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시107:1-43 |
---|---|
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구원받은 자의 찬양
본문: 시편 107편 1- 43
1620년 12월26일 플리머스(Plymouth) 해변에서는 기도와 감사, 즐거움과 희열의 외침이 메아리쳤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Mayflower) 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에 막 도착한 146명의 청교도들이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모래를 하늘로 날리며 소리치는 사람들, 바위를 끌어안고 감사기도를 올리는 사람들, 서로 부둥켜안고 펄떡펄떡 뛰는 사람들... 그들은 감사와 찬송, 그리고 소리 질러 외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대합창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180톤밖에 되지 않는 작은 배였지만 그 배를 주신 것에 감사했습니다. 평균 시속 2마일 밖에 안 되는 느린 배였지만 117일 동안 계속 전진할 수 있었던 것에, 항해 중에 두 사람이 죽었으나 한 아기가 탄생하였음에, 폭풍을 만나 큰 돛대가 부러졌으나 배가 파선되지 않았음에, 산더미 같은 파도에 휩쓸려 여자들이 바다 속으로 말려들어갔던 사건이 두 번이나 있었지만 모두 무사히 구출되었음에 감사했습니다.
사실 아메리카에 도착한 것은 한 달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디언들의 방해로 상륙할 수 없어 바다에서 한 달 동안 헤매어야만 했었습니다. 마침내 플리머스에 상륙했을 때, 3개월 동안 고통스러운 행해를 무사히 마친 것에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신앙의 자유를 얻어 이제는 마음껏 신앙생활 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감사의 찬양을 올렸으며, 그리고 이제부터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신앙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감사의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성경에도 이러한 감사의 외침과 찬양이 울려 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포로로 끌려가서 온갖 고생을 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앗시리아에서, 애굽 땅에서, 저 멀리 에티오피아에서, 바다 건너 섬들에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비록 남은 소수의 무리였지만 하나님이 약속한 시온 산으로 돌아온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감격의 찬양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이사야 12장 1- 6)
본문 시편 107편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련을 겪은 사람들이 구원의 기쁨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시입니다. 이 시편에 나타나 있는 어려움과 시련은 전쟁, 감옥 생활, 질병, 폭풍의 바다입니다. 어떤 이들은 전쟁에서 패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질병과 바다의 폭풍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어려움과 시련을 겪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과거를 회상해 보았을 때 자신들이 그러한 상황에 결코 홀로 내버려져 있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전혀 불가능한 절망의 상황에서 구원을 받았을 때 경험한 한 가지 공통된 것은 그들을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려는 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시편 107편의 시작입니다. 이 시편에서 찬양과 감사의 말씀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본문 1- 3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의 속량(구원)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미적(美的) 감수성이 탁월한 화가가 이 시편에 나타나 있는 고난의 장면들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각기 배경과 등장 인물이 다른 네 장면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 상상으로 네 장면의 그림을 생각해 가면서 본문의 중심 내용으로 다가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첫째 장면이 4∼5절입니다. 그림의 배경은 사막입니다. 시야에 들어오는 전경은 어디에나 모래밖에 없습니다. 나무도 풀도 식물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래를 움직이는 바람소리가 간신히 들릴 뿐, 모두가 침묵뿐입니다. 먼 곳에서 한 그룹의 무리들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들의 옷은 먼지로 덮여있고 머리는 바람에 날려서 흩어져 있고 얼굴은 햇볕에 타서 검어졌고, 눈은 충혈되어 있으며, 입술은 말라서 터져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배가 고파 허기가 져있고 갈증으로 인하여 속이 타는 것처럼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막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사막에서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까지 헤매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첫 번째 장면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을 표현한 것입니다. 본문에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4, 5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어떤 이들은 광야의 사막에서 길을 잃고, 사람이 사는 성읍(고장)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으며, 배고프고 목이 말라, 기력이 다 빠지기도 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이 절망적이고 암울한 상황에서 갑자기 발견된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희망의 분기점이 있습니다.
본문 6, 7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그 고난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바른길로 들어서게 하셔서, 사람이 사는 성읍으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용설 박사가 통속의학 강연회에서 ‘장통’(臟痛)에 관해 말하면서 통증이 유용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고통은 주의하게 하고 안정을 요구합니다.’ 만일 내장이 다 썩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죽은 사람입니다. 정신적으로 고통의 자극을 받지 못한다면 그는 백치이거나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프랭클린은 ‘정원사의 가위는 나무에게 유익하다. 고통 역시 인생에게 유익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4)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시인은 ‘하나님에게는 두 저울이 있는데 하나는 고통의 저울이요 하나는 위안의 저울이다. 고통의 저울이 차야 위안의 저울도 찬다’고 하였습니다.
