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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06: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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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은혜를 망각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
본문: 시편 106편 1- 48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바로 전에 그의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과 의논을 하셨다고 합니다. 정의의 천사는 사람을 만들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을 만들면 그가 동료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악을 자행할 것이고, 또 사람은 강퍅하고 잔인하고 부정직하여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진리의 천사가 반발하며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거짓되고, 그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 당신도 속일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거룩의 천사도 “사람을 절대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힐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비의 천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저희의 하늘의 아버지, 사람을 만드시옵소서. 그가 죄를 짓고 정의와 진리와 거룩의 길에서 멀어질 때, 제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감싸고 사랑스런 음성으로 그에게 말하여 다시 당신께 데리고 오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자비의 천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허물을 덮어주시고, 실수를 용서해주십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십시오. 스스로 멈출 수 없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가운데 고통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다시 주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시18:25)
인간 역사는 범죄와 반역의 역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범죄하였습니다. 노예가 된 것은 자신들의 죄가 아니지만 억압자에 대한 당연한 저항을 떠나서 거기에도 계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지 못하고 원망함은 그들의 범죄였습니다. 노예들이 사는 유형지도 그의 주권을 벗어나지 못하며 따라서 그 땅에도 여전한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을 알아차림은 그들의 몫입니다.
광야에서도 그들은 범죄하였습니다. 광야에서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들은 생존하고 삶의 행진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사치 아니하였고 오히려 원망하였으며 더 욕심을 부렸습니다. 그리고 이 욕심을 이루고자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변하지 않은 여전한 죄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을 다시 우상의 문화로 더럽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광야에 엎드러지며 재앙을 경험할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온역을 앓고 온갖 사고로 생명의 단축을 경험하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열방에 붙이시고 다시 열방의 지배를 받고 고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당연한 범죄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셨습니다. 그것이 그의 속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결정된 심판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는 자기의 백성들의 부르짖음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인자(자비)하게 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그들도 오늘의 우리도 회복과 기대의 삶을 삽니다. '그러므로'의 하나님이 '그러나'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본 시편은 출애굽에서 바벨론 포로 때까지의 역사 속에서 반복된 이스라엘의 불성실과 하나님의 징계를 서술한 역사시입니다. 시인은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반역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데서 비롯하였음을 밝히고, 동시에 징계 중에 있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자비하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아직까지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추축됩니다.(47절)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오래 전에 한 불쌍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어린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남겨두고 늘 질병에 시달리던 남편이 2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50년 전에 우리나라가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그 때 자식 둘 남겨두고 남편이 떠나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거기다 예수 믿는다고 시댁에서 얼마나 박해가 심했는지 모릅니다. 성경을 부엌아궁이에 집어넣는 시아버지의 핍박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교회에서 한 평생 말씀으로 살고 감사하고 기뻐하겠노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바느질하고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 자식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다행히 어머니의 그 믿음과 감사를 보고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의 감사를 보고 자랐던 그 아들이 자식을 낳았는데 손자도 할머니의 믿음을 보고 감사합니다. 며느리도 감사 모두가 감사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감사해야 합니까. 어떻게 감사합니까.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감사하지 않을 때가 많음을 기억하고 날마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헤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칩니다, 나는 족합니다 하고 살았습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족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진정한 감사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반드시 복을 주십니다. 그냥 두실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감사의 삶이 변환되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의 인생을 불평모드에 맞추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사모드에 맞춘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감사모드에 맞추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변에서 감사하는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면 나도 감사하고 기쁩니다. 그런데 불평하는 사람들 만나고 대화하는 나도 속이 상하고 답답해집니다. 부모가 불평하면 자녀도 불평합니다. 부모가 감사하면 후손도 감사의 후손이 나타납니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26)
미국 시카고에 있는 무디 예배당에는 강단 위쪽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다고 합니다. 어느날 옷차림이 허름하고 불량해 보이는 사람이 교회 앞을 지나가다가 힐끗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표어를 보자 그는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같이 못되고 나쁜 놈은 예외일 거야!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시겠어!’ 그런데 갑자기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가운데 통로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바로 그때 다른 통로로 무디가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기쁨으로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 때문입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내면에 있는 죄의식이 이런 위축된 태도를 가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우리의 죄를 보고 즉시 분노를 쏟아붓지 않으십니다. 대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께 분노를 쏟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시78:38)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십시오. 