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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6:5-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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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아빠(Abba)가 우리의 하나님 이라니
(마태복음 6:5-13)
2011년 1월 2일 신년예배 말씀증거
한완상 형제
오늘 한국 크리스쳔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은 하면서도, 갈릴리 예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그 깊고 절박한 메시지는 우리 가슴에 와닿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대신 4세기 사도들이 교리로 다듬어낸 <사도신경>은 높이 받들어 모시는 것 같습니다. 콘스탄틴 대제 로마의 권력은 하나의 제국과 하나의 보편 교회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하나의 그리스도를 크게 부각시키고, 그것을 절대적 신조로 우러러 지키게 하였습니다. 숱한 이단 처벌을 치루기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새 질서에 대한 갈릴리 예수의 꿈과 비젼은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아왔거나 실종되고 만듯합니다. 그것도 한 두 세기 동안 만 그런 것이 아니라, 4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역사의 예수님의 그 꿈과 뜻을 새삼 우리의 삶에서 깊이 되새기고 그것을 뜨겁게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새길 공동체는 처음부터 주기도문을 갈릴리 예수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직업적인 성직자의 축복대신 예수님의 기도 뜻을 되새기고 그 실천을 다짐해 왔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저희들도 그 깊은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이제 새해를 맞아 더 나은 새 세상과 더 밝은 새 역사를 새롭게 소망하면서 우리는 주기도문에 녹아 있는 갈릴리 예수님의 마음을 새삼 헤아려 보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전쟁불사의 불길한 소리가 우리를 불안케 했던 작금의 우리 상황을 되돌아보며 갈릴리 예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의 그 놀라운 변혁의 동력, 그 비범한 비젼 그리고 그 결연한 다짐을 뜨거운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2011년에는 하나님 사랑나라의 모습이 보다 뚜렷하게 이 비극의 분단 상황에서 드러나게 되길 바랍니다.
먼저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여호와 신을 아람어로 아빠(Abba)라고 불렀을까요? 이 같은 호칭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아빠라고 예수께서 불렀던 하나님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 당시 기존의 하나님 호칭은 여호와이지요. Yahweh는 히브리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Yahweh란 신 칭호를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사실 히브리어는 거룩한 언어로 인식되었습니다. 공식적 예배도 히브리어로 진행되지요. 구약성서도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예수께서는 이 거룩한 공식언어인 히브리어로 하나님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일상적인 통용 언어였던 아람어(Aramaic)로 아빠(Abba)라고 불렀습니다. 신성한 예배언어가 아닌 일상 언어로 하나님을 불렀다는 것, 바로 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신 칭호에서 그의 독특한 속마음 또는 마음가짐(mind-set)을 헤아려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경건하고 가장 거룩하신 지존자를 일상적 씨알들의 보통 언어로 표현했다는 뜻이지요. 여호와 신은 저 높은 곳에 초월해 계시면서 위엄의 권좌에 계신 무서운 신이였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예수에게는 여호와는 일상의 씨알들의 삶 한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숨 쉬며 그들과 함께 애환을 나누시는 다정다감한 아빠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은 헬라화(Hellenization)의 흐름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가 형성 될 때 그 흐름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전승이 아람어로 수십년간 구전되었다가 그 구전전승(Oral Tradition)이 문자로 번역될 때는 히브리어로 번역되지 않고 헬라어로 번역 되었지요. 