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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38-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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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485397 |
정용섭 목사
원수사랑, 가능한가?
마태복음 5:38-48, 주현절후 일곱째 주일, 2011년 2월20일
마태복음 5장은 두 가지 점에서 다른 복음서들과 구별됩니다. 하나는 팔복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다섯 반명제를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팔복은 누가복음이 부분적으로만 다루고 있습니다. 다섯 반명제도 마찬가지로 다른 복음서가 부분적으로만 다루고 있습니다. 다섯 가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살인, 간음, 맹세, 악한 자, 원수가 그것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모세의 율법을 먼저 거론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이 반명제를 거론하게 된 배경은 유대전쟁과 연결됩니다. 유대는 로마를 대항해서 독립전쟁을 벌였습니다. 기원후 66-73년입니다. 73년에 그 유명한 마사다 요새가 함락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3년 전인 기원후 70년에 이미 예루살렘이 함락되어서 실제로는 끝난 전쟁이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길을 모색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전쟁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정신적인 무장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바리새파 운동입니다. 율법의 강화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당시 느슨한 관계를 맺고 있던 그리스도교를 향해서 율법을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든지 아니면 유대교 밖으로 떨어져 나가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그리스도교는 유대 그리스도교와 이방 그리스도교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이방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율법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있었지만 유대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유대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압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율법을 어느 정도 따르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 5:20절이 이를 반영합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구절에 이어서 다섯 반명제가 나옵니다. 단순히 율법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율법보다 차원이 훨씬 높은 의(義)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작년에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정의에
목말라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김영사 출판사의 출판 전략이 성공한 것인지, 또는 샌델이 하버드 대학교 교수라는 명성이 빛을 발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인문학 서적이 이렇게 많이 팔렸다는 건 일단 좋은 현상입니다. 샌델도 정의를 말하고 유대의 율법도 정의를 말합니다. 복음도 정의를 말합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의나, 루터가 말하는 칭의론(Rechtvertigungslehre)도 바로 정의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입장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지금 율법이 말하는 의에 대한 반명제의 형식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는 악한 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마 5:38-42) 예수님은 먼저 율법을 거론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출 21:24)가 그것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에도 나오는, 거의 모든 고대 문명사회에서 하나의 기준으로 제시되었던 이 명제는 원래 좋은 뜻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법의 강제규정이 없으면 사람은 당한 것보다 더 심하게 앙갚음을 합니다. 말하자면 ‘눈은 눈으로’ 명제는 정의 사회를 위한 안전장치인 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합니다. 속옷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주라고 합니다. 그 뒤로 비슷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당시의 정의를 넘어서는 윤리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이렇게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런 절대적인 무저항, 비폭력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성전(聖戰) 개념을 앞세워 원수를 증오하고 피를 흘리며 싸웠습니다. 이슬람과의 십자군 전쟁만이 아니라 같은 그리스도교도인 로마가톨릭과 개신교가 30년 동안 싸운 적도 있습니다. 무저항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교 비주류에서만 받아들여졌습니다. 퀘이커 교도나 아미쉬 종파,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들입니다. 지금도 대한민국에서는 여호와의 증인 교도들이 군대에 가지 않고 오히려 감옥에 갑니다. 일전에 사법 연수원을 졸업한 변호사가 법무관으로 가기를 포기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결국 감옥에 갈 것이고, 6,7년 동안 변호사 개업도 못하겠지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변호사처럼 살라는 요청인가요?
