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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95: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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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본문: 시편 95편 1- 11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3.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4.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5.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성 브라더 로렌즈 수도사는 수도회 본부로부터 싸움이 제일 많기로 소문난 어떤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문제가 많은 그 수도원은 원장이 공석중이었습니다. 로렌즈 수도사가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자 젊은 수도사들이 몰려 나왔습니다. 그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 수도사에게 "어서 식당에 가서 접시를 닦으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처음 수도원에 들어오는 신입 수도사는 나이 불문하고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일부터 하는 것이 전통인 모양이었습니다. 로렌즈는 겸손하게 "네! 그러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곧장 식당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갔습니다. 로렌즈 수도사는 한달, 두 달, 석 달, 계속해서 접시를 닦았습니다. 젊은 수도사들의 엄청난 멸시와 천대와 구박이 쏟아졌습니다. 로렌즈 수도사는 아무 말 없이 그 구박을 다 받으며 신입수사들이 자는 문간방 좁은 공간에서 잠을 잤습니다. 석 달이 지나서 수도회 본부 감독이 순시차 수도원에 들렸습니다. 젊은 수도사들도 감독 앞에서만큼은 쩔쩔맸습니다. 그런데 원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감독이 물었습니다.
"원장님은 어디 가셨는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감독이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본부에서 로렌즈 수도사님를 3개월 전에 이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하고 파송했는데"
감독의 말에 젊은 수도사들이 아연실색했습니다. 그들은 즉시 식당으로 달려가 노 수도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로렌즈 수도사는 빙그레 웃으며 남은 접시를 마저 닦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교만하고 무례하던 젊은 수도사들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 그곳은 아주 모범적인 수도원이 되었습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22:4)
본문의 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것을 요청하는 시입니다.
시인은 우리를 경배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시와 음악으로 여호와를 경배하자고 초대합니다. 우리의 몸을 굽히며 무릎을 꿇고 마음을 드려 그분 앞에 "와서"그를 경배하자고 초대합니다. 그는 피조물인 우리가 그를 경배할 마땅한 이유를 설득합니다. 우리가 그를 경배할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가 지으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가 누구이신가를 묵상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창조자이시며 왕이십니다. 때로 신의 창조를 믿지만 신의 섭리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신론자(Deist)의 신은 우리를 낳으시고 우리를 기르기를 포기한 어머니와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신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통치하시는 왕이십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또한 구원의 반석이십니다. 인생이 요동하는 이유는 흔들리는 기초위에서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기초가 되십니다. 오늘날 개인과 사회, 민족이 요동하는 이유는 흔들리는 것들을 의지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우리 인생에 흔들리지 않는 기초를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그냥 엎드려 경배하게 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그는 구원의 목장으로 우리를 이끄신 다음 우리를 방목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한순간도 쉼이 없이 그의 따뜻하고 철저한 시선으로 우리를 돌아보시는 부지런한 목자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십니다. 이런 목자의 가슴을 경험한 이들이 엎드려 그를 친양하는 것- 그것이 바로 경배입니다. 지금은 그를 경배할 때입니다. 1절과 6절의 ‘오라’는 명령은 모든 인생들을 향한 준엄한 명령입니다. ‘오라’의 히브리어는 ‘할라크’입니다. 이는 걷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를 ‘길을 가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오라는 명령은 성전으로 모여서 경배하라는 초청도 되지만 우리 실생활에서는 ‘가라’ ‘걸으라’는 명령도 됩니다. 곧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도(道)는 곧 길입니다. 어떤 길을 걷느냐에 따라 다다르는 목적지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도(道)입니다(10절). 이 길을 걸으면 생명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사람들은 마땅히 가야할 곳으로 가지 않고 허망한 곳으로, 자기 죽을 길로 가려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였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시인이 요구하는 삶의 길은 찬양과 순종의 삶입니다.