흥미로운 사실이지요. 히브리어는 유대인의 언어지만 헬라어는 이방언어였지요. 물론 그것은 당시 일종의 세계적 언어(Global Language)이긴 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대한 아람어로 된 구전전승이 헬라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아람어를 헬라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둔 표현들이 지금도 신약성서에 남아 있지요. ‘달리다쿰’, ‘에바다’, ‘엘리 엘리 나마 사막다니’ 등이 바로 그것들이지요. 그 중에서는 Abba란 아람어가 성서의 여러군데 나타납니다. 4복음서 모두에 그 표현이 나타나고 있지요(마태 26:39, 마가 14:36, 누가 22:42). 그리고 사도바울의 서신들에서도 나타납니다(로마 8:15, 갈라디아 4:6). 그러니 이 표현은 가장 예수다운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Abba가 예수님의 깊은 속뜻과 깊은 비젼을 담고 있는 아람어임이 틀림없습니다. 아람어로 남아있는 성서표현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의 절박한 심경과 심정을 담아 드러내기에 헬라 말로 번역해서는 예수님의 깊은 속 뜻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었다고 번역자들이 판단했을 것입니다. 마치 한국의 민중신학자들이 민중을, 그리고 민중의 한(恨)을 영어로 번역하지 않고 ‘Minjung’, 또는 ‘Han’으로 그대로 쓰는 것과 같습니다. 더더군다나 당시 유대 율법주의 문화의 빛 아래서 보면 여호와를 아빠로 부르는 것은 깜짝 놀랄 일이지요. 아주 보수적 유대신자들에게 그 소리는 천둥의 벼락처럼 들렸을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을 어린아이들이 자기 아버지를 부를 때 쓰는 칭호였던 Abba로 불렀던 것은 아주 독특한 일이요, 어떻게 보면 불경스럽게 들리는 호칭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같은 파격적 언어사용과 그 사용의 파격적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어린아이들에게 가장 가까이 있어, 자기들이 위급한 상황에 빠질 때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바로 줄 수 있는 분이 바로 그들의 부모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아버지가 바로 Abba였습니다(우리말로도 아버지보다 아빠가 더 친근하게 들리듯). 유대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저 멀리 저 높이 계시는 두려운 분이였죠. 어리어리한 천당의 옥좌에 앉아계시며, 그 곳에서 너무나 밝은 눈부신 빛을 쏟아내시기에, 밑에 있는 인생들은 감히 눈뜨고 똑바로 쳐다 볼 수도 없는 거룩하신 지존자, 신비로운 전지전능자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청년 예수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 우리 곁에서 우리 인간을 보듬어 안아주시고, 어깨를 다독거려 주시는 아빠나 엄마 같은 다정한 분이었습니다.
유대인 성서 신학자요 역사적 예수 연구자인 Geza Vermes는 예수의 신은 구약의 신보다 더 친근하고(less remote), 덜 초월적이며(less transcendent), 덜 무서운 분(less awesome)이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의 신은 인간들과 직통으로 소통하고 싶어하시는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신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보수적인 유대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일종의 스켄들 같은 ‘충격’일 수도 있지요. 실제로 갈릴리 예수의 말씀(주로 비유 말씀)에서 우리는 그 친근하게 소통하시는 Abba의 모습, 지극히 작고 연약한 씨알들과 동고 하시는 Abba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 빚 진자의 아픔을 동고하시며 그 빚을 탕감해 주시는 Abba.
- 오후 5시가 되어도 일자리 얻지 못해 비참해진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9시에 고용된 건강한 노동자들과 동일한 임금을 지불했던 Abba.
- 돌아온 탕아를 조건 없이 받아 주시는 Abba. 잘못을 시인하라는 각서를 결코 강요하지 않으시는 Abba. 그 탕아의 귀환을 기다리는 중, 어느 날 그 모습이 저 지평선에 나타나자마자, 버선발로 뛰어가는 엄마 같은 Abba.
- 원수 사랑하지 않고 이웃사랑한다는 것이 의미 없음으 깨닫게 해주시고 이같은 파격적 이웃사랑이라야 하나님 사랑의 표현임을 깨닫게 해주시는 Abba.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런 Abba의 마음을 가지라고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지 않겠습니까.
“너희들이 정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너희들의 주적부터 먼저 사랑하라.
그 사랑으로 너희들의 주적을 변화시켜라.