스스로 멈출 수 없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가운데 고통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다시 주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본문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인간은 천차만별의 다른 성품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모두 근본적으로 부패와 탐욕이 가득하며 사탄의 종으로서의 성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롤 구주로 모셔 들이게 되면 영생을 얻게 되어 남녀노유 빈부귀천 구별없이 하나님의 성품을 갖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9절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여호와 앞에 성결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성결된 삶을 살려면 어떤 성품을 가져야 할까요? 먼저 중요한 것은 의입니다. 의가 없는 곳에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죄악 가운데는 일시적 쾌락은 있을지 몰라도 그 뒤에는 슬픔과 허무가 꽉 들어차게 됩니다. 재물도 의가 없으면 무익한 것이 되며 명예도 의로움이 따를 때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은 죄를 지음으로써 오는 고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양심을 주셨고 범죄했을 때 양심의 고통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죄인 상태에서 아무리 돈을 모으고 명예를 얻고 인기와 능력을 쌓아가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의로움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회개함으로 의로움을 얻어야 합니다. 그럴 때 물질이 있어도 값지게 사용하며 명예를 얻어도 소중하게 누립니다. 의로움이 없는 곳에는 순간적인 향락은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행복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하여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거룩한 삶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속에서 끓어오르는 음란과 죄악과 더러운 것을 스스로 해결해보려 고애를 쓰지만 실패하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는 이 더러운 생각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 더러운 생각과 죄악과 싸워 이기겠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결하신 예수님을 모셔드리고 의지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애속에서 거룩하고 성결된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 나는 못합니다. 주께서 내 속에 들어오셔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시사 저의 거룩함이 되시고 성결케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만 의지합니다’라고 항상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기도를 할 때 우리는 더 깊은 성결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 상실증이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기억에 장애가 생기는 것입니다. 기억 상실증을 일으키는 요인으로는 기질적인 요인과 기능적인 요인이 있습니다. 기질적요인의 기억 상실증은 외상성 기억 상실증이라고 하며,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일부분에(일반적으로 뇌의 해마)에 이상이 생겨서 기억에 장애가 생기는 것으로, 사고나 질병, 혹은 마약으로 뇌에 손상이 갔을 때 발생합니다. 기능적인 요인의 기억 상실증은 해리성 기억 상실이라고 합니다. 기능적인 요인들은 방어기전와 같은 심리적인 요소들입니다.
기억 상실에는 “부분 기억 상실”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부분 기억 상실은 크게 장기 기억 상실과 단기 기억 상실로 보통 나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장기 기억 상실”이란 옛날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부분이 있습니다. 과거의 일부분만을 기억 못할 경우 부분 기억 상실증, 전체를 기억 못할 경우를 완전 기억 상실증이라고 합니다. 그와 반면에 “단기 기억 상실”은 바로 전에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기 기억 상실은 가장 흔한 기억 상실 증입니다. 바로 전에 말했던 것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106편 말씀을 묵상하다가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되 완전히 망각한다면 (영적 완전 기억 상실) 그 결과는 어떠하였을까 생각할 때 좀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한 가지 소망은 분명히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 한 가지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본문 4절에서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를 우리도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소서‘
기도할 때마다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기에 너무나 충분하신 분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욥기에서 엘리후는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상달하며"(욥 34:28)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고 하심으로 성도들이 자신의 필요를 위해 기도할 마음을 더해 주십니다. 이런 점에서 시편 기자는 본문 4절과 5절에서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사 나로 주의 택하신 자의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앞길의 형통함을 위해서 간구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인 필요를 위해 기도하고 그 필요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은 사실은 이스라엘 12지파 중의 하나인 야베스에게 응답된 현실을 통해서 더욱 명백해집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1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적인 필요와 복을 간구할 때 그 필요가 분명히 채워지고 필요한 복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어짐을 성경은 증거하는 것입니다. 혹시 시험에 드는 일로 근심합니까? 그렇다면 마가복음 14장 38절의 말씀대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 지혜가 요청되는 상황이 현실 속에 나타났다면 야고보서 1장 5절의 말씀대로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지 아니한 것은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주님의 많은 인자를 기억지 아니하였습니다.
본문 시편106편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주의 기사를 깨닫지 못하며 주의 많은 인자를 기억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신 많은 인자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긍휼이 여기시사 모세를 보내 주시고 모세를 통하여 10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게 내리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신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행하신 기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많은 인자를 잊어버리고 홍해에서 거역하였습니다. 그들은 홍해가에 머물 때에 애굽 군이 쫓아온다는 보도를 듣고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출14:11). 이것은 곧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신 하나님을 원망함과 같습니다. “그것이 불신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범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본문 8절을 보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가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꾸짖으시사 마르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바다 지나기를 광야를 지남 같게 하셨습니다(9절). 그리고 그들을 좇던 애굽 군대는 물이 덮으매 하나도 남지 아니하고 죽었습니다(11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셨습니다(10절). 그러므로 말미암아 자신의 “큰 권능”을 나타내셨습니다(8절).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께 찬송을 불렀습니다(12절).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많은 인자(사랑)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애굽과 같은 사탄의 왕국에서 불신앙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던 저와 여러분들을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는데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 또한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로 나를 기억하소서(4절)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 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은헤에 배은망덕하여 불평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무슨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자기 이름을 위하여’서 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백성을 멸절시킴으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 비방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의 권능을 나타냄으로 이방 세계에 당신의 영광된 이름을 널리 드러내시기 위하여 태초부터 계획하시고 시작하신 구원사역을 끝까지 이루신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다함이 없으십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행사를 잊어버렸습니다.