본문 1-5절의 주된 요청은 ‘찬양’입니다. 찬양해야 될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어떤 신보다 크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땅과 산과 바다와 육지를 만드시고 그 주인되신 하나님이십니다. 땅은 얼마나 깊고 무거운가! 그러나 그 땅도 굳건한 반석되신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다. 산은 얼마나 높은가 우람한가! 그러나 그 산도 하나님 아래 있습니다(4). 바다는 얼마나 넓고 육지는 또 얼마나 광활한가! 그러나 그것들 또한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의 부요함은 또 어떠한가! 그 앞에 우리는 욥처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3) 하고 입술을 가리울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또한 얼마나 무한한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측량할 수 없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충분히 찬양받을 이유가 있습니다. 찬양하되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즐거이’ 찬양해야 합니다(1,2절). 하나님 전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것도, 기도를 하는 것도, 말씀을 읽는 것도,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감격해 하는 것도 다 즐거움에서 우러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세상의 신이나 우상들은 인간을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스리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즐거움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되 우리 예물은 감사와 감격이어야 합니다(2). 그 크신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를 지키심을 인하여 감사하라! 그 분의 빼어난 솜씨와 인생 가운데 베푸신 놀라운 은혜들을 인하여 감격하라!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시인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에 대한 감사와 자연과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 마음에 감격이 있는데 어찌 시가 나오지 않을쏘냐!
본문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전국 어디를 가도 같은 품질, 같은 가격으로 서비스 받을 수 있는 운영망을 체인점이라고 합니다. 각 체인점에는 본사의 요구와 구비 요건이 제시됩니다. 거기에 따르는 이익은 본사가 책임져 줍니다. 본사는 각 체인점이 우선 눈앞의 이익보다 본사의 요구와 비법에 따르고 있는가를 수시로 점검합니다. ‘체인’이라는 말은 ‘쇠줄’이라는 말입니다. 본사의 상표와 품질과 가격이 지역 점포에도 동일하게 묶여 있다는 말입니다. 성공한 체인점은 본사와의 연결이 견고한 점포입니다. 체인점이 본사와 다른 독특한 자기 아이디어로 경영할 수 있다면 구태여 체인점으로 남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체인점의 생명은 본사의 운영 방침과 품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인생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로 짜낸 그 어떠한 것도 지속적인 평안과 행복을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항상 일정하고 든든하여 흔들리지 않는 평안과 행복을 제공해 주는 견고한 체인이 있습니다. 창세 이후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는 사슬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체인에 우리 모두가 가맹하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의 반석이신 여호와, 그분의 체인점을 우리의 생활 가운데 세웁시다.
본문 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어느 교회의 목사님 사모는 병원에서 위암 판정을 받고 입을 굳게 다물고 미음도 입에 대지 않았스니다. 한창 나이에 이 지경이 된 것은 개척 교회 시절의 극심했던 고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히 남편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싹터 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은 감리교 신학대학의 윤성범 학장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 얼굴이 어둡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목사님은 형편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학장님이 제안을 했습니다.
“노트를 한권 사다가 아내에게 주세요. 그 노트에 감사할 일만 생각나는 대로 적으라고 해보세요.”
목사님은 즉시 노트와 볼펜을 사들고 아내에게 갔습니다.
“이 마당에 무슨 감사할 일이 있다고 그러세요.”
사모가 한두 줄씩이나마 노트에 감사할 일을 써내려간 것은 목사님이 방을 나서고 난 후에도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아주 평범하고 작은 일 부터 적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찾아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러자 점점 통증은 사라지고, 다리에는 웬일인지 힘이 생겼습니다. 병원에 가니 의사가 깜짝 놀랐습니다. 암세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나 자신의 활기찬 생활을 위해서, 타인에게 기쁨을 선물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복된 손길을 맞잡기 위해서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100:4)
일본에 미즈노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즈노씨는 세상에서 참 혹한 불구자인 것입니다. 전신이 해삼처럼 퍼져서 수족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며,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며 물론 글도 쓸 수 없습니다. 그가 의사를 발표할 수 있는 유일의 길은 눈을 반짝이는 것뿐입니다. 그가 작품으로 발표한 시는 그의 형수의 헌신적인 협조에서 이뤄 진 것입니다.
