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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통치와 심판

시편 복음............... 조회 수 2035 추천 수 0 2011.03.08 17:41:34
.........
성경본문 : 시110:1-7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그리스도의 통치와 심판

 

 

본문: 시편 110편 1-7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5.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6.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7.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장차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게 될 것이고 그 전에 공의로운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상의 나라가 부강해 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통치되어야 합니다.

영국이 위대해진 것은 영국 역사상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국가적으로 인정했을 때에 이뤄졌습니다. 첫째로 성경의 일부를 번역한 알프레드(Alfred) 대왕 통치기간에 영국은 미개와 분열과 무지에서 통일된 나라요 문명국으로 발돋움했고, 둘째로 성경 반포를 공식적으로 증진시킨 엘리자베스 여왕 1세 통치기간 중 영국은 처음으로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셋째로 빅토리아 여왕 통치기간에 영국은 국력이 세계에 편만했고 그의 영토가 세계에 산재하여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영국의 영화가 최절정에 올랐습니다. 외국 왕들이 찾아와 영국이 그토록 위대해진 비결을 묻자 빅토리아 여왕은 성경을 가리키며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영국을 이토록 위대하게 했다”라고 서슴없이 말했습니다. 미국이 최대강국의 영광을 누리는 것은 청교도 신앙의 후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 나라 통치의 원칙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미국 국쇄의 뒷면에는 “annuit coeptis”라는 표어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일에 미소를 지으셨다”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들어가면 개인도 가정도 나라도 축복을 받습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기록하는 자가 가장 복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게 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해 바벨론에 끌려갔지만 하나님은 그곳에서도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격려하십니다. 교만한 권세자들을 낮추시고 강대한 패권 국가를 폐하시며 경건한 사람들을 위기에서 건지시고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세워 가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을 선택하셔서 환란에서 건져내셨듯이 오늘날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슬픔, 고통, 질명, 고난 가운데서도 건져 내십니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그늘 아래 사시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시편 110편에서 다윗은 메시야의 영원한 통치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 110편은 시편 중 유일하게 전체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는 시편입니다. 그러기에 신약성경에서 27번이나 인용되어 있습니다. 시 110편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이십니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왕 중 왕입니다. 헨델의 메시야 중 잘 알려진 ‘할렐루야’에서 노래하듯이 예수는 왕의 왕, 주의 주가 되십니다. 오늘 시편의 저자인 다윗이 그를 가리켜 사용한 존칭에서 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을 가리켜 여호와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또 다른 한 분을 가리켜 다윗은 ‘내 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윗 왕이 이 분을 ‘주’라 불렀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 상 가장 화려하고 존귀함을 받았던 왕이 아닙니까? 오늘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왕을 대표하는 자로 서슴없이 다윗을 말합니다. 가장 존귀함을 받았던 왕이 또 한 분을 ‘주’라고 부르고 있는데, ‘주’라고 함은 자기보다 높은 분을 존칭하는 말이며 구약 시대에는 ‘아도나이’라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였던 것입니다. 한 나라의 가장 높임을 받는 왕 보다 더 높은 주라고 부르심을 받으시는 그 분은 왕 중 왕 이 되실 수 밖에 없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까지도 다스리는 왕 되십니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미국에서도 4년 혹은 8년간 대통령 직분을 수행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지지를 받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원수들에게도 지지를 받고 경배를 받는 분입니다.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은 왕 중 왕임을 그의 통치의 범위에서 알 수 있습니다. 현재 가장 기독교가 번성하는 중국은 공산주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지만, 그들 가운데서도 주님은 강력하게 역사하십니다. 원수들 가운데서도 지배하시는 분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교도소나 LA지역의 게토(ghetto)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주님을 경배하는 것을 보면, 원수들 중에 누가 왕노릇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왕 중 왕 되심은 그를 섬기는 군사들에 의해 증명됩니다. 시110:3의 ‘권능의 날’은 왕이 전쟁을 일으키는 날을 말합니다. 우리가 군대에 갈 때 마지못해 가지만, 주님에게만은 다릅니다. 선교지역에 가는 사람들을 보면 징병 받은 자처럼, 돈을 벌기 위해 가는 자 처럼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출세할 수 있지만 주님을 향해 자원함으로 달려가는 것을 봅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마음으로 파라과이로, 일본으로 자신의 휴가를 써가며 나아가는 헌신된 자들이 우리 주위에도 있지 않습니까? 섬김을 받으려하지 않고 오히려 섬기며 주님을 따라 자신의 삶을 드리는 영혼들은 왕 중 왕 되신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왕 중 왕 되심은 그가 통치하는 범위에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에서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주께 홀을 주셨으니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라고 합니다. 보통 지상의 왕이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나라, 자신의 손아래 있는 백성들만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역사 상 가장 뛰어난 나라라고 꼽히는 미국에서도 한 대통령이 당선이 되면 4년 내지 8년을 재임하는데 재임 중에도 정치적으론 공화당, 민주당 중 자신의 당으로부터는 지지를 받고 나머지 당으로부터는 비판을 받으며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누구이신데 원수 중에서도 경배를 받고 그들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은 것입니까? 그는 어느 한나라에 속한 분이 아니라 왕 중 왕이 되심을 그의 통치 범위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로 그를 대적하는 원수들 가운데서도 왕 노릇하고 계십니다. 심지어 세계 최악의 감옥소 안에서도 영혼들이 변화를 받고 새 소망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 중에서도 친히 다스리고 계신 왕 중 왕이 되십니다.

