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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34: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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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
본문 : 시편 34편 1 - 22절
독일의 음악가이자 독실한 신앙인인 하이든이 한 번은 저명한 예술인들이 모인 자리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경제적 고통이나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 때의 고민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화제의 쟁점이었다고 합니다. 모두다 한마디씩 하다가 하이든의 차례가 됐습니다. 하이든은 신앙인답게 “내 집에서 나는 작은 골방을 기도실로 정했습니다. 일에 지쳤을 때나 고민이 시작되면 나는 그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방에서 나올 때는 작은 빛을 발견하고 나옵니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우리의 삶에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기도실이 있고, 기도가 있는 한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이든처럼, 다윗처럼 곤고한 날을 축복의 날로 바꾸면서 살아갑시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욥36:15)
`월가의 전설`로 불려온 억만장자 투자가 존 템플턴 경이 7월 8일 향년 95세로 별세했습니다. 영국계 미국인 실업가인 템플턴은 종교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1972년에 제정하여, 매년 전 세계 범종교인 중에서 최고 지도자에게 시상과 함께 막대한 상금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제 1 회 수상자는 인도의 살아있는 성자로 꼽히는 테레사수녀, 그리고 이후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 파키스탄의 회교지도자 이나물라 칸 등이 수상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1992년에 한경직 목사가 수상을 했습니다. 템플턴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개인의 명예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교계의 명예이기도 했습니다. 이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63빌딩 코스모스홀에서 템플턴상 수상 축하예배를 드렸는데, 이 자리에서 한경직 목사는 뜻밖에도 자신은 일본 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한 목사이므로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내용의 고백을 했습니다.
일제 시대 때의 신사참배 문제는 일제시대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커다란 쟁점이었고, 이로 인해 우리나라 기독교가 분열이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신사참배와 관련해서 공개적으로 발언을 한 적이 없었는데, 가장 청렴하다고 존경과 신망을 받고 있는 한경직 목사의 이 같은 회개는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90세의 나이까지 그의 가슴속에 묻어놓았던 자신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려하지 않고 오히려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합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의 족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한 마태복음 1장을 살펴보면, 거룩해야할 예수님의 족보는 인간의 온갖 추악한 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시편을 지은 다윗을 거기에는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 1:6)
다윗의 부인이자 솔로몬의 어머니를 다윗의 아내라고 하지 않고 바로 우리야의 아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인 다윗이 충복 중의 충복인 우리야의 아내를 간음했다는 다윗의 일평생을 통해 가장 감추고 싶은 치부를 성경은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삶속에서 두 번째로 감추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바로 오늘 본문인 시편 34편의 배경일 것입니다.
시편 34편의 제목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당시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후 하루가 다르게 위상이 높아지는 다윗을 시기한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로 작정하자 다윗은 피신을 떠나는데, 당시 아비멜렉이라 불리는 블레셋 국가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망명을 합니다. 즉 사울을 피해 도망을 한 곳이 이스라엘이 아닌 적국 아비멜렉이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적국으로 망명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적국으로 망명한 다윗은 갑자기 미치광이 짓을 합니다. 다윗이 미친 척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윗의 소문이 즉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21:11)“라는 다윗을 향한 칭송이 그곳 가드까지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망명국의 아기스 왕의 신하들은 왕에게 다윗이 이곳에 망명한 것에 대해 의심을 합니다. 이에 다윗은 가드 왕 이 혹여나 자기를 죽일까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 앞에서 미친 체하며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는 미치광이 흉내를 냅니다”(삼하 21:12-13). 적국의 신하들조차도 두려워할 정도로 온 이스라엘이 칭송해마지 않던 용맹한 다윗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미치광이 흉내를 내는 비참한 모습만이 보입니다. 이에 아기스 왕은 미치광이 다윗을 쫒아냅니다. 쫓겨나는 다윗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목숨을 부지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기뻐했을까요? 아니면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까요?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1절)
다윗은 미치광이 짓을 해서라도 목숨을 부지 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한탄 또는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항상 여호와를 송축하고 앞으로도 찬양하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9절)라고 합니다. 의외입니다. 본문은 예를 들면 일제 강점기 당시 신사참배를 강요당하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또는 위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어쩔 수없이 이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하고 나오면서 성도들을 향해 “나는 하나님을 항상 송축했고 앞으로도 찬양하겠으니, 여러분도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십시요”라고 당부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성도였다면 저는 “목사가 되어서 순교라고 각오해야지 그깟 위협이 두려워서 신사참배를 한 주제에 어떻게 우리를 향해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는지 참 뻔뻔한 사람이네”라며 비난했을 것입니다.