그가 시를 쓸 때에는 그의 형수가 일본어 50자표를 걸어 두고 막대기로 한 자씩 짚어 내려가다가 미즈노 씨가 원하는 글자가 짚히면 그의 눈이 유난히 반짝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수는 그 글자를 백지에 써 두고, 또 짚어 내려가다가 다음 글자를 쓰는 식으로 미즈노 씨의 마음에 있는 시가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 한 수를 쓰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두 사람의 인내가 필요한 것이며, 그 시가 바로 일본 문단의 걸작이 되고 베스트셀러가 되며, NHK가 특집으로 보도한 것입니다. 미즈노씨의 시집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미즈노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또 원망해도 부족할 터인데 말입니다.
파스칼은 “사람은 같은 사건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같은 조건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은 그 조건에서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어떤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미즈노 씨가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우리들이 세상의 어떤 환경 속에서 든 오직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시147:7)
6-11절의 주된 요청은 ‘순종’입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6절)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기르시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양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입니다.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7절). 세상의 음성을 듣지 마십시오. 그 길은 곧 사망의 길입니다. 양을 부르는 목자의 소리가 끊이지 않듯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도 하늘에 가득 찹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하며, 기도 중 그 마음 가운데 감동과 깨달음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또한 환경과 사람과 일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도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양의 행복과 안전은 목자에게 어느 만큼 순종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을 성경은 ‘목이 곧고 완고했다’고 평가합니다. 므리바 또는 맛사란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광야에서 우리를 목말라 죽게 만든다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모세가 하나님을 거룩하심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만 분을 내다 모세마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었지만 광야 40년 내내 그 세대 때문에 근심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십 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10절) 그 때문에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안식, 곧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근심하는 인생입니까 아니면 기뻐하는 인생입니까?
순종하는 자에게 안식이 주어집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을 곧 그분에게 우리 인생을 맡기고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뜻입니다. 종은 주인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순종은 비굴함이나 노예적 삶이 아닙니다. 순종은 자기 의지나 세상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 더 넓고 크신 하늘의 뜻을 살겠다는 의지입니다. 순종의 길은 더 어렵고 힘든 자기부인의 길입니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진리처럼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는 흥하고 거스리는 자는 망합니다(순천자흥 역천자망, 順天者興 逆天者亡). 순종하는 자에게는 안식과 평강이,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사망과 불안이 따릅니다.
본문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런던 대학의 우주 물리학자인 보이드 박사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약 10만 개이며 최신 전자망원경을 가지고 한 은하수 안에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2천억 개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최신 망원경을 가지고 볼 수 있는 전체 우주 속의 별들의 수는 2,000억×1,000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볼 수 없는 별은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오늘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별빛은 10만 광년 전에 반짝였던 빛이 우리 눈에 들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난 후 보이드 박사는 찬송가 40장이 자신의 간증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몸도 창조하셨습니다. 우주 만물의 규모와 인체의 각 부분의 신비스런 조화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솜씨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생들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힘 있는 존재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루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솜씨와 지혜를 찬양합니까? 하나님의 권능에 내 자신을 맡기며 살고 있습니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상황과 처지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와 느낌을 줍니다. 패배한 후 승리자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항복을 의미하며 실로 비참한 모습으로 비쳐집니다. 세상적으로 가진 것이 많은 자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어찌 보면 비굴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인격이 고매하고 존귀함을 받을만한 분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면 그것은 진정 존경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서 지극히 마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우리의 창조자요 선한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 경배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이유는
첫째, 하나님을 높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시 95:3)
시인은 하나님께서 모든 신들 위에 계신 크신 왕이시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높여드리기 위해서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시편 148편 13절을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행하심이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 능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하고 탁월하며 위대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며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선포해야 합니다.
역대상 29장 10절을 보면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윗은 온 우주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을 높여드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을 높여드리는데 두어야 합니다. 요즘 크리스천 기업인들 중에 하나님을 높여드리기 위해서 기업의 이름을 성경적인 의미로 짓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주’(主)라 시인하게 하기 위해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빌 2:10).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5:8)
둘째,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시 95:6) 여기서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는 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0) 그는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보고 저들이 알지 못해서 그러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예수님처럼 기도를 드렸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선한 지혜가 떠오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자기 육성이 앞섭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가 될 때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예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참 신앙의 길은 무릎으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승리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을 하든지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진행하며, 기도로 마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두로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다른 곳으로 갈 때 그들을 전송하는 자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 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행 21:5)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십니다.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행20:36)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3:15)
셋째, 겸손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굽히며 경배하는 겸손과 섬김의 자세입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었지만,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겸손한 모습으로 기도했습니다(대하 6:13). 하나님은 겸손하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에게 긍휼과 자비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잠3:34). 로마서 11장 20절을 보면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잠 16:18).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해주십니다(시149:4).