그가 왕 중 왕 되심은 그를 섬기는 군사들에게서도 보여지고 있습니다. 3절에서 말하는 주의 백성은 그의 군사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는 His troops, 그가 이끄는 군대라고 되어있습니다. 주의 권능의 날이란 그의 전쟁의 날을 가리키는데, 그 날에 주의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할 것이오,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온다고 하십니다.

오늘도 선교지로 나아가는 주님의 백성들을 보시면 강제로 징병 받아 끌려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탐나서 나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도리어 잘 나가는 세상의 일을 정리하고 자신의 청춘이 다 가기 전에 주님의 복음 들고 나가겠다고 자원하는 자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젊은이들이 온 땅에서 복음을 들고 싸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군대를 이끄신 적이 없지만 오늘 날 그를 위해 헌신한 군대, 그를 위해 젊음을 드린 청년들, 그를 위해 삶을 바친 헌신자들이 큰 물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중 왕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제사장이십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맹세까지 하시면서 하나의 진리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이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십니다. 멜기세댁은 구약 성경 창14장에 나타난 한 인물이고, 반차를 좇는다는 말은 그의 서열/풍습을 따라 제사장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멜기세덱은 전쟁에서 승리해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축복한 살렘의 왕이요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그 자손들 가운데서 제사장이 나오게 하셨는데, 아브라함의 전통을 쫓아 나오는 제사장이 아닌 하나님이 직접 임명한 제사장이 바로 멜기세덱입니다. 아론과 그 자녀는 자신도 죄인이기에 온전한 제사를 드리지 못하지만,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제사장으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온전한 제사를 드리고 십자가에서 구원의 길을 다 이루신 후 약속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모든 족속을 위한 제사를 드린 분입니다. 아론과 그 자손은 이스라엘에 국한된 제사장으로,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에 들어가야만 구속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제사와 전통을 초월한 모습으로 예수님은 오셨고 그의 십자가 보혈은 남가주에 있는 우리뿐 아니라 시베리아, 아프리카 등 모든 백성에게 효과가 있는 제사가 됩니다. 아론도 죽을 수밖에 없었고 그 제사는 이스라엘의 제한된 시간에만 효과가 있었지만, 예수의 제사는 영원히 효과 있는 제사입니다. 오늘날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가 빠져 헛되이 축제하기 때문에 허망한 것입니다. 망상을 쫓지 말고 본질이신 예수를 붙잡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7장 11-17절에 이 의미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먼저 11절에 멜기세댁의 서열을 좇아 우리의 제사장이 되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온전한 제사를 드리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나중에 세워진 아론과 그의 자손들은 자신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죄인으로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는 없으며 단지 형식적인 제사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겐 죄가 없으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어 모든 시험을 받으셨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그는 우리를 위해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 있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십자가에서 직접 우리의 죄를 위한 제사물이 되셨을 때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온전한 제사를 드림으로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한 분만으로 우리의 죄가 씻음 받는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7장 1절에서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론은 사람이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그가 살아서 사역하는 동안에만 효과가 있는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셔서 영원히 계시는 주님이 되십니다. 그래서 그의 제사는 영원한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2천년 전 갈보리 산 위에서 그가 치른 희생은 오늘날 우리를 구원하며 2천년 후에도 역사가 끝나지 않는다면 구원을 이루는 희생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장 14-16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으로서 모든 족속들을 위한 제사를 드리신 분이라고 설명됩니다. 아론과 그의 자손들은 유대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우선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와야만 했습니다. 밖의 사람들에겐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전통을 좇아 제사장이 되시지 않고 멜기세댁의 전통을 따라 제사장이 되신 분이므로 그분의 십자가 보혈은 오늘 날 동남아지역 뿐 아니라 저 멀리 얼어붙은 북방 땅과 저 아프리카의 오지에서도, 사하라 사막에서도 구원이 가능한 십자가의 능력이 되십니다.

