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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1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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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2009·01·02
우리는 정말 믿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그 결단을 제대로 지킨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한 해만 돌아보아도 우리는 주님 앞에서 수많은 결단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중에는 여전히 믿음으로 굳게 서서 충성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반면에 믿음이 다 식어지고 은혜도 떨어지고 침체된 성도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렇게 주님 앞에 나오기가 너무나도 부끄럽고 염치가 없어서 마지못해 이 자리에 나온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늘 실패하고 자주 침체됩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다시 회복되며 바로 설 수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완전히 침체에 빠져 있던 베드로가 회복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베드로를 회복시키셨는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늘 실패하고 침체되는 우리가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지를 배우도록 합시다.
갈릴리 바다로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다고 결연하게 맹세했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마26:33-35)
이렇게 맹세하며 다짐했던 베드로가 막상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자 즉시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는데, 저주하고 맹세하면서까지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26:74) 얼마나 비겁하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렇게 주님을 부인하자마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날 이후 베드로는 부끄러운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평소에 그토록 열정적으로,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주님을 따르는 데 앞장섰던 베드로가 지금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도 없는 패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누가 그를 인정하겠습니까? 그가 어떻게 주님의 제자가 되며, 사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또 다시 주님을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베드로는 이제 다시 고기나 잡으며 살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실패와 비참하게 무너진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죄와 실패를 씻어주시고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시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베드로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주님을 따르겠다고 얼마나 맹세하고 다짐했습니까? 우리는 은혜를 받을 때마다 감격하면서 목숨을 바쳐 주님을 섬기겠다고 다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며칠, 아니 몇 시간도 안 되어 혈기를 부리며 은혜를 다 쏟아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보실 때 정말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싫고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나은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와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의 이 회복의 은혜가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자, 실패자가 되어버린 베드로는 극심한 영적 침체와 상실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허전하고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께서는 그의 배신을 추궁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셨을까요? 여기에 오늘 본문의 핵심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은 과연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제 무너졌던 소망이 다시 살아났으며, 기쁨과 감격과 평안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마음은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수치와 자신에 대한 분노와 절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베드로를 힘들게 한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어!” 베드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도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인생이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문제가 분명히 정립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을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공부하기를 싫어하고 마음을 잡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만 생각하고 인생을 마지못해 살아가거나 비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것도 이것이 정립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베드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우리가 사명을 따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소명을 받던 때가 생각납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러주셨을 때, (그 때 나는 군 입대를 앞둔 백수였습니다.) 비로소 나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붙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가난과 힘든 공부와 자존심 상하는 것 등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확신과 기쁨과 감사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힘이 들어서 이 길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이 길을 포기한다면 인생을 살아갈 이유도 없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해버린 베드로의 심정이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오직 한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만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른 질문을 던지셨다면 베드로는 제대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베드로도 얼마든지 대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비록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그의 마음 중심에는 주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의 질문에 즉시 대답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 아시나이다.” 주님께서는 이 질문을 통해 베드로에게서 사랑의 고백을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하게 되자 그의 마음이 다시 뜨거워지고 어둠이 물러가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극적인 순간입니까?
오늘 주님을 부인하고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실패한 우리, 영적으로 침체된 우리가 들어야 할 주님의 음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당신도 주님의 이 음성을 듣고 베드로처럼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주님을 사랑합니다!” 가슴이 뜨거워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이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헨리 나우웬은 <춤추시는 하나님>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을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살아간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랬고 우리가 죽은 후에도 그럴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아버지의 이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 이것이 성자 예수님을 지탱해주는 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음성을 들어야 바로 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이 음성을 듣느냐 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고독과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이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기도시간에 성급하게 나의 기도제목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먼저 신뢰하며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십시오. 그 때 우리는 이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음성을 들을 때 당신도 고백하십시오. “주님, 사랑합니다!” 그 순간부터 당신의 진정한 기도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심으로 베드로의 고백을 유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의 소명과 직무를 회복시키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공적으로 베드로의 사도직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그 누구도 베드로가 예수님 부인한 것을 지적하면서 그를 공격하거나 비난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누군가가 또 다시 이 문제를 거론한 것을 한 번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목회는 그 어떤 일보다 힘들고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목회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위로가 늘 함께 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에게는 반드시 휴식이 필요합니다. 일 년에 한 두 번은 쉬면서 재충전하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순수하고 믿음 좋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복잡하고 전혀 믿음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은혜 받았다고 기뻐하다가도 금방 침체되고 넘어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음이 잘 자라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고집이 세고 성격이 모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항상 문제가 있고 어려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하루도 마음을 놓고 지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사람들을 ‘내 양’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을 목회자에게 돌보라고 맡겨 놓으셨습니다.
과연 그 누가 이 모든 사람들을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복잡하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양들을 돌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이 양들을 돌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리하면 양들을 돌볼지 모르나 불리하면 양들을 버리고 말 것입니다. 심지어는 양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도 서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삯군, 또는 강도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직무를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맡기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주님을 본받아 이 양들을 돌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라야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이 목사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의 지도자들과 선배들과 가정교회 가장들, 그리고 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이런 일을 감당하다가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과연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신 이 직무와 사명을 결코 팽개칠 수 없습니다. 새해에 주님께서 영혼들을 돌보도록 세워주신 모든 분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끝까지 성도들을 잘 돌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께 날마다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주님, 사랑합니다!”
사랑의 고백
주님께서 체포당하시고 대제사장의 집에 끌려가셔서 심문을 당하고 계실 때 마당에서 불을 쬐고 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이 부인으로 베드로는 배신자,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침체에 빠져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더 이상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그날 베드로는 밤새도록 허탕을 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되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베드로는 삶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와 용기를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갈릴리 바다로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신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왜 바보처럼 그렇게 헤매고 다니느냐고 야단을 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숯불을 피워 떡과 생선을 구워놓고 식사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로 베드로를 치유하시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날 아침 숯불 곁에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하면서 치유 받고 회복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이렇게 회복시키십니다. 은혜가 식어지고 지치고 침체되었습니까?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팽개치고 피해 다니다가 부끄럽고 송구스런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까? 어려움을 당하여 시달리다가 믿음까지 약해졌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당신에게 물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 다른 것은 묻지 않으십니다. 오직 이 한 가지가 중요합니다.
조용히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내가 너를 사랑하여 나의 모든 것을 주었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주님 앞에 이 고백을 드리십시오. 저도 힘들고 지치고 주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넘어질 때마다 이 고백을 드립니다. 그 때마다 내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주님께서 나를 어루만지시고 회복시키심을 체험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나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깨닫는 순간 우리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다시 불타게 됩니다. 날마다 주님과 사랑의 문답을 하십시오. 주님과의 만남과 교제가 더욱 깊어지고, 주님의 사랑이 당신의 가슴에 가득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날마다 더욱 견고하게 서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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