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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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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재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은혜는 치유하고, 진리는 자유케 한다
요한1:14, 빌립보 2:5-11
2010년 12월 19일 대림절 셋째 주 주일예배
김경재 목사
(삭개오작은교회 전도목사)
대림절(Advent)을 지내는 날자 셈법
대림절 혹은 대강절이라고 부르는 교회절기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의식하면서 살아 갑니다. 그러나, 정작 시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잘 알지못합니다. 성 어거스틴부터 칸트를 거쳐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시간이해 패러다임에 관한 혁명적 이정표가 새로워 졌지만, 생활인 우리들은 일상속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두가지 발상법이 서로 다른 시간셈법을 가지고서 살아갑니다.
그 하나는, 시간이란 과거에서 흘러나와 현재를 거쳐 미래에로 달려간다고 생각하는 발상법입니다. 수첩을 들고 각종 약속일자를 적어가면서 생활하는 습관에 익숙한 사람은, 지금이 3월이라면 5월이나 8월의 일기수첩 페이지엔 흰여백이 많고, 지나간 1월이나 2월은 볼펜으로 채워진 각종 일처리 기록들로서 날자마다 꼭 들어찬 것을 보게됨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착각합니다. 내가 언제 줄을런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10년을 살던 20년을 더 살던, 그 기간동안은 내가 나의 시간의 주인이라고 착각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은행에 여유있게 저금해둔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저금해둔 돈을 저금통장에서 찾아쓰듯, 나의 시간을 내가 주인되어 활용처리하며 산다는 착각을 합니다.
그런데, 시간의 셈법에 있어서 다른 발상법이 있습니다. 시간이란 미래로부터 와서 현재를 거쳐 과거에로 살아져간다는 발상법입니다. 이런 발상법은 이스라엘 예언자들과 성경의 발상법입니다. 시간이란 은행에 저금해둔 돈처럼 내가 맘대로 쓰거나 조종하는 나의 자산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 기회, 새로움, 예기치못하는 사건이 담겨질 사건의 그릇이라고 생각하는 발상법 입니다.
시간셈법의 두가지 유형을 말했습니다만, 전자 곧 시간이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 할 경우에는, 미래에서 일어날 진정한 새로운 기대나 희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와 현재에 뿌려진 씨앗들이 그 결과를 만들어가며 되어가는 과정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업보사상이 그 대표적인 것이고, 근대 과학적 세계관에서 인과율법칙이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나, 후자, 곧 시간이란 미래에서 현재로 와서 과거에로 흘러들어가는 발상법에는 예기치않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여백이 있습니다. 더욱이 시간이 현재에로 돌 입해 들어오는 그 미래라는 시간의 근원이나 출처가, 새로움을 세계에서 펼쳐가시는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에서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대림절을 영어로 에드벤트(Advent)라고 부른답니다. 이 단어는 희랍어 아드벤투스(Adventus)에서 유래하는데, 메시야의 오심, 예수의 재림,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을 기다리는 희망의 언어입니다. 이미 있는 기존의 가능성 씨앗이 발전해서 열매를 맺는 결실물이 아니라, 예기치 않는 일, 놀랍고 희한한 일을 경험 하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대림절의 헬라어 단어 에드벤투스(Adventus)에서 영어단어 에드벤쳐(adventure)가 생겼는데, 그 영어단어가 모험, 희한한 일, 진기한 경험을 의미하는 것은 그 영어단어의 뿌리가 대림절과 동일한 헬라어 에드벤투스(Adventu)s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와 진리
시간에 관한 서론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만, 어른이된 그리스도인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자세는, 교회 어린이 주일학교 학생들이 날자를 세어가며 선물가지고 찾아오실 샅타클로스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동심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성탄절의 본질은 성육신 사건의 신비에 놀라고, 우리생명 속에 강림하는 ‘새로운 은총과 진리’에 촉발되어 우리존재가 새로워지는데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단도직입적으로 성탄의 기쁨과 성육신의 기이한 사건을 이렇게 한마디 구절로서 갈파 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 영광은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이며,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요1:14)
이 성경구절 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세가지 핵심단어는 영광, 은혜, 그리고 진리라는 것입니다. 성탄절이란 상업주의에 휘둘려서 수퍼마켓의 매상고를 올리는 경제절기 이거나, 초대그리스도교의 동정녀수태탄생이 가능하냐 여부를 가지고서 논쟁하는 교리토론 주간도 아닌 것입니다. 참 영광과 은혜와 진리에 우리 속눈이 떠져서 우상이 횡횡하는 우리사회 안에서 참 자유를 되찾아야하는 해방의 계절인 것입니다.