아기스 왕이 혹여나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서 미치광이 노릇을 하다가 쫓겨난 다윗은 요단 서편에 위치한 아둘람에 있는 한 굴로 도망쳤습니다(삼상 22:1). 그런데 성경은 굴로 피신한 다윗의 소식을 들은 형과 아버지 식구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다가왔고 나중에는 400명이나 되는 큰 무리를 이루었고, 다윗은 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합니다(삼상 22:1-2). 이스라엘에서 가장 용맹한 다윗이 사울 왕의 추적을 피해 적대국으로 망명을 했는데, 거기에서 목숨에 위협을 느끼자 침을 질질 흘리는 미치광이 짓을 해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는 소문이 인근각처에 다 퍼졌을 것인데, 어찌 보면 비겁자인데, 사람들이 이러한 다윗에게 몰려들었다는 이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다들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구태여 비겁자 낙인을 찍어도 괜찮을 다윗에게 몰려들었나가 궁금해집니다. 바로 이에 대한 답변을 오늘 본문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당시 아기스 왕이 혹여 자신을 혹여 어떻게 할까 두려워했습니다. 이 두려움에 그는 미치광이 흉내를 냈고 이로 인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다윗이 미치광이 흉내를 내면서 다윗은 결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이런 최악의 상황까지 몰아간 사울 왕,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4절)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6절)
다윗에게 엄습해온 두려움 속에서도 여호와께 간구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침을 질질 흘리는 미치광이 흉내를 내면서도 얼마나 애절하게 하나님께 간구하며 부르짖었는지 모릅니다. 분명 성경에는 아기스 왕이 이러한 미치광이 다윗이 자신의 성에 있다는 자체를 심히 불쾌히 여기며 내쫓으라고 했다고 되어있는데 다윗은 자신을 환난에서 구원하신 주체가 자신의 지혜 또는 아기스 왕이 아닌 하나님이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눈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현실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최악의 상황이고 상대방이 나를 도와주어야만 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 또는 사람에게 매달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은 하나님만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역사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의지합니다. 자기 자신이나 사람만을 바라본 사람이라면 미치광이 흉내를 내고 이로 인해 목숨을 부지했다면서 자신을 참으로 지혜가 많은 사람이라고 자화자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본 사람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이시었다고 하나님을 송축하며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다윗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15절)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다도”(17절)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18절)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는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19절)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서 하나도 꺽이지 아니하도다”(20절)
다윗은 자신을 “의인”이라합니다. 의인을 본문의 표현으로 하자면 “혀에서 악을 금하고 입술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르는 사람”(13-14절), 즉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을 칭합니다. 바로 다윗이 이와 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에 비록 그가 적진으로 망명을 했고, 미치광이 흉내를 내어서 쫓겨나 아방궁전이 아닌 어두컴컴한 아둘람 굴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로 온 이들은 환난 당한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다윗이야 말로 자신들의 처지와 상황을 잘 이해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 무리를 향해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3절)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9절)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11절)
사울의 죽음의 위협을 피해 도망자인 다윗은 늘 자신이 처한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깊이가 더 깊어지는 신앙의 성숙을 도모했고, 믿음의 깊이가 깊어지는 만큼 그의 주위에는 그를 신뢰하는 사람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한경직 목사님이 만약 신사참배한 죄인임을 한탄만 했다면 결코 우리가 아는 한경직 목사님이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때의 일을 계기로 매일 같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깊이를 더해가는 삶을 사셨습니다. 즉 그는 일평생 자신의 죄인됨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혀에서 악을 금하고 입술에서 거짓말 금하고,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기에 오늘날의 한경직 목사님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과연 우리는 위기의 순간 가장 먼저 무엇에 의지할까요? 만약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이라면 무엇을 먼저 생각할까요? 누구나 본능에 충실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능도 훈련에 따라 변합니다. 불을 겁내는 맹수들도 조련사의 훈련으로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링을 향해 망설이지 않고 돌진합니다. 