여러분은 망상을 따르지 마시고, 참된 구원과 소망이 되신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실 수 있길 축원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위대한 정복자이십니다.

왕 중 왕이 되시고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은 또한 위대한 정복자 (the great conqueror)가 되십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한 이 진리가 매우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우린 보통 예수님을 생각할 때 이면을 간과합니다.

본문5-7절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7절은 적들을 추적하는 무사가 잠시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린 후 다시 머리를 들고 적들을 주시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모습을 보실 수 있으십니까? 2천년 전 우리의 구세주가 되기 위해 마굿간에 아가로 오신 주님은 언젠가 위대한 정복자로 다신 오십니다. 그때는 마지막 심판자로 오십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서 이 사실을 우리에게 너무나 확실하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good news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셔서 모든 죄악을 정복하시고 그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이 세상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계속되고 있는 세계의 테러리즘, 문화와 과학이 발달하면서 한계를 모르고 발달하고 있는 죄악들 이 모든 현실은 언젠가 창조주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해야만 참된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징조입니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던 다윗은 시편 24편에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원한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하고 능하신 주님이 오시고, 전쟁에 능하신 주님이 오셔야 진정한 소망이 있고, 영존하는 평화가 임할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마지막 구절에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위대한 정복자(the great conqueror)로 오셔서 이 세상을 치료하시고, 우리 가운데 온전한 평강의 왕으로 거하시라는 고백입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그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오셔서 나를 살려주시고, 나의 가정을 치유하시고, 우리 교회를 세워주시고, 이 땅을 고쳐주시고, 이 세상을 구해주시옵소서' 진정한 마음으로 따라해 보십시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왕 중 왕이 되십니다. 그에게 경배하십시요. 그는 영원한 제사장이 되십니다. 오직 그를 신뢰하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위대한 정복자가 되십니다. 그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그 나라를 확장하는데 삶을 드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 심판자로 오셔서 열방을 쳐서 파하실 것입니다. 시냇물을 마신 후 기운을 차리고 다시 적들을 향해 추적하는 예수님의 모습(시110:7)은 위대한 정복자로 오셔서 주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보여줍니다. 좋은 소식인 예수님은 사도신경에서와 같이 심판자로 다시 오실 것까지 포함합니다. 우리 몸에 치명적 병이 걸리면 증상만 다룰 것이 아니라 원인까지도 다루어야 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을 궁극적으로 제거하실 것을 뜻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 소원이 되고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고백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폴로 15호를 타고 달 나라에 갔다 온 제임스 어원 대령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인간이 달에 갔다 온 것 자체를 위대한 일로 본다면, 진짜 위대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한 사건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 예수님의 몸으로 지구에 오신 일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아니 한 도시의 시장이 나의 집을 방문한다면 그것은 경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왕 중 왕 되신 우리의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셨다는 이것은 놀랍고 엄청난 사건이라고 말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2천년 전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그분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찾아 오셨나? 그분이 오늘도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확실히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인 시편 110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편은 150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 유일하게 전부가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시편 말씀이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신약 성경에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시편 말씀이며 오늘 본문 1절은 신약 성경에서 27번이나 인용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은 오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경을 쓰다 가장 예수님을 확실하게 전할 수 있는 말씀으로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본 절은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과 은혜로 이 세상을 정복하시고, 세상을 심판하심으로 ‘다윗의 위가 영원하리라’는 언약의 실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표제를 통해 이 시를 쓴 사람이 다윗임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아도나이, 즉 ‘내 주’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참된 왕이 계심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시편2편에 따르면 이 왕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이 아들은 비록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분이지만 다윗은 바로 그가 이스라엘의 영원한 통치자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절에 나오는 ‘오른쪽’은 바로 그 왕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왕이었음에도 다윗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이 자신의 위치가 아닌 ‘내 주’의 위치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왕권을 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주님은 이스라엘의 참된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과 22장에는 주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유대교지도자들의 질문 공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21장에서 그들은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주님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고 물었습니다(마 21:23).