고통은 때로 유익합니다. 우리는 평안할 때보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 더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생사(生死)의 문제가 결부될수록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근심 중에서 부르짖으면 그 고통으로부터 구해내시는 분입니다. 고통의 저울이 찰 때 위안의 저울도 차는 것입니다. 사람의 성공은 고통 위에서 진정으로 이루어짐을 기억하십시오.
본문 8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한 번은 어떤 성도가 자기 목사에게 가서 묻기를, "어찌해서 주님께서 가룟 유다 같은 이를 택하셨습니까? 그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는 곧 대답하지 못하고 조금 생각하더니 서서히 대답하는 말이 "나는 그것보다 더 이상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주께서 왜 나 같은 사람을 택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솔직히 하나님 앞에서 반성할 때는 오직 자기는 죄덩어리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실 택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 공통의 경험인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부족을 여실히 살펴볼 때에는 과연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번 말씀한 바와 같이 "누가 능히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면서 탄식할 수밖에 없는 줄 생각합니다. 좀 더 양심이 예민하면 "나는 쓸데없는 사람이야. 나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랴."이렇게 낙심하기도 쉬운 줄 생각합니다. 혹은 자포자기 할 수도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히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줄 압니다. 구원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주님께 있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나는 그리스도라. 그리스도 내가 저희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너의를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그러면서 계속해서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하셨습니다.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고, 그 다음에 다시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 택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손 안에 있습니다. "아무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것은 우리가 분명히 압니다.
참으로 우리의 창조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온전치 못하고 죄악으로 더렵혀진 우리 인생을, 또 나를 구원해주시고 사랑하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삶속에서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얼마나 찬양하며 감사하고 있습니까? 정말 사람이 무엇이관대, 그 사람들 중에서도 또한 내가 누구관대.. 우리 심중에도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문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유머 작가인 루코크가 현대판 사도행전을 엮었습니다. 그는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 강림은 불가능했다는 것을 풍자를 통해 재미있게 말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린다고 광고를 했다. 그러나 적어도 120명은 모여야 할 이 예배에 참석한 자는 40명뿐이었다. 베드로는 직장에서 시간외 근무를 하느라, 요한은 골프 약속 때문에, 야고보는 시험 공부 때문에 부득이 교회에 나올 수 없는 형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길 같은 성령도 이 다락방에 내려오는 것을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며 간절히 바라는 심령에게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사람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비결은 하나님의 사랑이 머물고 있는 대상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고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즐겨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중하게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한 영혼을 얻기 위해 때로는 우리 자신을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약속하신 좋을 것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 장면의 그림의 소재는 10∼16절의 내용입니다. 그림의 배경은 감옥의 내부입니다. 그곳은 어둡고 우울한 장소입니다. 죄수들이 착고를 차고 차갑고 축축한 돌벽에 사슬로 묶여 있습니다. 간수들은 잔인하게도 죄수들을 차고 때립니다. 그들의 이 암울한 상황이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10- 12절을 읽겠습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어미 소가 송아지 두 마리를 낳았습니다. 송아지가 자라서 코뚜레를 할 때가 되자 맏이 송아지가 농부한테 사정하였습니다. ‘저한테는 코뚜레를 하지 말아 주십시오.’ ‘코뚜레를 하지 않으면 망나니가 되고 말 텐데.’ ‘아닙니다, 주인님. 코뚜레를 하여야만 일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은 옛날 생각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코뚜레를 하지 않으니 일을 곱절로 잘 한다는 말을 제가 듣고 말 테니까요.’ 농부는 맏이 송아지의 말을 들어 주었습니다. 맏이 송아지는 코뚜레 없이도 일을 잘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황소가 되자 코뚜레를 하지 않은 맏이는 차츰 꾀가 늘었습니다. 일을 피해 달아나기도 했으며 잡으러 오는 농부를 뒷발로 차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 소가 들에서 돌아와 보니 맏이가 없었습니다. 도살장으로 보내진 것입니다.
사람이 사망의 그늘에 주저앉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생각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주변 환경과 하나님을 원망하곤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부분이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합리성이라는 쇠사슬이 우리의 지성과 육체를 옭아매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의 성실성을 기억하며 사는 지혜를 가집시다.