그러면 너희와 주적간의 관계도 변화 될 것이다.
그들이 너희들의 친구가 되면서
평화가 너희 땅에 단비처럼 내리게 될 것이다.“
이 같은 말씀을 2011년을 맞는 한국 크리스챤들은 벼락같은 하나님 소리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갈릴리 예수님의 당부이시기도 하지요.
새길의 예수따르미들은 바로 이 예수의 Abba가 놀라운 사랑의 힘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심을 지난 24년간 고백해 왔습니다. 우주만물과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끄시는 그 엄청난 힘이 저 외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면서 우리를 보듬어 주시고, 안아 주시는 Abba의 힘에서 나온다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이 우리의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의 첫 번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빠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되길 바라는 간구입니다. 왜 첫 번째 간구가 거룩함의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너무 친근해지면 거룩한 관계가 훼손되기 때문일까요? 실제로 하나님이 너무 친근해진다면, 인간들이 신을 업신여길 수도 있고 나아가 그 이름을 가볍게 여겨 그 권위를 손상시킬 수도있겠지요. 그런가하면 반대로 너무 거룩하게 되면, 친근하게 접근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도 사실 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간구는 Abba의 친근성과 소통성을 걱정해서 나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권위와 힘이 너무나 거룩한 것으로 믿어 인간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게 될 때, 인간은 그러한 거룩한 절대자를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아빠는 거룩할수록 더욱 두려워하지 않게 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천사 가브리엘이 놀란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을 알렸을 때 마리아는 떨었지요. 이때 천사는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느니라.”라고 용기를 불어 넣어 주셨듯이, 아빠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 라고 격려해 주시는 절대자이십니다.
정말 성스러운 지존자는 무서운 절대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귀신을 무서워했습니다. 그것이 달걀 귀신이든지, 처녀 귀신이든지, 두렵기만 했지요. 왜냐하면 그 귀신들에게는 진정한 거룩함이 없기 때문이지요. 진정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지요. 공포와 고통만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아빠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귀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막강한 힘으로 우리를 심판한다고 믿게 되면, 역설적으로 인간들은 그 신의 힘을 빌어 이기적으로 악용하게 되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잔인했던 폭군이나 독재자들이 ‘거룩하기에 막강한 신의 권세’를 빌어 그들의 잔인한 짓을 합리화 해왔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때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십자가를 앞세워 대량학살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알라신의 이름으로 자살폭탄 전사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면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신흥종교와 사이비 종교 교주들은 신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신도들을 착취하고, 억압하고, 기만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 개신교 안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남의 땅을 땅밝기 하는 오만한 행태를 보였는데, 이는 아빠의 이름을 더럽히는 짓이라 하겠습니다. 이 모든 종교적 악행이 바로 아빠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짓이지요. 주기도문의 첫 번째 간구가 바로 이 같은 종교적 악행을 근본적으로 그만 두라는 지엄한 명령 아니겠습니까. 종교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지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반인륜적 범죄행위가 버젓이 저질러질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아빠 하나님을 가장 슬프게 하는 일임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길 제일 먼저 간구하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Abba의 사랑이 친근할수록 존경의 마음과 반드시 함께 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원래 진정한 사랑은 두려움보다 존경의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자기비움에서 오기 때문이지요. 비움의 실천, 양보와 사양의 실천, 우아한 패배의 선택이 상대방을 감동시키기 때문이지요. 이 감동은 자연히 상대방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기적 사랑은 대체로 거부반응을 일으키지만, 이타적 사랑 곧 자기 비움의 사랑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저절로 고개 숙이게 하지요. 무서워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비움의 사랑이 주는 힘 앞에서 감동하고 감탄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지요.