나아가 그들은 22장에서 로마의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 문제로 주님을 공격했습니다. 또한 부활 신앙의 맹점에 대해, 그리고 구약에 나오는 613개의 계명들 중 어느 계명이 가장 큰가에 대해 차례로 질문했습니다. 그 질문들은 한결 같이 주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주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한 질문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질문들이 지니고 있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지니고 있는 신앙의 허점들을 조목조목 지적하셨습니다. 나아가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역으로 질문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뻔한 질문에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정답’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공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마 22:43~44)

주님은 바로 시편 110편의 내용을 인용하시면서 다윗이 왜 자신의 후손으로 오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내 주’라고 고백했는가를 물으셨습니다. 다시 말해 이 질문은 다윗 왕조차 인정한 그리스도의 권위를 유대교의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너희들은 왜 인정하려 들지 않느냐는 지적이었습니다.

주님과의 논쟁에서 완패했지만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끝까지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권위와 권익을 지키기에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이러한 모습과는 달리 다윗은 자신의 권위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왕이었지만 그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심을 늘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본문 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규(圭)’는 곧 권세와 권위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규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있음을 고백할 뿐 아니라 나아가 그 규를 소유하신 주님께서 자신이 통치하고 있는 시온을 다스려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내에서 그 누구보다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던 다윗이었지만 그는 그 권력이 어디로부터 비롯되었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신의 한계와 자신이 머물러야 하는 위치가 어디인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다윗의 놀라운 신앙고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본문 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스텐버그의 명화 「십자가」는 기독교사에 놀라운 변화를 준 그림입니다. 스텐버그는 성 제롬 대성전 주임신부의 요청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그리다가 중단하고 시간을 끌었습니다. 화료가 너무 적다고 흥정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는 중간에 집시 소녀를 모델로 다른 그림을 착수하였습니다. 어느 날 소녀가 기초만 잡혀 있는 예수상을 보고 십자가에 대하여 이야기해 달라고 졸라댔습니다. 간청에 못 이겨 예수의 이야기를 대강 들려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소녀는 감동을 받고 화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었다는 이 훌륭한 사람을 선생님은 무척 사랑하고 계시겠지요.’ 스텐버그는 양심이 찔려 뉘우치고 기도한 끝에 전력을 다하여 예수상에 착수했고 주는 화료도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려진 명화 「십자가」는 많은 것을 창조하였습니다. 진젠도르프 공작이 이 그림을 보다가 감화를 받고 전 재산을 바쳐 선교회를 창립하였습니다. 그 선교회가 모라비안 교파가 되었고, 이를 통해 많은 젊은이들이 주의 일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감리교의 창설자 웨슬레도 그들의 뜨거운 신앙과 전도열에 자극되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헌신이 교회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본 절에서 다윗은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헌신하는 주님의 백성들이 ‘새벽이슬’같이 나아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더운 날씨인 근동지역은 일교차가 큰 탓에 많은 양의 이슬이 내립니다. 주님께 헌신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신선하고 신비롭기까지 한 새벽이슬에 비유한 것은 그들의 헌신이 강제로 징집된 군대에 비할 바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근거한 진정한 감동과 자발적인 충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 역시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았습니다. 새벽이슬 같이 헌신하는 다윗의 중심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일찌감치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시고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 중 누구보다 많은 영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나아가 그는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누리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한 백성을 모아 교회를 이루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저항하려는 세력을 파하고,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세상의 악과 사단은 교회를 넘어뜨리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권능과 사랑, 신비한 지혜로 교회들을 지켜 오셨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겨자씨와 같았으나 교회는 점점 흥왕하여 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도록 정의되어집니다.