이 말씀은 사람이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살며, 고통과 쇠사슬에 묶이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가장 높으신 분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고통을 주셔서 그들을 낮추셨으니, 그들이 비틀거려도 돕는 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암울한 상황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때 갑자기 감옥이 흔들리며 놋대문이 부서지고 쇠빗장이 꺾였습니다. 이 두 번째 장면의 희망의 분기점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환경적으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것 같은 영혼의 상태가 될 때, 그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판단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은 항상 고난과 시련의 원인을 물리적인 환경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추적하여 대부분 마음에 들지 않는 한 사람을 찾아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때 항상 나는 내 편이기 때문에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받은 상처는 생채기까지 보듬으면서 남은 창으로 찔러도 기억하지 못할 때가 허다한 것이 타락 이후의 인간 본성이 아닙니까? 결국 그 사람을 고치려 들거나, 다시는 보지 않을 거라 다짐하는데 둘 다 미움으로부터 오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다릅니다. 시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신앙의 정절을 지키려고 할 때 겪는 고난은 예외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겪는 고난에는 항상 하나님의 섭리가 묻어 있습니다.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은 때로 당신 자녀들이 그릇된 길을 가려할 때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자녀들을 포기하고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며 주님을 멀리 떠난 다음에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탕자 아버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아버지는 탕자가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할 때 거절할 수도 있었고, 집을 떠나겠다고 할 때 하인을 시켜 못 떠나도록 가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허랑방탕한 꿈을 꾸고 있는 아들을 단지 옆에 두고 있는 것이 아들과 함께하는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먼 나라로 떠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철없는 아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야 자기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고 고통 받게 하시지 않고는 우리의 어두운 마음이 당신께로 돌아서지 않을 것을 아시기에 사랑으로 징계하십니다. 그 사랑의 회초리 앞에서 하나님께 원망하며 소리치시겠습니까? 혹은 탕자처럼 집을 떠나보려 하십니까? 성도가 내디딜 가장 지혜로운 걸음은 다시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본문 13- 16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우리가 주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을 때에, 우리를 그 곤경에서 구원해 주시고 어둡고 캄캄한 데서 건져 주시고 우리를 얽어 맨 사슬을 끊어 주셨으며 주님께서 놋대문을 부수시고, 쇠빗장을 깨뜨리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구속함을 입게 될 사실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그림의 세 번째 장면은 17∼22절의 내용입니다. 세 번째 그림은 매우 처참하고 불쌍한 장면입니다. 거기에 온갖 질병으로 아픈 사람들이 여기 저기 널려져 누워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아파서 음식을 보고도 일어나지 못합니다. 여기 저기서 신음 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 세 번째의 처참한 장면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17, 18절을 읽겠습니다.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
어리석은 자들은, 반역의 길을 걷고 죄악을 저지르다가 고난을 받아 밥맛까지 잃었으니 이미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역시 이 장면의 그림에서도 희망의 분기점이 있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와 같은 고난을 당한 원인이 그들이 범한 죄악에 있음을 다시 한번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질병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으로 간주했습니다.(왕하5:27, 대하 21: 15, 욥333: 17- 22)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는 극한 심적 육적 고통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욥33:20-22, 시102:4)
본문 19, 20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그때에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께서 그들을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다
단 한 마디 말씀으로 그들을 고쳐 주셨고, 그들을 멸망의 구렁에서 끌어내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인자하심이 풍성하시고 영원하신 분으로 비록 자기 백성이 범죄하였기에 징계를 내리신다 할지라도 그의 백성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때는 반드시 응답하시고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려움과 문제에 직면하였을 때에는 낙심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구원을 간구하여 해결함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 2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가 행하신 일을 선포할지로다”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감사제를 드리고 찬양하고 주의 그 기이하신 일들을 선포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감사제는 특별히 감사한 일이 있을 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이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제사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제사를 드릴 때, 그 사람에게 이 과정은 자기의 존재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고백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귀한 것을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해서 드리고 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그 제사 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을 맹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감사제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마지막 그림입니다. 이 그림의 소재는 23∼32절의 내용입니다. 그림의 배경은 바다입니다. 섬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은 망망대해입니다. 거기에 고대의 돛단배들이 정상적인 항로를 따라 바다를 항해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지는 어딘지 잘 모릅니다. 갑자기 멀리서 폭풍 구름이 나타납니다.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하늘은 점점 어두워집니다. 바람이 더 강해집니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며 파도가 크게 일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배 안에 있는 누구도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폭풍우를 여러 번 겪었기 때문에 확신에 찬 모습으로 일상적인 일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곧 공포가 그들을 둘러싸기 시작합니다. 뱃사공들은 동료들의 얼굴에서 공포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술 취한 것처럼 비틀거립니다. 금방이라도 그 배는 부서져서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공포로 가득 찬 분위기가 본문에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본 절은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자 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로 하여금 침략하게 하신 사실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의 일화 가운데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웨슬레가 미국에 집회를 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던 중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풍랑 가운데서 사람들이 서로 살겠다고 아우성칩니다. 풍랑과 아우성이 뒤범벅이 된 가운데 어디에선가 은은하게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웨슬레는 그 찬송 소리가 나는 곳으로 찾아가 보니 배의 갑판 위 한 모퉁이에서 몇몇 명의 여자들이 모여앉아 얼굴에 아무런 불안한 빛이 없이 매우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라비안 신도들이었습니다. 웨슬레는 거기서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 사건은 웨슬레의 생에 또 한 번의 거듭남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현실에서 사막· 감옥· 질병·폭풍의 바다를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해 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위대한 생의 경험입니다.
