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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0:2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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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2008·12·19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이 눈으로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데서 생긴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눈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잘 모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사물을 잘 못 볼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눈으로 보아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실제로 우리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도 얼마든지 잘 믿습니다. 무엇보다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것들은 거의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내가 직접 가서 본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말도 잘 믿습니다. 때로는 그 말이 터무니없는 말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쩜 그런 말을 그렇게 잘 믿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나 자기가 직접 눈으로 보아야만 믿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매우 모순된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도마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자기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예수님을 자기가 직접 보기 전에는, 그분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자기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도마에게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
앞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이 숨어 있던 곳에 나타나신 것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해갔으며, 이제 자기들까지도 죽이기 위해서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고 기쁨과 감격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열 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1절) 그 이유는 본문에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추측을 해봅니다. 아마도 도마는 예수님께서 죽으시자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단정해버렸던 모양입니다. 제자들은 서로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느니,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느니 하는 말을 하면서 약속한 장소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그 모임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완전히 절망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도마에게 이구동성으로 자기들이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열 명의 제자들이 한 마디씩만 거들었다 해도 얼마나 말이 많았겠습니까? 제자들은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기뻐하는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던 도마만 여전히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나타나셨다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부활이 없다면 예수 믿는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되고 만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7,19)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면서 떠들어댔을 때 도마는 왠지 기분이 상하고 소외된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도마는 여전히 슬픔과 절망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5절) 도마는 자기가 직접 보고 만져보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모인 제자들
제자들이 모여 있던 집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유대인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도 끝나서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던 사람들도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또 다시 모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신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그들이 다시 모이면 주님께서 또 다시 나타나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생각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여전히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도마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도마가 아무리 완강하게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해도 제자들은 이 도마를 감싸고 붙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또 우리에게 오실 테니까 우리랑 함께 있자.”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도마의 불신앙을 제거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26절)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렇게 다시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다시 평강을 주셨습니다. 그 때 여전히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도마의 슬픔과 절망과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긴장과 갈등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제 도마를 포함해서 모든 제자들의 마음에는 평안과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의심하는 도마를 비난하지 않고 끝까지 붙들어준 제자들에게서 도전을 받게 됩니다. 우리 중에는 아직도 믿음이 연약하거나 아예 믿음이 없는 형제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런 형제들을 설득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그들이 우리와 함께 주님 앞에 나오도록 힘써야 합니다.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붙들어주어야 합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그 형제를 찾아오셔서 만나주시면 모든 의심이 완전히 사라지고 믿음에 굳게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우리가 함께 모일 때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찾아오시는 것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모일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실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준비도 없이, 기대감도 없이 막연히 모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함께 하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질병으로 고생하는 형제들, 맘이 상하여 힘들어 하는 형제들, 어려움에 처하여 고통 받고 있는 형제들, 중요한 문제를 놓고 씨름하는 형제들과 함께 모여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찾아오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고치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
예수님께서는 도마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도마가 어떻게 했을까요? 자기 말대로 주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만져보았을까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고, 도마가 했던 말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심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
도마의 이 고백은 요한복음이 강조하고 있는 주제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요한은 처음부터 자신이 쓰는 복음서의 주제를 이렇게 제시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복음서가 끝나가는 지점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도마의 생생한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도마는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 고백했습니다. 도마의 이 고백이야말로 요한이 이 복음서에 강조하고 있는 주제를 결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믿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여호와의 증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계급이 가장 높은 천사, 즉 여호와의 군대장관 정도로 믿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령 하나님도 믿지 않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 또는 기운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성령의 하나님 되심과 인격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다 이단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성령도 역시 성부, 성자와 동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도마는 전능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그 영광과 권세와 능력이 동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복음서의 기록 목적
요한은 자기가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1절)
요한복음의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증거는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했을 때 도마는 그들의 말만 듣고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었어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도마의 모든 슬픔과 절망과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고 제자들이 누리고 있던 것과 똑같은 감격과 기쁨을 즉시 누릴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복음서의 목적은 동일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도 없고, 예수님을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이렇게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이 복음을 듣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지 못한 분이 있습니까?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단지 믿기만 하십시오. 단지 그것만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영생을 주실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도마는 가슴 벅차게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9절)
예수님께서는 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셔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지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이제 예수님은 육체로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도마처럼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져보아야만 믿겠다고 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믿는 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이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21-23절)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보내신 자들의 말씀을 믿어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 성령께서 임하시며 우리의 삶이 새로워집니다.
복음을 듣고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분명한 확신을 주시며, 놀라운 평안과 기쁨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한 번의 영광스런 체험이 아니라 날마다 말씀을 통해 깨달으며 살아가는 축복입니다. 이것이 훨씬 더 복되고 중요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 말씀을 붙들고 깨달음으로 믿음이 자라가며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처럼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더 복이 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시고 인격적으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이러한 주님과의 만남은 예수님을 육체적으로 만난 것보다 훨씬 확실하고 풍성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도 살아계시는 주님께서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예수님을 육체적으로 한 번 만난 것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내가 지금도 살아계시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과 늘 함께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만난 주님은 다시 우리를 떠나가시지 않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하) 의심하지 말고 간절히 사모함으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께서 찾아와 만나주실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어떤 슬픔과 두려움이 있습니까? 주님을 만남으로 이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과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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