그런데 맹수들이 이같이 할 수 있는 것은 훈련을 통해 조련사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에 가능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미 경험했던 또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상황은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를 두렵게 할 수도 또는 비참한 모습으로 전락시킬 수도 또는 원통함과 비통함을 가슴 가득하게 채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는 시편 말씀을 통해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고 간구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인들의 간구와 외침을 듣고 반드시 구원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의인이라 칭하셨기에 의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나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인으로서 혀에서 악을 금하고, 입술에서 거짓말을 금하고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상황에 억매이지 않게 되며, 오히려 이 상황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깊이가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며, 이들과 더불어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만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깊이가 어제보다 더 깊어지고 사람을 향한 사랑의 넓이가 어제보다 더 넓어지는 오늘이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본문 성경은 그 성격을 밝혀 놓은 것처럼, 다윗이 사울에 추적을 피하여 아비멜렉(아브라함시대의 부족의 후예) 에게 일시적으로 피신(避身)을 하였으나 아비멜렉을 믿을 수 없기에 그 앞에서 미친척하여 그를 안심(安心)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서 위기의 때를 넘긴 후에 자기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노래한 시(詩) 입니다.
그러므로 위기의 때를 당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다윗의 시를 통하여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동일하게 체험(體驗)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다윗의 시(詩)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詩)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본문 1절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頌祝)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여호와를 항상 송축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환란을 당하여 힘들 때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에 은혜를 늘 덧입고 살아가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찬송생활을 앞으로도 계속하여 살아갈 것을 마음에 다짐하고 있습니다.
곤고한 자들은 고난과 환난으로 말미암아 주님 앞에서 낮아진 자들로 이들은 자신을 믿지 않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뢰하는 성도들이기에 자기들도 다윗처럼 주님의 돌보아 주시는 은총을 받을 날이 이를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지어다”(시68:26)
본문 2절입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고전1:30, 31절에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하였습니다.
다윗은 다른 성도들도 함께 크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의 이름을 높이자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도우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영혼이 자랑하며 살 것을 선언합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간증이 듣는 자에게 위로가 되며 기쁨에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겪게 되는 신앙적 간증들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를 듣는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서 어려운 위기를 극복하는 힘과 능력을 덧입게 되어 승리한 삶으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합시다.
본문 3절입니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사람이 하나님을 크게 높일 수 없으나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그대로 위대하시다 찬송하고자 함으로 이런 찬송을 위해서는 자기는 부족함을 느껴 겸손히 낮아지므로 하나님을 높이는 말씀대로의 삶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윗은 자기와 함께 여호와의 크심을 노래하며 이름을 높이자고 사람들에게 요청합니다. 그 이유는
본문 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현대인들에게 두려움은 육체적 혹은 정신적 질환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두려움으로 인한 질병에 시달리기도 하며 두려움 그 자체로 죽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한 예로 2차 세계대전중 전장에 나가 죽은 미군의 수가 30만 명인 반면에, 아들이나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고 불안과 두려움에 떨다가 심장병으로 죽은 미국인의 수가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또한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전쟁 때 겪었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폐인이 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 공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정이 아니라 사탄이 주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라고 노래합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는 자는 어떤 두려움도 가지지 않습니다(시 112:7).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성도들은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두려워하기 전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서 기도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현명한 삶의 자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사 모든 두려움에서 건지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이 간구하였다는 말은 간절하게 계속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행위로써 언제나 기도는 간절해야 응답이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11:8)
이 간절한 기도의 응답을 우리 주님이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신앙이 좋은 다윗도 아기스 왕이 골리앗을 죽였던 자기를 알게 될 때 두려워하였으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한고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아기스 왕에게서 하나님이 건져주셨습니다.