본 절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원문에 충실하게 올바로 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즉 “당신의 백성들은 꼭두새벽부터 거룩한 위엄으로 줄지어 당신의 전쟁의 날에 기꺼이 헌신하려고 하고, 당신의 젊은이들은 당신을 위한 이슬입니다.”로 해석됩니다.

‘권능의 날’은 히브리어로 ‘헬레카’는 용사라는 뜻으로 ‘헬’이라는 말은 힘센 장사를 말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전체의 용사사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용사라는 사상을 심어주셨는데, 이것은 출애굽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입성까지는 남의 나라를 밟고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많은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보증은 “나 여호와가 전쟁에 개입한다.”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 땅에서 망가진 그분의 나라를 부분적으로 고치다가 수많은 대적자를 본격적으로 토벌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보내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을 다 부르셔서 그들을 다 용사로 만드셨습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씨름”은 희랍어로 ‘팔레’라 하는데, 이것은 고대 그리스․로마시대 때의 격투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격투기는 한쪽이 죽기까지 끝나지 않았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6장 13절~17절 사이에 무장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바로 ‘팔레’와도 같이 죽기까지 싸우는 영적인 싸움에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삶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너무 나약한 것이 우리의 현실인데, 물론 자신의 죄에 대한 진지한 참회와 승리도 주님의 은혜라는 진실한 인정이 필요하지만 통절한 회개와 패배감에 사로잡히는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 절은 전쟁 시에 헌신을 다짐한 사람들이 줄지어서 나오는 모습을 그리는 문장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백성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 나라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며 사는 것보다 더 기뻐할 수 있는 나라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고백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된 사실에 대한 자부심과 그러한 선택하심에 대한 기쁨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나라 안에서만 즐거울 수 있고, 가장 참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1) 이미 이루어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문제는 그 나라가 전쟁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 그 때에 필요한 것은 그 전쟁에 기꺼이 헌신하고자 하는 용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과 동시에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가 침투해서 들어왔지만 아직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완성된 것은 아닌데, 주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늘나라의 실제적인 통치가 이 세상의 역사에 파고 들어와서 실행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여주신 이적과 표적들은 단순히 축사와 병 고침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적 통치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통치를 확인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전에는 철저한 자원의 부족을 느끼면서 산 사람들이며, 이 땅의 자원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산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이 하늘의 자원 없이 살 수 없음을 깨닫게 해 주셨고, 하나님의 통치의 현재적 효과를 통해 어두움 가운데서 소망을 주사 창조의 계획을 따라 살게 해 주시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가 주는 효과입니다.

우리 안에 죄의 요소가 있지만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이루어 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죄의 힘을 넉넉히 이기며 살 수 있습니다. 다만 불순종하고, 현재적으로 은혜 안에 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를 누리며 살지 못합니다.