본문 7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히브리 잠언 중 ‘하루하루 조금씩 자살해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속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씩 자살을 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말 같지만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물에 대해서 지나치게 고민하거나 또는 지나치게 후회하여 생기를 잃고 이로 인해 점점 정신적인 건강이나 육체적인 건강을 해쳐 나중에는 보람 없이 썩어버리는 인생이라는 의미입니다. 인생은 매일 새로운 기회의 혜택을 입으며, 또 그 기회가 제공하는 도전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날들을 어떻게 보람있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매일 조금씩 자기를 죽여가는 자는 ‘자기 뜻대로,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한정된 지혜와 자원으로는 영생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유한한 자원의 고갈로 인하여 매일 매일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풍성한 지혜와 풍부한 자원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뿌리가 깊이 박혀서 양분을 잘 섭취하는 나무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듯 우리의 삶을 윤택케 하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풍성한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양육받는 삶에 행복이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의 음성을 들으며, 누구의 양육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까?
여기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7절)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하여 무릎을 꿇읍시다.
본문 8절에 “므리바”란 말이 나옵니다. “무리바”란 싸운다, 다툰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르비딤에 도착했습니다. 그비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의 마을입니다. 그들이 르비딤에 다다르기까지 수많은 난관과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고통 가운데서도 엄청난 은혜도 맛보았습니다. 애굽과 바로를 이기고, 홍해를 건너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갈길 몰라 광야에서 헤맬 때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의 인도와 보호를 받았습니다. 인간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의 큰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렇다면 물이 없는 문제쯤은 하나님께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냐?”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있다면 이러겠느냐! 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투고, 욕하고, 원망하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므리바” 다투다. “맛사” 시험하다. - 그래서 르비딤을 므리바 혹은 맛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보시니 이 백성이 형편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르비딤에서 그들을 다시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리방황하는 동안에 출애굽한 1세들은 모두 죽고,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시간은 신앙에서 넘어지는 시간입니다. 신앙에서 실패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마귀 사탄에 붙잡히게 되고, 마귀 사탄에 붙잡히는 시간은 망하는 시간이요, 죽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인생행로에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무릎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실로 마땅한 일일 뿐 아니라, 그 은혜가 감사하고 감격스러워 자발적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귀하게 창조해 주시고, 범죄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베풀어 주시며 , 복되고 영광된 하나님의 나라에 백성되게 하여 주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저절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고 경배와 찬양을 돌리며 복종을 다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 우리 중에 하나님 외의 다른 헛된 것들에 무릎을 꿇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무릎 꿇어야 마땅함에도 교만하게 목을 뻣뻣이 세우고 굽힐 줄 모르는 경우는 없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꿇어야 할 무릎을 세상의 헛된 것들 앞에서 꿇기 좋아하는 자들은 끝내 돌이킬 수 없는 허무감과 비참함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굽힐 줄 모르는 교만한 자는 끝내 넘어짐을 당하고야 말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무릎 꿇고 경배하는 자만이 끝내 일으킴을 받아 영원한 기쁨과 영광에 참여하는 복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기 위해서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함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빛나고 높은 보좌에 않으신 주님, 큰 영광 중에 계신 주님을 찬송합니다.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는 이때에 흔들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의 체인 아래 즐겁게 생활하게 하소서. 우리를 지으신 지혜와 권능의 하나님께 삶 전체를 맡기고 생활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양육을 받으며 보람 있는 삶을 살게 하소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함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하소서. 뜻 없이 무릎 꿇는 그런 복종이 아니요 운명에 맡겨서 사는 그런 생활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님의 복음과 뜻을 외치며 하나님 나라와 의의 확장을 위해 헌신하며 살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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