성도들도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두려운 존재를 만날 수 있으므로 그런 때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하므로 그 두려운 존재로부터 건져주시는 응답의 은혜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시91: 2, 5- 7)
다윗은 성도들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앙망하면 신령한 은혜를 입게 되어 부끄럽지 않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윗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윗의 간증을 들은 모든 사람들도 여호와의 이름을 광대하시다 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이 주를 앙망하는 모든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주의 광채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말하기를,
본문 5절입니다.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고 함으로서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응답을 받음으로 그 얼굴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성도들도 자기와 같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항상 간구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다윗의 말을 듣고 주를 앙망하는 곧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자들은 광채를 내는데 이는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신령한 은혜로 근심 걱정하지 않고 심령의 평안을 누리는 모습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자들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소망은 성령님의 인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5)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곤고한 자리에 빠진 다윗이 부르짖으매 곧 소리를 지름보다 심령의 간절함으로 간구할 때 하나님이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다윗이 곤고한 중에 사람이 도와줄 수 없어서 오직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의 모습을 볼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너무나 온전치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간절한 부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떳떳이 나아갈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구주 되시는 “예수” 그 영화롭고 보배로운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시기를 조금도 주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얼굴을 부끄럽게 아니하십니다.
본문 6절입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부르짖음은 애원이고 기도이며 요구인 것입니다. 기다리기도 어렵고, 지체할 수 없을 때 부르짖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것은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다급한 일이 있습니까?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까? 지체 말고 눈물로 부르짖읍시다. 이런 부르짖음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응답받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시18:6)
마찬가지로 욥도 간절히 부르짖었으므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로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
“나는 햇볕에 쬐지 않고도 검어진 피부를 가지고 걸으며 회중(공회) 가운데 서서 도움을 부르짖고 있느니라”(욥30:28) 또한 요나도 물고기 뱃속에서 받는 고난을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구원해주셨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욘2: 2, 10)
다윗은 곤고한 중에도 주를 경외하는 성도들을 위해 여호와의 천사들이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신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이 간증은 곧 우리들의 간증이 될 것입니다. 다윗을 부끄럽지 않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님을 더욱 부끄럽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믿으며 그 안에서 죄 사함을 얻는 진리를 마음에 믿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자격을 가집니다.
본문 7절입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여호와의 사자인 천군 천사들이 우리를 둘러 진치고, 주의 거룩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사 우리를 온갖 어려움에서 건져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하여 무수한 천서들을 거느리고 계신 사실을 알 때에 우리의 신앙이 굳어진다.” (칼빈)
“우리는 이점에 있어서 천사를 믿는 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방편으로도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다.” (박윤선)
본문 8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세 사람이 서로 바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책에서 읽어본 바다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바다란 정말로 좋은 곳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옆 사람은 피서차 다녀 온 바다를 떠올리며 찰싹대는 파도와, 시원한 물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은 끝까지 듣고서 이렇게 입을 열었습니다.
“자네들은 진정 바다를 아는 것이 아니네. 책에서 본 바다도, 물놀이를 하던 얕은 바닷가도 바다를 말하기엔 불충분한 것들이지. 나는 얼마 전 바다를 탐험할 기회가 있었네. 정말 저 바다 깊은 곳의 물고기와 수초, 생명이 꿈틀거리는 곳, 끝이 없는,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차마 입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곳이 바다라네.”