2) 싸움의 날

하나님 나라의 현존이 임하여 마지막 때에 진짜 싸움의 날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 하늘나라가 각 사람 속에 임하고, 그들이 어둠과 죄악의 세력들과 싸우려 하기 때문에 신자들과 죄는 치열하게 다투고,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울부짖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치열한 분투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나약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영적인 전쟁이라는 인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인간적인 위로로 전락하고 교회도 그런 식의 연약한 공동체로 변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깨어 있어 은혜 받은 신자의 삶 주변에 어둠의 세력이 집결하고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영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삶의 현 주소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려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자신의 내면을 보며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정결해져서, 그 본질 속에 성령님이 역사하여 신자의 본성이 거룩하고 진실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신자가 착해져 가는 것이 아니라 용사가 되어 가는 과정으로 성결한 사람이 아니면 진정한 의미에서 능력의 사람일 수 없습니다.

신령한 계시에 관한 조명의 빛, 거룩한 능력, 사단의 공격 속에서도 두려움이 없는 담대한 투쟁, 죽음을 두려워하지 용기, 이 모든 것들은 순결한 마음에서 생겨나는 작용입니다.

성경이 그리고 있는 착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마지막은 이 땅에 완성되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기게 하십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 땅을 건설해 가시는 방법이며 이 마지막 시대는 이러한 전쟁의 날입니다.

3)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용사들

마지막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부패한 것 같아 보여도 모두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우리가 안일하게 살고 있는 동안 이 지구 구석구석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서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모두 안일하게 사는 이 날에 하나님께 사랑받는 특별한 종들은 눈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부패해가는 이 땅의 영적인 현실을 보면서 눈물 흘리고, 영적 싸움에 직접 용사가 되셔서 개입하시는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주님 품으로 돌아와 위로와 격려를 받는 것과 세상으로 파송되는 것의 순환적 반복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은혜를 따라 분투하는 삶 속에서 잘 보존되는데 지속적으로 성령의 은혜를 간직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살라고 하신 본분을 따라 살려고 하는 올곧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자기만족적 삶의 자원이 아니라 소명을 내포하는 것이기에 소명을 이루며 살겠다는 집요하고 철저한 헌신이 없으면 곧바로 부패하게 됩니다.

충성스러운 삶의 현장이 없으면 새로운 경험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새로운 말씀이라도 다 같은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 되면서 점점 뒤로 물러가 사명도 망가지고 영혼도 파괴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사랑이 있는 그 곳에는 영적인 승리의 흔적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용사로 개입하신 현장에는 반드시 자신의 섬김의 현장을 전쟁터라고 생각하고 죽기까지 기꺼운 마음으로 헌신하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어두운 세상을 고치기 위해서는 하늘의 자원을 이 땅에 나누어 주면서 강물처럼 흘러가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전쟁에 동원되어야하므로, 이 땅이 영적인 전쟁터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피 흘리기까지 헌신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영혼만이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 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다윗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그리스도께서 단지 물리적인 권력을 행사하시는 통치자가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실 수 있는 진정한 메시야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벧에돔의 집에 있던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 다윗은 제사장이 입는 에봇을 입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언약궤가 들어오는 특별한 행사를 위한 예복으로 입은 것이지 자신을 제사장으로 여겨 입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이 제사장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것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 5:8~10)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주님 역시 하나님의 권위 아래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사셨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며 사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께서 순종하심을 통해 아론에게서 세습된 제사장이 아닌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모두 담당해주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 5- 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부활하신 후 40일 되던 날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승천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끝났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 승천으로 인해서 성도들에게는 큰 유익이 있게 되었습니다. 오순절이 되던 날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몇몇 제자와만 함께 했으나 이제는 모든 성도와 함께 할 수 있게 되었고 더 중요한 것은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대로 항상 내주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스데반과 바울은 예수님께서 몸의 형태로 승천하신 것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7:56, 행9:27, 고전 15:8). 그러면 주님의 승천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주님의 승천은 그의 승귀(높아지심)를 의미합니다.