본문 26, 27절을 다 같이 보겠습니다.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배들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바다 깊이 잠깁니다 그런 위기에서 사람들은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습니다. 그들은 모두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흔들리니, 그들의 지혜가 모두 쓸모없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본 절은 광풍에 의해 발생한 큰 파도에 의하여 배가 파선할 만큼 크게 요동함으로써 선원들이 크게 두려워하며 정신 차리기 힘들 정도로 곤비한 상황에 처히게 된 모습을 시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의 침입으로 인하여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곤고한 상황에 처한 사실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 시편의 중심된 내용이 나타납니다.
본문 28- 3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이것은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그들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 폭풍이 잠잠해지고, 물결도 잔잔해집니다. 사방이 조용해지니 모두들 기뻐하고 주님은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그들을 인도하여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바라는 항구(소원의 항구)란 풍랑 가운데 항해하는 자들이 마음에 갈망하는 항구를 말합니다. 흑암과 풍랑 속에서 비쳐지는 등대의 불빛, 그것이 주는 기쁨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항구는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돌아가기를 갈망했던 예루살렘을 상징하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성도들이 들어가기를 희구하는 하나님 나라 또는 인생의 거친 항해에서 피난처와 안식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나서 시편 기자는 이 네 번째 그림의 결론을 덧붙입니다.
본문 31, 3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백성의 모임에서 그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그를 찬송할지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있었던 일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하고, 죄 없는 자유인들이 독일의 유대인 학살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피눈물을 뿌리고 죽어가던 그 현장에서, 유대인들이 눈물을 뿌리면서, 피맺힌 절규를 통해서 외친 질문이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입니다.
어느 날 연합군이 이 수용소를 탈환하고, 수용소 벽을 검사하다가 한 쪽에서 뜻밖에 낡은 조각으로 쓰여진 찬송가의 가사를 보고 깜짝 놀라며 그 벽 앞에 서 있었습니다. 아마도 어느 그리스도인이 그의 신앙고백으로 기록해 놓았던 구절인 것 같습니다. 그 찬송가의 가사 내용은 우리 역시 잘 아는 것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두루마리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겠네.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할 수 없겠네."입니다.
이 놀라운 기록 앞에서 아연실색하여 바라보던 병사의 눈길에 그 아래에 조그맣게 쓰여진 글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God is here. 였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이 여기에 계십니다.'입니다. 우리의 생의 모든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하나님은 여기에 계시다.'입니다. 지금 여기에 계신 하나님은 사막의 생활에도 함께 계시고, 옥중에도 함께 계시고, 병상에도, 풍랑이 이는 바다에도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본 절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여라 사람에게 베푸신 주의 놀라운 구원을 감사하여라 백성이 모인 가운데서 그분을 기려라 장로들이 모인 곳에서 그분을 찬양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막이나 감옥, 병상이나 풍랑. 이는 바다는 모두 실제로 우리의 현실에 존재합니다. 그것들은 우리 인간의 경험의 한 부분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한 우리의 경험은 좌절·절망·우울·고독·공포입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희망과는 완전히 대치되는 경험들입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우리의 삶을 포기케 하고 생을 비관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결론은 사막에서, 감옥에서, 병상에서, 폭풍이 이는 바다에서 나올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막에는 시원한 물과 오아시스가 있고, 캄캄한 감옥 밖에는 상쾌한 공기가 있는 들판이 있으며 폭풍의 바다에는 잔잔한 물과 안전한 항구가 있습니다. 그러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 위대한 시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불가능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혼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절망적인 암울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선하심,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감사의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본문 33- 3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그 주민의 악으로 말미암아 옥토가 변하여 염전이 되게 하시며 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고 주린 자들로 말미암아 거기에 살게 하사 그들이 거주할 성읍을 준비하게 하시고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며 또 복을 주사 그들이 크게 번성하게 하시고 그의 가축이 감소하지 아니하게 하실지라도”
내 인생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살면서 못된 짓만 일삼는 악인에게는 강을 광야로 만드시고 샘을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옥토를 염밭이 되게 하여 악인의 죄 값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리고 궁핍한 하나님에 사람들에게는 광야를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을 샘이 되게 하여 그들로 그곳에 거하게 하시고 그 곳에서 마을을 이루며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며 그 땅에 소산을 취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풍성한 곡식을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축 때가 불어나게 하시고 복을 주어 저희로 크게 번성케 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다가 다시 압박과 곤란과 우환을 인하여 수가 줄어들고 더 비참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방백들을 능욕하여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헤매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도 주리고 궁핍한 하나님에 사람들을 그 곤란과 우환에서 건져 주시고 그 가족을 양무리 처럼 불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로 인하여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뻐하게 되고 나쁜 짓만 일삼는 모든 악인은 입을 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있는 사람들은 이런 일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아야 하고 그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요 자녀가 됩니다.