본문 13절을 보시길 바랍니다.
“저희가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일시동안의 음식물의 결핍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인 모세를 원망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히 하나님의 행사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급을 기다리기보다 조급히 음식물을 탐하여 모세를 원망하는 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즉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감사는 일시적이었으며, 그들은 곧 다시 마라에서(출15:24), 신 광야에서(출 16:3) 그리고 시내 광야에서(민11:4)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본문 14절을 읽겠습니다.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어느 날 한 농부가 기쁨에 차서 그의 아내와 가족에게 말을 했습니다. 가장 좋은 암소가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한 마리는 붉고 한 마리는 흰 송아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농부는 아내에게 이런 제의를 하였습니다.
"여보 당신도 생각하였겠지만 이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겠소? 그러니 우리가 이 두 마리를 같이 길러서 때가 되면 그 중 한 마리를 팔아서 하나님께 헌금을 드립시다."
농부의 말을 들은 아내는 그가 주님께 바치겠다는 송아지가 어떤 것이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런 일에는 신경을 쓰지 말아요, 두 마리를 같이 길렀다가 때가 되면 우리가 말한대로 합시다!"라고만 하였습니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농부는 매우 우울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는 아내의 질문에 농부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당신에게 나쁜 소식을 전해야겠소,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소"
그러자 아내는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오늘 아침까지도 어떤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결정을 하지 않으셨잖아요?"
아내의 질문에 농부는 시무룩하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흰 송아지를 드리려고 하였단 말이야, 그런데 흰 송아지가 죽었다니까!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은 것이야!" 하면서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이 농부와 같이 내 안에도 욕심으로 말미암아 가증되게도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일은 없습니까?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그들이 그렇게 범죄하였는데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샘물을 내어 마시게 하시며 만나와 메추라기의 고기로 공급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한 것을 주셨던 것입니다(15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반란을 일으키는 죄(민16장)를 범하였고 더 나아가서 호렙에서 금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극히 가증한 죄를 범하였습니다(19절, 출32장).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죄악된 세상은 로마서1장23절 말씀처럼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죄를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도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크리스천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의 영광과 바꾸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오늘 본문 시편106편14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바로 “욕심”입니다. 그 욕심이 명예의 욕심이던 물질의 욕심이던지 간에 이러한 욕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기보다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기보다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행사의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사람의 행함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로 나를 기억하소서’(4절)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구원자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본문 21절을 보시길 바랍니다.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의 구원자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나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많은 인자와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 위하여 행하신 일들을 잊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들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잊었다고 시편 기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큰 일”(21절)을 행하셨고 그의 “큰 능력”(8절)을 나타내시므로 그들을 구원해 주셨건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구원자 하나님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홍해에서 놀랄 일을 행하신(22절) 구원자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스라엘 백성 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아니하였고(불신앙) (24절) 원망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였으며(불순종) (25절) 더 나아가서 이방신 바알브올을 숭배하였습니다(28절). 또한 그들은 므리바 물에서 하나님의 영을 거역하였으며(33절)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는 이방인들을 멸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섞여서 그들의 행위를 배우며(35절) 그들의 우상을 섬겼습니다(36절). 그 우상에게 자녀의 피를 흘려 제사까지 하였습니다(37-38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가 더러워졌으며 음탕하였습니다(39절).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은 진노하셨고(23, 29, 32, 40절), 이스라엘 백성들을 “열방의 손에 붙이시매”(41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압박을 받으므로(42절)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고통을 아시고(44절)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러 번” 건지셨으나 그들은 “꾀로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인하여” 낮아짐을 당하였습니다(43절).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너무나 빨리 잊어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그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너무나 빨리 잊어버리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당시 고통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이 여기시사 그 고통과 역경에서 건져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이상 고통과 역경이 없이 평안하게 지낼 때 그 당시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너무나 빨리(속히) 잊어버리곤 합니다. 왠지 우리 사람들은 고통과 역경은 쉽게 잊어버리지 못하면서도 그 고통과 역경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속히 잊어버리지 않나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당한 고통과 역경은 잘 기억하고 있으면서 그 고통과 역경에서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행사, 그 은혜는 너무 빨리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 받은 후 평안히 잘 지내고 있을 때 구원자 하나님도 잊고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로 나를 기억하소서’(4절)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와 맺은 “그의 언약”입니다.