참으로 직접 해저를 탐험한 자의 바다에 대한 감격이 다른 이와 어찌 같을 수 있으랴. 이처럼 성도라면 누구나 주님을 알기는 알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 주님을 진정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자일까요?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도 직접 만나 그분을 체험한 사람들이 있고 구경꾼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소문만 듣고 비난을 일삼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지 않고는 또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해 보지 않고는 신앙의 감격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기도로 말씀 안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2:4)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2:3)
다윗은 자신이 곤고한 중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기에 성도들에게 맛보아 알지어다 말하며 참으로 하나님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수가성의 여인이 부끄러운 삶 때문에 낮에 물 길러 갈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자랑하며 전도하였습니다.
수가성의 여인은 여호와의 선하심 곧 인자와 긍휼과 새롭게 하사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 되게 하시는 은혜를 맛보았으므로 다윗처럼 메시야에게 나오라고 전하였습니다.
수가성의 여인은 육신의 목마름이 아니라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하였으므로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람들에게 생수를 맛보아 알라고 전도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 곧 두려워 섬기면 하나님이 함께 해주셔서 부족함이 없게 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성도들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권하면서 경외하는 자에게는 그의 생명과 삶을 책임져주시므로 부족함이 없도록 복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번 기도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십시오! 그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본문 9, 10절입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주실 때 부족함이 없도록 항상 인도하시며 은혜 베풀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이 도우실 때 전능하심으로 도와주시므로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 1, 2)
다윗은 사자처럼 남을 해하고 탈취하는 자는 부족할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성도는 부족함이 없어서 주리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성도들에게와 그의 자녀 손들에게 창조주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이며 성도가 받은 사랑을 나누어 줄 때 하나님이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시37: 24- 26)
본문 11, 12절입니다.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다윗은 성도들에게 자신이 믿고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려고 와서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성도들에게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가르칠 것이니 와서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며 하나님 섬기는 법을 배워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법궤 앞에서 만나시고 말씀해주시겠다고 하셨으므로 언제나 제단에서 흘러나오는 생수를 마시듯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25:22)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그 말씀으로 자신과 듣는 자를 구원하도록 해야 합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4: 16)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법도대로 행하므로 살고 은혜 받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10: 1, 2)
여러분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가르침처럼 나는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을 가르칠 것입니다. 참으로 생명을 사모하고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는 들으십시오! 듣는 자에게는 성령의 깨달음이 있기를 예수님께 기도드립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참 된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소원하라고 하십니다. 성도들은 세상과 함께 하는 생명은 죽을지라도 주님과 함께 하는 생명은 영원함을 믿고 이 영생하는 생명을 사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들은 연수를 사랑하여 곧 장수하기를 원하여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복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복을 받기 원한다면 악한 말과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본문 13, 14절입니다.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혀를 악에서 금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하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복락은 그 혀를 쓰기에 달렸다고 하였습니다. 혀를 잘 쓰면 축복을 받습니다.
어떻게 쓰는 것이 혀를 잘 쓰는 것인가? 악을 금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악이 무엇입니까? 죄는 하나님을 떠난 것 또는 믿음에서 떨어진 것! 곧 불신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 그러면 악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죄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악은 행동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혀를 악에서 금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모든 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불신자들이나 흉악한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지....” 그러나 실상은 우리가 악한 말을 자주 쓰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무시하는 일들에서 많은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 능력을 무시하는 말들입니다. 하나님이 된다고 하는데도 믿지 아니하는 말들입니다.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이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선악과에 대한 경고에 말씀을 믿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아담을 속여서 둘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혀의 악입니다.