첫째, 세상에서 번쩍번쩍 빛을 내는 것들이 모두 금이 아니듯이, 성탄절은 영광을 지니고있다고 자처하는 모든 거짓메시야들의 우상의 겉옷을 다 벗겨내고, 말밥통에 누이신 아기예수 안에서만, 십자가에 죽임당한 그분 안에서만, ‘영광의 빛’을 발견하는 속눈뜨임의 계절이라야 하겠습니다.
루가복음서에 따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만 소개하고 있습니다.(눅2:25) 시므온은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예수의 정결례를 행하려고 먼길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므온은 영안이 밝아져, 아기를 받아 모시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기를 “주제여, 이제는 말씀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2:25)라고 감격하여 노래하였습니다.
성경종교에 의하면, 영광은 참 하나님에게만 속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영광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분여 하고 위임해주는 사람안에서만 그 영광의 빛은 반사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권력욕, 물질욕, 명예욕을 충족시키려고 정권, 금권, 명예를 도둑질해서 자기가 차지하는 무뢰한들이 역사속에서 많이 보지만, 영광을 도둑질하거나 강제로 자기 것이라 자처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되어서 그 자신에게 도리혀 화가 미치게 됨니다.
처음 그리스도교회의 케류그마는 다름아니라, 금관을 쓰고 제국의 옥죄에 앉아 “내가 곧 신의 아들 영광의 메시야 구세주이다. 나를 경배하며 영광을 내게 돌릴지어다”라고 주장하는 로마제국의 카이사와 그 제국의 지배집단에게 “아니다! 참메시야의 표징은 제국의 옥좌에 착석한자가 아니라 말구유 안에 강보로 쌓여 누워있는 자”이다 라고 대담한 주장을 한 것입니다. 진정한 영광의 메시야는 금관을 쓰고 권력과 부와 군대를 총지휘하는 카이사르가 아니라,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달린 그 분만이 참 메시야라고 선언하는 반제국, 반체제, 반황제숭배자들이 목숨걸고 증언하는 증언의 소리인 것입니다. 그것이 초대교회가 증언하고 사도 바울을 비롯한 첫 복음증언자들의 ‘복음선포’ 였습니다.
그 당시 세상눈으로 보면, 그들은 광신도이거나 지극히 어리석은 자들이거나, 혹세무민하는 신흥종교 무리들이거나 심지어 무신론자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눈에는 거슬리는 스칸달론이요, 헬라의 지혜인에게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삼박자 축복에 기적을 구하고, 금관을 쓴 지도자와 황금송아지를 보장해주는 지도자를 지지합니다. 교회당은 더 커가고 높이 올라가지만, 거기엔 말구유에 누이신 아기예수도 없고 선혈에 얼굴이 상하신 예수도 없습니다. 이단사냥에 충혈된 대심문관 무리들과 명예욕과 돈맛과 권력맛에 양심 을 화인맞아 스스로 하나님의 정통성을 지켜 보위한다는 천국근위병들만 득실거림니다.
둘째, 성탄의 비의는 성육하신 그 분 안에서 ‘은혜’를 보라는 멧시지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증언은 성탄절 소식의 핵심입니다. 그 단어가 너무나 세속화되어 본래 의미가 살아져 버렸습니다. 그 단어의 참 의미를 조금이라도 되찾아 맛보려면 감리교를 창시한 요한 웨슬레의 형, 곧 챨스 웨슬레의 작사곡 찬송가 105장 대림절 노래를 생각하면 좋습니다. 대림절이오면 105장 찬송가가 그렇게도 좋습니다. 챨스 웨슬레는 1744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죄로상한 우리 맘을 은혜로서 고치고.... 죄에 매인 우리들을 자유하게 하시네”.