본문 42절을 읽겠습니다.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이다.”
어떤 날 주인이 종을 불러서 좋은 밭을 가리키며 그 밭에 보리를 심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은 보리대신 그 주인이 가장 싫어하는 귀밀을 심었습니다. 추수 때가 되어 주인이 밭에 나가 보니 심으라는 보리는 안 심고 귀밀을 심은데 대노하여 "내가 보리를 심으라고 하지 않았더냐? 어찌하여 귀밀을 심었단 말이냐?"라고 나무라자 그 종은 "주인이여 보리가 나오기를 바라며 귀밀을 심었었나이다."
이 말에 주인은 놀라는 표정으로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느냐? 귀밀을 심고 보리를 거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느냐?" 그 종은 대답하기를 "주인이여, 주인께서는 쉬지 않고 세상 밭에 악의 씨를 심으면서 부활의 날에는 선한 열매를 거둬들이기를 바라고 있지 아니하나이까? 그러므로 저도 귀밀을 심고 보리를 거둬들여 보려고 심었었나이다."
흙은 정직하고 성실합니다.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하며 노력한 것만큼 많이 거두게 합니다. 이 파종과 추수의 원리가 인간의 마음 밭에도 그대로 적용되건만 우리 인간들은 진실 되지 않은 것을 심고 진실된 것으로 거두려 하고 때로는 심지도 않고 거두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이웃이 고통당하고 있을 때 위로의 말 한 마디 해주지 않았으면서 내가 고통당할 때 위로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정직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고 사악한 자는 자기의 악에 사로잡히게 하십니다. 즉 공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를 보호하고 악은 죄인을 패망하게 합니다.(잠13:6)
하나님께는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잠잠히 있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다리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는 생의 어려움 앞에서 상상을 초월하리 만큼 침착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로서 늘 찬양하되 고통 중에서 건지실 하나님, 바른 곳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우리가 이 자리에 예배하기 위해 모인 것도 그 구원의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예배는 복을 받는 수단이라기보다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드리는 감사의 응답입니다.
주님의 기이한 일, 가치 없는 죄인들을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의 피로 구원하신 후에 시시때때로 주님의 사랑으로 인도하시고 진리로 우리를 훈계하시며 우리 안에 있는 죽지 않은 옛 자아와 싸울 때에 언제나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사랑으로 우리들을 살게 하셨으니 이런 특별한 은혜를 받은 성도가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은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죄인 가운데에서 높이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높이고 찬송하며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서 우리의 인생 전체가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편지가 되도록 그렇게 살아야겠습니다.
* 기도: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여 주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저희가 저희의 뜻대로 가게 아니하시고 무한하신 지혜로 늘 돌보아 주셔서 감사드리옵니다. 고통의 날에 하나님께 나아가며 더욱 간절히 부르짖게 하소서. 고통의 유익을 깨닫게 하소서. 오늘 하루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심령으로 사모하며 살게 하소서. 인간의 작은 두뇌로 하나님 말씀을 헤아리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하소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크신 사랑을 온 땅에 전하기 원합니다. 내게 성령 충만함과 지혜를 주시고 힘과 능력을 주셔서 그 은사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확장하는데 쓰임 받는 도구 되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