저는 1980년 5월 12일 오후 늦게, 뼈를 깎는 고통으로 신음하신 끝에 소천하신 어머님 시신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투병하실 때의 그 괴로워했던 딱한 모습은 말끔히 사라지고 천사의 얼굴로 평안히 누워계신 어머님의 그 얼굴을 보고 저는 한편으로는 어머님의 영의 몸이 주님과 함께 있으리라 믿었기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님 곁에서 동고하지 못했던 불효자 자신을 나무라고 있었지요. 특히 어머니 얼굴의 주름살을 헤아려 보며 어머님의 사랑을 가슴 시리게 헤아렸습니다. 불효자식 용서해 달라는 기도와 함께 그 주름살 앞에 고개를 깊게 떨어뜨리며 자괴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님들도 올해 설날에 부모님을 뵙는다면 그 주름살을 새삼 헤아려보면서 고개 숙여 부모님께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 주기도문의 간구는 아빠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바라는 간구입니다. 크리스챤들은 대체로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가는 천당으로 알고 있지요. 갈릴리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지금> <여기서> 세워야 하고 키워가야 할 사랑의 새 질서임을 깨우쳐 주셨지요. 비록 그 일이 엄청나게 어렵다하더라도 말입니다. 이 세상의 권력이 사랑질서를 거칠게 거부한다 하더라도 <지금> <여기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하기야 우리 인간들만의 힘으로는 아빠의 사랑나라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저희들의 손을 마주잡고 함께 이 종말론적 작업을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사랑나라를 세우는 일은 기존의 세상 권력체제가 탐욕과 독선에 근거하고 있는 한 그것을 대치 할 수 있는 또 대치해야 하는 대안적 작업이기에 그것은 항상 종말론적 활동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과연 아빠의 사랑지배질서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이룩해 낼 수 있는 일인지를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빠 나라는 이미 지금, 여기서 이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 완벽한 모습, 그 완성된 모습은 아직도 우리 역사현실과는 멀리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 아빠나라는 <already>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뤄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not yet>이라는 미래의 일이기도 합니다. Schweitzer는 철저하게 <not yet>의 입장을 따랐다면 Dodd는 <already>의 입장을 존중했습니다. 갈릴리 예수께서는 이 두 사이에 끼어 있는 아빠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모두 이해 하셨습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누가 11:22)는 말씀에서 예수님의 귀신 쫓아내는 선교활동이 바로 아빠나라를 우리 속에 임하게 하는 일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활동과 열린 밥상공동체 활동도 아빠 하나님의 사랑실천과 그에 따른 평화와 평등의 실현을 뜻했습니다. 그리고 온갖 억울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기쁨을 서로 뜨겁게 나누는 일 곧 아빠 사랑나라의 주인이 되는 기쁨을 누리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현실에서는 비록 그것이 부분적인 성취이긴 하나 이미 여기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물론 그 완벽한 모습은 미래로 미룰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재림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우리의 최선의 선택은 아닙니다. 언제 그날이 올지 모르지만, 그날까지 우리의 육신의 몸이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지금> <여기서> 원수사랑으로 하나님 나라 주인이 되는 기쁨,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을 함께 나누고 누려야 합니다. 평화만들기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을 또한 함께 나누고 누려야 합니다.