구약의 엘리사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아합 왕의 군대장관은 믿지 않고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느냐”고 오히려 엘리사를 모욕하였습니다.) 그는 엘리사의 말한 대로 그것을 보기는 하되 먹지는 못하고 성문에서 백성들의 발에 밟혀 죽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없었던 영적 소경과 같은 유대의 제사장과 율법사와 서기관들은 구약을 읽으면서도 그 안에 계시된 구주를 알아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참 구원의 생명을 자기들 앞에 보면서도 자기들의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들은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자기들의 죄에서 구원을 얻게 하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이 믿으면 된다고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믿느냐고 부정하며 내 벧는 말이 혀의 악입니다. 죽어라. 죽인다. 죽일 놈. 망할 놈. 염병할 놈. 등등 저주하는 말들이 혀의 악입니다. 네 입술의 궤사한 말을 금해야 합니다. 거짓말, 사기 공교히 꾸민 이야기, 이단 사설, 이익을 얻기 위하여 속이는 각종 말. 등이 궤사한 말에 속합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르십시오! 악은 여호와를 떠난 것이며 등진 상태라고 한다면, 선은 여호와를 향한 것이며 가까이 가는 삶의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악을 버리는 적극적인 방법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은 곧 화평을 찾아 따르는 것입니다. 화평을 찾아 따르라는 말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화평할 일을 생각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인 너와 나의 관계에서 화평할 일을 찾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과의 관계에서의 화평을 찾아 행하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혀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람을 부정하게 만듭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15: 18, 19)
사람의 혀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을 지옥 불에 들어가게 만듭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3:6)
사람의 혀에서 나오는 거짓말은 마귀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마귀와 함께 망하게 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15)
하나님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므로 화평을 이루는 성도가 되어야 부족함이 없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라면 악을 버려서 기도의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 21, 22)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성도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선한 삶을 살아야 하나님이 보시고 부족함이 없게 해주십니다. 선을 행할 때 화평이 이루어지므로 의인은 화평을 이루기 위하여 힘써 선을 행해야 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하나님은 악한 세상에서 선과 화평을 좇으려 하는 고독한 의인들을 돌아보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여호와의 눈이 의인을 보심은 의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눈이 의인을 보심은 의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눈이 의인을 보심은 하나님은 의로운 일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과 화평을 이루려는 의인들에 대하여 악을 행하는 자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시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와도 원수를 맺어서는 안됩니다. 여호와의 눈이 의인을 향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며, 그 귀는 저희의 부르짖음에 기우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늘 귀를 기우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향하여 살고 있다면 우리가 곧 의인이며, 여호와의 귀는 의인을 향하여 귀 기우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소원을 부르짖어 기도하면 들으실 것을 마음에 믿으십시오!
본문 16, 17절입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나의 소원함을 들어주소서!”
하나님은 의인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되나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건지십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24: 16)
본문 18절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해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2월 중순부터 3월 한 달간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이란 부활주일부터 앞으로 세어 주일을 제외한 40일 간의 기간을 말합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은 언제나 수요일로, 그날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고 불러 특별한 회개의 날로 삼았습니다. 구약 시대에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던 전통을 살려 참회를 하며 정절을 지키기로 약속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고기를 금하고 금식을 하는 등 절제하는 생활을 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고 그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부활절이나 고난주간 정도만 의미 있게 보내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라고 평가받는 요즘 세대에 사순절을 기억하고 지키기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이 기간에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면서 기도하며 회개하는 일을 통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깊은 고난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부활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많은 시간 기도에 힘쓰면서 경건 훈련을 통해 사순절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라도 지은 죄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시며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하나님은 세상에서 의인이 고난을 많이 당하지만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십니다. 그러므로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 고 하셨습니다. 중심에 통회함을 가져야 합니다. 통회함을 누가 가질 수 있습니까? 자기의 허물과 죄와 믿음 없음을 보는 사람입니다.
주여 나에게 통회하는 마음을 주소서!
