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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빛이다

마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426 추천 수 0 2011.02.16 01: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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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4:12-22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472093 

emoticon 정용섭 목사

예수는 빛이다

마태복음 4:12-22, 주현절후 셋째 주일, 2011년 1월23일

 

     오늘 설교 본문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세례 요한이 헤롯에 의해서 감옥에 갇힌 뒤에 시작된 예수님의 활동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에 근거해서 해명한 이야기이고(마 4:12-17),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어부였던 네 명의 청년을 제자로 부른 이야기입니다.(막 4:18-22) 이 이야기는 3장과 4장의 전체 주제와 연결됩니다. 그것은 주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사건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씀 선포,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 받은 사건,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 전에 당한 세 가지 시험, 오늘 설교 본문의 두 가지 이야기, 마지막으로 23-25절에서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유대 전 지역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보도입니다.

     세례 요한의 선포와 예수님의 선포는 똑같습니다. 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고 선포했고,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고 선포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이 사실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이유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가 특수하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데에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출생 순간부터 특별한 인연이 있었습니다. 양쪽의 출생은 모두 천사에 의해서 예고되었습니다.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임신 중에 서로 만난 일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먼저 출가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고,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뒤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복음서 기자들이 똑같이 증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흑암과 빛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기대했지만 그는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의 앞길을 예비할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와 메시아는 격이 다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 사실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마태가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도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메시아를 증언하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사 9:2절을 인용한 본문 마 4:1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소위 제1 이사야라고 불리는 이 사람은 기원전 8세기 초에 활동했습니다. 주로 하나님의 심판을 말했습니다. 그 시기는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멸망당했고(BC 721), 남유다도 크게 위협을 받던 때였습니다. 총체적으로 불안한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틈틈이 하나님의 구원을 전했습니다. 평강의 왕이 와서 자신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외침입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이사야가 외친 평강의 왕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사야가 말하는 ‘흑암을 비추는 빛’이라는 뜻입니다.

     흑암, 사망의 땅과 그늘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사야는 물론 당시의 어려운 정치 사회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처한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 지배 아래에 있을 때입니다. 종교적으로도 흑암의 시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던 세례 요한에게 민중들이 몰려나갔다는 것은 민중들의 영혼이 흑암 가운데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몰려드는 민중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28) 여기서 짐은 종교적인 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떨까요? 이사야나 마태복음 시대와 다르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지금 생존의 위기를 크게 느끼지 않습니다. 아직 남북이 대치하고 있고, 빈부의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먹을 게 넘치고, 재미있는 일이 많습니다.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지만 않는다면 그런대로 삶을 즐기면서 지낼 만합니다. 정말 그런가요? 오늘 우리의 행복 지수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조사방식에 따라서 약간 다른 결과가 나오겠지만, 별로 높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보다도 못합니다. 행복한지 아닌지의 척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긴장의 강도입니다. 수억 원의 주식을 사 놓고 매일 긴장하면서 사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긴장하면서 삽니다. 심한 경우에는 유치원 시절부터 긴장합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라는 말이 바로 우리를 가리키는 게 아닐는지요.

     복지제도가 어느 정도 실현되고, 개인의 인생관이 건강하게 자리를 잡으면 흑암이라는 우리의 실존이 모두 해결될 수 있을까요? 북유럽 국가들처럼 요람에서 무덤까지 긴장하지 않고 삶을 즐기면서 여유 있게 살아가면 빛이 필요 없어도 될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특별히 돈이 신처럼 추앙받는 이 시대는 우리를 모두 그쪽으로 몰아갑니다. 돈, 명예, 건강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스런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입니다. 실제로 그럴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무엇으로도 우리의 내면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삶의 조건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으로 우리의 삶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는 약간만이라도 삶을 통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기자들도 그 사실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성서가 어떻게 진단하는지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이 그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생명과의 단절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많은 것으로 채워도 우리 생명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비슷합니다. 흑암 속에서 시력이 좋아지는 연습을 하거나 약을 먹는 것과 비슷합니다.

    흑암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필요합니다. 빛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는 말은 곧 그를 통해서 생명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이 생명의 완성이 구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사실에 토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두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이 그 토대입니다. 교회는 이 사실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약간 다른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생명과 구원을 얻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흑암에 사는 것 같습니다. 아직 내면이 불안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기초적인 대답은 영성이 아직 미숙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도 음악 공부나 시 공부와 비슷해서 깊이 있게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하면 분명히 다른 삶의 경지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영성이 깊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완벽한 삶은 불가능합니다. 죽기 전에는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는 것처럼 이 땅에서 우리의 생명이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통해서 생명의 완성을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나를 따라오라

     마태복음 기자는 그런 삶을 두 번 째 사건에서 이야기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제자로 부르신 이야기입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과 가족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당시 서른 살 정도 되었다면 제자들은 그보다 어렸겠지요. 처음에 보자마자 곧 부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겠지만 성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섰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빛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당연히 따라야 합니다. 제자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냥 감정적으로, 충동적으로 나서는 게 아닙니다. 첫 눈에 반한 여자나 남자가 서로 끌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빛이라는 사실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럴 때만 제자의 삶은 가능합니다.

    생명의 빛인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말 그대로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를 따르는 게 아니라 예수처럼 살자고 주장합니다. ‘예수살기’라는 모임도 있습니다. 값싼 은혜에 빠져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신앙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적으로도 세상에서 모범을 보일 필요도 있긴 합니다. 요즘처럼 그리스도교에 대한 세상의 판단이 부정적인 때는 더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를 대신할 것처럼 나서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모범을 보여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럴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세상이 변하지도 않습니다. 인간과 세상을 낭만적으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쉽게 부패하고, 이기주의에 떨어지고, 자기도취에 사로잡힙니다.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빛을 반사시킬 뿐입니다. 사실 빛을 반사하는 것조차도 우리에게는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 빛을 받아야만 겨우 살아갈 수 있는 피조물입니다. 오죽 했으면 바울이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헬라인이나 모두 총체적으로 죄에 빠졌다고 말했겠습니까. 빛을 향해 영혼의 촉수를 뻗치는 게 최선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영적 태도입니다.

     둘째,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로 그를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교회에 나올 때만 제자가 되고 나가서는 제자가 아닌 것처럼 산다면 예수님을 빛으로 아는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전체 삶이 제자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직장, 가정, 이웃과의 모든 관계에서 제자로 살아야 합니다. 이건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 믿고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존재의 변화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것입니다. 우리이 모든 것이 변화된 것입니다. 사람이 무슨 방식으로도 손을 댈 수 없는 차원에서,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 가능한 차원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삶 전체로 제자가 된 것입니다. 자나 깨나 기도하고, 말씀 읽고, 전도하고, 가능하면 교회생활에 매달려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걸 원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탈속적으로 살지 않고 오히려 세속적으로 사셨습니다. 시장에서 시장 사람들과 만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삶으로 살아내셨습니다. 여러분이 굳이 종교적인 언어를 구사하지 않는다고 해도 예수님을 실제로 빛으로 경험했다면 여러분은 어디서나 온전히 제자로 자리를 잡게 될 겁니다.

     오늘은 주현절후 셋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이것을 상투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이것처럼 놀랍고 위대한 사건은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이고 구원이고 빛입니다. 마태가 인용한 이사야의 예언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빛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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