주기도문의 전반부 곧 아빠이름 거룩하게 하는 일과 아빠사랑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고 노력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간구입니다. 나머지 반은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간구입니다. 일용할 양식의 문제, 빚 탄감과 용서의 문제, 시련과 시험을 이겨내는 문제 등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우리가 간구해야 할 일,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주기도문의 전반부를 마치면서 저는 예수님의 아빠를 우리말로 하나님이라 해야 좋은지 하느님이라 불러야 되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의 신이 아빠(Abba)같은 신이라고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우리에게 친근히 다가오시기를 원하시면서 오늘도, 스스로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다가오시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사랑의 신임을, 우리는 한 순간이라도 잊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Abba 하나님’이라 해도 좋고, ‘Abba 하느님’이라 해도 좋습니다.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신다는 뜻으로 하나님을 부른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스스로 유일신의 권위를 내세워 세상의 모든 이웃종교를 무시하는 뜻으로 쓰인다면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를 떠나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Abba를 슬프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하늘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어 인도하시는 분, 그리고 하늘처럼 넓게 그 사랑을 펼치시어 의인이나 악인 모두에게 햇볕과 비를 허락하시는 분으로 하느님이란 칭호를 사용하시면 그것도 아름다운 일이지요. 우리가 독선과 탐욕을 거부하고, 사랑으로 평화와 공의를 세우시는 분을 우리의 신으로 모신다면, <아빠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제일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구지 ‘하나님’ 또는 ‘하느님’이란 우리말을 표현하고 싶다면 ‘Abba 하나님’, ‘Abba 하느님’으로 쓴다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Abba를 빼고 쓴다면, 어느 표현이든 아빠처럼 우리들과 친근하게 소통하시길 원하는 사랑의 지존자가 바로 우리의 창조주요 역사 주관자라는 인식을 더 철저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둘째로 저는 주기도문이 아빠의 사랑지배가 이뤄지길 원하는 기도이기에, 그것은 본질적으로 주술적기도와 다르다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싶습니다. 주기도문은 값싼 축복을 간구하는 이기적 기도가 결코 아닙니다. 주술적 기도는 항상 이기심과 탐욕과 독선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항상 이타적 사랑에서 나옵니다. 주님께서 체포되기 직전, 그 처절하게 절박했던 순간 드린 겟세마네 기도를 보십시오. 거기에는 아빠 하나님에게 간곡하고 간절하게 드리는 그의 기도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빠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는 철저한 이타적 기도, 자기비움의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비움의 기도이기에 그것은 이기적, 탐욕적, 세속적 주술의 기도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너무 값싼 성공과 승리와 축복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기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지요. 한국 교회가 비움의 주기도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스스로 마술적, 사술적 천박한 종교기관으로 변질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 사탄의 세 가지 유혹은 모두 주술적 힘으로 탐욕을 실현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것이 경제적 부든, 세상을 호령하는 권력이든,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 다는 신통력을 보여주고 싶은 종교적 욕망이든, 그것은 모두 자기 채움 자기 과시의 탐욕을 추구하는 주술적 소망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모든 주술적 유혹을 철저하게 물리치셨지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비우는(부인하는) Abba 사랑의 힘으로 우아하게 패배하기로 작정하셨지요. 바로 이 같은 스스로 자기를 비우는 사랑의 힘으로 그는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비움의 사랑 없이 부활은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결연한 믿음입니다.
끝으로 Abba 나라 위한 기도는 대안적(代案的) 새 질서를 세우려는 종말론적 기도요 노력이요 헌신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탐욕의 질서에 대한 대안으로 비움의 질서를 세우고,
독선의 질서에 대한 대안으로 포용과 관용의 질서를 세우고,
무력이나 완력에 의한 승리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우아한 패배를 선택하여 상생과 상승의 새 질서를 세우는 일입니다.
악순환은 여기서 끝장나는 것입니다. 사랑의 선순환으로 평화와 정의를 누룩처럼 번지게 하는 일이 바로 Abba 나라의 지부인 교회 공동체가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이 Abba 나라는 언제나 골고다 언덕위에 우뚝 서 있습니다. 저 로마의 우람한 판테온 신전이나 저 예루살렘의 웅장한 성전 안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제 신묘년(辛卯年)을 맞아 우리 새길 공동체는 Abba를 우리 가운데 모시는 Abba의 사랑공동체로 거듭나야 합니다. 사랑으로 서로 소통하며, 그 Abba 사랑에 잇대어 사는 신나는 기쁜 삶이되어야 할 것입니다. 갈릴리 예수의 Abba가 바로 우리의 Abba임을 깨닫고 그 Abba와 직통으로 소통하여 은혜 받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신묘년 첫 주일 제가 드리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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