본문 19절입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이 세상의 악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들이 비록 많은 고통을 당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자는 세상에서 핍박을 받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침내 건지신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히2:18, 약1: 12)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12:7)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으면 구원 받는 복 된 자가 되게 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 12- 14)
의인은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많다고 하십니다. 즉 여호와의 신앙을 지키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삶은 힘들고 어려움을 말씀하심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에서 건지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성도는 두려워하지 말고 구원을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본문 20절입니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하나님은 의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신다고 하심으로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아니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과 같은 의로운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임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주께서 지키실 것입니다.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19: 31- 34)
이 말씀은 성도가 실패하는듯하나 적어도 영적 의미에서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은 그의 지은 죄로 인하여 벌을 받아 죽게 하시지만 그의 종들 곧 의인의 영혼을 속량하시므로 구원 받기 원하여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않습니다.
본문 21, 22절입니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우리는 원수를 친히 값을 필요가 없습니다. 악인이 악인을 죽일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의인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자기들 악인들에 의하여 그 죄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친히 원수를 값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손에 맡기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원수를 악인으로 하여금 값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은 자기가 지은 죄악으로 인하여 죽게 하십니다.
“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로 되돌리시며 그들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그들을 끊으시리로다”(시94:23)
하나님이 악인의 죽음을 내버려두심은 의인을 미워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들 곧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므로 의인들이 세상에서 악인들과 같이 죽는 것 같으나 실상은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하나님은 비록 죄인일지라도 그에게 피하여 오는 자들을 벌하지 아니하십니다.
할렐루야! 영광이 우리 아바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에게 영원하실지어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주께서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의 염려할 바는 단 한 가지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행하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호와를 송축하십시오. 주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을 받는 비결은 이제 결론이 얻어졌습니다.
첫째, 여호와의 이름을 날마다 시시 때대 마다 송축하는 생활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누가 송축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아는 사람입니다. 누가 그 은혜를 깨달아 압니까?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거나 좋아지게 되는 것은 사랑이 생겨날 때 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성령이 임하여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으로만 깨닫고 느끼고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성령의 충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주여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시옵소서!
둘째,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사람의 복락은 그 입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그 입의 열매로 배불린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입에 성령의 거듭남이 일어나게 하여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시다. 이사야는 자기의 부정된 입술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새롭게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은 그의 입을 하늘나라의 화롯불의 인두로 지져주셨습니다. 이후부터 이사야의 입에서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의 선언이 예언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예레미야 에스겔 등 많은 선지자들에게도 비슷하게 일어났었습니다. 우리의 축복의 비결은 주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입술의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주여!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 거룩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는 한 그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값이 없고 풍성합니다. 그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주시기 원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믿음의 소유자에게도, 죄인 중의 괴수에게까지도 관심을 두고 들어주십니다. 이 곤고한 사람은 연약한 사람입니다. 빈털터리입니다. 쓸모없이 된 사람입니다. 지친 사람입니다. 절망에 처한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곤고한 사람이라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샘이십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9- 10절)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이 곤고한 자리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환난에서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는 것으로 채워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온갖 고난의 자리에서 구원하여 주셨기에 그는 항상 감사 찬송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자들을 어렵게 하고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며 시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이겨가려면 온갖 고난이 다가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백성들을 언제나 돌아보시고 귀를 기울여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구원해주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은혜 베풀어주시는 그 맛을 맛보아 아는 자라면 하나님께 사랑 받기 위하여 더욱 가까이 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감사해서 찬송하며 한편으로는 항상 자신을 돌아보며 통회하는 심령이 되어 구원의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사망의 구덩이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이 찬양이 우리의 입술에서 끊이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험한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두려움을 가지지 않도록 인도해 주소서. 세상의 두려움이 엄습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 자신을 믿기보다는 하나님 한 분 만을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늘 우리의 혀가 악을 금하며 입술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모든 악을 버리고 선만을 행하며 화평을 찾는 하나님의 경외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러한 매일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깊이가 더 깊어져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웃을 향한 사랑을 폭을 더 넓혀주시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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