다른 하나는 이웃과 원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마 5:43-48)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레 19:18)고 명령합니다. 그것이 율법에서 정의입니다. 이 율법 명제를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무조건 원수처럼 미워했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에는 이방인 나그네와 과부처럼 소외된 이들을 돌보라는 가르침도 많습니다. 이 명제는 ‘제로섬’ 게임과 같은 상황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원수를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생존 자체가 허물어지는 상황에서 원수를 미워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지 이 율법은 선악 이원론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자기와 같은 편과 다른 편을 철저하게 분리했습니다. 이웃과 원수의 분리입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을 거론하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하지 않으시고 해를 비추며 비를 내리신다는 사실을 제시했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앞서의 이야기와 원수 사랑이라는 이야기는 똑같이 율법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율법을 뛰어넘는 마태 공동체의 고유한 윤리입니다. 여기에 바로 초기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로부터 벗어나는 단초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노골적으로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수사랑, 이것은 가능한가요? 누가 우리의 원수인가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인가요? 파렴치하고 반사회적인 사람들인가요? 이슬람교도들인가요? 동성애자들인가요? 북한 공산당인가요? 아니면 나와 경쟁하는 사업가인가요? 한 달쯤 전에 ‘쥐 식빵’ 사건이 있었습니다. 같은 지역에서 빵가게를 하는 사람이 쥐가 들어간 식빵을 만들어 상대편 상표로 포장해서 유통시켰다고 합니다. 기업 경쟁에서도 이렇게 비인격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마당에 원수 사랑이 가능할까요? 가능하든지 않든지 주님의 명령이니까 무조건 지켜야 할까요? 원수사랑은 그렇게 노력하라는 당부일 뿐이지 실제로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말씀인가?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가지 차원에서 위기입니다. 첫째, 실제 삶에서 원수사랑은 불가능합니다. 원수사랑은 고사하고 원수를 미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수준에도 이르기 어렵습니다. 불가능한 명령(mission impossible)을 붙들고 살아야 할 사람들의 영혼은 지칩니다. 이런 명령을 모른 체하는 게 오히려 속이 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감정이 요구하는 대로 대충 살아도 별로 불편한 걸 못 느낍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실제 삶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게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실제로는 다를 게 없는데 달라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문제를 회피하는 사람들이 많겠지요. 이 말씀은 신앙생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입니다. 또는 자기를 학대하기도 합니다. 왜 자기는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지 몸부림을 칩니다.
둘째,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정의로운 투쟁을 망설이게 한다는 점에서도 위기입니다. 일전에 이집트에서 민중들의 봉기로 30년 장기 독재를 하던 무바라크가 물러났습니다. 이집트 민중들을 향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해야 할까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원수 사랑이라는 말씀에 기대서 사회정의를 치열하게 전개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원수 사랑이 정의로운 투쟁까지 포기하게 하는 것이라면 공허하기 짝이 없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 과연 그런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걸까요? 다시 묻습니다. 원수사랑은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요청하는 걸까요? 이것을 모든 상황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원수와 투쟁할 때는 투쟁해야 하고, 참을 때는 참아야 하고, 양보할 때는 양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각자가 알아서 선택해야 합니다. 복음은 신자들이 무조건 지켜야 할 도덕적 시행규칙이 아니라 영혼을 의존시키고 살아가야 할 생명의 능력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것은 본인이 결정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것까지 원하는 사람은 어린아이겠지요.
그렇다면 오늘 원수 사랑이 말하는 생명의 능력은 무엇일까요? 이미 마태복음이 이를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윤리는 이방인들도 다 추구하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정도에 머문다면 이방인과 다를 게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반적인 윤리를 넘어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윤리의 수준은 하나님 차원입니다. 마지막 48절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윤리적인 삶과 질적으로 다른 삶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당황스럽습니다. 일반적인 수준의 윤리를 실천하지도 못하는 우리가 신적인 윤리를 따라야 한다니 말입니다.
마태복음의 요청은 일단 명백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과 실정법보다 더 높은 수준의 윤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정의보다 더 높은 수준의 정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유럽과 미주의 선진국은 제삼세계에 빌려준 돈을 모두 탕감해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선진국은 그 돈이 없어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지만 가난한 나라는 그게 늘 큰 짐으로 남습니다. 탕감해주면 거지근성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믿는다면 당연히 탕감해줘야겠지요. 오늘 한국의 신학자는 남북관계에서 어느 수준의 윤리를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북한 주민들과 김정일 정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정치는 정치인들이 나름으로 풀어가야겠지만, 하늘의 아버지를 믿고 있는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인들보다 훨씬 높은 단계의 윤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남한의 교회는 ‘아이러니’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원수 사랑이라는 성경의 말씀은 못 본체 합니다. 원수 사랑이 단지 관념으로 떨어지면 곤란합니다.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떻게 실현될지를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살펴봐야 합니다. 기회를 얻는 대로 용감하게 이를 실천해야겠지요.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구제를 할 경우에도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누가 원수인지 아닌지도 잘 모릅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어떤 경우에도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긴장이 있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완전하라고 요구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원수 사랑의 차원까지 나가야 한다는 명령과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긴장은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걸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를 찾고 있습니다. 아무 고민 없이 율법에 묶이거나 열광적 종교현상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른 길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는 길이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집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의롭다고 인정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여러분에게 덧입혀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완전한 의를 보아야 합니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이 완전한 정의입니다. 여러분이 실제 삶에서 원수 사랑을 완전히 실천하지 못해도 여러분은 여전히 완전합니다. 원수 사랑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원수 사랑의 경지를 향해 지혜롭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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