둘째로 주님의 승천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셔서 그의 중보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편이란 말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광을 의미하고 또 다른 하나는 권능을 의미합니다. 물론 영적 존재인 하나님께 우편과 좌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주님께서 지금 영광과 권능으로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앉아계신다는 것은 통치의 개념입니다. 따라서 지금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통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육적으로 우리 성도들과 함께 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한 중보의 사역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대언자(변호사란 뜻)의 사역을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평화를 누리고 소망을 가지며 안전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은 믿는 성도들에게 성령의 오심과 함께 은사를 주시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엡 4:11∼2). 다시 말해서 주님의 승천으로 지상에 계셨던 주님을 대신해서 성령께서 임하여 어디나 계시게 되었으므로 성도들에게는 큰 축복이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셋째로 예수님의 승천은 그의 하늘에서의 통치의 시작을 의미합니다(고전 15:20∼28). 이 통치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됩니다. 재림하실 때에는 승천하셨을 때의 모습 그대로 오시기 때문에 누구나 다 주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행 1:11).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의 모습이 부활하셨을 때의 모습 그대로라는 점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영체(영적 몸)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은 쉬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중보의 사역과 함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재림하실 때까지 통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문 5-7절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7절은 적들을 추적하는 무사가 잠시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린 후 다시 머리를 들고 적들을 주시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모습을 보실 수 있으십니까? 2천년 전 우리의 구세주가 되기 위해 마굿간에 아가로 오신 주님은 언젠가 위대한 정복자로 다신 오십니다. 그때는 마지막 심판자로 오십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서 이 사실을 우리에게 너무나 확실하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good news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셔서 모든 죄악을 정복하시고 그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이 세상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계속되고 있는 세계의 테러리즘, 문화와 과학이 발달하면서 한계를 모르고 발달하고 있는 죄악들 이 모든 현실은 언젠가 창조주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해야만 참된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징조입니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던 다윗은 시편 24편에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원한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하고 능하신 주님이 오시고, 전쟁에 능하신 주님이 오셔야 진정한 소망이 있고, 영존하는 평화가 임할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마지막 구절에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위대한 정복자(the great conqueror)로 오셔서 이 세상을 치료하시고, 우리 가운데 온전한 평강의 왕으로 거하시라는 고백입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그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오셔서 나를 살려주시고, 나의 가정을 치유하시고, 우리 교회를 세워주시고, 이 땅을 고쳐주시고, 이 세상을 구해주시옵소서' 진정한 마음으로 따라해 보십시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왕 중 왕이 되십니다. 그에게 경배하십시요. 그는 영원한 제사장이 되십니다. 오직 그를 신뢰하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위대한 정복자가 되십니다. 그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그 나라를 확장하는데 삶을 드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인생이 진정으로 아름다워질 수 있는 길은 우리를 통치하시는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는 물론 왕이 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그 권위 아래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따라 우리의 인생을 세우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삶을 영화롭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이제까지 은혜 가운데 우리를 인도해 주신 주님께서, 앞으로도 그의 권능으로 이끌어주실 것을 믿으며, 왕 중 왕, 영원한 제사장, 위대한 정복자가 되시는 우리 주님께 모든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립시다.

 

 

* 기도: 만왕의 왕이신 주님, 그리스도의 통치와 심판이 속히 이 땅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왕이었지만 다윗은 자신 위에 왕이 계심을 늘 겸손하게 인정하며 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도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심으로써 우리의 영원한 왕이요 제사장이 되어주셨습니다. 다윗처럼 주님처럼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며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왕이신 주님의 말씀 앞에 오늘도 겸손히 무릎 꿇게 하시고 그 말씀 따라 우리의 인생을 세울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그래서 말씀 안에서, 주님의 통치하심 안에서 우리의 인생이 진정 아름다워지게 하여주시옵소서.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함으로 세계 변화의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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