은혜(grace, gratia, Xaritas)는 신비로운 영혼 치유의 물, 상처에 바르는 성유, 생명의 엑스선 빛, 영혼을 양육하는 신령한 젖입니다. 은혜는 종교적 감정이거나 물질적 축복이라기보다 인간영혼의 가장 내면 속에서 작용하는 모성적 신성의 어루만짐 입니다. 은혜가 임하면, 문둥병으로 문들어진 피부에 새살이 돋고, 고난과 시련과 배신당함으로 찢겨진 영혼이 맘의 평안을 얻게됨니다. 은혜가 임하면,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던 마음이 조용하게 가라앉고, 돌처럼 굳어진 암세포 살덩이가 부드러운 살로 변환됨니다. 은혜만이 종교적 광기를 사랑의 에너지로 바꿈니다. 은혜만이 동족의 삶속에 핵폭탄과 전쟁불길도 서슴치 않겠다는 님북한 전쟁광들을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셋째, 성탄의 비의는 그 분 안에서 진리를 맛보고 온갖 우상과 죄의 마성적 속박에서 해방받고 자유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진리(aletheia)란 형이상학적인 어렵고 난해한 철학적 진리라기보다는 진실 혹은 참에 더 가까운 어휘입니다. 그 사람 예수 안에서 비로서 참된 진실이 무엇인지를 보았고 알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 분의 말씀 가르침과 행위와 그분의 새인간성 안에서 자유를 얻고, 해방을 맛보았다는 증언입니다. 내면적 해방은 온갖 죄책감과 병든 심성에서 솟아오르는 독소를 해독시키는 과정입니다. 이기심, 우월감, 지배욕방, 우쭐거리고싶음, 자만과 자행자지 하고픈 방종, 자기멸시등이 다포함 되겠지요.
외면적 해방은 사회적 존재로서 내가 살아가기 위하여 권력과 금력에 아부하거나 묵종하고,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힘들이 우리를 우상숭배자로 만들경우에 쉽사리 양비론이나 양시론에서서 자신을 변명하는 스스로의 자기기만이 다 포함 되겠지요. 우리는 자유인 같지만, 인류역사 중에서 이중삼중으로 우리로 하여금 우상숭배자가 되라고 유혹하고 협박하는 문명시대에 살고있는 것입니다. 어느경우엔 법질서와 사회안정의 명분으로, 어느 경우엔 국가안위나 합리성으로 명분으로, 우리를 서서히 무능력한 소시민으로 만들어 타이탄니즘 거인족 종교숭배자로 만들어 버림니다
2010년도 다사다난한 해였기에, 여러 가지 일들이 우리 사회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천안함 침몰사건, 연평도 피폭사건, G20개국정상회의, 김장배추파동, 아시아 올림픽 매달획득 2등달성, 4대강 개발 감행이 원인이 된 국론 분열, 바로 얼마전 국회예상안 통과를 둘러싼 국제적 망신사건등등.... 그러나, 조용히 소란스런 일들을 제켜두고서 가만히 뒤돌아보면 그런 소란한 일들은 역사속에서 시간이 지나면 물거품 같이 살아지고 잊혀질 일들입니다.
청빈과 무소유로서 내면의 해방과 자유를 설법하고 그렇게 살고간 법정스님의 별세, 그리고 1970-80년대 우상이 횡횡하고 대중은 이성이 마비되었을 때 오로지 진실 그 한가지에만 충실함으로서 우상의 허상을 벗겨냄으로서 외면적 해방을 선구자로서 열고가신 지성인 리영희교수의 별세, 그 두분의 상실은 우리사회의 큰 손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만큼 다가오는 성탄의 은혜와 진리를 ‘광야의소리’처럼 메시야의 오실길을 준비시킨 다른 인물이 2010년 한국사회에 있을가요?
법정의 소리를 다시 생각합니다. “내 소망은 단순하게, 평범하게, 그러나 나는 나답게 살고싶다.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맑고 행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비구 선승 법정의 입을 통해 한국 그리스도교회에게 하시는 하늘의 말씀으로 듣고 싶습니다.
3세기 알렉산드리아 교부 오리게네스는 말하기를 말씀의 성육사건은 역사와 시간 속에서 단 한번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는 성자를 영원히 낳고 있다”고 말 했습니다. 13세기 영성신학자 마이스터 엑하르트도 비슷한 뜻의 말을 했지요. “성모 마리아만 아기예수를 그 자궁속에 수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우리 영혼 속에서 말씀을 잉태하여 아기 예수를 낳아야 한다.” 앞선 신앙선배들의 심오한 말씀이 우리 보통사람들에겐 이해하기가 쉽지않는 너무 어려운 말인것 같습니다만, 겉단어와 상징적 표현을 깨트려 말씀의 속 뜻을 이해하면, 성탄절이란 예수의 생일축하일로서 끝나서는 아니되고, 이 지구의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맘 속 말구유 안에서 아기예수가 태어나는 울음소리가 거듭 힘차게 울려나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올해 성탄절엔, 여러분의 마음 안방에서, 가정 식탁에서, 새길공동체 친교와 봉사안에서, 그리고 서해바다 연평도와 평양거리와 DMZ 철조망을 경계로 한 남쪽 북쪽 병사들의 초소 안에서, 아기예수의 맑은 울음소리가 울려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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