본문 35, 36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열방과 섞여서 그 행위를 배우며 그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이 저희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어떤 연구실에서 개구리를 가지고 실험을 하였습니다. 개구리를 약간 뜨거운 물이 들어 있는 큰 비커에 집어넣었더니 놀란 개구리는 펄쩍 뛰어올라 달아났습니다. 이번에는 찬물이 담긴 비커에 그 개구리를 넣자 개구리는 여유있게 헤엄치며 놀았습니다. 잠시 후 개구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보려고 비커 밑에 램프를 놓고 1초에 화씨 0.017도씩 데워지도록 불꽃을 아주 작게 조절해 놓았습니다. 물의 온도는 서서히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개구리는 태평스럽게 헤엄만 치고 있었습니다. 온도는 계속 0.017도씩 올라가고 서너 시간쯤 지났습니다. 과연 개구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개구리는 푹 삶아져서 하얀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물 위에 떠있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환경은 마냥 도취되어 놀기에 적당한 온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민한 피부 감각을 상실한 채, 선한 것과 그릇된 것을 분별치 못하고 마냥 시간을 보낸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주변의 이방인들과 구별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본문 45절을 보십시오.
“저희를 위하여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많은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망각하고 불신앙과 불순종 가운데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신 하나님은 결국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사 저희가 고통 중에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많은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45절)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습니다(46절). 즉,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시적 징벌에서 구원 하셨던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많은 인자하심과 그의 (큰) 행사를 잊어 버렸고 더 나아가서 그들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렸지만 하나님은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기억하고 계셨으며 또한 그들과 맺은 언약을 잊지 않고 계셨던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불성실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성실한 그의 언약 백성에게 성실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대답을 디모데후서 2장 13절에서 찾아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백성인 저와 여러분들에게 성실하신 이유는 그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성실하실 수 밖에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그의 신격인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사야49장15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비록 엄마가 그녀의 젖 먹는 아기를 혹시 잊을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아니하신다는 이 말씀, 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많은 인자(사랑)를 기억지 아니하고 그가 나의 삶 속에 행하신 역사들을 속히 망각하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망각하고) 살 때가 수 없이 많은 데 그러한 배은망덕한 나를 하나님께서 절대 잊지 아니하신다고 하니 이것이 은혜가 아니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로 나를 기억하소서’(4절)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잊고 싶은 일들도, 꼭 잊어야 할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평생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돌보시고 구원해 주시는 은혜요, 이 세상 어떤 일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불의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잊는다면 하나님을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의심하게 되어 결국에는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만은 반드시 기억하여 평생동안 가슴에 새기어 반드시 교훈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밤에 시편 기자처럼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드립시다.
‘주여,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로 나를 기억하소서’ (4절). 비록 우리가 영적 기억 상실 증에 걸려서 하나님의 많은 인자(사랑)와 그의 행사를 기억지(망각) 아니할지라도, 더 나아가서 구원자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오늘 이 밤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로(만) 나를 기억해 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읍시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찬송가410장),
본서를 통해 나타난 선민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사는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인 모든 성도들의 구원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영적 이스라엘인 모든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 은혜를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계속적으로 신앙적 패배를 가져오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그에 따른 회개와 사죄와 축복이라는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결코 끝내 실족지 않고 점차 성숙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화되어가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며(엡4:13), 우리의 범죄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놀랍고 한없는 인자(자비)와 은혜를 기억하여 항상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딤전1: 12, 13, 딛2:11- 14)
* 기도: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리스도께서 저를 위하여 죽으셨음과 그의 보배로운 피가 저의 모든 죄를 씻으셨음을 믿습니다. 저는 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신뢰하기에 지금 말씀을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 마음에 주님이시요 나의 구원자로 모셔 드립니다. 날마다 주님의 뜻을 행하도록 도와주세요. 참 평안과 안식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 중에 거하며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곧 우리의 삶과 일치하도록 인도하소서.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져진 믿음으로 삶을 살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시며 주님 주신 자비를 실천하는 삶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심판할 수밖에 없으신 하나님, 그러나 오늘도 우리를 인자와 긍휼로 대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위 환경이라는 올무에 걸리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게 하소서. 저희 죄를 회개합니다. 저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의로움을 얻고 세상에 나아가 의롭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저희 힘으로 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간구하오니 성결의 능력을 주셔서 성결하게 살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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