 있습니다. 주현절(epiphany)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성이 드러난 것을 지키는 절기입니다. 교회 전통에 따라서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경배한 것에 근거하기도 하고,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세례 사건에 근거하기도 합니다. 주현절이 말하는 핵심은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이 육체적인 한계를 안고 살았던 분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위의 질문을 다시 반복합니다. 예수님은 왜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그냥 믿으면 되나요? 믿을만한 근거가 무엇입니까? 거기에 증거가 있나요?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운명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운명은 그것 자체가 파루시아, 즉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났습니다. 치유와 축귀에 대한 복음서의 보도는 모두 이런 권능을 가리킵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죄인, 세리에 대한 사랑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출발부터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근거해서 행동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의 완전한 일치를 이루셨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삶, 그의 가르침, 그의 행위, 그의 운명 전체를 하나님과의 일치로 보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이런 신앙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운명이 곧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사실에 대한, 오늘 우리의 주제로 바꾸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였습니다. 이 부활의 빛에서 예수님의 공생활동은 전혀 새로운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마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근거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이 열리고 그 하늘로부터 이것에 대한 소리가 들렸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전해져오다가 공관복음서에 그대로 기록되었고, 오늘 우리가 읽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사실이 이해되지 않으시나요? 믿겨지지 않으시나요? 동의하기 어려운가요? 더 분명한 증거가 필요하신가요? 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는 마지막 때 주어질 것입니다. 지금은 선택이 필요합니다. 저는 예수의 말씀, 행동, 운명에 하나님이 온전히 하나가 되셨다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통찰과 그 신앙을 옳다고 인정합니다. 그들과 똑같은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또 하나의 복음서인 요한복음이 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여러분에게 그대로 전하는 것으로 오늘의 설교를 마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를 본 자는, 그를 아는 자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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